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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5월 22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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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4-12 15:59 조회3,9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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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2일부터 5월 25일까지는 광주유지들에 의한 무기반납기간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시를 떠나자 광주시가는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 싸울 대상이 없어진 것입니다. 수백-수천 명씩 모여가지고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던 건물소각, 차량소각, 국가자산 소각 행위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경거리가 없어지니 부나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 포화를 맞은 도시처럼 광주시는 파괴되고 전쟁 잔해와 끄슬린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폐허의 도시를 보면서, 일부 광주 유지들이 5월 22일 도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다. 이 무서운 무기들을 반납하고 계엄군과 관련자 처벌에 대한 협상을 하자”는 데 의견들이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무기를 털어온 날래고 듬직한 대학생들을 찾았습니다. 털어온 무기의 관할권자인 그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제부터는 더 이상 피해를 보지 말자’는 간절한 뜻을 설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애써 털어온 무기들을 그들의 동의 없이 반납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주 유지들이 찾는 그런 대학생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광주의 대학생이라면 나타나 영웅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굴도 보이지 말아야 하고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북한특수군이 이런 공개된 장소에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이 민주화 시위대를 만들어 무기를 털었다면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광주에서는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말이 암호처럼 널리 유행했습니다.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하고, 4시간 만에 전남지역 전체에 산재한 44개 무기고를 털고, 장갑차 4대를 몰고, TNT를 폭탄으로 조립하는 환상의 초능력을 가진 외지인들을 광주사람들은 600명의 연고대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2일 아침 광주유지들이 이 연고대생 600명을 애타게 찾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연고대생이 오후 3시 08분에 도총 앞 분수대에서 환영식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길을 안내하고 증심사를 중심으로 모든 편의를 제공한 김일성 종합대학 출신이자 비전향정기수인 손성모 등 간첩들이 ‘비선라인’으로 주선한 그들만의 비공식 행사였을 것입니다. 간첩 손성모는 5.18때 간첩들에 길을 안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미전향장기수로 있다가 2000년 8월 22일 김대중이 북송한 비전향장기수 63명에 끼어 북으로 갔습니다.

‘5.18기념사업회’의 ‘항쟁일지’(타임라인)에는 “광주시가 서울대학생 500여명에 대한 환영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5.18 역사를 총 관장하는 ‘5.18기념사업회’가 500-600명의 서울대생들의 존재를 공식 확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환영대회에 관한 5.18기념재단의 기록은 ‘연고대생 600명이 곧 북한특수군이었다’는 주제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2013년 7월 14일 경에 사라지고 지금은 그 대신 다른 엉뚱한 기록으로 대체돼 있습니다. 
 

광주 유지들 앞에 나타난 학생은 오직 1명, 불과 22세의 앳된 전남대학 학생 김창길이었습니다. 교수들이 도청에 나왔지만, 그 교수들은 어떤 학생들이 그런 엄청난 작전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극히 소수의 광주의 유지들, 교수들이 수습대책위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이들은 모두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도청으로 출퇴근하는 신종 공무원들이었습니다. 이에 실망을 느낀 22세의 김창길이 YWCA 소속의 일부 사람들을 이끌고 무기회수에 직접 나섰습니다. 전교사에 다니면서 체포된 자들과 무기를 맞바꾸는 일도 했습니다.  

김창길은 어린 나이에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도청에 무기 상태로 조립돼 있는 다이너마이트 폭탄 더미를 해체해야 광주시가 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교사(전라남북도 계엄분소)에 가서 이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은 유일한 기술자 배승일 문관을 25일과 26일에 걸쳐 도청 지하실에 파견하였고, 김창길은 온건파들과 함께 배문관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만일 배문관이 북한특수군이나 강경파 학생들에 발각이 됐더라면 그 즉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주면 광주시민들이 그들의 원수 공수부대와 잘 싸울 것으로 알았던 600명, 그들의 예측과는 반대로 ‘무기를 수거하고 반납하는 광주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몸이 달았습니다. 수천 수만의 군중들이 거리를 메웠을 때에는 얼굴 노출에 신경쓰지 않아도 군중속의 한 사람 정도로 묻힐 수 있었지만, 군중이 없는 광주벌판에서 활동을 하려면 얼굴부터 가려야 했습니다. 복면부대가 출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북에서 온 ‘환상의 능력자들’은 복면을 하고, 무기를 들고, 차를 몰며, 날랜 모습들을 시민들에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들을 믿고 끝까지 항쟁하라고 독려하고 다녔습니다. 복면부대의 존재와 행위에 대해서는 이하에 기재돼 있는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증언과 진술서에 잘 나타나 있지만 아래에 게재돼있는 복면사진들에서 더 빨리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600명의 연고대생’ 일부는 이 기간에 계엄군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다시 솟구치게 만들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놓고 남남간의 전투를 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이미 광주에 “누군가에 속고 있다”는 정서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지각없는 10대, 20대들도 이제는 외지인들의 행동에 이질감을 느껴 그들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았습니다. 무기회수가 지속되었습니다. 600명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교도소를 점령하여 그 속에 수용돼 있는 류낙진 등 170여 명의 좌익수가 포함된 2,700여명의 재소자를 풀어 폭동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총 6회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습니다.  

육군본부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북한은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쟁탈전은 남북한 특전부대끼리 벌이는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참호를 깊이 파고 몸을 숨기고 있었던 공수부대와 장갑차 및 군용트럭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던 600명과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600명중 상당수가 죽었을 것입니다. 북한군은 죽기 전에 각가지 방법으로 증거를 없앱니다. 그리고 남은 특수군은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안개처럼 광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광주에는 한국 국민이 아닌 12구의 신원불상자를 남겼습니다.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에는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00명”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 공동으로 나타나는 암호입니다.

2013년 5월 15일 채널A에는 전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가명 김명국이라는 탈북자가 그의 참전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이 김명국에 대해 광주의 변호사들과 ‘5.18대책위원회’가 고발을 했지만, 사건을 이송 받은 서울검찰청들은 김명국을 소환조차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였습니다. 그가 광주작전에 참전하였다는 사실, 그가 광주의 영웅으로 북한에서 대우 받았다는 사실, 북한에서 5.18작전을 어떻게 결산하였는지에 대한 사실, 그가 왜 탈북하였는지에 대한 사실 등은 이미 그가 탈북했던 2006년의 합동조사반 기록에 다 기록돼 있기 때문에 그의 참전사실은 인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빨리 탈북한 그의 여동생 역시 같은 사실을 합동조사반에 털어놓았다 합니다. 
 

여기까지가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 있던 5월 22일부터 25일까 전개됐던 광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기간 중 광주인들에 의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광주시민들에게는 오직 '역겨워 보이는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때에도 광주의 일반대학생들은 은신 칩거 중이었습니다. 온건한 생각을 가진 22세의 김창길이 주도하는 대로 무기반납 활동이 지속되었더라면 광주사태는 여기에서 평화적인 피날레를 장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일 밤중에 돌연히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부산항에 미국 항공모함이 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광주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보판단 역시 광주의 20대 젊은이들에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6세의 조선대생 김종배가 25일 밤에 갑자기 나타나더니 이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열흘만 견디면 미국이 광주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어린 뜨내기들에 역설하였습니다. 참으로 지작 없고 천진난만한 신념이었습니다. 당시 항공모함이 극비리에 부산에 오는 것은 맞는 정보였지만, 그 항공모함을 타고 오는 미군이 광주폭도를 도와주리라 생각한 것은 넌센스였습니다. 아마도 광주사람들에게 결사항전 하기를 바랐던 구군가로부터 제공받았던 선동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는 신념이 되어 최후까지 결사항전을 하겠다 목청을 높이게 하였습니다.  

이런 김종배 그는 누구였습니까? 김종배는 5월 25일 밤까지 광주폭동에 전혀 참여한 바 없었고, 운동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윤상원에 갑자기 포섭되어 나타난 도청의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600명이 복면을 한 채 거리를 누비면서 무기반납을 중지하고 자기들을 믿고 결사항전에 나서라 설득하러 다니던 사진들입니다.

(사진 생략) 


                          5월 26일과 27일 새벽까지는
        소수의 20대 부나비들이 개념 없이 나댄 소영웅적 객기의 시간  

25일 밤늦은 시각, 전남도청에서는 멋모르는 소수의 20대들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엉뚱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26세의 조선대 학생 김종배, 26세의 화물차 운전수 박남선, 30세 회사원 정상용, 5.18의 상징이라는 30세 윤상원(녹두서점 점원), 27세의 조선대 허규정 등이었습니다. 25일 밤, 박남선이 권총으로 공포탄을 쏘면서 김창길 등을 위협하여 ‘시민학생수습위원회’로부터 축출시키고, 시민학생수습위원회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항쟁본부’로 바꾸었습니다. 이 이름으로 인해 일반국민들에는 마치 5.18에 ‘항쟁본부’가 있어서 모든 민주화시위를 지휘했던 것처럼 질 못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박남선은 26세로 개념 없이 도청에 처음 들어와, 상황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지만 ‘항쟁본부’ 가동이래 항복할 때까지 25시간 동안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그를 공수부대 예비역 대령 출신의 항쟁 사령관인 것으로 각색하어 배우 안성기로 하여금 배역을 맡게 했습니다. 항쟁본부에 항쟁을 지휘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오죽 지도자가 없었으면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도 5.18의 주인공을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지도자로 각색했겠습니까? 이 세상에 지도자 지휘자 없는 “대규모 폭동”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단 두 사람이 산 속에 조난되어도 지휘자가 자연스럽게 탄생합니다. 그런데 수십만 도시게릴라 작전을 수행하였으면서 거기에 지도자와 지휘자가 없었다는 것이 어떻게 수긍될 수 있겠습니까? 5.18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지휘한 세력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름과 얼굴과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얼굴을 감추자 광주사람들 중에는 대규모 작전을 지휘한 지도부가 없었다는 사실이 민얼굴처럼 드러났습니다. 
 

항쟁본부의 총사령관은 26세의 대학생 김종배였습니다. 그런데 5.18을 그린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와 남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김종배라는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엉뚱하게도 ‘화려한 휴가’에서는 화물차 운전수를 항쟁사령관으로 등장시켰고,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는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도망자 박관현을 ‘전두환의 심복으로 등장시킨 광주교도 소장’과 싸우다 죽어간 영웅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이 모두가 5.18에는 광주의 영웅이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항쟁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 그룹은 불과 80명 정도로 구성된 콩가루 집합체였으며, 주로 중고교생들과 막노동자들로 구성됐습니다. 5월 26일 새벽부터 가동된 항쟁본부의 조직은 아래와 같습니다.  

위원장 김종배(26, 학생 무기징역)

대변인 윤상원(30 위장취업 도청에서 불에 타 사망)

외무담당부위원장 정상용(30 사원 무기징역)

내무담당부위원장 허규정(27 학생 15년징역)

기획실장 김영철(32 사원 7년징역)

민원실장 정해직 (29 교사 5년 징역)

상황실장 박남선(26 골재운반운전수 무기징역)

보급부장 구성주 (26 건재상 2년징역)

홍보부장 박효선 (26, 전남대 연국과, 황석영 추종자)

조사부장 김준봉(21 사원 5년징역)

기동타격대장 윤석루(20 양화공 무기징역)

경비담당 김화성 (21 종업원 5년징역)

기동타격대장(20, 구두공 무기징역)

  이들은 명단에만 있었을 뿐, 항복할 때까지 25시간 동안 사실상 한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성명서만 매우 강력하게 내서 계엄군의 광주재진입 작전을 결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들만 아니었다면 광주 재진입작전은 없었을 것이며, 27일 새벽에 발생한 17명의 민간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진입 작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주로 중고생들이었고, 그나마 20대의 항쟁본부 간부들은 도청에 들이닥친 계엄군을 보자마자 즉시 항복을 표시하여 살아남아 오늘날 신흥귀족으로 등극해 있는 것입니다. 5월 27일 05:23분, 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은 최규하 대통령에 광주작전이 모두 종결되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검찰이 1995년 7월 18일 발표한 ‘5.18관련수사결과’(증5) 139쪽에는 이날(5.27) 사망한 민간인 17명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5월27일 사망한 시민들은 도청에서 11명, YWCA에서 2명, 그리고 전남여고, 무진중학, 전대앞, 효덕동, 지원동, 동명동, 광주고에서 각 1명씩이고 나머지는 피해 장소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 17명의 명단에는 14세 여중생을 포함해 19세에 이르는 10대가 7명, 20세가 2명, 22-28세가 7명 그리고 40대가 1명입니다. 여기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이들 중 28세의 남자(상업)가 카빈총에 맞은 것으로 검찰 문서에 기록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총을 다룰 줄 모르는 어린이의 총에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 주력은 다 빠져나가고 40대 1명과 10대 9명, 20대 7명이 개념 없는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래는 검찰수사 자료에 나온 5.27의 민간사망자 17명의 명단입니다.  

1. 김명숙(여 14, 서광여중3년), 2. 안종필(남, 16, 광주상고1) 3. 문재학(남, 16, 광주상고1) 4. 박성용(남, 17, 조대부고3) 5. 김종연(19, 재수생) 6. 이강수(남, 19, 금호고2) 7.유동운(남, 19, 한신대2) 8. 민병대(남, 20, 병아리부화장 종업원) 9. 이정연(남, 20, 전남대1) 10. 김동수(남, 21, 조대3) 11. 김성근(남, 23, 목공) 12. 박용준(남, 24, 신협직원) 13. 오세현(남, 25, 회사원) 14. 문용동(남, 26, 호신대4) 15. 유영선(남,27, 회사원) 16. 이금재(남, 28, 상업, 컬빈총상) 17. 양동선(남, 47, 광주고 직원)  

폭동이 진압된 후 계엄사는 곧바로 군법회의를 열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최고의 중형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 마지막 5월 26일에 참여했던 개념 없던 부나비들이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시면 광주폭동 마지막 날에 줄을 잘못 서서 중죄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잘 드러날 것입니다.

사형선고
를 받은 사람은 5명이며 이들은 정동년(37, 건달에 가까운 복학생), 배용수(34, 화물차 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화물차 운전수), 김종배(26,학생)입니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 구두공) 허규정(27, 학생) 정상용(30, 회사원) 하영열(31, 공원) 윤재근(28, 공원) 서만석(36, 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5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도청으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이며 5월 18일부터 5월 22일까지의 폭동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계엄사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광주시를 파괴하고 광주 시민을 살해하고, 광주의 부나비들로 하여금 계엄군을 살해케 한 고도의 게릴라작전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1991년 3월 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 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했습니다. 윤기권은 당시 19세의 고3으로 5월 18일 오후 4시경 닭장 차 속에 들어 있는 경찰 15명을 인질로 납치하여 광주민주화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며, 그 공로로 인해 2억원을 보상받았습니다. 35년 전 당시의 2억원이라면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가 이런 공로로 2억원을 받았다면 이동 중인 20사단을 막대기 하나로 제압하고 사단장 지프차 1호차를 위시하여 사단 전체의 지휘차량 14대를 빼앗은 300여명의 공로는 최소한 1인당 10억 원씩은 될 것으로 짐작이 가는데 이를 요구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수군 600여명은 광주사태 수개월 전부터 전남지역 전체를 샅샅이 뒤져 17개 시군에 위장하여 꼭꼭 숨어 있던 무기고 44개를 찾아내고, 이에 대한 약도 및 구조도면을 그렸을 것이고 아마도 사진까지 찍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했기에 5월 21일 불과 4시간 만에 전남 각지에 두루 분포돼 있던 44개 무기고를 털어 무려 2개 연대 분량의 무기들을 탈취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논리적 추측은 탈북자들의 증언과 100% 일치합니다. 윤기권의 공로가 2억원이라면 이렇게 화려한 공로를 이룩한 600여명의 공로는 아마도 1인당 20억 원씩은 받아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공로를 제시한 연고대생이 일체 없습니다. 장갑차를 몰고 공수부대를 향해 4차례씩이나 지그재그로 질주하여 사상자를 낸 연고대생도 신고하면 수십억을 받을 수 있었고, 교도소를 6차례씩이나 공격한 연고대생도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련만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연고대생 600명이 북한특수군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유공자라면 모두 공적에 대한 조서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4,600여명의 5.18유공자들에 대한 공적 조서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헛수고만 했습니다. 이 공훈자료는 보훈처에도 없고 광주시에도 없고 오직 국가기록원에 있다 합니다. 성남 소재의 국가기록원에 알아보니 공개가 불가능하다 합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광주인들에 유행했던 ‘연고대생 600명’은 광주사람들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사건기간 당시에는 단 한 사람이 광주시에 들어가려 해도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연고대생이 서울에서 600명씩이나 뭉친다는 것도 있을 수 없었고 그들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광주소요 10일간에 전개됐던 상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20사단은 그 후 40일 동안에 걸쳐 폐허가 된 광주시를 말끔하게 정리해주고 철수하였습니다.


2017.4.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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