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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8-15 22:55 조회1,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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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일본 바로알기

 

               하멜이 본 조선

 

조선역사는 제26대 고종으로 종말을 맞았다. 17대 효종과 제18대 효종 시대에 네델란드인 하멜이 대만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1953~66년 에 걸쳐 여수 순천 강진 등 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관찰한 조선인의 모습이 하멸표류기로 전해져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1660년 전후의 조선인은 사악한 미개족으로 묘사돼 있다.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청나라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전투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난다. 남자는 이미 아이를 몇 낳은 아내라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할 수 있다. 처첩을 몇이라도 떳떳하게 거느릴 수 있다. 자기 여인을 여종처럼 취급한다.”

 

조선은 청나라에 예속돼 있다. 하지만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양반들은 토지와 노예에 의해 수입을 얻는다. 개중에는 2,000~3,000명의 노예를 소유한 사람도 있다. 종이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조선인들은 이 지구 위에 12개 왕국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국 천자의 지배를 받았으며 공물을 바쳐야 했다고 생각했다. 청나라 말고도 세계에는 많은 나라가 있다며 이름을 말해 주어도 조선인들은 비웃으며 필시 고을이나 마을 이름일 거라고 반박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다 담배를 피웠다.”

 

조선의 형벌제도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여인이 남편을 죽였는데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다가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 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하지만 그 절차가 괴이하다. 피살자의 시체를 구석구석 닦아 낸 식초와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을 잘 섞은 다음 이 혼합 액체를 범죄자의 입에 물린 깔대기에 배가 찰 때까지 들이 붓고는 부어오른 배를 터질 때까지 매질한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데리고 자면 사형에 처해진다. 남자들은 여자를 아주 좋아하며 질투심이 너무 많아 절친한 친구에게도 좀처럼 아내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범죄자는 자기가 죽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다. 남자들은 보통 뒤에서 찔려 죽기를 원하며 여자들은 자기 목을 찔러 죽는 방법을 택한다.”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사람은 밀린 세금을 다 낼 때까지 또는 죽을 때까지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정강이뼈를 맞는다. 맞다가 죽으면 그의 일가친척이 밀린 세금을 내야 해 국왕이 결코 자기 수입을 못 받는 법은 없다. . .사찰()은 주로 양반들의 놀이터, 기생들을 데리고 절에 자주 놀러온다. 절은 가장 잘 지어진 건물이지만 매음굴이나 선술집에 가깝다. . 조선인들은 질병을 혐오한다. 전염병이 들면 고을 밖으로 실어가 조그만 집에 가둔다. 지나가는 사람은 환자 쪽을 향해 땅에 침을 뱉고 지나간다. 결국 거기에서 그대로 죽는다.”

 

    1,900년 전후의 조선 아프리카 토인보다 더 미개

 

언더우드 김옥균 윤치호 등 당시 살았던 내외 거물들 수십 명의 글이 있다.

 

조선 사람들의 절반은 노비고 일부 양반들이 노비를 수천 명씩 거느린다. 노비는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노비의 자식은 일할 나이가 되면 주인이 즉시 빼앗아 간다. 85%가 문맹이다. 여자들은 항상 규방에 감금되다시피 되며, 바깥주인의 허락 없이는 거리에 못나간다. 이러한 율법은 너무도 준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였고,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린 딸들을 한 사람당 쌀 한말에 팔았다. 조선인들은 처참한 국내 상태를 묘사하며 '길마다 시체들이 널려있다.'고 호소했다. 조선정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식량을 사들이는 것을 허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백성의 절반을 죽게 내버려 둔다. 조선인들은 초보적인 위생 상식도 없으니, 부잣집에 가도 상황은 다를 바 없다. 청소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똥을 피해 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똥과 오줌이 그대로 버려져서 우물도 매우 오염되었다. 조선의 왕실은 게으르고 관직을 차지하려는 탐욕스런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그들은 돈과 권력에 따라 사람을 예우를 했다. 조선은 한양 도성의 길거리 청소를 개들에게 맡겨놓았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들이 먹어치우니 그 청결 여부는 개들의 식욕에 달려 있다.”

 

조선을 방문한 외국사람들이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사람과 똥오줌이다.'라고 말했다. 관청에서 민가의 마당까지 오물 천지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어찌 외국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일인가? 집집마다 버려진 똥오줌과 쓰고 버려진 하수 때문에 도랑에는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오물이 고여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그 더럽고 썩은 시궁창에 헐벗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부녀자들은 야채를 씻어먹었다. 반쯤은 똥더미인 마당에 있는 우물의 물을 여자들은 태연하게 식수로 사용했다. 조선의 한양은 내가 본 도시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 없다. 한양거리의 더러움은 차라리 ... 말하지 말자. 백성들이 비참함과 가난 속에 허덕이는데, 공무원들은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부를 탕진하고 있다. 조선의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게으르고 미신을 신봉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지조 없고 탐욕스러운 정부 탓에 생긴 불행한 결과이다. 조선의 정부는 수백 년 동안 백성들에게 더 나은 것에 대한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조장하기는커녕 방해해왔다. 왜냐하면 조선의 양반지배층이 봉건적인 질서로 자신들이 물려받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부리고 파는 노예와 몸종제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는 있고 조선에 없는 것은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가진 학자와 문화적 집단이다.”

 

한양에는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쉽게 퍼가지 못하므로 백성은 냇가나 거리에 똥오줌을 버린다. 도성의 물맛이 짠 것은 바로 내다버린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사람의 똥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웬만한 비에도 씻기지 않는다. 백성들은 고된 노동에 열 손가락 모두 뭉툭하게 못이 박혀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십 년 묵은 헤진 솜옷이 전부이며, 먹는 것이라고는 깨진 그릇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못한 나물뿐이고 부엌에는 나무젓가락과 빈항아리만이 놓여있을 뿐인데, 이유는 간단했다. 무쇠 솥과 놋수저는 공무원이 빼앗아갔고 군포 대신에 동전 2.5냥씩을 해마다 양반관리들에게 납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느 영국인이 조선에서는 가장 청결하다고 하는 인물이 그가 지금까지 본 가운데 가장 더러운 인물이었다고 놀렸다. 그는 조선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공무원들은 탐욕에 미쳐서 백성의 피를 빨아먹었다. 조선은 공무원들의 마치 물을 마셔도 갈증이 계속되는 것 같은 관권 만능이라는 병에 걸려 있으며 그로 인한 출혈로 죽어가고 있다. 조선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20퍼센트도 경작하지 못하며, 수출을 위한 제조업이 하나도 없고 광물자원은 풍부하지만 거의 개발하지 못하고 있고 개발하고 있는 자원조차 조잡하고 비경제적인 방식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 나라에 와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다는 것이다. 전 세계 많은 나라를 다녀봤으나, 지구상에서 이처럼 더러운 나라는 처음이다.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그 조잡함은 실로 형용하기 어렵다. 25만 명의 주민은 미로와 같은 골목길의 땅바닥에서 거주한다.”

 

조선인들은 반 야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격이 매우 까다로우며, 이 나라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조선의 양반의 예법은 매우 오만불손하며, 그들에게서는 잔인하고도 복수심에 불타는 야만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은 음모의 명수인데,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을 아기 때부터 음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조선의 수도는 음모와 부패와 폭정과 비참함과 지독한 야만이 끓어오르는 곳이다. 백성과 정부는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정부는 파산 상태에 빠졌다. 이 나라는 지금 지옥에서 한 걸음 앞에 놓여있다. 수세기 동안 조선은 다리를 절며 살았는데도, 조선인들은 스스로 고칠 줄 몰랐다. 조선에 오게 된다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나는 조선인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고 또 하나는 죽고 싶은 욕구이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 번째 선택을 하겠다. 조선의 왕은 열강의 분열을 이용하여서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며 공무원은 음모를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수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점차 용맹성을 잃어버린 조선인은 의지와 진취성이 부족하게 되어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 되었다.”

 

조선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불결하다. 도로는 쓰레기와 사람의 대변으로 넘쳐나고, 돼지는 기세가 올라 곁눈질로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도로를 활보한다. 극심한 악취가 코를 찔러 구토가 나온다. 조선의 공무원은 모두가 도둑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양반지배층이 자기들 것을 으레 빼앗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백성들은 양반지배층이 도둑놈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도둑질에도 단계가 있다. 이 도둑질은 강탈의 단계이다. 조선인들은 일본군 병사들이 돈을 내지 않고 식량을 가져간다며 불평하는데, 실상은 이렇다. 조선 백성이 쌀을 납부하여 일본군 병사들이 먹으면 일본 정부는 돈을 지불하는데, 조선의 공무원이 그 돈을 착복한다. 조선의 공무원들이 돈을 빼돌리는 수완은 전 세계 모든 민족을 능가한다. 이것을 일컫는 말이 따로 있는데, ‘착취라고 한다. 이러한 착취를 조선의 공무원들은 수완이라고 생각해왔다. 조선에는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이라는 두 부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

 

조선의 모든 공무원들이 약탈을 일삼아 수탈이 이 나라의 법칙처럼 되었기에 조선인들은 노력할 유인을 느끼지 않는다. 가난은 양반지배층의 억압에 맞설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다. 조선정부의 부패와 비효율은 오래전부터 개혁이 불가능한 지점 이상에 도달했으며, 조선의 백성은 그런 학정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반대해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조선의 공무원은 나라의 심장부를 차지한 채 이 나라 백성의 생피를 빨아 마시는 흡혈귀이다. 조선백성이 '고되게 일해서 돈을 벌어봤자 관리가 그것을 뜯어갑니다. 당신 같으면 일할 맛이 나겠습니까 ?'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찬동한다는 의미에서, "할 수만 있으면 차라리 목을 매겠소."라 하였다. 어촌의 빈곤함과 불결함은 경악할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지배층은 백성들을 생기가 없고 자고 하품하고 먹는것을 되풀이 하며 게으르고 불결한 존재로 만들었다. 한양은 봄철에 얼었던 오물들이 풀리면서 풍기는 냄새가 지독하여 나의 코가 없어졌으면 했다. 문명국이었으면 즉각 민중의 반란을 불러일으킬 부정적이고 야만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조선의 백성들은 그 사건을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조선민중의 이러한 인내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공무원들은 조세수취로 백성들을 쥐어짜낸다. 조선의 정부는 하나의 거대한 강도다. 가난, 불결, 폭음, 도덕적 타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한 달간 머문 후에, 그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떠났다. 조선의 민중이 크게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조선의 멸망이다. 조선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와 같다. 진보의 길을 모르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함과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논할 가치가 없다. 조선 민중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민중을 구제하는 길이다. 조선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며, 지배층은 국민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고 일반 백성들 조차도 부패와 탐욕, 위법 행위를 자행하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의 세습과 부정부패판인 조선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므로 머지않아 조선이 멸망할 것임을 예견하며 조선 민중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 조선은 부패한 유생의 소굴로서 뜻이 큰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로 살고 있다. 조선은 학자는 있지만 다만 중국의 문자만 알 뿐이다. 그 나라를 평가한다면 글자를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 인간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지옥이 조선의 한양에 출현했다. 나는 조선을 보고 야만인보다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地獄國)이라 평하고자 한다.”

 

조선 멸망의 원인은 궁중과 공무원인 양반이다. 일본당과 중국당으로 나뉘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서로 죽이며 싸웠으며, 저 양반이라는 자들은 공무원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에서 공무원을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공무원을 두는 것은 오직 양반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한다. ··일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다.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1921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노스클리프 자작이 조선을 본 첫인상은 비참했다. 노스클리프 자작은 아프리카 토인들도 저것보다는 나은 집에서 산다고 조선의 초가집을 평하였다. 천하 만고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이 없다. 중국 도로에 냄새가 진동한다지만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똥구더기에 산다. 일본인의 집은 밝고 깨끗한데 중국인의 집은 더럽고 음침하다면서 욕을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집은 똥뒷간 수준인데 어찌 조선 사람들의 똥뜃간 수준의 집과 중국인들의 이층집을 비교하겠는가. 한심하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 얼굴에서 고통에 찌들은 슬픈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  

 

윤치호(1865 ~ 194512.)가 당시 조선을 평가한 내용이 있다. 그는 19세로 왕의 통역사와 역할을 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인재였으며 개혁가, 외교관, 언론인, 정치가, 사상가호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글을 아래에 옮긴다. .

 

1921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노스클리프 자작이 조선을 본 첫인상은 비참했다. 노스클리프 자작은 아프리카 토인들도 저것보다는 나은 집에서 산다고 조선의 초가집을 평하였다. 천하 만고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이 없다. 중국 도로에 냄새가 진동한다지만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똥구더기에 산다. 일본인의 집은 밝고 깨끗한데 중국인의 집은 더럽고 음침하다면서 욕을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집은 똥뒷간 수준인데 어찌 조선사람들의 똥뜃간 수준의 집과 중국인들의 이층집을 비교하겠는가. 한심하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 얼굴에서 고통에 찌들은 슬픈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부의 한심한 형태가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되고 있던 것이다.

 

수치스러운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 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케 된다. 정부는 500여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한국에 있어서 가장 깊게 자리잡고, 동시에 가장 널리 퍼진 악은 거짓말이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한국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고집부리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체면, 자존심이 선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무능하고 가렴주구를 행하는 조선인 정부와 유능하고 착취하지 않는 일본인 정부 중에서 택하라면 나는 일본인 정부를 택할 것이다. 한국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않고 다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 조선인과 대화 하느니 차라리 벽을 보고 대화하는게 낳다. 벽은 뒤에서 험담은 하지 않는다.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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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전후의 조선 실태 요약

 

양반과 노예의 비율이 3:7이었다. 1938년에는 모자 노예가 세트로 팔렸는데 1인 단가가 23, 소 값은 30냥이었다(국립중앙빅물관 자료)

 

2. 조선의 공무원들은 조세수취로 백성들을 쥐어짜낸다. 조선의 정부는 하나의 거대한 강도다.

 

3.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민중을 구제하는 길이다. 조선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며, 지배층은 국민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고 일반 백성들조차도 부패와 탐욕, 위법행위를 자행하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의 세습과 부정부패판인 조선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므로 머지않아 조선이 멸망할 것이다.

 

4. 다른 나라에서 공무원을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공무원을 두는 것은 오직 양반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5.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린 딸들을 한 사람당 쌀 한말에 팔았다. 길에는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조선정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식량을 사들이는 것을 허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백성의 절반을 죽게 내버려 둔다. 조선인들은 초보적인 위생 상식도 없으니, 부잣집에 가도 상황은 다를 바 없다. 청소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똥을 피해 가는 것이 더 현명했다. 똥과 오줌이 그대로 버려져서 우물도 매우 오염되었다. 조선은 한양 도성의 길거리 청소를 개들에게 맡겨놓았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들이 먹어치우니 그 청결 여부는 개들의 식욕에 달려 있다.”

 

6. 조선 양반들은 상놈 계급이 영리해지는 것을 막고 탄압했다.

 

7. 양반이고 상놈이고 똥 오줌이 범람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개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도산 안창호)

 

8.사람의 귀함을 모르고 잔인했다.

 

9. 딸자식은 동물이었고, 팔아먹고, 소처럼 일시키고 낳자마자 죽이기도 했다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3&wr_id=197835&sfl=wr_name%2C1&stx=%EB%B4%84%EB%A7%9E%EC%9D%B4&sop=and&keyword=%EB%B4%84%EB%A7%9E%EC%9D%B4

 

      식민지쟁탈 열강국들 중 일본처럼 신사적인 나라 안 보여  

 

1) 70%의 노예를 해방시켜 독립 호적을 만들어 주었다-일본이 준 최고의 선물.

조선호적령

[시행 1923. 1. 1.] [조선총독부령 제154, 1922. 12. 18., 제정]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uzang99&logNo=22106690757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2) 현대적 교육을 통한 개화(한국군 파월은 군 사고방식의 개화시기)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3&wr_id=197905&sfl=wr_name%2C1&stx=%EB%B4%84%EB%A7%9E%EC%9D%B4&sop=and&keyword=%EB%B4%84%EB%A7%9E%EC%9D%B4

 

3) 산업인프라와 대기업: 압록강 수풍댐(1937~43) 수력발전소 걸설을 위시한 발전소, 철로, 터널, 교량, 공장을 건설한 존재는 조선왕이 아니라 일본왕. 미국에 의해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모두를 빼앗기고 간신히 몸뚱이만 탈출했다.

 

4) 사농공상 계급((, 학자), (, 농민), (, 장인), (, 상인) 체계에서 농공상을 천시했던 조선역사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면 과연 철로와 공장과 빌딩과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은 대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5) 단발령과 양복문화는 개화의 전형

 

6) 36년은 수탈의 기간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개화, 도덕교육, 산업화의 기간이었고, 1965년 이후 55년 동안 한국경제의 산파요, 젖줄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선과 필리핀은 자생능력이 없어 각각 당시의 열강인 일본과 미국에 의해 위탁관리의 길을 자초했던 것이다.

 

         정신대에 대한 기본 지식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진하여 몸을 바치기 위한 부대라는 뜻이다. 정신대의 시발은 조선의 학생, 농부, 주부, 일반백성들이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희생정신을 가지고 몸을 바쳐 돕자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들이었다. 원래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일본에 충성을 표시하려는 조선인들이 1941년 초부터 만들어낸 말이다. 당시 조선사회에 이런 모임은 매우 다양하게 결성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직전인 194111월에 근로자들이 대규모로 필요하게 됨에 따라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이 발령되어 대대적인 노무동원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남성은 16-40 미만, 여성은 16-25세 미만의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포고령이 발령됐지만 실제로는 남성들만 징발이 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여성에 대해서는 동원을 피하고 가급적 지방 기업들에 가서 일을 하라는 정도의 권고만 했다. 1940-44년 사이, 미국의 여성근로자는 50%나 급증한 반면 일본이 고용한 여성은 불과 10% 증가했을 뿐이다.

 

19441, 일본총리 도오조는 항공기 제작 및 기타 중요 기간산업체들에서의 노동을 위해 여자근로정신대를 발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부터 여성을 근로 현장에 본격적으로 투입하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고, 1944.8.22에는 일황의 칙령 제 519 호로 포고되었다. 12세 이상 39세 미만의 여성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봉사기간은 1, 그리고 나중에 2년으로 연장되었다. 동원된 조선인 부녀자는 간호보조, 군수품생산, 기타 전시 잡역에 종사했다.

 

가장 유명한 정신대의 중의 하나는 토요카와 여자근로정신대이다. 아이치 현에 위치한 토요카와 해군병기공장에서 일한 여성근로정신대를 뜻하는 것이다. 이 정신대는 1944년 여름에 편성되었다.

 

당시 일본은 게이샤 바를 포함한 모든 유흥업소들을 폐쇄시켰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하던 식모, 점원, 접대부는 물론 가정에 있던 미취업 소녀들까지도 대거 참여하거나 동원되었다. 이들 정신대들에 가장 큰 고통은 식량난과 폭격이었다.

 

정신대는 근로의 성격상 최소한 당시 국민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만 차출되었다. 서울, 인천, 광주, 부산에 있던 중학 및 실업학교 여학생들이 대거 정신대에 동원됐다. 정신대 차출은 학교 교사들이 했다. 형식은 지원제였지만 고사들에게는 할당량이 부과되었다. 이런 할당제는 지금의 한국의 행정현실과 똑같은 것이었다.

 

정신대원들은 일반적으로 국내 기업들에서 일했지만 일부는 일본, 만주, 중국, 싱가포르 등지의 공장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파견된 사람들은 회사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 료모는 항상 아침에 배웅하면서 격려의 말을 해주었고, 료부는 차를 태워 공장으로 바래다 주었다. 하루에 8시간 일을 했고, 매주 하루를 쉬었다(해방전후사의재인식 447). . 이들은 노임을 저축하여 전후에 학업을 계속했다(553)”이들은 대구 근처에 있던 방직공장, 큐수의 오무타와 나가사키에 있던 탄광에서,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비행기공장 등에서 일을 했다. (해방전후사의재인식 450) “199931, 다섯명의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부는 가명을 사용했고, 다른 일부는 얼굴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안부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려 했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 452)

 

            일본군 위안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에는 산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려있고, 여기에 문필기, 이득남, 이상옥,김옥실, 배족간, 송신도 할머니들이 소개돼 있다. 특별히 이 6명의 할머니들을 소개한 목적은 이 6명의 할머니들은 집안에서 학대받다가 신여성의 꿈을 선동하는 브로커들에 의해 속아서 위안부로 간 케이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일반에 얼려지기로는 모든 위안부는 가정의 보호 하에 있던 조신한 여식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붙잡아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는 유곽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정희 교수는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 434-476)

 

      소정희 교수가 학문적으로 본 위안부의 본질

 

식민통치의 마지막 10(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되고,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을 연애의 표상으로 삼은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게 된 경우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어진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 단의 희생양이 되어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으며,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소정희의 글)

 

아래 내용은 소정희 교수가 정대협이 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집에서 발췌한 것이라 한다.

 

1) 문필기: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고, 19926월에 위안부로 공식 등록했다. 그녀는 1925, 2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 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짖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게이스였다.

 

3) 이득남: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세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머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 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2부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산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교수, 3인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제가 틈틈이 요약하여 올리겠습니다만 책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은 필독을 부탁드립니다. (2006)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우리 정대협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합니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인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게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습니다.

 

먼저 후지나가 다케시 교수의 글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부터 조금씩 요약해 나갈까 합니다.

 

       일본군 위안소의 원조, 상해위안소

 

1. 오키나와에 거주한 조선인 전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등 십여 권의 책들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충격을 준 것은 19918월부터 위안부들이 잇따라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한 소송을 전개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자료상 확인된 바에 의하면 1932년 상해 위안소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중일전쟁 개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위안부 수가 최대규모였기 때문에 상해 위안소는 타 지역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해 위안소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상해에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는 공창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공창제도의 설치동기는 1)강간방지, 2)군의 사기앙양 3)성병예방 4)방첩이었다.

 

당시 상해에서의 조선인 여성 실태는 이러했다. 상해에서 조선인 여성 댄서가 출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도 출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창도 있었다. 이들은 신흥접객부로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불경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1936년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 여성 댄서가 37, 이들은 풍속을 혼란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카페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급은 48,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매음을 하여 주인과 반반씩 나누었다. 이 무렵 상해에는 290명의 조선인 사창도 존재했다. 사창이란 공창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이었다.

 

만주사변 때 나타난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매춘부 출신이며 그 중에는 조선인 여성이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중일전쟁 중기인 1940년 무렵에는 조선인 여인을 데려다 위안부를 시킨 성적 노예들도 새롭게 출현했다. 중일전쟁이 전면화 된 이후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는 시기에 위안소 경영자 중에 조선인 이름이 꽤 있었다.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부는 1)군직영위안소 2)군이 감독-통제하는 군전용위안소 3)민간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곳(민간, 군 공용) 4) 순수한 민간 전용 위안소(군이 다니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 4번째 형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32314자 상해 파견군 고급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의 일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추잡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 . .”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안의 창설자다. 쇼와7(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 현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

 

1932년 당시 상해의 일본인의 풍속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요릿집 3개소, 음식점 72, 다방 13, 해군위안소 17, 구락부 2, 무도장 1, 예기 134, 무도녀 170, 작부 166.

 

          상해 주재 일본인의 매춘 역사

 

메이지 원년(1868)부터 메이지 14-15(1881-1882) 무렵까지 상해 주재 일본인 수는 10-100명이 고작이었으며 1년에 평균 5-6명씩 증가했다. 대개 남자 31, 여자 3분의2였다. 여성의 6-7할은 외국인을 상대로 배춘을 했다. 이들이 일본 매춘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모리사키 가즈에 저서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15(1882)에 상해에 800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적시했다. “일본 아가씨들이 금새 늘어난 상해에서는 영사관이 이를 국가의 수치로 간주하고 붙잡아 500-600명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명 정도는 숨어 있었다

  

         일본은 만행국이었나?

 

1. 도덕교육 일본이 시켜주었고, 김대중-이해찬이 없앴다.

2. 공수부대의 만행을 믿는가?(임산부, 강간, 생매장, 헬기사격)

3. 이승만과 미군의 제주도 양민 학살을 믿는가?

4.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과 강간을 믿는가?

5. 6.25때의 국군 미군의 양민 학살을 믿는가?

6. 위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일본의 만행도 믿지 말자

 

   거짓말 잘 하는 조선 빨갱이들이 심어놓은 거짓말이 반일종교

 

아는척 잘난척 잘하는 조선인들: 반일이 선(Good)이고, 애국이고,

 지식인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일자리 없던 시대에 일본 회사에 취직한 것을 강제징용 당했다고 거짓말 한다.

 

3. 인신매매단의 감언이설에 속아 팔려가고 가난한 부모가 자발적으로 위안부로 내보낸 경우가 많은데도 모두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잡아갔다고 거짓말 한다.

 

4. 사또와 왕이 주리틀고 불고문하여 없는 죄도 만들어 내던 처벌방법을 판사, 검사, 변호사를 동원한 사법체제로 재판하게 한 것을 만행이라고 한다.

 

5. 1948.7.17. 공포된 제헌헌법과 각종 법률은 일본 책을 그대로 베끼고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다. (유진오)

 

6. 값을 쳐주고 쌀을 구매해간 것을 놓고 강제로 수탈해 갔다고 거짓말 한다. 조선에 무슨 재산들이 있어서 그리도 많이 수탈을 당했는가?

 

7. 똥 오줌이 뒤섞여 있는 우물을 상하수도 시스템으로 근대화시킨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8. 단발령을 문화파괴였다고 비난한다.

 

9. 일본이 건설한 철로 도로 항만 발전소 공장 빌딩 대기업 등을 모두 빼앗고도 일본인이 조선재산을 수탈해 갔다고 거짓말 한다.

 

10. 70%의 노예를 해방시켜 호적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고마워 할 줄 모른다.

 

              국민이 나아갈 길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처음부터 역사를 장악한 좌익들이 조작한 가짜 정보였다

 

일제 36년은 개화기였다.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을 담당하다 전사한 미국인들은 누구로부터 보상을 받나? 오로지 명예다. 조선인과 그 후신들에는 명예에 대한 개념이 없다. 미국노예의 후손들인 아프리카인들은 지금 미국 미워하지 않는다. 일본인들도 미국 미워하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경제는 1965년부터 일본자본, 일본기술, 일본소재, 일본 부품을 들여와 조립해서 미국시장에 내다 파는 이른바 통과경제(Transit Economy)체제로 건설됐다. 일본이 먼 아프리카에 있지 않고 이웃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일본은 한국에 매우 유익한 존재였지만 빨갱이들이 배은망덕한 것이다. 우리는 빨갱이들을 몰아내고 일본과 잘 지내야 한다. 빨갱이들 선전처럼 조선이 근사한 나라였으면 왜 일본에 빼앗겼는가? 일본과 오래 함께 살아온 남한은 일본을 등지고 살아온 북한버다 53뱌 더 잘 산다. 이것이 일본의 기여다. 일본이 없었으면 한국경제도 없었고, 박정희의 기적도 없었다.

 

 지만원tv, 89화 이웃일본 바로알기

https://www.youtube.com/watch?v=Zgkwa2Ft8Pg

 2019.8.1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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