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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보는 이유(앵콜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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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7-12 17:41 조회4,2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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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리 분석의 동기

노무현은 대한민국을 마음껏 파괴하고 간 사람이다. 전 사회적으로 그는 자살을 한 것으로 깊이 인식돼 있다. 대한민국을 적대시한 이적행위자가 죽었으면 됐지, 왜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아까운 시간들을 소비하면서 자료를 찾아내고 정리를 하고 분석을 하는가?

그 첫째 이유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는 필자의 생리(DNA)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 이유는 간첩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이한영을 간첩이 사살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 다음은 정몽헌, 그는 대북사업을 비밀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으로 검찰 조사에서 추궁을 당하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고비에 처해 있었던 사람이다. 바로 그 때 그가 자살을 했다고 했다. 아래에 그 이유를 짚어 보았지만 필자는 그가 타살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가 없어져 줘야 한다는 것이 타살의 동기라고 생각해 왔다. 이한영과 정몽헌은 비밀유지를 위해 타살됐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

반면 용도폐기용 타살도 있을 것이다. 박헌영은 김일성에 충성했지만 김일성은 장차 그가 김일성 권위에 위험요소로 성장할 것이 두려워하여 간첩죄를 씌워 죽였다. 필자는 혹시 노무현도 이런 용도폐기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노무현이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실질적인 도움을 북한에 주었다. “달라는 대로 다 주어도 남는 장사”라며 5조 이상의 돈을 퍼주었고, 10.4선언을 통해 13조라는 돈을 더 퍼주기로 했고, 연합사 해체 등을 통해 한국의 안보를 허물었고, 사회 좌경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북한 측에서 보면 역사 이래 최고의 영웅표창을 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런 공로를 이룩한 그를 만일에 북한이 기술적으로 살해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용도폐기,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한 공산혁명에 그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수의를 입으면 한국에서 좌익들이 설 자리를 잃어 공산혁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필자가 짚어본 미스터리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개연성을 뒷받침하고 얼마간의 설득력이 있다면 이 땅에서 깊은 생각 없이 친북세력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일대 무서운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으로 대한민국 수호세력에게는 패망직전의 월남에서처럼 애국자들이 의문사를 당할 수 있다는 데 대한 경보음도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스터리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투신과 관련한 사진들


           노무현 집 바로 위가 부엉이 바위


                              추락지점


      

       노무현을 쌀자루처럼 메고 갔다!


    등산로


                           정토원 가는 길




  능선 3거리에서 부엉이바위로 올라가는 길(목교 폭 1m. 길이2m)


                               40도 가파른 등산로


                   5.23일 경찰발표와 5.27일 발표 도식화





                           최종 발표된 경로
               
                   
                      노무현 의문사의 개요

2009년5월23일(토) 새벽 노무현은 사저가 바로 코앞에(200m) 내려다보이는 부엉이바위에서 자살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경남경찰은 그렇게 하지 않고 처삼촌 벌초하듯 끝내버렸다. 현장을 보존하고 즉시 국과수를 불러 현장검증을 하게하고, 부검을 하게하고, 관련자들과 목격자들을 철저히 수사해야 했지만 웬일인지 1차 브리핑에서 현장검증은 장례식 이후로 미룬다고 발표를 했다. 비가 오면 피가 모두 씻겨 없어지면 현장조사의 완벽성이 결여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경찰이 더 잘 알 텐데도 이렇게 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병춘 경호과장 단 한 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경호원이 단 1명이라는 데서부터 의문이 생긴다. 나가면서 양복을 입었는지 등산복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등산화를 신고 나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동네 등산이지만 양복차림에 등산화라는 것도 어색하다. 경찰은 양복을 입었다했고, 노무현과 마주서서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는 마늘밭 주인 박영철씨는 등산복을 입었다고 했다.

몇 달 동안 노무현의 집을 빽빽하게 둘러쌌던 보도진들도 어쩐 일인지 그날만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날은 권양숙이 검찰 조사를 받는 날로 알려져 불꽃 튀는 취재가 예상되는 날이었다. 가장 의심되는 것은 이병춘의 횡설수설과 지방경찰의 조사태도였다. 유일한 증인인 이병춘이 조사 때마다 말을 4차례나 바꾸었고, 경찰은 오직 이병춘의 말에만 의존하여 조사결과를 브리핑했으며, 그 브리핑 내용은 이병춘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에 불과해 보였다. 말을 바꿀 때마다 경찰은 이병춘을 마치 데려온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경호를 잘못한 데 대한 처벌을 받을까봐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이리저리 둘러대는 것에 불과하다"며 이리 묻고 저리 감쌌다.

자살이라는 결론은 5월23일 낮, 컴퓨터 저장됐다는 유서에 자살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병춘의 진술, 이 두 가지에 의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병춘의 말은 횡설수설하여 믿을 수가 없고, 컴퓨터 유서에도 의문점이 많다. 유서의 내용이 노무현답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들이다. 해탈한 고승이 써준 불경의 냄새가 나며 종이에 쓰지 않고 컴퓨터에 썼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종이에 쓰지 않은 유서는은 신뢰성이 낮다. 컴퓨터 유서라면 집안의 비서관 등 남들이 얼마든지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자살을 각오하고 나가는 사람이 유서를 저장하자마자 군사적전 하듯이 뛰어나가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다. 그래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기에는 그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6월5일, 경찰은 노무현이 집에서 나가는 장면을 담았다는 비디오를 공개했다. 그런데 그 비디오에는 시각이 표시되지도 않았고, 뚝뚝 끊기고 영상도 희미한데다 영상들이 이어지지 않고 메뚜기처럼 툭 툭 튀는 것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날 그 시각에 찍은 것인지도 믿기 어렵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다 해도 의혹이 크다. 그 동영상을 본 일반 아낙네들이 입을 모은다. 동영상을 보니 의문이 풀리고 확실히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경호관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노무현의 모습이 경호관과 똑같이 활력 넘쳐 보였으며, 도로가에서 풀까지 뽑는 모습은 도저히 죽으러 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살하러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울 텐데 길가의 풀이 보이겠느냐는 것이다.“저 모습은 자살하러 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이런 결론들인 것이다.

우리는 2003년 8월4일, 새벽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는 현대 건물 12층에서 추락해 자살했다고 했다. 그는 박지원, 임동원과 함께 검찰의 추궁을 받고 있었으며 검찰에 모든 걸 밝힐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바로 그 때 그가 5장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나마 5장 가운데 마지막 한 장은 없어졌다 한다. 유서는 마치 무엇을 베껴 쓴 것처럼 휘갈겨 썼고, 격에 맞지 않는 내용들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김윤규사장에게 눈을 찡긋거리지 말라는 농담까지 있었으며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주고 금강산 사업은 반드시 계속하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그가 떨어진 12층 사무실에 있는 창문은 45도 정도 위로 젖히는 창문이고, 가로 90cm, 세로 37cm 였다 한다. 외상도 전혀 없었고, 구두는 신겨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극히 비좁은 공간으로 재벌회장이 투신자살을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이었다. 죽는 데에도 최소한의 품위는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때도 수사는 쉬쉬하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사에 대한 심층보도도 별로 없었다. 떨어졌다는 그 나무도 며칠 후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었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주 나중에 월간조선이 특정지역 건달 5명이 해치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선에서 매듭 되었다. 비밀의 누설을 예방하기 위해 누군가가 해치웠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경남경찰의 최종발표

이병춘의 말에 따라 오락가락하던 경찰이 5월27일 사실상의 최종수사결과를 브리핑했다. 이는 조선일보에 의해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조선일보 기사
          
5.27일 경남지방경찰청 이노구 수사과장이 발표한 중간 수사결과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당일 행적을 재구성하면 노 전 대통령은 5.23일 오전 5시44분 사저 내에서 유서 파일을 컴퓨터에 최종 저장한 후 "등산 나갈게요"라며 인터폰으로 이 과장을 나오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오전 5시47분 사저 앞에서 기다리던 이 과장과 만나 산행에 나섰다. 이 사실은 사저 앞 CCTV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노 전 대통령은 등산로 입구 부근 마늘밭에서 만난 주민 박모(63)씨에게 "일찍 나왔네. 마늘 작황이 어떻노?"하고 물었고(5:55), 박씨는 "작황이 좋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등산로를 따라 봉화산에 들어선 노 전 대통령은 봉화산 부엉이바위 위쪽에 있는 불교 사찰인 정토원 쪽으로 올라가다 정토원에서 110m 떨어진 '봉수대 0.37㎞'라는 이정표 부근에서 동행한 이 과장에게 "힘들다. 내려가자"고 말하고 부엉이바위로 향했다. 이때 이 과장은 사저에 있던 신모(38) 경호관에게 "하산하신다"는 무전을 날렸다. 오전 6시10분 부엉이바위에 도착한 노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에 요즘도 부엉이가 사나? 담배 있는가?"하고 물었고, 이 과장이 "없습니다. 가져오라 할까요?"하자 "아니 됐어요"라고 말했다. 또 폐쇄된 등산로에 사람이 다니는 흔적을 발견, "폐쇄된 등산로에 사람이 다니는 모양이네"라고 했고, 이 과장은 "그런 모양입니다"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에서 뒤쪽으로 5m 정도 떨어진 묘지 옆 잔디밭에 앉아 "정토원에 선 법사가 계신지 보고 오지"라고 했고, 이 과장이 "모셔올까요"라고 되묻자 "아니, 그냥 확인만 해보라"고 했다. 이 과장은 바로 정토원으로 뛰어갔다. 이 시간은 6시14분으로 추정된다. 이 과장은 부엉이바위에서 247m 떨어진 정토원으로 뛰어가 선 법사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부엉이바위로 뛰어 되돌아갔다. 노 전 대통령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 과장은 휴대전화로 사저 경호동에 있던 신 경호관에게 "심부름 다녀온 사이 대통령님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서 내려오시는지 확인 좀 하라"고 했다. 이 과장이 휴대전화로 전화한 시각은 오전 6시17분이다. 다급해진 이 과장은 마애불 부근 등지로 노 전 대통령을 찾아다녔으며, 사자바위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에 정토원 요사채 앞에서 선 법사를 만났다. 선 법사가 "무슨 일이지? VIP(노 전 대통령) 오셨어?"라고 묻자 "아무것도 아닙니다"고 대답하고는 뛰어 부엉이바위로 되돌아갔다.당시 인근 3초소에 근무하던 전경은 이 과장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부엉이바위에 온 장면을 목격했다(6:10-14분). 전경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느라 잠시 시선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바로 이때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6월5일의 최종 수사결과 발표의 비논리성

 


경찰은 52초 분량의 cctv를 공개했다. 그런데 cctv에는 날짜와 시각이 표시돼 있지 않아  기자들에 의해 의혹이 제기됐지만 국민을 향한 공개적인 해명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화면은 5월22일, 노무현-권양숙-노건호 3인이 정원을 둘러보는 장면, 5:47분 경호관과 인사 나누고 출발하면서 길가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는 장면, 흰 차가 추락한 노무현을 태우고 가는 모습으로 구성됐다.

노무현 집으로부터 등산로 입구 못미처 우측에 있는 박영철씨의 마늘밭까지는 평평한 마을도로이며 250m정도 돼 보인다. 집에서 등산로 입구가지가 271m라 한다. 아고라 팀들이 자체 시민수사팀을 만들어 답사한 바에 의하면 집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보통의 도보속도로 1-2분 걸린다 한다. 노무현과 박영철씨가 대화를 시작한 시각은 5:55분, 그러니까 1-2분에 걷는 거리를 8분에 걸어왔다는 뜻이 된다. 노무현은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그날 처음으로 나갔다 하니 보행속도가 빠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화시간을 1분 정도를 잡는다면 노무현이 마늘밭을 출발한 시각은 5:56분이 될 것이다.  경찰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여기에서부터 그날 노무현이 걸었던 거리는 382m 정도가 된다. 마늘밭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20m 정도 된다. 등산로 입구에서 산등성이에 있는 T자형 3거리까지의 거리는 208m, 이 길은 사진에서 보듯이 경사 40도 동도의 매우 가파른 계단길인 모양이다. 능선 3거리 Junction에서 우측으로 137m를 가면 정토원이 있다. 이 길 역시 가파른 계단길이다. 3거리 Junction에서 좌측으로 목조다리를 건너 80m가면 부엉이바위가 있다.

노무현은 이 3거리 3거리 Junction에서 정토원 쪽으로 37m를 가다가 다리가 아프다며 되돌아와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는데 도착시각이 6:10분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이 5:56분에 마늘밭 주인과 헤어져 부엉이바위에 도착한 6:10분까지 14분 동안에 걸은 총 거리는 20m+208m+37m+37m+80m=362m가 되는 것이다. 가파른 산,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 362m의 거리를 여러 달에 걸친 칩거와 고민으로 허약해졌을 몸으로 단 14분 만에 주파한다는 것은 공수특전대 용사들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더구나 노무현은 통상 1-2분 걸리는 등산로입구까지의 평지 250m를 8분에 걸쳐 걸었다. 그날 노무현의 건강은 이 정도로 약화돼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느릿느릿 걷던 사람이 가파른 등산길에 접하자마자 공수부대 요원처럼 날라 다녔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더구나 뉴스에는 부엉이 바위를 감시하는 3초소 초병이 노무현과 경호관이 부엉이 바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으며, 본 시각은 6:20분이라 한다. 아마도 이는 상황일지에 적혀있는 자료일 것이다. 노무현의 건강으로 보나, 가파른 계단식 등산로의 이동 거리 362m로 보나, 6:10분에  부엉이바위에 도착했다는 것은 신뢰성이 아주 낮아 보인다.    

노무현이 입은 옷은 콤비 양복, 상의는 회색이었으며 여기에 등산화를 신었다 한다. 경찰은 5월24일 최초 브리핑에서 현장검증은 장례식 이후로 미룬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추락지점에는 혈흔이 안 보인다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그 후 경찰이 여러 날에 걸쳐 현장조사를 했고, 그 결과는 이렇게 발표됐다. [현장 나뭇잎에서 혈흔 2점, 이정표에서 1점, 옷과 등산화에서 31점 총 34점이 발견됐고 양복의 목 부분이 ㄴ자로 찢겨져 있었다. 부엉이 바위의 높이는 40.4m. 노무현의 투신시각은 6:14-17분, 이병춘 경호관이 추락한 노무현을 발견한 시각은 6:45분]. 약 30분 정도 누워있었던 그 자리에는 피가 많이 고였을 터인데 며칠에 걸쳐 어렵게 찾아낸 혈흔이 불과 2점(콩알사이즈?)이라니 이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6:17-45분(28분) 사이 이경호관은 신경호관과 여러 번 통화를 했다는데 뉴스 보도내용과 경찰의 최후 발표가 맞지 않는다. 뉴스 보도에는 6차례의 핸드폰 전화와 3차례의 무선교신(무전기)이 있었고, 무전교신 내용에는“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통화내용이 있었고, 이 통화내용 때문에 경찰은 추락 당시 이병춘이 노무현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단서를 잡아냈고,  그래서 이병춘을 다시 조사했다고 했다. 첫 조사에서 이병춘은 이렇게 진술했다 “6:20분에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고, 25분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기 사람이 가네하면서 이병춘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한 후 6:45분에 뛰어내렸다.”그리고 그 다음날 경찰은 이병춘의 이 거짓(?)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고 발표를 했었다.        

그런데 6월5일의 최종 발표에는 무전기 사용 1회, 핸드폰 사용 3회인데 통화내용은 모두 지워져 있다고 발표했다. 무전기는 6:45분에 단 한번 사용됐는데 “사고가 났으니 차  대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무전교신은 무엇이었다는 것인지 이해가지 않는다. 최종발표에는 이병춘과 신경호원 아시의 통화가 아래와 같이 정리돼 있다.

6:17분 핸드폰 통화: “심부름 다녀온 사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서 내려오시는지 확인해라”
6:23분 핸드폰 통화: “찾았나. 안 보이나?”
6:30분 핸드폰 통화: “저수지나 연못 가에 찾아봐라”“정토원으로 가 보시죠” “가봤더니 없더라”
6:45분 무전통화: “사고 발생했으니 차대라”

통화내용은 지워져 있다니까 위의 정리내용은 이병춘과 신경호관의 진술에 의해 작성됐을 것이다. 여기에서 의혹이 가는 것이 많이 있다. 두 경호관이 빠르고 간편한 무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느리고 복잡한 핸드폰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경호의 기본 도구는 무전기다. 귀에 리시버를 꽂고 있기 때문에 무전기의 버튼만 누르면 리시버로 들으면서 금방 상대와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전기는 경호용 최신 장비이며 공용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런데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뚜껑을 열고 단축키를 누르고 신호 가기를 한참 기다리고 귀에 꽂은 리시버를 빼야 한다. 이렇게 느리고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 핸드폰을 그 다급한 시각에 구태여 사용했던 목적이 무엇일까? 거기에 더해 통화내용도 모두 지워져 있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대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 의혹도 짙은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병춘이 6:17분 최초 노무현을 놓쳤다는 바로 그 시각에, 사저 근무요원들 전체에 비상을 걸지 않고 그것도 핸드폰으로 신비서관에게만 나오라 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6:17분, 다급했을 때의 통화에서 있었던 말로 보인다. 놓쳤다”는 말은 누구를 추적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지, 감히 ‘각하’에 대해 쓰기에는 심히 불경한 용어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병춘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노무현을 느슨하게 포장된 쌀자루처럼 어깨 위에 메고 바위 밑으로부터 녹음이 우거진 비탈 산을 타고 평평한 지점에까지 66m를 걸어왔다는 사실과, 업고 오는 도중 사고지점으로부터 11m 되는 지점에 상의가 벗겨져 땅에 떨어져 있었고 등산화 한 짝도 벗겨져 있었다는 몇 개의 사실이다. 어깨에 들러 업고 오는데 상의가 저절로 벗어졌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말이 된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등산화가 벗겨진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경찰은 이동춘의 옷에 혈흔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발표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죽으면 유일한 동행자인 이병춘이 의심을 받는 것은 상식이다. 10년 이상 된 경력 높은 경호과장이라면 노무현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곧바로 여러 사람들에게 비상을 걸어야 쉽게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다. 사저에 비상을 건 다음 119와 경찰을 불러야 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도 상식이다. 추락한 부상자는 119에 의한 응급조치 대상이지 경호관이 가슴을 눌러댈 일은 아니며, 더구나 물건처럼 둘러메고 다닐 대상은 아니다. 이는 아마도 고교생까지도 아는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경호과장이라는 사람이 추락해 있는‘각하’를 쌀자루처럼 둘러메고 녹음의 산속을 뚫고 내려와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갔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런 것을 초기에 알았던 경찰이 부검도 하지 않고 국과수도 부르지 않고 시체부터 태웠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경찰은 이병춘의 둘러내는 거짓말들을 그때그때 중계방송을 했다. 처음에는 투신할 때 그가 대통령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바위 밑으로 내려가서 등산객을 다른 데로 보내고 오니 사라졌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심부름을 간 사이에 사라졌다고 했다. 경호관을 보았다는 사람은 동네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을 찾아 어느 이경호관과 신경호관 두 사람 중 누구를 보았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그렇게 했다는 뉴스는 없다.

노무현은 한번에 팍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2차 3차 공중을 낙하하면서 바위를 때렸던 것으로 보인다. 마늘밭과 고추밭은 모두 등산로 입구 근처에 이웃해 있다. 고추밭은 더 높고 추락지점에서 가까우며, 마늘 밭은 지대가 상대적으로 낮고 조금 더 멀리 있다 한다. 그 때는 박영철씨와 고추밭주인 이기우씨 부부도 일을 하고 있었다 한다.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고추밭 주인(이기우)은 '툭' '탁' '쿵' 3번의 소리를 들었다 했고, 그보다 소리가 덜 들리는 마늘밭 주인은 “쿵 쿵” 두 번의 소리를 크게 들었다고 했다. 정토원 관계자는 노무현의 뒷모습을 정토원에서 보았다고 했고, 초기 뉴스들은 노무현이 부모의 위패가 모셔진 법당에 가서 인사를 고하고 마음을 정리했다고들 했다. 

              뉴스들에 나타난 내용들과 인터넷 의혹들              

1. 암벽에서 자살을 하려면 무의식적으로 먼 곳을 보면서 최대한 멀리 뛰어 내린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리면 바위에 닿는 순간 뼈가 부서지면서 장기가 파열된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장기는 파열되지 않았고, 다리 대신 양팔의 부러졌고, 두개골 골절 등 두부의 손상이 사망원인이었다 한다. 전면은 비교적 깨끗하고 척추부분에 가해진 충격이 컸고, 머리도 뒷부분이 많이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사들을 뽑아 보았다.  

                                   한국경제

봉하마을 주민인 이모씨(60)와 김모씨(58) 부부는 5월 27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고추밭에서 일하던 중 '툭' '탁' '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며 "그때는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무엇이 떨어진지 알 수 없었지만 새벽이라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이씨 부부는 사건 발생 당일 오전 5시50분께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추밭에서 밭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김씨는 "남편은 농약을 치고, 나는 김을 매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남편 이씨는 "두 번 정도 제법 큰 물체가 땅바닥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며 "하지만 비명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또 이 신문에 따르면 이씨 부부는 아침 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경호관이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씨는 "부엉이 바위 밑에서 한 남자가 또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지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며 "그때는 그들이 대통령과 경호관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이날 3명의 경호관이 부엉이 바위 밑에서 노 전 대통령 수색작업을 했다는 발표와는 다른 대목이다. 이들 부부는 "집에서 나와 밭일을 시작하는 데 걸린 시간이 길게 잡아도 10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며 노 전 대통령 투신 시점을 '6시10분에서 20분' 이내로 추정했다. 또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을 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시간은 6시30분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해냈다. 밭일을 끝내고 귀가한 시간이 6시30분 전이었다는 주장이다.(기사 끝)

시각도 제각각이지만 충격은 2-3차례 크게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멀리 뛰어내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팔로 1차 충격을 막으려 하다가 몸이 다시 떠서 제2차 3차의 충격을 발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양팔이 부러진 것은 1차 충격을 막으려다 부러진 것으로 해석된다. 암벽에서 구른 사람이 왜 하필 머리 정상부분에 11cm 정도의 찢어진 상처를 남겼을까? 

                              조선일보

“5월 23일 오전 6시50분쯤 추락” 머리에 큰 상처, 김해 세영병원으로 이송,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즉시 부산대 양산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전 9시30분 숨졌다. 문재인은 5시45분께 사저에서 나와 봉화산에서 등산을 하던 중 오전 6시40분께 바위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인다.  8시13분께 병원에 도착했으나 상태가 위중해 9시30분께 서거하셨다"

백승완 부산대병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직접 사인은 머리 손상이라고 밝혔다. 백 병원장은 이날 오전 11시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8시 23분쯤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도착 당시 의식이 없었고 자가호흡도 없었다. 두정부에 11㎝ 정도의 열상이 발견됐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회복이 안돼 오전 9시30분 중단했다" 백 병원장은 "뇌좌상이 확인됐는데 두부 손상이 직접 사인으로 확인됐다"고 말하고 "이외에도 늑골 골절, 골반 등 전신에 다발성 골절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기사 끝)

2. 경남지방경찰청은 이렇게 발표했다. "수행 경호과장이 사고 직후 무전 등으로 문모 비서관에게 연락했고 문 비서관으로부터 다시 연락받은 박모 비서관이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유서를 처음 발견했다." 경찰은 유서를 발견한 박 비서관이 유서를 발견한 시간이 오후 1시라고 발표했지만, 유서가 있다는 보도한 언론들은 많이 있으며 이들 언론들의 뉴스를 게시한 시각은 10:13분부터 11시 사이로 나타나 있다. 대통령이 암벽에서 추락했다는 무전을 듣고 대통령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부터 확인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3. 젊은 사람이 실족을 해도 즉사를 할 만한 암벽에서 63세의 노인이 자살을 하려 뛰어 내렸는데 척추가 멀쩡했다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4. 부엉이 바위 쪽을 감사하는 경비3초소의 전경 1명이 오전 6:20분에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했다. 이 6:20분은 객관적 자료일 것으로 보이지만 경찰은 6:15분을 전후해 뛰어내렸다고 발표했다.  

5. 노무현은 피범벅이 되어 세영병원에 실려 왔고, 노무현의 피 묻은 상의는 발견이 되었는데 현장에서는 하루가 지나도록 노무현의 혈흔이 발견되지 못했다는 뉴스들이 많았다. 피 묻은 상의는 낙하지점으로부터 1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상의가 이과장이 노무현을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졌을 것이라 말했다. 추락하는 동안에는 벗겨지지 않았고,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일부러 벗기려 해도 어려운 상황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윗옷에 대해서도 보도가 각각이다. 점퍼라고도 했다가 양복이라고도 했다. 노무현과 밭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박씨는 노무현이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보도진에 옷을 보여주었다는 보도는 없다.  

6. 40.4m의 무서운 절벽 바위에서 사람이 뛰어내렸다면 척추와 다리부터 부러졌을 것이고, 온몸의 뼈가 다 절단이 났을 것이라는 게 상식인 모양이다. 그런데 다리는 성하고 척추에 심한 타박이 있고, 정수리에 11cm의 찢어진 상처가 났고, 정수리 상처가 사멍원인이라고 했다. 멀리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머리와 팔로 떨어져 그 판의 힘으로 제2차 비상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7. 천호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5.25일 발표하기를 노무현이 서거 당일(23일) 정토원에 갔었다고 했다. 정도원 관계자도 노무현의 뒷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정토원이란 곳은 부엉이 바위에서 220미터 가파른 산을 더 올라가야 있다. 천호성의 말이 맞다면 노무현과 이병춘 경호관이 정토원에 도착한 시각은 허약해진 노무현의 건강이라면 오전 6:30-50분 정도는 됐을 것 같다. 왜냐하면 경비3초소에 있던 전경 1명이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한 시각은 06:20분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병춘 경호관의 말에 다라 수사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조사 때마다 다른 소리를 했다. 6:10분에 부엉이 비위에 내려왔다는 말도 경호관의 말일 뿐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제3초소 경비원의 상황보고시간과 이병춘이 둘러대는 말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하나? 
                
                             한겨레(6.1)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경호 실패를 숨긴 것과 관련해, 경찰이 노 전 대통령 경호팀에 대한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아무개 경호과장 외에 경호팀 차원에서 이를 숨기려 한 정황을 확보하고, 30~31일 이틀간 경호팀 책임자인 주아무개 경호부장과 서거 당일 근무했 던 경호관 3명 등을 조사했다. 이운우 경남경찰청장은 31일 “경호관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사건의 실체를 은폐하려 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 경호과장 외에 당시 당직근무자 3명을 지난 30일 조사했고, 31일에는 노 전 대통령 경호팀을 책임지고 있는 주아무개 경호부장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 . 경찰은 지난 23일 오전 노 전 대통령 경호팀에서 청와대 경호처에 거짓 보고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낮 12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아무개 경호과장과 함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쉬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요지의 서거 경위를 발표했다. 이는 이 경호과장이 경찰에서 처음 진술한 내용과 같으며, 뒤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경호과장은 이날 아침 6시14분 노 전 대통령의 심부름으로 정토원으로 떠났으며, 31분 뒤인 6시45분이 돼서야 부엉이바위 아래서 노 전 대통령을 찾아냈다. 경찰은 특히 이 경호과장이 정토원에 갔다가 부엉이바위로 돌아온 아침 6시17분부터 6시45분까지 당직 경호관들과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등 6차례의 전화와 3차례의 무전을 주고받은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이 연락을 통해 노 전 대통령 경호팀은 이 경호과장이 노 전 대통령과 31분 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이를 청와대 보고 때 누락했거나 왜곡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남경찰청의 한 간부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경호와 사저 경비를 위해 120여명의 전경이 배치돼 있으므로, 경호팀에서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바로 경찰에 알렸다면 좀 더 빨리 노 전 대통령을 찾아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간부는 “최소한 당직 경호관들은 이 사건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말을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해/최상원 김광수, 황준범 기자 csw@hani.co.kr
       
                      서울신문(5.28)

[노 前대통령 국민장] 경호관은 은폐 시도… 경찰은 부실 수사
      
이 경호관은 사고 당일 이뤄진 경찰의 1차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동행해 오전 6시20분쯤 부엉이바위에 도착, 2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누다 오전 6시45분쯤 투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조사에서 이 경호관은 당일 오전 6시10분쯤 부엉이바위에 도착, 노 전 대통령이 정토원에 가보라고 지시했고 오전 6시17분쯤 다시 부엉이바위에 왔더니 노 전 대통령이 보이지 않았다고 당초 진술을 번복했다.  . .이 경호관은 정토원 방문 여부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했다. 노 전 대통령도 함께 갔다고 했다가 정토원에 자신만 갔다 온 사이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고 했다. 이 경호관은 조사과정에서 정토원 방문 횟수도 번복했다. 당일 오전 6시15분쯤 정토원에 갔다가 부엉이바위에 내려온 뒤, 노 전 대통령이 보이지 않자 오전 6시30분쯤 다시 정토원에 찾아간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 방문은 노 전 대통령의 행방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호관은 말맞추기 시도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날 정토원 원장인 선진규 법사에게 전화를 걸어 “정토원에 내가 갔다는 얘기는 경찰에서 진술하지 않았으니 그런 줄 알고 있으라.”라고 당부하는 등 은폐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목격자·교신·CCTV 조사 안해

경찰의 안이한 대응도 비판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중대사안을 수사하면서 초동 수사 때부터 이 경호관의 진술에만 의존한 채 목격자 조사 및 무선교신 내용, 폐쇄회로(CC)TV 확보 등 수사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1차 조사 브리핑이 있었던 지난 25일엔 이 경호관으로부터 정토원 방문에 대한 진술을 듣고도 발표하지 않았다. 결국 부실수사 논란이 확산되고 나서야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무선교신 내용을 확보해 이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있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경찰이 2차 브리핑을 통해 진실규명 의지를 보였지만 의문점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봉하마을 경호대의 업무수행 적정성이다. 이 경호관을 제외한 나머지 경호요원들이 서거에서부터 경찰의 2차 수사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현장에서 어떤 조치를 했는지, 청와대 경호처에는 어떻게 보고했는지 등이다. 경찰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동료 경호관들의 설득으로 이 경호관이 마음을 정리하고 사실대로 진술하게 된 것으로 분석한다고 밝혔다. 이는 경찰수사에 앞서 나머지 경호관들은 이 경호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뉴스한국(5.27)

인터넷서 확산되는 故 盧 전 대통령 타살
이 모 경호관 진술 오락가락…상황 은폐 시도도
[ 이슬 기자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닷새째인 27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 정토원. 이 절은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던 날 경호원이 혼자서 찾았던 곳이다. 사건을 맡은 경남지방경찰청은 지난 25일 2차 수사결과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6시 20분경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 근접경호를 맡은 이 모 경호관과 함께 있다가 45분경에 바위 아래로 투신해 자살했다고 잠정 결론냈다. 사건은 이렇게 종료되는 듯 보였다.

첫 번째 의혹, 이 경호관은 왜 정토원 방문을 숨기려 했나? 이후 노 전 대통령이 부모의 위패가 있는 정토원을 들렀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경호관의 진술은 신빙성을 잃었다. 정토원에 대한 이야기는 선진규 정토원 원장이 입을 열면서 알려졌다. 선 원장은 지난 25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당일 새벽 경호원이 '계시냐"며 나를 찾아왔었다. 내가 VIP(노 전 대통령 지칭)도 오셨느냐고 물었는데 경호관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 원장의 말대로라면 이날 노 전 대통령은 정토원에 오지 않았고, 그를 경호하는 이 경호관만 잠깐 들렀다. 노 전 대통령을 근접경호해야 하는 이 경호관이 왜 혼자 정토원에 왔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선 원장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라는 노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면, 다른 경호원을 불러 확인토록 했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경호관은 경찰 조사가 반복되자 진술을 번복했다. 정토원에 간 사실은 물론 횟수도 오락가락했다. 이 경호관은 첫 번째 조사에서 "정토원 인근 등산로를 지나갔다"고 했고, 두 번째 조사에서 "정토원에 두 차례 갔다"고 말했다. 세 번째 조사에서는 "6시 14분경 노 전 대통령이 정토원에 다녀오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27일 불교방송에 따르면 이 경호관은 정토원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 내가 노 전 대통령 심부름으로 정토원에 들른 사실이 없다고 진술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상 사건은폐를 시도한 것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경찰이 이미 이 경호관의 정토운 방문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27일자 매일경제 인터넷판은 "노 전 대통령의 투신 당시 경호관인 이 모 경호과장이 사건 다음날인 24일 노 전 대통령의 지인에게 괴로워하며 '대통령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내용의 `양심고백`을 했던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지인은 이 같은 사실을 경찰에 알렸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한 것으로 드러나 사건 은폐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또 이 같은 사실을 경호관에 대한 최종 책임기관인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경찰은 이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의 근접경호에 실패한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고의로 숨기려고 한 것이 되지만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의혹, 경호관과 헤어진 노 전 대통령이 서거까지 30분 동안 무슨 일이? 애초 경찰은 이 경호관의 진술을 바탕으로 노 전 대통령이 오전 6시 45분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경호관의 3차 진술에 따르면 그는 6시 14분경 정토원으로 올라갔다.

경찰은 이 경호관이 정토원에서 돌아 온 후 31분이 지나서야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을 발견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경호관은 3차 진술에서 "정토원에 올라갔다가 3분 후 내려온 뒤 등산객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려보내고 나니 노 전 대통령이 사라졌다"고 진술하며 오락가락하고 있다. 어쨌든 이 경호관은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경호관의 30여 분 동안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인 26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화산 일명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경찰이 현장 검증을 벌이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세 번째 의혹, 盧 서거 비슷한 시각 등산객이 만난 리시버 착용한 경호원은 누구? 경찰 수사와 이 경호관의 진술을 토대로 살펴보면 두 사람이 6시 14분경 헤어진 것이 되지만 이후에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등산객에 목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MBC는 마늘 밭에서 일을 하던 주민 박 모 씨가 6시 30분 전후로 두 사람의 모습을 정토원에서 봤다고 한 내용을 보도했다. 이보다 앞선 6시 20분에는 리시버를 낀 경호원과 30미터 가량 함께 걸었다는 등산객의 진술도 이어지고 있다. 목격자 진술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이 경호관의 행적이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이 방송은 이 경호관의 무선 교신 내용 중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언급하며, 이 같은 보고를 하게 된 경위와 구체적인 무선교신 대한 구체적인 수사와 함께 구체적인 교신 기록에 대해서도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한 부엉이 바위 아래 절벽에 혈흔이 발견되지 않는 점도 풀리지 않는 의혹이다. 24일자 서울신문은 손창배 세영병원 내과 과장의 설명을 토대로 노 전 대통령이 도착했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피범벅에 사지가 으스러진 노 전 대통령이 세영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전 7시쯤. 구급차가 아닌 경호실 차량에 비서진과 경호팀이 동승해 이송했다."

4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추락한 노 전 대통령이 세영병원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 신문의 보도처럼 피범벅이 된 상황이었지만 추락지점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네티즌 사이에서는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매일경제는 이 같은 음모설을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혈흔 사진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24일 투신시각과 동일한 새벽 시간대에 현장을 방문해 취재 확인한 결과 노 전 대통령의 혈흔이 뚜렷하게 확인됐다"며 돌 위에 묻어 있는 혈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네 번째 의혹, 盧 시신 이송된 과정…15분 만에 4km떨어진 세영병원까지?

연합뉴스는 경호관이 낙상한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한 후 119 구급대에 신고하지 않은 채 들쳐 엎고 옮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환자를 들것 등으로 안전하게 옮기지 않고, 함부로 옮길 경우 오히려 환자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게 구급 전문가들의 공통된 설명"이라며 "당시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전직 대통령의 안위를 책임지는 경호관이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MBC는 이 경호관이 15분 만에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을 발견해 들쳐 엎은 후 산 아래까지 내려가 김해 세영병원까지 간 과정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세영병원에서 양산 부산대병원까지 옮겨진 경위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남도민일보는 23일자 오전 9시 04분 보도한 기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오전 7시 40분께 김해 세영병원의 앰뷸런스를 타고 마산 삼성병원으로 후송할 계획으로 삼성병원 측 응급실 치료를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돌연 양산시 부산대학병원으로 방향을 급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상의 이유로 세영병원이 운영하는 앰뷸런스를 탄 채 마산 삼성병원 응급실로 갈 것이란 전갈을 삼성병원 측 관계자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삼성병원으로는 오지 않고 양산시로 앰뷸런스 진행방향을 바꾸었으며 오전 9시 현재 양산 부산대학병원 측으로부터 검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다섯 번째 의혹, 박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유서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와 관련한 경찰 조사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서를 처음 발견한 박 비서관이 노 전 대통령의 유서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신문은 한 네티즌의 주장을 빌어 "컴퓨터에 보관된 유서가 그토록 빨리 발견된 점이 의문"이라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유서 전문 중 절반이 누락된 채 나머지만 보도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편 경찰은 애초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마친 후 유서를 발견한 박 비서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곳곳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장례식 기간 중에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경남지방경찰청 고위관계자는 26일 "경호관을 재소환해 조사한 결과 '등산객을 아래로 내려보내고 오니 대통령이 없어졌다'는 진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미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직전 경호관의 기존 진술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이 경호관과 함께 부엉이바위 위쪽에 있는 정토원에 들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 투신 순간 곁에 없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MBC는 이어 수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당시의 무전교신 내용을 분석한 결과 놓쳤다,보이지가 않는다 등의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 라디오코리아 아이리더 제공) 
                2009-05-27 오전 10:39:33 

 
 "경호관 심부름 보내고 투신"…'마지막 30분' 미스터리
盧 전 대통령 투신 직전 행적 전면 재조사 불가피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전후 행적과 관련해 3차례 경찰 조사를 받은 이 경호관은 그때마다 진술을 바꾸고 있고, 경찰은 그의 진술에 의존해 허술한 결과 발표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경호관은 "투신 때까지 함께 있었다"(1차), "정토원에 다녀와 보니 사라졌다"(2차), "등산객을 저지하고 와 보니 사라졌다"(3차)라고 진술을 번복해 왔다.

27일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이운우 경남지방경찰청장은 기자들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이 심부름을 시켜 경호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30분 간 혼자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경호관을 정토원으로 심부름 보낸 사이 혼자 있다가 투신했다는 것.

이 청장은 "통화(교신)기록과 경호관의 진술, 시간대 등으로 미뤄 그렇게 추측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시점을 전후해 이 경호관이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는 무전보고 내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청장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6시 14분께 부엉이바위에 도착해 담배 얘기를 한 뒤 6시 17분에 경호관에게 "정토원 원장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했고 경호관이 "모셔 올까요"라고 묻자 "그냥 확인만 해봐라'고 심부름을 시켰다"고 설명했다.

이 청장은 또 "경호관이 없어진 노 전 대통령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오전 6시 45분"이라며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한 뒤 업고 내려와 차로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덧붙였다.

8. 5.24일의 경찰브리핑에서는 노무현이 정토원에 들렀다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5. 25일, 수사관도 아닌 천호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꼼꼼해 보이는 시간표를 내놓았다. 5:50분 사저출발, 6:20분 부엉이바위 도착, 6:25 부엉이비위 출발 6:30 정토원 입구 도착, 6:35 정토원출발, 6:40 부엉이바위도착, 6:45 투신. 정토원 원장과 정토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의 의중을 살펴보거나 거리와 시간을 따져보면 오히려 천호성 전 수석의 설명이 경찰의 최종발표보다 일견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5.26일 천호성 수석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 당일 봉하산을 오르면서 경호원에게 ‘정토원에 가보자’고 말했고, 두 사람은 6시30분쯤 정토원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경찰발표와 정면 대치된다.

9. “놓쳤다”라는 말이 매우 수상하다.

10. 수사의 초점을 노무현이 경오를 받지 못한 31분에 맞추고 있다. 이것은 수사의 핵심이 아닌데도 경찰은 국민의 관심을 이런 곳으로 돌렸다.

11. 경호원이 5. 23일 오전 6시20분경 봉화산을 등산하던 등산객 중 한 명을 만났다는 진술도 이미 나왔다. "당시 리시버를 착용하고 있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약 30미터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 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대통령이 없어져 찾으러 다니는 경호원이 한가하게 등산객하고 잡담이나 하면서 30미터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인가?

12. 경찰의 최종발표대로 하자면,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했던 63세의 노인이 40.4미터 높이의 암벽에서 자살을 마음먹고 뛰어내렸는데 3시간 동안이나 이리저리 짐짝처럼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사망선고 09:30분). 여기에 더해 노무현은 추락한 상태에서 30분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혈흔을 하루가 넘도록 발견 못 했다? 암벽에서 추락한 허약한 상태의 63세 노인의 직접사인은 두부손상, 그런 상태에서 혈흔이 콩알만큼(?) 나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대목이다.

13. 세영병원을 향해 부상자를 실은 흰색 경호차가 출발한 시각이 오전 6시 47분이라 한다. 경찰은 노무현을 차가 있는 곳 까지 이경호관 혼자 자그만치 66미터를 업고 왔다고 발표했다. 술 취한 친구를 업고 66미터를 걸어가려고 해도 얼마나 힘이 드는데 45미터 절벽에서 추락한 성인남자를 혼자 업고 66미터를 2분 만에 녹음을 뚫고 길도 없는 산비탈을 이동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30분간 피를 흘린 사람을 66미터 혼자 업고 이동했는데  바닥에 피가 안 보인다는 것도 좀 그렇다. 

                                  결 론

노무현에게는 자살의 동기도 매우 높고 타살의 동기도 그만큼 높다. 그러나 투신자살로 보기에는 나타난 증거들과 논리들이 많이 빈약하다. 이병춘 등 경호관들도 숨기는 게 많이 있어 보이고, 경찰도 숨기는 게 많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논리와 증거가 명쾌하지 못한 것이고, 명쾌성의 상실이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책임 문제도 있다. 노무현이 자살을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경호관으로부터 현 청와대 경호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홀가분해 진다. 하지만 타살로 결론나게 되면 노무현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현 청와대와 대통령에게까지 심각한 책임론에 휘말리게 된다.

필자는 현 대통령이 원로들과 의논 없이 그리도 성급하게 가당치도 않은 국민장을 선사했을 때 단순하게 대통령의 경솔함을 탓했다. 하지만 지금 조용히 생각을 해보니 당시에 아고라를 중심으로 해서 강력하게 불고 있던 타살설을 조기에 잠재우기 위해 다급하게 덮어 씌운 이불이 바로 국민장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청와대가 타살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좌파로부터의 모략을 멀리 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판세를 경찰이 읽지 못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청와대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반면 좌파들은 국민장이라는 어머어마한 선물을 가지고 조문정국을 마음껏 확대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손가락질 받던 그들의 수장이 영웅으로 탈바꿈하는 마당에 이 문제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경찰의 적당한 수사는 양쪽 모두를 위해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타살설을 가장 설득력있고 전문적 수준으로 제기했던 사람들은 아고라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틀도 채 안 지난 시점에서 아고라 사람들의 자세가 갑자기 180도 바뀌었다. 그후부터는 타살설을 공격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결국 노무현의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논리에 의해 그 진상이 매몰된 미제의 사건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시국에 대한 각자대로의 판단과 교훈을 얻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다운 국가에서 살고있지 않은 것이다,

                                                                                   분석 끝

2009.6.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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