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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발포는 위험에 처한 병사들의 정당한 자위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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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4-26 17:41 조회3,9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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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발포는 위험에 처한 병사들의 정당한 자위권이었다

 

                              더민주당, 논리 없는 석기시대에 매몰  

전두환 회고록에 '5·18 당시 발포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책은 6월경에나 나오는 모양이다. 발포라는 말이 떠돌자 4뤌 22일 더민주가 나서서 논평을 낸 모양이다.  

"광주시민 가슴에 또다시 총질하는 행위다. 대법원은 1997년 전두환 등 신군부 지도부에게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해 유죄를 확정했다.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광주시민을 살해한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이미 사법적 단죄를 받았음에도 '발포 책임이 없다'며 발뺌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궤변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고 맹공을 퍼부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5·18 진상규명과 학살자들의 진심어린 사과다. 광주시민들은 36년째 그날만을 기다려오고 있다.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시민에게 응답할 차례다. 권력찬탈을 위해 헌정질서를 파괴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파렴치한 역사 왜곡 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1995년 서울검찰-군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보고서” 내용  

전두환이 발포명령권자라 떼를 쓰는 것은 무식한 빨갱이들의 억지일 뿐 사실도 아니고 논리에도 어긋난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와 중정을 모두 통솔하는 2성 장군이었고, 그의 임무는 대통령에 정보를 제공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정책 개발에 두뇌들을 동원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보필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광주현장 진압군에 발포를 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최규하를 돕는 라인은 두 개였다, 하나는 계엄사령부 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수사 라인이었다. 전자는 이희성이 맡았고 후자는 전두환이 맡았다. 2성 장군인 전두환이 4성장군이 지휘하는 계엄라인에 끼어들어 발포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자위권 발동 명령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의해 5월 21일, 오후 5시에 내려졌다.  

하지만 빨갱이들이 문제 삼는 도청 앞 발포는 오후 1시에 발생했다. 그것은 장갑차와 대형차량들이 도청 정문에 집합해 있는 7공수 및 11공수 대원들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했을 때 병사들이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대응한 사격이었다. 제31사단 소대가 공수부대와 함께 있다가 헬기가 31사단 병력만 단독으로 철수시킬 때, 소위가 혼자 탈출해서 미안하다며 그가 가지고 있던 실탄 박스를 공수부대 병사들에 주고 갔다. 이 실탄을 나누어가진 병사들이 지그재그로 돌진해 오는 장갑차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한 것이 좌익들이 부풀린 이른바 도청 앞 발포다.  

여기에서 공수부대원 여럿이 북괴군이 모는 장갑차에 치어 살상당했다. 하지만 이는 소부대 차원에서 달려드는 대형차를 향해 발사한 경우의 제9번째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자기 목숨 건지기 위해 정당방위로 개별 차원에서 발사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아래에 검찰보고서에서 발췌한 5월 21일의 상황을 소개한다.  

                                        5월 21일의 상세상황  

5월 21일은 수요일, 날씨는 맑았다. 20일과 21일 이틀간의 밤은‘철야시위’의 밤이었다. 자정부터 5월 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 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01:45분, 전교사는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31사단장에게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31사 96연대 13/444(장교/여타 계급)명이 02:45분에 광주교도소에 배치됐다. 02:00시,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에 난입하여 방화했고, 세무서는 전소됐다. 세무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카빈총 17정을 탈취했다. 이 때 광주시외 전화가 모두 두절됐다. 03:00시, 도청, 광주역, 광주세무서, 가톨릭센터. 공단입구 등에서 4만여 명이 구호와 전우가를 제창하면서 철야 시위를 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을 해제하라.
시민은 도청 앞에 모이자.  

이 날의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고교생 중심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화염병을 투척, 군장갑차를 공격하고 있다.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 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도청건물 3개 동을 불태우고, 차량 12대를 불태웠고, 광주역, 월산동사무소를 불태웠다. 이때의 피해는 군인사망 2명, 군인부상 5명, 경찰중상 6명, 경찰경상 7명, 민간인 사망 2명이었다.  

04:00시, 기차를 타고 온 20사단 61연대(82/14,13)가 송정리에 내려 전교사에 도착했다. 04: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계엄군을 외곽으로 빼내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소탕작전’은 5월 23일 이후 의명 실시하고 군에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심했다.  

05:20분, 역전파출소, KBS가 연소 중에 있었고, 전남대에 포위된 3공수여단에서 9명이 중상자가 발생했다. 06:00시, 시위대는 노태동, 금남로, 광주교도소, 서부 변전소 등에서 가정을 방문, 합세를 호소했고, 버스25대, 트럭 4대를 탈취했다. 06:25분, 가스 살포용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했고 08:00시를 기해 전교사 지역에 비상경계령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 등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 1명이 실종됐다가 후에 복귀했고, 병사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그레이하운드 1대, 트럭 2대를 몰고 송정리로 이동하면서 시민이여 동참하라며 마이크로 선동했고, 가톨릭센터와 한일은행 앞에서 5,000여 명이 버스 1대, 용달차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새벽 4시에 상무대에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교육대학으로 이동했지만 돌고개 지역에서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혀 전교사로 회군했다. 공수대는 시위대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내서 도로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11공수의 61 및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 앞에, 63대대는 노동청 방면에, 7공수 35대대는 광주천 방면에서 전남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를 완료했다. 8시가 되자 도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했다.  

08:30분, 25세가량의 여자가 관광호텔 앞에서“전두환의 동생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인계하라. 보내지 않으면 불을 놓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이에 계엄군이 호텔을 차단했다. 도청 앞에서는 민간시체 2구를 가져와 도지사더러 인수해 가라고 주장했고, 제일은행 앞에서는 학생들이 각목, 삽 등 흉기를 들고 버스 2대, 군 지프차 2대를 탈취했고,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08:50분, 20사단 사령부 및 61연대 114/1,555명 상무대에 도착했다. 이날 총으로 완전히 무장한 시위대는 2,700여 명이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 중에는 사상범이 170여 명 있었다. 08:58분, 버스 2대, 트럭 1대에 탄 시위대 400여명이 교도소에 접근했다 돌아갔다. 10:22분,150여 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 쪽으로 갔다.  

11:02분, 시위대 50여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15:38분, 경찰 기동순찰차 등 20여 대로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이는 교도소 공격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한 사전 정찰행위였던 것으로 판단됐다. 11:46분, 교도소를 지키는 31사 경계 병력에 실탄이 공수됐다. 무장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 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09:00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계엄사 376쪽)를 탈취했다.(검찰 조사로는 56대, 5.18관련사건수사결과 98쪽).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여 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에 주둔 중인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시민군 측 김해범(조선법대1년) 및 전옥주(조선대 무용과 중퇴) 등이 차량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시민의 참여를 선동하고 다녔다.  

시위대는 10만으로 늘어나 광주 시가지 전역 및 나주 등 인근 지방으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이 때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금성센터 매점에 난입하여“경상도 출신이니 한번 당해 봐라”며 상가에 방화했다. 주유소도 습격을 당했다, 대창석유, 동아석유, 나주 대중 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23,484리터, 경유 20,701리터를 탈취했다.  

10:00시, 정웅 31사단장은 시위대의 주장이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강구돼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전교사에 했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 사령관에 이를 보고했다. 이 때, 광주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해오던 계엄사는 오전 시간에 처음으로 사태의 진전 상태를 보도했다. “광주 소요사태는 5월 18일에 시작됐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이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사태가 악화됐다. 21일 오전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조속히 평온을 찾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국민의 동요를 의식하여 사태를 축소 보도했던 것이다.  

도청 앞에서는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 35대대장의 안내로 장형태 도지사를 만났다. 이들은 공수부대 즉각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염사령관과의 면담 주선 등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최선을 다 하겠다 약속한 후 도청 앞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을 기다리던 중 먼저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가 시위대에게 진정하기를 설득하려 하자 시위대는 각목과 화염병을 던져 연설을 중단시켰다.  

이에 장형태 지사는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다니며 “공수부대를 철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하여 달라”는 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무조건 12시까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윤흥정 사령관이 갑자기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면서 종합행정학교 학교장이었던 소준열 장군을 전교사 사령관에 보임시키는 인사이동에 따라 소준열 장군이 전교사에 도착했다. 이취임식은 다음날인 5월 22일 10:00시에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에‘체신부장관을 군에서 추천해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전달했고, 이에 전두환은 곧바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으며, 이희성은 곧바로 그와 가장 친한 육사 8기 동기생인 윤흥정을 추천했던 것이다. 

11:00시, 도청 앞 수만 명의 시위대 앞에는 총을 든 격렬 시위자들, 장갑차, 버스. 트럭 등 수십대 차량이 공수부대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11공수 61대대장은 여단본부에 긴급 대책을 강구해 달라 SOS를 쳤지만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도청을 사수하라는 엉뚱한 지시만 반복했다.  

견디다 못해 63대대장은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헐어 개인당 10발씩 나누어주면서 위급할 때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11:15분, 성남비행장을 출발한 61항공단의 수송용 UH-1H 헬기 10대가 13:10분, 전교사에 도착했다. 12:00시, 윤흥정은 21일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에게 공수부대로부터 도청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기록들에 의하면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 쪽을 향해 공포를 쏘았지만 사상자들은 없었다. 앞의 한동석 소위와 대대장들의 수기를 보면 도청 앞 첫 총성은 시민군 쪽에서 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계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웅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3공수 5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트럭, 버스, 소방차 등 대형 차량들을 앞세워, 정문에 4만명, 후문에 1만명이 3공수와 그야말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첩보가 퍼지자 13대대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며 실탄 30발씩 장전돼 있는 탄창 2개씩을 지급했다.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으로 12시경에는 전남대 정문에 설치된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전남대 정문의 300m 정도 뚫렸고, 이에 3공수 3개 대대가 총 투입되어 시위대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밀어붙였다. 3공수여단은 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반복해서 이들 차량 시위대와 밀리고 미는 격전을 치렀다.  

시위대가 차량을 지그재그 기동으로 돌진시키자 공수부대 장병들은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다.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대 숙영지가 시위대에 의하여 점령당할 수 있는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은 E-8 가스발사통 20여개를 총동원하여 여단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가스탄을 발사시켰고, 공수대원들은 여기저기에서 위협사격을 가했다.  

계엄군의 반격에 당황한 시위대는 이때에야 겨우 물러났다. 화가 난 공수대원들은 극렬 공격자를 점찍어 추격했고, 민가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쏘거나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체포 연행했다. 이와 같은 공방은 3공수여단이 전교사 사령관의 명령으로 광주 교도소로 이동하기 위해 전남대를 빠져나간 17시 30분경까지 계속됐다. 오후 5시 30분, 3공수여단이 전남대를 빠져나가자 시위대는 곧바로 전남대를 점거해 버렸다. 3공수는 시위대로부터 장갑차, 트럭, 5톤 구난차, 경찰 가스차 등 13대를 노획하여 그중 4대는 운전 불가상태라 파괴해 버리고, 나머지는 교도소로 끌고 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활용했다. 전남대 앞 진압 과정에서 임신8개월인 주부 최미애(23)가 충상으로 사망했고, 성명 불상자 2명(운전사와 학생으로 추정)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최성환(남, 18), 양일권(남, 19) 신상균(남,15) 등이 총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10만 규모로 늘어나 도청점거를 시도했다. 30,000여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를 실은 리어카를 앞세우고, 군용 지프차 및 장갑차 등에 분승하여“오늘 밤은 부자집과 각 기관을 파괴하자”고 선동하면서 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고, 폭도 200여 명이 차들을 집단으로 몰고 나주, 함평, 목포 등지를 순회하면서 주민참여를 선동했다. 도청 앞에는 12시부터 11공수와 시위대가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였다.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일렬횡대로 진을 친 상태에서 시위대의 도청진입을 막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 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워 공수부대 대열 앞 10m정도까지 접근함으로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 소총까지 휴대한 상태였다.  

13시,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아직도 철수하지 않는데 대해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진압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놀란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리는 바람에 실탄이 공중으로 발사됐다(8번째 발포). 총소리에 겁을 먹은 시위대가 뒤로 물러나 한동안 다가오지 않았다. 도청직원들이 마이크를 가지고 애국가를 부르며 해산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극도로 피로한 계엄군 장병들은 이틈을 타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시위대가 버스와 트럭으로 공수대원들을 향해 또 다시 지그재그로 돌진했다. 고속에 지그재그로 달려들자 장병들은 혼비백산 했다. 다급해지자 몇 명의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했다(9번째 발포). 버스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버스는 도청건물 좌측을 들이받고 정지했고, 나머지 차들은 분수대를 돌아 빠져나갔다.  

산개됐던 공수대원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대형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부 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를 취해 시위대에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13:30분경, 시위대가 또 다시 장갑차 1대를 아주 바른 속도로 몰고 공수대원들을 깔아 죽이려 돌진하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수많은 공수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발포했다(10번째 발포). 장갑차 위에서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됐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의 동시다발적인 발포로 일단 후퇴했던 시위대는 가톨릭센터와 한국은행 광주지점으로 집결했고, 이 증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공수대원들에게 접근하자 이미 이성을 잃은 일부 공수대원들이 이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11번째 발포). 이때 도청 앞에서 발생한 발포만 해도 4번이었다. 이날 전남대 결전에서는 발포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했다.  

전남대에서 이뤄졌던 발포들은 쌍방 간의 전투행위였으므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5.18측과 판검사들은 도청 앞에서 이루어진 4차례의 발포만을 문제 삼으면서 그 책임자가 바로 전두환이라는 기막힌 주장을 하는 것이다. 판검사들이 상황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5.18측 사람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전두환이 어느 시각, 어느 곳에나 나타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보는 것 같다. 위의 한동석 소위의 진솔한 수기를 보거나 군대 상식으로 보나 상상을 해보나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에 있는 전두환이 무슨 명령을 내린다는 것인가?  

누가 보아도 이제까지의 발포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불과 1-2초 사이의 조건반사적 결심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는 순간에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발포를 한 것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허락을 득한 발포다? 판검사들은 군인들이 일체 발포를 해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불타는 짚단에 타죽었어야 했고, 차량돌진에 수 없이 깔려 죽었어야 했고, 총과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재판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까지 도청을 치키던 7공수 35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그런데 방송국을 경계하다가 전남도청을 거쳐 사단으로 철수하던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사단으로 철수하면서 가지고 있던 경계용 실탄 200여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35대대로 념겨졌으며, 이로써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갖게 된 것이다.  

전남도청에서 이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대대적인 무기탈취가 있었다. 80여명의 시위대는 차량 3대를 타고 광산 하남파출소에 가서 카빈 9정을 탈취했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시위대는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시위를 벌인 후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정과 실탄 2상자를 탈취했다. 13:35분경, 화순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정과 실탄 7-8박스를 탈취했고, 광주에서 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한 후 래카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정, M-1소총 200여정, 실탄 46,000여발을 탈취했고, 15: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7,760발, 제라틴 폭약 13상자(2,925kg) 및 도화선 6,000m, 화순 동면 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1정, LMG 1정, 실탄 14,000여발을 탈취했고,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학, 강진 선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900여정, 실탄 13,000여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다가 광주공원과 학운동 등에서 분배하고 무기 시용교육을 실시하고, 조직을 편성하여 시내 주요 목진지에 배치했다(이상은 1995년7월18일 검찰수사결과 100-101에서).  

그 밖에 군과 중앙정보부 등의 기록들에는 이래와 같은 자료도 있다. 화순경찰서 중앙파출소로부터 총기 212정 및 실탄 81,908발, 수류탄 182개, 나주경찰서 남편지서로부터 카빈 64정 및 실탄 504발, LMG 1정 및 실탄 1,508발, AR 1정 및 실탄 350발, M-1 15정 및 실탄 1,500발, 권총 1정 및 실탄 7발, 수류탄 47개,(검찰수사결과와 다름) 나주경찰서 산포지서에서 카빈31정 및 실탄 5,310발, AR1정 및 실탄 360발, M-1 26정 및 실탄400발, 화순 서태리 역청공장에서 제라틴 폭약 22.5kg을 탈취했고, 화순읍 중앙파출소를 방화했다.  

14:00시, 전교사는 전남대를 방어하고 있는 3공수 여단에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외곽도로를 차단하고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도청에서는 도지사 등 3명만 제외하고 도청직원 전원이 피신했다. 같은 시각, 나주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 제조공장 무기고에서 총기 1,700정 및 실탄 4,700발을 탈취했다. 14:45분,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UH-1H가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로부터 사격을 받아 6발이 명중되었다. 15:50분 경, 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을 하던 같은 기종의 헬기 역시 6발의 총격을 받았다. 61연장은 전남도청 임무교대가 불가함을 보고했다. 오후 2-3시 경에 시위대는 이미 헬기에 대고 사격을 할 만큼 무장되어 있었고, 육군 정규보병부대와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4:50분, 시위대의 장갑차가 또 다시 전남도청 광장 쪽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로부터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12번째 발포) 15:00시,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광장을 향해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를 하자 후퇴했다.(13번째 발포)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는 충금지하상가 4거리에 도착하여 20여정의 무기를 분배했고, 화순경찰서에서 탈취한 무기는 석천다리, 지원동에서 무기를 분배함으로써 총을 가진 시위대가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무기를 광주공원 및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했고, 총기사용법을 교육 받은 시위대는 지프차 등을 타고 시내를 돌면서 시위군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민참여를 호소했다. 이들 무기를 소지한 일부 시위대는 전남도청을 향했지만, 이 때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 신관, 전남일보, 수협도지부, 상무관 등 건물 옥상에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했다.(14번째 발포)  

15:15분, 우체국 쪽에서 2,000여명의 시위대가 카빈총을 가지고 도청으로 접근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15번째 발포) 15:35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선무활동에 의해 시민과 불순세력을 분리할 것, 광주 외곽 도로망을 차단할 것, 교도소를 끝까지 방어할 것, 지휘를 일원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교사 사령관은 31사단장에 작전배속 시켰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을 환수하고, 16:00부로 대공경계령인 진돗개 둘을 발령했다. 정웅이 너무 무능하여 그에게 주어졌던 광주진압 작전권을 회수한 것이다. 5월 21일부로 계엄사령관은 지휘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정웅과 윤흥정으로부터 광주작전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회수한 것이다.  

15:50분, 카빈총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시가지를 누볐다. 16:00시, 시위대들은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발포를 했고,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고 헬기, 도청 및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로 발포를 했다. 시위대는 지프차에 수류탄 1상자와 LMG 1정을 설치하고 도청 점거를 시도했고, 국민은행 앞에 다이너마이트 1차량 분을 놓고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카빈총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고, 광주은행 본점에 도착한 트럭이 시위대에 30여 정의 카빈총을 분배했다.  

호남전기에서 카빈 180정 및 실탄 900발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에서 카빈42정, M-1 14정, LMG 3정, BAR 3정, 권총 10정을 탈취했다. 광주연초제조찬에서 카빈 101정을 탈취했다. 전남방직회사에서 카빈 188정 및 실탄 60발을 탈취했다. 해남계속지서에서 수류탄 47발을 탈취했다. 시내에서 민간버스 111대 및 경찰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때 진종채 2군사령관은“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면 철수시켜 충돌을 막는 동시에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30분, 전남도청상황실이 완전 폐쇄됐고,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철수, 교도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연행해 놓았던 수십 명의 극렬 시위자들을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다. 이 수송과정에서 일부 공수대원들은 전날, 광주역과 전남대 등에서 시위대에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천막 안에 최루탄과 가스를 투입하고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구타하였고, 그 결과 여러 명이 사망했다. 16:50분,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이에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35대대 1,200명의 병력은 17:00시에 장갑차를 선도로 하여 전남도청을 출발, 공포를 쏘면서 전남대로 철수한 후, 7공수 33대대를 합쳐 총 5개 대대를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시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해방구가 된 것이다.  

17:00시, 총기를 소지한 시위대들은 조를 편성하여 정찰활동, 도청감시, 외곽도로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했고, 이로부터 소위‘무장시위대’가 본격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도청이 완전 점거 당했고, 광주 전 지역에 행정이 마비됐다. 이들은 총을 들고 탈취한 차량으로 전남 전 지역을 질주하면서 시민참여를 독려했다. 장갑차 및 9대의 차량으로 총기를 난사하면서 광주 교도소를 습격했다. 조선대학교에 있는 계엄군에 난사하고 탈취한 총기를 시민에게 분배했다. 나주 반남지서에서 카빈 38정 및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 해남 옥천지서에서 M-1 555정, 칼빈 61정, AR 소총 1정, LMG 1정을 탈취했다. 장성 황동지서에서 M-1 13정을 탈취했다. 장성 진원지서에서 카빈 47정, M-1 1정, LMG 1정, AR 1정을 탈취했다. 화순광업소 예비군 대대, 광주 대한통운, 광주고교, 강진 성진 지서 등 무기고를 급습하여 수량 미상의 무기를 탈취했다. 한국낙농(김복용 대표)을 급습하여 매일 우유 900상자, 100만원 상당의 요구르트를 탈취했다. 삼립식빵에서 식빵 676상자, 열일식품에서 식빵 86상자 및 592개를 탈취했다. 대청섬유, 농성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6,240리터, 경유 9,046리터를 탈취했다.

17:15분, 전남도경 상황실이 완전 폐쇄되고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피란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운동복으로 위장하여 광주공항으로 철수했다. 17:20분,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광주교도소 및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시작했다. 3공수 15대대가 31사단 병력과 임무를 교대하고 있을 때, 시위대가 카빈총을 가지고 고속버스 2대에 분승하여 돌진해오면서 기습사격을 가했다. 이에 공수부대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수단은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와 트럭4대를 빼앗았고, 카빈, M-1 등 4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18:50분, 외곽도로 봉쇄 명령에 따라 20사단 61연대는 광주에서 전주로 나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송암동 및 광주톨게이트에 배치됐고, 62연대는 통합병원 입구, 송정리 비행장, 전교사에 배치되었다. 19:30분, 교도소를 방어하는 3공수 병력과 무장 시위대 사이에 여러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담양에 거주하는 시민 4명이 픽업 차량을 타고 가다가 시위대의 카빈총에 맞아 그중 2명(35,37세)이 사망했다. 이 때 광주 지역에 있는 주유소는 휘발유를 달라는 대로 주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드럼통 단위로 휘발유를 집으로 날라 갔다. 네 번째 휘발유를 운반하다가 교도소 앞에서 총을 맞아 부상당한 민간인이 훗날 유공자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도청을 지키던 11공수와 7공수 35대대가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주남마을로 후퇴하던 도중 차량 제대가 전남대 병원, 남광주시장, 숭의길고 부근을 지나면서 시위대로부터 차량돌진 공격과 사격을 받아 군차량 3대가 전복되고 장교 1명과 사병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0시,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완전 접수되었다. 21:00시, 육군본부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60연대 제2,제3대대 및 포병연대 병력 88/1,514명이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다.  

22:10분,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 제5 및 제6중대와 무장시위대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지프차의 선도 하에 트럭 버스 등 6-7대의 차량을 타고 목포 쪽으로부터 오다가 61연대와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버스 2대가 전복됐다. 이 교전상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은 5월 22일, 00:15분경에 제1중대와 수색중대를 증원시켜놓고 있었다. 01:00경, 시위대는 광주 쪽에서 버스 5-6대에 분승하여 다시 쳐들어 와 교전을 했고, 위 두 교전과정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공수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로부터 총기 16정과 실탄 500여발을 노획했다.  

이날 시민군이 탈취한 차량 수는 1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며, 무기는 2개 연대 분에 해당한다. 시위대의 무기가 차량돌진, 돌, 화염병 등에서 소총, 기관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3공수 상황병이었던 김치년씨와 한동석씨의 차분한 수기에서 나타났듯이 이들은 5월 21일 새벽 5시경에 이미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공중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일부터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됐다.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군 병력은 20사단 308/4,778명, 3여단 265/1,216, 7여단 82/604, 11여단 163/1,056, 31사단 14/461, 전교사 107/2,144, 계 939/11,198명이었다.  

 

2016.4.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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