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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5,18은 북의 공작이었고, 김대중과 5.18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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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09 23:27 조회1,6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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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5,18은 북의 공작이었고, 김대중과 5.18은 하나였다.

 

            거물간첩 김용규의 폭로

 

거물간첩으로 전향한 김용규는 소리 없는 전쟁”(1999.11.1, 원민)에 김대중과 5.18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대중 집권이 만 2년 되는 시기에 그는 매우 용감한 책을 쓴 것이다.

 

* [민주화]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다.

*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386주사파 거두 강길모 프리존사장의 증언 과 일치)

*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 4.19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수많은 탈북자들은 5.18북한이 벌인 실패한 작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평시에는 하루 종일 방송을 하지 않던 북한이 5.18 때에는 하루 종일 중계방송 하듯이 광주사태를 중계방송 했고, 공수부대원이 칼로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찢어 태아를 꺼내내는 잔악한 현상을 방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본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북한은 5.18 실황을 하루 종일 방송했다

 

사건 당시 광주에서는 KBS, MBC 방송국들이 불에 타서 방송을 하지 못했고, 시민들이나 군은 북한방송을 들었다. 5.18 시위대에는 13명의 방위병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재춘씨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분소장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1996.7.11. 5.18사건 제121차 공판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다.

 

       1967년 대규모 간첩단이 목포에 내려가 목이 터져라 김대중 선거운동했다

 

대남공작 비화 소리 없는 전쟁”72쪽에는 간첩들로 이루어진 통혁당이 1967년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있고, 김대중 연설집을 보니 당시 김대중은 목포에서 유세를 했다. 거물간첩 출신 김용규의 글은 이렇다. 싸움에서 통혁당 조직원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역전, 터미널, 시장터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목포가 죽느냐 사느냐 사활이 걸려있는 선거다. 목포시를 살리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공화당을 낙선시켜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남한의 좌익들이 일으켰던 낙선운동의 시조였던 것이다.

 

반면 196764일 오후 2, 김대중은 44세 되던 해에 목포역전 관장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간첩들이 대거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당선시키는 선거운동을 요란하게 했는데도 당국이나 국민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가 당사자인 김용규가 전향하여 폭로해서 겨우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거점이라는 김용규 선생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19805월 김대중은 [전민봉기]로 국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잡으려 했다

 

김대중은 1980326, YWCA 강연회에 나가 이렇게 강연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이다민주화를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무서운 선동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80410일 오후 8시경, 북악파크호텔501호실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10여명과 회합하고 국민연합이 계엄령 해제, 정부주도 개헌포기, 유신잔당 퇴진, 정치일정 단축, 구속자 석방 복권, 학원자유, 자유언론 실천 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국민연합을 대폭 개편하고 과거 투쟁 경력이 풍부하고 각 학생지도부와 연계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장기표를 조직국장,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각 임명하기로 결정하는 동시, 이들 3인에게 학원 선동임무를 각 부여하고, 위 참석자들에게 작금의 국내정치 정세를 분석하여 볼 때 나로서는 신민당내 당권파의 강력한 반발로 지지기반 확장이 어렵고 군부의 지지기반이 없고, 3.11. 신 총리와 3.15. 최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볼 때 선거로서는 차기 대통령에 당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바라볼 수 없으므로 정당 활동보다는 국민연합을 위시한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내세워 학생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면 교외로 유도하여 시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아울러 우리 조직을 가세시켜 대대적인 본격적 시위를 전개하면 현 정부는 궁지에 몰려 우리의 민주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 여론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하여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서 국민연합은 다음 날인 411일의 서울대학생회 주최의 학생추도식에서, 416일의 한국신학대학 학생회주최의 학술강연회에서, 417일의 서울대학생회주최의 4.19기념강연회에서, 418일의 동국대학생회 및 인하대학생 주최의 4.19기념강연회에서, 과도정부를 유신체제 옹호세력으로 몰아붙이고 학생들의 투쟁을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1980416, 한국신학대학교 학생회 주최 학술강연회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특권층은 수십억원의 호화주택에서 기천만원의 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개를 한다. 독재 하에서 감옥에 가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학원과 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980417,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1960411,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열군(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되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한 것이다.

 

1980418, 동국대학생회 초청연설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10.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탄압을 받더라도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 있다.” 한마디로 국가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동의 영향으로 불법학생집회가 급증했고, 그동안 평화적이었던 학생집회들이 갑자기 폭력시위 양상으로 변모해 갔다. 성균관대, 목원대, 세원대, 전남대 등에서는 복학생들이 노선을 달리하는 교수들을 폭행하고, 심지어는 70세 노령의 대학원장을 구타까지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서울대, 조선대, 전북대, 총신대 등에서는 학교시설을 점거-파괴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19804월 중 학생소요를 통계로 보면, 시위-농성 106개교, 수업거부 25개교, 휴강조치 44개교였으며, 경희대, 세종대, 한양대 등에서는 철야농성이 일주일 이상이나 유지됐다. 학생시위의 확산에 고무된 국민연합429,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선언하면서 반정부 장외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80917일의 판결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1980.5.1. 18:00경 문익환, 이문열, 예춘호, 고은해, 한완상, 김종환, 장기표, 심재권, 김승훈, 이우정, 이현배, 김병걸, 박세경 등과 회합하여 학내소요를 계엄령해제, 정부주도 개헌작업 포기, 정치일정 단축, 유신잔당 퇴진 등 정치적 이슈로 전환하게 하고 교내 시위를 교외시위로 유도, 시민이 이에 가세하도록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 시키면 현정부는 붕괴될 것이니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등 청년조직원들이 학생 선동에 더욱 주력할 것과 그 결행 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정하고 집권을 위한 제반 지휘본부이며 정부 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할 한국민주제도연구소가 빠른 시일내에 활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이사장에 예춘호, 소장에 이문열을 각 선임하고 전문위원으로 민족재생담당에 김관석, 역사문화담당에 백낙천, 종교교육담당에 정을병, 노동담당에 탁희준, 농업담당에 유인호, 경제담당에 임재경, 안보외교담당에 양호민, 통일담당에 문익환, 도의정치담당에 안병무, 행정담당에 이문영을 각 선임하였다.” 사실상의 혁명내각이었던 셈이다.

 

대규모의 폭력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하자 이에 크게 고무된 국민연합은 516, "2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7일자 제1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에서 요구한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신현확총리의 즉각퇴진, 정치범의 전원석방 및 복권, 언론의 자유보장, 유정회, 통일주최국민회의와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 해체 등에 대하여 519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5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김대중은 또 반정부 투쟁 방침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민주 애국시민은 유신체제를 종결짓는 민주투쟁에 동참하는 의사표시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다. 비상계엄은 무효이므로 국군은 비상계엄령에 의거한 일체의 지시에 복종하지 말 것이며,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하고, 전 국민은 민주화투쟁을 용감히 전개한다.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중소상인, 민주애국시민은 522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단 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

 

                5.18은 김일성 지령

 

1983109, 아웅산 만행이 자행되어 대한민국 각료 전체가 버마에서 일거에 희생되었다. 17명의 각료들이 그 자리에서 순직했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얀마 정부는 주범 2(강민철, 신기철 대위)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한 후 다음해인 198410월 국제연합에 아웅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미얀마 정부가 이 2명을 잡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구로부터 당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김일성 교시를 읽어보니 이 사건은 김일성이 사건 1개월 전인 19839월에 지시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남조선의 대통령이 각료들을 이끌고 동남아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부에서 결사대를 파견해 보겠다고 했다는데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틀림없이 해야 합니다. -마가 허술한 나라라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방문 일정에 따라 사전 답사도 해 보고 빈틈없이 잘 준비를 해서 감쪽같이 해 치워야 합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성공하게만 된다면 결정적 시기가 성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아웅산 테러는 사건 훨씬 전에 북한 작전부에서 기획됐고, 1개월 전에 김일성이 빈틈없이 감쪽같이 해치워야 한다고 지령한 것이다.

 

김일성의 비밀교시를 보면 김일성은 10.26 직후인 197911월에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국에 걸쳐 이른바 [전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791220일에는 12.12를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라고 정의하면서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80421, 사북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김일성은 사북사태를 전민항쟁으로 확대하라는 비밀교시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거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김일성은 197911월부터 19804월에 걸쳐 남한에 전민적인 봉기를 일으키라 지시했고, 한 달 후인 53일부터 남한에는 무서운 속도로 폭력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515일에는 서울역에서 10만 이상의 학생 시위대가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등 폭력시위가 자행됐고, 급기야 내무장관은 치안을 계엄군에 맡아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광주 5.18 폭력 시위에 대해 김대중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았을까? 법정에서 유효할 증거는 찾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김일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 전민봉기 지시를 간첩들이 이행해야만 했을 것이고, 그 간첩들은 김일성이 키운 골수 좌익 김대중을 조종하고 그를 배후에서 도와 광주사태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967년 대규모 간첩들이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열띤 선거전을 치렀는데도 아무도 몰랐듯이 광주에서 간첩이나 점화기폭조들이 대규모로 내려와 활동을 했다 해도 우리 정부나 국민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67년 폭포에도 대규모 간첩들이 활동을 했다면 광주와 같이 유사 이래 가장 큰 규모의 광주사태에는 얼마나 많은 간첩이나 북의 심리전 전문가들이 활동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파견됐다는 임천용 증언에 5.18단체측 대응 중단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20061220일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장 2시간 이상에 걸쳐 수백 단위의 북한 특수군의 남파 배경을 설명했고, 이에 5.18단체측은 이틀 후에 좌시하지 않겠다, 사과하라는 취지의 반박성명을 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그 후 1개월 후에 5.18단체 측을 향해 조목조목 공격하는 신랄한 반격을 가하는 성명서를 냈지만 그 후 5.18단체측은 임천용 회장 등을 상대로 고소를 하지 않았다 한다.

 

남한에는 무수한 고첩들이 있다. 1997년에 황장엽씨는 5만이라 했다. 이들이 5.18 광주사태에서 손놓고 얌전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아마 드물 것이다. 이들을 조직화하고 전문적 임무를 점화기폭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수백 단위의 전문가들이 10.26 이후 김일성 비밀교시에 따라 대거 남파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간첩들 중 장님문고리 잡듯이 잡힌 간첩이 하나 있었다, 5.2306:15,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룡(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 난수표 3, 무전기 1, 독침 1, 위장 주민등록증 2, 환각제 등 22339점을 압수했다.

 

197912개월간 검거된 사건은 불과 5건이었는데 반해 19805월초까지 4개월간 발생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무려 10건이나 되었다. 10건 중 7건이 1980년의 3월부터 5.18 발생 직전까지 2개월 반 동안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79-80의 언론보도집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1980317,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323,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했다. 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기관권총, 물갈퀴 등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325.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하여 무장간첩 8명이 사살됐다.

 

4) 1980327,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상황이 발생했다. 모두가 도주했고, 무장공비 1명만 사살됐다.

 

5) 1980512,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또 교전이 발생했다.

 

6) 1980515,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7) 1980516,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523일에 체포했다


      “5.18은 북한의 작전인데 실패한 작전이었다”, 북한에선 상식

 

북한에서 망명한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구태여 강명도씨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이 책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도 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면 남한에서의 거의 모든 소요는 전문적인 공작수법을 훈련받은 고첩들과 전문 폭동기술을 가진 남파 세력들 그리고 자생 불순세력들이 연합하여 불을 지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악성유언비어 살포-거짓선동-파괴 방화 살인을 내용으로 하는 폭력행위, 뒤집어씌우는 모략행위, 집단적 억지주장. 역사왜곡에 이르는 일연의 과정들에는 반드시 작전 세력이 있다는 것이 필자 솔직한 믿음이다

 

                     10.26 직후의 북한 동향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갑자기 시해되자, 당시 국무총리였단 최규하가 갑자기 대통령 대행자가 되었다. 박정희가 이끌던 내각은 197910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같은 날 아침 9시에는 최규하 대통령대행이 직접 나서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그 시점에서 국민들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북한의 남침이었고, 간첩들의 준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해 12, “1980년 초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가 미국으로부터 입수됐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했다(1979.12.25.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괴대남도발 위협판단”). 이에 당황한 최규하 대통령은 1225일 크리스마스 날,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고,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는 대규모 육군 기동훈련을 벌여 북한에 무력을 과시하기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지도층에게 북한의 남침 위협을 알려 사회안정을 위한 협조를 당부하기로 한 것이었다(G-3,‘육군위기관리대책’).

 

1980121, 최규하 대행 주재로 대간첩대책중앙회의가 열렸다. 최규하 대행은 이 자리에서 북한은 공작간첩을 통한 정치선동과 무장간첩 남파에 의한 사회불안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으니 특히 대공관계자는 불순분자 개입을 사전 방지해 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그해 126일부터 31일까지 경기도 파주에서 보병 2개 사단과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고, 130일에는 김종필, 김영삼 등의 정계인사들과 언론계 및 대학생간부 등 798명에 기동훈련을 참관케 하여 훈련의 목적을 설명해주었다(G-3, 육군기동훈련).

 

미국 역시 북한의 오판을 경계했다. 198043, 군사정전위 제400차 대회의에서 UN군측 대표 '호스테트리' 소장이 북한의 앗따른 대량 무장간첩침투 행위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 것이다. 정부는 517일에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비상근무령을 내렸으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위컴 사령관을 방문하여 일본내각으로부터 접수한 남침첩보 및 우려사항을 전달했다.

 

이처럼 1980년 봄은 남침위기와 대량간첩으로 대표되는 매우 불안한 안보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재야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권력의 공백기를 국가전복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국민과 대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주도함으로써 사회에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리더십 진공상태가 형성됐다. 3김을 포함하는 정치꾼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고 싶어 했던 이른바 재야세력들이 저마다 일어나 국민에게 아필하려는 선명성 경쟁을 벌이면서 사회혼란을 획책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은 과도정부를 해체시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사실상의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대중선동과 학생폭력을 주동했다.

 

이 권력의 공백기를 북한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대남사업부를 중심으로 남한에서 일고 있는 사회혼란을 폭동으로 증폭시켜 남침조건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려고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9791027,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를 지시했고, 10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계엄사 114p).

 

198058, 김일성은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동했고, 5.18일에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표현했다. “나는 두 개의 조선을 반대한다.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어서 519일에는 북한 인민군 고위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모종의 비밀회동까지 했다.

 

남침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이 잇따르면서 드디어 1980510일에는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가 입수됐다. “남침 시기는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시기와 맞물려 있다. 김재규 처형에 따른 항의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15-5.20 사이에 남침을 하기로 재결정하였다”. 이 첩보는 중국 당국이 일본 방위청에 제보한 것이었다.(1980.5.10. 육군본부작성 북괴남침설 분석”)

 

앞에서는 평화를 내세우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것이 북한의 생태(DNA). 10.26이라는 호재를 갑자기 맞은 북한은 위장평화공세부터 폈다. 19791220일에 모스코바 올림픽에 남북단일팀으로 참가하자 제의해 왔고, 1980111일에는 김종필(공화당총재), 정일권(공화당 상임고문), 김영삼(신민당총재) 양일동(통일당총재) 윤보선(국민연합공동의장)함석헌(국민은행공동의장) 김대중(국민연합공동의장) 안필수(통사당 위원장) 김철(통사당 고문) 김수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장) 이희성(계엄사령관) 11명에게 남북대화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1980112일에는 북한총리 이종옥이 신현확 국무총리에 총리회담을 제의해 왔다. 이에 따라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226일부터 열려 515일까지 9차례에 걸쳐 연속됐다. 이 모든 것은 내부교란을 획책하면서 한국의 주요 인물들의 관심을 안보분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평화공세는 1980827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갑자기 중단됐다. 남한에 권력 진공상태가 발생하자마자 위장 평화공세를 취하여 남한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어놓다가, 남한에 강력한 지휘체제가 확립되자 위장공세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고 평화공세를 중단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야세력은 일방적으로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재세력으로 규정하고, 최규하 정부는 북으로부터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며 대학생들을 선동해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과도정부를 즉각 해체하고 전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당시 최규하 정부는 유신체제를 계승할 자세를 보였는가? 아니었다.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발생했던 시국사범들에 대해 일제히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재야세계에서는 이를 서울의 봄이요 민주화의 봄이라며 매우 기뻐하면서 승리감에 도취했다.

 

재야세력이 퍼트린 유수한 유언비어가 나돌 때마다 최규하 정부는 헌법을 빨리 고치고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가 최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다짐해 주었다. 이렇듯 민주화 요구에 적극 호응하던 최규하 정부를 놓고 유신체제의 후신이기 때문에 즉각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자는 재야세력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 주장이었는가? 당시 물렁하기로 이름나 있던 최규하 정부가 독재정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도 최규하 대통령을 바지대통령이라고 판시했다. 최규하 정부가 유신을 이어받아 독재를 할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오직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최규하 정부를 유신을 이어갈 독재정부라고 주장해 놓고, 이제는 전두환을 매장시키기 위해 최규하를 껍데기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광주사태 기간 중의 북한동향

 

518일에 일어난 광주 시위사태가 점차 확대되어 전라남도 16에도 치안부재의 무정부상태가 되는 혼란이 일어나자, 북한은 심상치 않은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전국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된 517일 심야와 광주 시위사태가 발생한 518일에 연이어 기관 고위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국내정세를 검토하고 통일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인민군은 518일에 전군 연대장급 이상 전원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의 정세를 평가한 후에 유사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519일에는 북한 전역에 걸쳐 군수물자 동원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 점검했다. 5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군사대표단장 백학림 중장이 북한은 통일을 위하여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공언했고, 521일에는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군인의 외출과 출장을 일체 금지시키는 한편 출장 중인 군인과 당원을 527일까지 귀대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은 또한 520일에 통혁당과 19개 사회단체 연합 성명을, 그리고 521일에는 통혁당 전라남도 위원장 명의의 담화문을 통하여 광주시위 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성전”“평화적 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이라고 고무하면서 노동자, 청년 학생, 지성인, 계엄군 장병은 영웅적 투쟁에 합류하라고 선동했다. 521일에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연 것을 기점으로광주 반정부투쟁을 지지 성원하는 군중대회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광주사태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후방에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988.6 안전기획부 작성광주사태 관련기본자료”).

 

10·26사태는 결정적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1979113호청사 부장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 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7912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 에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 198053호청사 부장회의)

 

3)계엄사 114p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791027,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를 지시했고, 10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4) 515일 서울역앞 시위대 규모가 10만을 넘자 김대중은 잔뜩 상기되어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57일자 제1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에서 요구한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신현확내각의 즉각퇴진, 정치범의 전원석방 및 복권, 언론의 자유보장, 유정회, 통일주최국민회의와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 해체 등에 대하여 519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5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김대중은 또 반정부 투쟁 방침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민주 애국시민은 유신체제를 종결짓는 민주투쟁에 동참하는 의사표시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다. 비상계엄은 무효이므로 국군은 비상계엄령에 의거한 일체의 지시에 복종하지 말 것이며,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하고, 전 국민은 민주화투쟁을 용감히 전개한다.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중소상인, 민주애국시민은 522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단 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

 

국민연합에 의한 516일의 2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522일을 기해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이는 대규모 폭력시위의 기세를 믿고, 과도정부를 얕잡아 보면서 협박성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이해됐다. 당시 수세에 몰렸던 과도정부로서는 그야말로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정국은 정부가 붕괴하느냐, 김대중이 붕괴하느냐에 대한 최후의 결전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탈북인들의 증언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5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10-1662)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216,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6-12)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8-16)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25811)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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