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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제218화, 이승만과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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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3-22 21:57 조회6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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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218, 이승만과 4.19

https://www.youtube.com/watch?v=GlCKPnjl9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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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이승만과 4.19

 

재외국민 전세기 수송 논란  

이태리 중국 미국 순위

이탈리아 코로나19 사망자 793명 급증4825

미국 확진자 26,000+

개학-가을 학기 예상

개인별 위생 의식이 관건

내일 [지만원 시집] 출간 배달

[조선과 일본] 일역판 3월 말 발간

스피노자

 

이승만 대통령은 (1) 어수룩한 미국을 움직여가면서 (2) 남한사회를 사실상 통제했던 공산주자들을 숙청-청소하고, (3) 3권이 분립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끈질긴 반대와 태클을 이겨내면서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어 현대식 국가기관들을 설치하고 행정인력과 과학 인력을 양성했습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장면처럼 우왕좌왕했더라면 4.19세력은 시위할 공간을 갖기는커녕 김일성 집단에 의해 총 맞아 죽고 아오지탄광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른바 ‘4.19혁명세력은 좌익들이 틀어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승만을 독재자, 친일파, 미국의 앞잡이, 부정부패의 원흉, 분단의 원흉이라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건국자체를 부정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반역행위인 것입니다. 간첩 [이석]은 보안사 대공수사관 앞에서 “4.19는 내가 지휘했다고 실토하였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19721,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해방 후의 대구는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세력이 들끓었습니다. 이명영에 의하면 간첩 이석(李錫)은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10,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습니다. 19554, 이석은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하여,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하여 의식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간첩 이석이 1955년부터 다시 경남에 본부를 차리고 국가전복을 위한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1960411,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습니다.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대규모 시위의 불쏘시개는 언제나 시체가 담당했고, 따라서 간첩들은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언제나 시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명영에 의하면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였다고 합니다.

 

1980417,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이런 선동을 했습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그런 선동은 1980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고서야 비로소 이기붕과 최인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책임을 지고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하면서 순순히 물러났습니다.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갈 때 그는 학생들의 거친 시위 속에서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나갔습니다. 민간인으로 하야한 시점에서 관용차를 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독재자가 여기 말고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를 독재자라 모함하는 한국국민이 저주받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좌파들이 말하는 대로 독재자였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김일성이나 모택동처럼 시위학생들을 대량 살상해 버리고 처형했을 것입니다. 그는 수족들을 잘못 기용했고, 잘못 관리했다는 원망은 들을 수는 있어도 분단의 원흉이고 독재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문맹률 80%의 국민 중에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필요한 엘리트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 말고 또 누가 있었겠습니까. 이승만이 꾸린 대한민국을 지게나 지고 호미를 쥐었던 무지렁이들이 운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가장 많이 활용한 장본인은 김일성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내각과 김일성 내각의 구성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

<처형자 내각>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홍명희(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 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습니다. 비명횡사(非命橫死 )한 내각인 셈입니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애국자 내각>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사실이 이러한데도 4.19단체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혁명세력이라며 온갖 거드름을 다 피웁니다. 이들 자칭 혁명세력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원래 4.19를 주도한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가 4.19와는 무관한 외부 좌파세력들입니다. 시위가 혁명입니까? 시위는 혈기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합니다, 그게 무슨 큰 자랑입니까? 이 나라에는 시위보다 더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말없이 국가의 장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좌파들이 연연세세 4.19가 독재를 타도한 혁명이라며 우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서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4.19 시위대처럼 젊은 혈기와 의협심을 발산했습니까? 그런 시위는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던 해방공간에서 그들과 싸우며 이 나라에 민주주의 시스템을 건설하고 이 나라를 적화통일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4.19세력이 수억만 개가 있어도 해낼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입만 열면 외쳐대는 부정선거는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부정선거는 지금도 만연해 있습니다. 매크로를 가동한 드루킹이라는 인물이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문재인은 이 매크로 조작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정서가 이 나라에 만연해 있습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지시한 것이 아니지만 매크로는 적어도 문재인 부인 김정숙이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도된바 여러 차례였습니다. 이기붕과 최인규와 정치깡패들이 저지른 일각의 일을 침소봉대하여, ‘김일성 왕조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구축해 준 국부를 시위대 학생들의 발밑에 깔고 뭉개서야 어찌 이를 국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4월혁명회의 정체

 

4.19를 빙자한 좌파세력 중 하나가 ‘4월혁명회입니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매월 사월혁명회보를 발간하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4.19가 곧 좌파들의 온상인 것입니다. 2011419, 이승만의 양아들인 80대의 이인수 박사에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하며 일방적인 몸싸움을 벌인 극히 예의 없는 건달들이 ‘4월혁명회건달들입니다. 2001년부터 8년 동안 상임의장을 한 사람은 '황건'이라는 좌익입니다. 4월혁명회의 홈페이지는 진보로 표시돼 있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례를 하고, 한미전쟁연습을 반대하고, FTA를 반대하고 적화통일(민족자주통일)을 주창합니다. 민중의례는 대한민국의 순국선열들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반대하여 싸우다 희생된 빨치산 후예들을 기리는 의례입니다.

 

 해방 후의 남한 학생운동 대부분은 북과 연계된 불순한 운동 

 

1977년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의 235-270쪽에는 '전후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주요투쟁일지가 요약돼있습니다. 이 책에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에 걸쳐 무려 344건의 학생운동이 있다 했고, 매 사건을 눈으로 보듯이 요약돼 있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자세한 역사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은 남한 학생운동을 북한이 지휘했고 북한이 그 기록을 정리한 북한의 역사라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특히 이 책의 229쪽 하단-230쪽 상단에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투쟁 전략과 전술이 요약돼 있습니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서 산발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북한 자료들을 보니까 모두 북한이 만들어준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은 지난 항쟁을 통하여 위대한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남조선의 진보적 청년학생들은 우선 각종 형태의 합법 또는 비합법적 써클들과 연구회들을 수많이 결성하고 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혁명이론 그리고 전력 전술을 연구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선진적 학생들은 진보적인 중학교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망라하여 1955년부터 독서회를 결성하고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과 수령님의 혁명력사를 학습하였으며 공산주의 교양강좌까지 조직하였다.(120)”

 

한 예를 들어 1960년에 발생한 학생시위 사건은 38개나 됩니다. 1960년에 발생한 학생운동이 4.19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228일에는 경북고, 대구고 등 1,000여명이 시청광장과 도지사집 앞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35일에는 서울의 고교와 대학들이 민주주의수호를 내걸고 시위했다. 38일에는 대전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전의 고교생 1,000여명이 학생에게 자유를 달라며 시위했다. 315일에는 마산에서 25,000여 학생-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했다. 324, 부산 고교생 1,000여명이 학원자유화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어서 . . 411일에는 마산에서 35,000여 시민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18, 고대 3만 명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시위했다. 419, 서울에서 10, 부산에서 7, 광주에서 3만의 시민들이 정권타도 시위를 했다. 420, 서울의 학생 시민들이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경과 충돌했고, 전주, 수원, 이리, 청주 등을 통해 남조선 전체에 확대됐다.”

 

“421, 22, 23일에는 인천에서 확산, 423일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25일에는 서울의 1만여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진격하면서 경찰과 육박전을 폈고, 진보적 학생들이 ‘4.19청년학생동맹을 결성했다. 426, 서울 50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를 완전포위하고 경찰기관들을 습격했다. 4월 인민봉기의 절정을 이뤘고,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이 이후로도 학생시위는 연말까지 24회나 지속되었다.”

 

이상이 북한 노동당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77년에 발간한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수록된 남조선학생운동사에서 뽑은 4.19를 전후하여 발생한 남조선청년학생의 운동사입니다. 당시 시위대들은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귀순한 거물간첩 김용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315,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혁당(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이었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7월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8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부정선거와 4.19 정체에 대한 신현확의 증언

 

19992월호 월간조선, 신현확의 육성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신총리는 자유당 말기 부흥부장관으로서 3.15부정선거에 관여한 죄목으로 23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바 있습니다.

 

“3.15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 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3.15선거 당시 국무위원들이 개표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씨와 장면씨의 표가 92 8로 나오자 국무위원들이 최인규 장관을 불러 이건 시중여론과 너무 다른 것 같소하고 지적했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개표결과가 70 30으로 바뀌었답니다. 이것이 4.19 이후 국무위원들이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의 증거가 된 거지요

 

전 국무위원이 15년 구형을 받았고 선고는 76개월로 잘랐지. 그중에 중심인물은 최인규 그에게는 나중에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전부 76개월. 이래가지고 있었는데...5.16 혁명 나기 전에 어땠나 하면 내 방에 간첩이 두 명 있었어. 그러면 어떤지 알아? 아홉 명이 앉아 자요. 거기엔 살인범이 있고 쓰리꾼도 있고... 전부 같이 넣었어. 그리고 우리 일행은 한 방에 한사람씩 집어넣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의논한다고..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거요.”

 

그 감옥 내부는 어땠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 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 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 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이 무사하려고.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에 들어가서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 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놈은 그 얘기를 나한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지.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 체제에 대해 좋다고 찬성하는 놈 한 놈도 없는 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 지나면 간첩이 오야붕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물었어.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디에 갔느냐?’ ‘서울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놈 말이 명동에 가보니, 시골에서 닭을 키우면 새벽에 닭장을 열어준다. 그럼 닭이 와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지 이게 뭐 사람 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내가 북은 어떠냐고 물으니,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적화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 들어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방안에 앉아있는데도 정보가 다 들어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서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7개월 살아서 잘 알아. 목침을 벽에다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 해. 옆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다 전달이 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 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이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 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어.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들 같은 사람들 있지만. 대부분은 저쪽이었다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 이제 적화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이승만 박사의 쓸쓸한 최후

 

4.191주일 지난 426, 이승만 박사는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428, 이 박사 부부는 걸어서 경무대를 떠났습니다. 이화장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이 박사 내외를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 박사는 이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여러 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화장은 일반 서민이 산다 해도 겨울을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서 냉동 창고라고 이름나있었습니다. 이 박사는 이를 코울터 장군에게 빌려주었지만, 난방시설도 없는데다 온수까지 나오지 않아 코울터 장군은 온수 시설 등 여러 가지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그래도 코울터 장군 부인은 이화장이 춥고 불편하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코울터 장군 내외가 설치한 그 편의시설 마저, ‘가동하면 전기가 많이 든다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던 524, 하와이 한인동지회 회장을 하고 있던 최백렬씨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2-4주 정도 잠시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사랑하는 애견(해피)을 이웃에 맡기고 이박사 부부는 529일 오전 이화장을 나섰습니다.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줘요이것이 마당에 모인 이웃들에 남긴 이박사의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85세였습니다.

 

그가 호놀루루 공항에 도착한 것은 529일 오후 2:30, 공항에는 하와이 교민들이 잔뜩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짐은 전부 4, 부부의 옷이 든 트렁크 두 개, 타이프라이터 그리고 마실 것과 점심과 약품 상자뿐이었습니다. 서울 김포공항에서는 내외분의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미국에서는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세관검색을 생략했습니다.

 

이박사 곁을 늘 지켰던 오중정씨는 호놀루루 마키기 가에 있는 집을 쬐끄만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키키의 작은 집, 아예 쪼끄만 집, 마당까지 합해서 30평이나 될까, 1층에는 지하실까지 해서 창고 같은 방이 하나, 뒤에는 작은 뜰이 있었고, 2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을까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 그뿐이었어요. 이박사가 거기에 신문지를 갖다 놓고 붓글씨를 쓰곤 했지요. 지금도 이 집은 있지만 수리를 해서 조금 모양이 변했지요

 

이 집에 교포들이 자신들이 쓰던 책상과 식탁과 주방도구들을 가져왔습니다, 가로 1.2m, 세로 90cm의 알루미늄 식탁, 그 식탁이 지금 이화장에 전시돼 있다 합니다. 하와이로 간 후 이 박사 내외는 그를 존경하는 한인 및 미국인들이 보내주는 푼돈으로 지극히 검소한 소식과 외출 없는 생활로 일관하면서 오직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국에 갈 날만 갈망하고 살았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청빈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겉옷은 화려하지 않은 옷가지를 두고두고 손질하여 입혔고, 속옷은 더 이상 기울 수 없을 때가지 누덕누덕 기워서 입혔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랜 동안 남편의 병 구환을 하다가 졸도했던 관계로 남편의 유해와 함께 고국에 올 수 없었습니다.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 3천 달러를 고쟁이 주머니에 간직한 채 어느 날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치아가 얼마나 괴롭혔던지 그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틀니부터 맞추자 했습니다. 틀니 정도면 하와이에서도 맞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푼이라도 고국에서 써야한다는 고집스런 집념 때문에 하와이에서 여러 해 동안 틀니를 하지 않은 채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귀국했을 때에는 기력이 원체 쇠잔하였습니다. 틀니는 장만했지만 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돈을 들여 마련한 틀니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틀니, 비록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저승 갈 때에는 꼬옥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며느리에 각별한 부탁했습니다.

 

내가 이 박사 옆으로 갈 때에는 꼭 틀니를 끼워서 보내라. 이 빠진 할머니 모습으로 남편에게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내 장례식 때 꽃다발을 장식하지 말아라, 그 돈은 없는 사람들이 써야 할 귀한 돈이다 

 

하와이는 이 박사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와이로 올 때는 자유의사에 따라 왔지만 장면-윤보선 정부는 물론 박정희 정부에서까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치의로부터 이박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주변 인사들이 이 박사의 환국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환국하려면 사과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박정희를 매우 야속하게 생각합니다. 건국대통령을 이렇게 대접하니까 부국 대통령인 자기도 나쁘게 매도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박정희가 대통령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또 다른 과오 하나가 있습니다. 김구를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등극시킨 처사였습니다. 전두환 역시 박정희의 아들 정도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막상 대통령이 되니 박정희를 깎아 내렸습니다. 박정희 신봉자들을 탄압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조선인들의 쇼비니즘인 것입니다. 우리가 발전하려면 국민 각자가 쇼비니즘을 버리고 세계적으로 보편타당성을 갖춘 코즈모폴리턴이 즉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박사의 건강은 혈압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인사들이 박정희의 이 야속하고 충격적인 말 즉 귀국하려면 사과부터 하라는 말을 이 박사에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이 박사의 사과문을 적당히 발표했습니다. 이 적당한 사과문을 발표한 후인 1962317, 이 박사 내외는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들뜬 기분으로 공항으로 가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박정희 정부는 그의 환국을 끝내 거부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 박사의 생명은 극도로 단축되었습니다. 19657190:35, 그는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아내와 양아들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를 토해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운명했습니다. 그의 나이 90이었습니다.

 

그가 없었으면 지금의 조국도 없었건만, 그런 그는 그가 창조해낸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객지에서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721일 오후 4:30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유해는 하와이 하컴 미공군 기지로 옮겨졌습니다. 10:30분부터 시작된 미국측의 영결식, 공군 의장대의 조포와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의 추도사와 진혼나팔 소리로 장식됐습니다. 한국정부의 요인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분위기 상 누구라도 영결식에 오면 박정희 팀에게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해는 미군 의장대에 의해 C-118 특별기에 올랐습니다. 밴프리트 장군을 위시하여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 16명이 이 박사와 함께 특별기에 올랐습니다.

 

그가 하와이에서 오직 서쪽 하늘만을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52개월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바로 이것이 향년 90세로 생을 마감한 이박사의 쓸쓸한 황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 무쌍한 이승만, 세계인들은 그를 처칠과 드골 급의 거물지도자로 칭송하지만 유독 그가 세운 이 나라 이 강토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에게 끝없는 증오와 돌멩이를 던지고 있습니다. 위 내용은 1988년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을 읽고 간단히 추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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