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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적화통일 교두보이자 해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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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8-12 18:40 조회22,4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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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는 적화통일 교두보이자 해방구

                             빨갱이 김대중이 광주의 영원한 영웅



김대중 컨벤션센터만 보면 광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은 광주에는 영웅이지만 대한민국에는 능지처참해도 모자랄 역적이다. 이래서 광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붉은 해방구라는 생각을 한다.  5・18의 최고봉인 김대중! 그는 23세 때 남로당에 가입하여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일생 내내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왔던 사람이다.


1971년 일본에 가서 반국가조직인 한민통을 결성하여 곽동의 등 베트콩파와 함께 북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반국가운동을  하였고, 1997년 북한의 부주석 김병식은 1971년 도쿄 플라자호텔에서 민족애의 정신으로 김대중을 깊게 포옹을 했던 사실과 김대중에 20만 달러를 주었다는 내용이 담긴 1997년 12월 5일자 편지를 인터넷에 공개했다. "20만 달러는 적은 금액이겠지만 그래도 그 돈이 오늘날 선생이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도와주지 않으면 모든 비밀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이었다. 1999년 말에 시작된 김대중에 대한 북한의 협박은 일본 잡지 문예춘추, 한민전, 구국전선 등의 매체들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노출됐다.


이에 대급해진 김대중이 2000년 3월 초 갑자기 베를린으로 날아가 '베를린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김정일에 접선 요청을 했다. "북에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민간 차원에서 돕다 보니 액수가 미미했다. 많이 도와주려면 정부가 나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상회담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정상회담의 대가로 국민 몰래 적장에게 5억 달러를 주었고 그래서 6월 13일 평양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5억 달러도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미국이 어쩌다 찾아낸 것이지만 우리는 얼마의 돈이 더 갔는지 알 수 없다. 김기삼씨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15억 달러를 김정일에 바쳤다.


이후 평양에서는 적장과 한 차에 타고 다니면서 접선을 했고, 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에 합의했으며 돌아오자마자 "전쟁은 없다, 북한을 의심하지 말자" 했다. 휴전선을 보자. 북한은 엄연히 우리의 적이다. 적을 의심하고, 국민에게 안보 경각심을 고취해야 할 위치에 있는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적을 의심하지 말자, 전쟁은 없으니 안심하라 한 것은 분명한 반역행위일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김대중은 2001년,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대북지원금이 핵 개발에 악용된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만약 북에 핵이 개발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로 북의 핵 개발을 감추어주고 국민을 기만했다.

                            보수 세력 분쇄하고 적화통일 이룩하자는 광주

광주에서는 미국을 성토하고 주한미군을 내몰자는 굿판도 벌였다. 6월 14일부터 광주에서 '6・15민족통일대축전'이 열렸다.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의 간부들이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다. 또 다른 이적단체인 한총련 800여 명도 참가했다. 한총련의 참가 목적은 '반통일세력의 총공세를 분쇄하고 실질적인 6・15세력의 총결집'을 결의하기 위해서였다. '보수세력들과의 총력전을 결심하자',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전쟁계획을 분쇄하고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자.'

                                             광주와 북한은 하나

다음은 "6・15축전 빗속 개막식에 심야만찬까지"라는 제하의 조선일보 기사다.

쉼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도 뜨겁게 달아오른 통일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남북・해외 대표단은 6・15남북공동선언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첫째 날인 14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북측 대표단 148명은 이날 오전 11시 고려항공 JS0615편으로 광주공항에 도착, 숙소인 무등파크호텔로 오는 내내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광주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축전 첫날은 북측 대표단의 5・18민주묘지 참배로 더욱 빛났다.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장과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을 앞세운 60명의 북측 대표단은 5・18민중항쟁추모탑에서 민주열사를 위한 묵상을 했다. 참배자들은 짧은 묵상에 이어 묘역을 둘러보고 '민주의 문' 아래서 5・18항쟁과 6・15공동선언의 정신이 일맥상통한다는 의미가 담긴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다음 순서는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과 축하공연. 남측의 이종석 통일부장관,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 상임대표, 북측의 김영대 안경호 단장 등이 주석단에 모습을 드러내자 개막식이 시작됐다.


                   
                  망월동 영령은 적화통일 영령

“이날 또다시 축전을 빛낸 이벤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기념사였다. 그칠 줄 모르는 비 때문에 경기장 로열박스에 이희호 여사와 나란히 앉은 김 전 대통령은 두 번째 방북에 대한 의지를 전하는 동시에 축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오늘의 이 민족통일대축전의 광경을 보고 망월동 국립묘지에 계신 영령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서 오늘의 모임을 축하하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며 감회에 젖었다.”


“김 전 대통령은 나아가 저는 저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민족의 평화와 통일과 번영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연단에 오른 백낙청 상임대표는 개막사를 통해 남과 북은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이라는 공통성을 찾아 힘을 모으고 각기의 다름 속에서 풍성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통일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또 북측 김영대 단장은 축하연설에서 ‘우리는 뜨거운 이 6월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한다. 정세가 어렵고 복잡할수록 더욱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 말했고 곽동의 해외측 공동위원장은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키는 힘은 우리 앞에 주어진 절박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날 개막식과 축하공연은 북측 대표단이 비에 젖은 옷을 급히 갈아입은 탓인지 1시간 정도 지연됐지만 남북・해외 대표단은 비를 맞으면서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개막사 후 종이비행기 대신 흰색과 파란색 풍선 600여 개를 날리는 등 약간의 일정 변경도 있었지만 비옷을 입고 운동장 가운데 의자에 앉은 대표단은 늦은 시각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월드컵경기장에는 북측에서 준비한 역사적인 6・15북남선언을 철저히 이행하자ʼ는 등의 대형 플래카드와 함께 대표단 입장에 앞서 트랙을 돌았던 초대형 한반도기가 내걸렸다. 한반도기 옆에서 아! 통일 얼른 해봅시다는 글귀는 관람에 즐거움을 더했다.

                                      5・18폭동은 적화통일 폭동

이처럼 2006년의 광주는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한당국과 남한 빨치산들의 공동 텃밭이었다. 적화통일의 텃밭을 제공한 광주가 어떻게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혼란스럽다. 일국의 국회의원이 현상을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 놓고서도 떼거지들에 밀려 사과까지 해야 하는 몰상식한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빨간 것을 보고도 빨갛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집단들이 바로 남한 빨치산 집단인 것이다.


1980년의 광주폭동과 2000년의 김대중 적화통일 음모와 2006년의 광주가 무엇이 다른가? 1980년의 광주소요는 폭동으로 적화통일을 이루려 한 것이었고, 2000년 6월 15일은 김대중이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악용하여 남한을 통째로 북한에 내주려는 음모였으며, 2006년의 6・15는 남북한 고위급 적색분자들이 모여 힘을 결속하고 접선을 하면서 국민들에 적화통일이 임박해 있음을 과시하고, 남한 좌익들을 격려하고 결속시키기 위한 시위였던 것이다.


                         광주는 정신적으러 대한민국 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언제까지 광주와 5・18단체들의 봉이 되고 들러리가 될 것인가? 민족자주통일은 적화통일을 일컫는 말이다. 위에서 김대중은  오늘의 이 민족통일대축전의 광경을 보고 망월동 국립묘지에 계신 영령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서 오늘의 모임을 축하하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는 무서운 말을 했다.


이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김대중은 5・18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이고, 이미 증명돼 있는 북한쪽 사람이다. 광주는 이런 빨치산 두목인 김대중을 영웅시 한다. 김대중은 5・18묘지에 가서 5・18영혼들이 6・15적화통일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만족해 할 것이라고 말했다. 5・18단체는 이런 김대중의 말을 수용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5・18이 적화통일을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5・18단체가 북한과 한편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굿판에 장소를 제공하고 춤을 추는 광주, 김대중을 영원한 영도자로 모시는 광주 우리나라 지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라도의 DNA는 반골


황석영의 책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증44) 19~20쪽에는 광주가 타 지역에 비해 민주화열기가 높았던 이유를 6가지로 들었다.


첫째,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제투쟁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광주는 역사적으로 반골의식이 강하다는 뜻이다.


둘째, "4・19 이후 민주화 통일운동의 급진적 흐름이 잠적해 버린 이후 광주에서만은 유신독재의 전 기간을 통해 민주화 의식이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져오고, 특히 민청학련사건과 민주교육지표사건(주: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학생들 주도)을 계기로 확충되면서 현장운동화 하였다"는 것이다. 민청학련과 민주교육지표사건은 전형적인 반체제 친공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광주가 좌익사건의 본거지라는 데 대한 프라이드를 전한 것이다.


셋째, "광주를 둘러싼 기층농민들과 연계되어 학생운동이 학교 외부 세력과 연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대남작전 전략과 일치한다. 학생과 노동자와 농민이 하나로 조직화되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데 그런 연결이 광주에서 매우 잘 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넷째, "유신독재 전 기간을 통해 광주의 지역운동역량이 지속성장하였다. 1978년에는 각계의 역량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었다.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가톨릭정희평화위원회, 가톨릭청년회, 기독청년회, YMCA, YWCA, NCC, EYC, JOC 등의 종교단체와 한국앰니스티광주지부, 민주청년협의회, 현대문화연구소, 녹두서점 등등의 재야청년 사회단체들이 겉으로는 분립된 형태로, 내부적으로는 한동네 사랑방과 같이 결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조직 대부분이 좌경화 조직들로 분류돼 있다. 이런 좌경화조직들이 5・18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다섯째, "박정희 독재기간 내내 이루어진 매판정책 추진과 불균등개발로 인하여 ʻ호남푸대접ʼ이라는 광범한 대중적 불만의식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호남은 푸대접이라도 받지만 강원도는 아예 무대접이다. 따라서 전라도의 한은 경상도에 대한 배 아픈 한이다. 그래서 5・18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경상도와 부산이라는 번호판만 보면 차량을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들에도 몰매를 때려 죽였다. 결국 5・18은 경상도 사람인 박정희 밑에서 부글부글 끓어왔던 푸대접의 한을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이용해 분출시킨 한풀이였던 것이다.


여섯째, "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법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 고장에서도 인물이 하나 나와야 한다는 민중적 열망이 간절하였던 차에 전남의 대중적 영웅인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좌절당하고 고난을 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5・18의 정체가 드러난다. 5・18은 전라도 영웅 김대중이 체포된데 대한 분풀이였지 전라도를 왕따시킨 타도 사람들을 위해 이타주의 정신으로 목숨 바쳐 희생한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광주에 대한 북한의 예우


북한의 5.18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인민들은 원래 오래 전부터 억압자들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 온 력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봉건통치배들의 야합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여 갑오농민전쟁의 봉화를 추켜들었으며, … 이승만 통치 때에는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려수, 순천 군인폭동의 불길을 지펴 올려 민족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증31, 602쪽 하3중~603쪽 5줄)


"예로부터 광주 인민들은 압제자를 반대하는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싸웠고, … 부패 무능한 봉건왕조를 반대하여 궐기하였던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1946년의 화순탄광 로동자들의 폭동, 1948년의 려수, 순천 군인폭동에 이르기까지 …."(증38, 21쪽 하5줄~22쪽 2줄)


                                         해방구라는 표현

황석영 책: "그것은 해방이었 다. … 시민들 자신의 도시 광주는 모든 좌절, 압박, 부자유, 반민주, 분단 등등의 쇠사슬과 질곡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놓여난 해방지구가 되었다."(증44, 132쪽 5~10줄).


북한 책:  "영웅적 광주인민들의 봉기는 바로 자주성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한 고리였다." (증38, 3쪽 하3~4) "민주정권의 싹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울(일으켜 세울) 수 있게 하였다."(증38, 4쪽 11~12줄)

 

이 글이 소화가 안 되시는 분들은 "솔로몬 앞에서 선 5.18"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2010.8.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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