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 광수 장인숙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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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11-09 15:56 조회1,3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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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 광수 장인숙 미스터리
장인숙에 관한 자료는 나를 고소한 12명의 탈북자들 중 가장 적다.
<언론 인터뷰 내용: 장인숙의 말>
① MBC 1997-09-12 ② [중앙일보] 1997.09.13. ③ 부산일보 2000-03-02 ④
건축사신문, 2014.4.1. ⑤동아일보 1997.09.12
장인숙은 1941년생으로 1997년 9월에 탈북했다. 4명의 아들 중 둘째 아들만 오지 못하고, 3명의 아들이 모두 남한에 왔고, 첫째 며느리와 셋째 아들 약혼녀까지 모두 데려온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셋째 며느리의 부모도 한국에 와 있다.
남편의 성은 정씨, 터널공사를 주로 맡아 진행하던 대좌출신인데 일하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 아들들의 나이가 4살, 7살, 10살, 13살이었다.
정씨의 아버지 정순성씨는 인민경비대 대좌로 복무하다가 78년 9월 사망했다.(⑤1997.9.12. 동아일보).
큰아들(정현, 1965년생으로 추정)은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한 후, 대학1년 때 소련으로 유학을 갔고 – 1990년 8월에 남한 도착, 러시아 출신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생산
둘째 아들(정광, 1968년생으로 추정)은 인민무력부기술종합대학에 다니다가 독일 공군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북한에 잔류
셋째 아들(정용 또는 정룡, 1971년생으로 추정)은아버지의 공과가 인정돼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김정일 친위부대를 키우는 곳이다. -1997년 9월, 어머니와 동반 귀순, 북한에 있는 약혼녀 최씨(1975)를 2,000년에 데려와 양가 가족 참석리에 결혼
막내(정남, 1974년으로 추정)는평양의 일고등중학교에 입학.
첫 아들이 1990년 8월 러시아 유학중 남한에 귀순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이 1990년 12월 말 ‘반역자 가족’이 되어 온성에 위치한 ‘동포탄광’(함경북도 최북단, 아오지 탄광 부근)으로 추방되었다. 그 탄광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원칙화되어 있었다. 1990년 연말에 도착해 잠시 대기하던 중 둘째 아들이 다니던 대학선배가 그 지역 북부지구 탄광청 부청국장인 것을 알고 둘째가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했다. 부청국장은 우리 가족을 탄광으로 보내지 않고 그 대신 취직을 시켜주었다. 당시 내 내이는 50세, 나는 그 사람 덕분에 5년 동안 탄광설계사업소에서 근무하고 정년퇴임까지 하게 되었다. 셋째 아들 정용은 종이공장, 닭공장 노동자로, 막내 정남은 철도 선로원으로 일했다.
1997년 9월 12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은 충격적이다.
『처음엔 현이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으나 93년 여름 그 애가 일본 TV에 통역요원으로 나왔다는 얘길 전해 듣고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 후 제삼국 교포를 통해 현이 소식을 들었고 몇 차례 헌 휴지나 코푼 종이로 위장한 편지를 주고받던 끝에 한국이 좋으니 귀순하라는 권유를 받고 결행했다. 둘째 아들 광(光·30)씨는 함께 오지 않았는데…. 『(울먹이며) 그 애는 최근에 결혼했기 때문에 처가도 걸려 있고 해서 함께 오지 않았다』
<배나TV 방송 내용, 막내아들 정남의 말>
탈탈탈 배나TV
1997년 탈북, 정남 : 평양 추방, 우리가족 멸족당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 [탈탈탈] 229회 1부
•2019. 11. 24.
https://www.youtube.com/watch?v=qCIe3jz4EbY
4~5분: 아버지는 유사시 김일성 동상 등을 피난시키는 임무를 담당하는 건설부대장으로 내가 5살 때 사망했다.
12~18분: 우리 가족이 동포탄광으로 추방된 날은 1990년 12월 27일이었다. 동포탄광은 사실상 정치범 수용소라 당시 국제사회에서 말썽이 돼 바로 이 시기에 갑자기 이전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12월 28일 도착하게 돼 있었는데 눈이 50cm 나 내려 3일 반 만인 12월 31일 오후 2시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수용소는 이미 이전됐다. 소용소에서 우리는 데릴러 나왔던 보위원들은 기다리다가 가버렸다. 온성 군당에서도 다 설 세러 나갔다. 최고의 명절은 신정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호송하던 보위부 사람들은 옹성에서 곧바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보호원 없이 온성역에 도착했다. 1월 3일까지 질서가 없었다. 허술한 틈을 타 둘째 형이 방위사령부 중대장을 하다가 추방된 상태(재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군복을 그대로 입고 청진으로 가서 탄광을 관리하는 북부 부총국장을 만났다. 그는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그분 덕분으로 가족이 탄광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50분: 둘째 형과 형수 사이에 탈북을 놓고 의견이 대립했다. 결국 장보가 밀고해 둘째 형이 보위부에 잡혀 갔다. 그 여파로 어머니와 셋째 형이 보위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3일만에 나왔다. 이 때 나는 중국에 있었다. 막내 아들 소재를 추궁했지만 둘러댔다. 3일이 지나 보위부요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에에 어머니와 셋째 형이 집에다 동네사람들 불러다 사람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도망했다. 브로커가 중대장에게 돈을 줘서 경비 못서게 했고, 물이 깊지 않아 쉽게 도강했다.
중국에서는 숨어 지내면서 형이 보낸 돈으로 열심히 먹어서 북한의 빈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0일 동안 중국에서 잘 먹었더니 체중이 18kg 늘었다. 큰형이 러시아에 와서 한국으로 동행해왔다. 탈북한지 20일 만에 중국-소련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의문점들
1, 큰 아닐 정현이 구소련에서 1990년 8월에 귀순해서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는데 그 가족이 ]‘반역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온성군 동포탄광으로 추방된 시기가 4개월이 경과한 그 해 말경일 수 있는가?
2. 아버지의 임무가 말 할 때마다 다를 수 있는가? 1997년 인토뷰에서 장인숙은 터널공사를 책임지는 대좌였다고도 했고, 인민경비대 대좌였다고도 했다. 그런데 2019, 11. 막내아들 정남은 김일성 동상 등을 유사 시 후송하는 책임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장인숙은 남편이 공사 현장에서 순직했다고 했다. 공사현장에서 순직했다면 안전사고로 순직했다는 이야기일터인데, 이는 대좌(대령과 준장 사이)라는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다. 경비대 대좌나 유시시 동상 후송을 책임지는 부대의 대좌라면 공사현장에서 사망할 일이 없다.
3. 죽어서야 나오는 것이 원칙으로 정해진 탄광으로 보내지는 반역자 가족 4가족을 지역 사무소의 부책임자 지위에 있는 한사람이 빼돌릴 수 있는가? 그 부책임자는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 그 엄청난 모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4. 탄광에서 빼돌려주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장인숙에게 최고급 일자리를 주어 정념퇴직을 시켜 주는 은혜를 베풀 의사와 능력이 있는 것일까?
5. 장인숙은 그 부청국장이 둘째 아들의 대학 선배라 하고, 막내아들인 정남은 그 부청국장이 어머니의 지인이라 하는데 왜 말이 다른다?
6. 큰아들이 남한에 잘 있다는 사실을 1993년 일본TV를 본 지인이 알려주어서 알았다고 했는데 반역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추방된 입장에서 3년씩이나 큰 아들의 탈북사실을 몰랐다는 말인가?
7. 가족이 탄 기차는 12월 28일 도착하게 돼 있었는데 눈이 50cm 나 내려 3일 반 만인 12월 31일 오후 2시에 도착했고, 도착해 보니 수용소는 이미 이전됐다고 했는데 북한이 아무리 엉터리라 해도 폐쇄되는 수용소에 반역자가족을 연행할까?
8. 가족을 호송하던 보위부 사람들은 온성에서 곧바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되돌아갔고, 반역자 가족을 접수하기로 돼 있는 보위원들은 기다리다가 가버렸고, 온성 군당에서도 다 설 세러 나갔다. 1월 3일까지 질서가 없었다고 했는데 이런 삼국지 시대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현상이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갓인가?
9. 허술한 틈을 타 둘째 형은 방위사령부 중대장을 하다가 추방된 상태(재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군복을 그대로 입고 청진으로 가서 탄광을 관리하는 북부 부총국장을 만났고, 그 부책임자가 어머니의 지인이었던 둘째 아들의 지인이었든 상관없이 그 부책임자가 반역자 가족을 이렇게 돌봐주어도 이상이 없는 사회가 북한 사회인가?
10. 둘째 형과 형수 사이에 탈북을 놓고 의견이 대립했고, 둘째 형의 장모가 밀고를 해 둘째 형이 보위부에 잡혀 갔다면, 어머니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을 3일간만 조사하고 자리를 피해줄 수 있는 것인가?
11. 막내가 당시 중국에 혼자 가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의 어느 곳에서 통신 수단 없이 만날 수 있었는가? 왜 혼자 중국에 갔었는가?
12. 강을 건널 때 브로커가 중대장에게 돈을 줘서 경비 못서게 했고, 물이 깊지 않아 쉽게 도강했다고 했는데 중대장 한 사람이 봐주면 철조망, 흔적선, 쇠창 밭 등 장애물과 수많은 경비초소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13. 중국에 20일 동안 숨어 지내면서 형이 보낸 돈으로 열심히 먹어서 북한의 빈티를 벗겨내기 위해 잘 먹었더니 20일 동안에 체중이 18kg 늘었다고 하는데 살이 그렇게 빨리 불어날 수 있는 것인가?
2020.1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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