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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림 팔이 장사꾼 김영순(283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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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3-22 11:06 조회6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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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혜림 팔이 장사꾼 김영순(283광수)

 

 

                       증거 자료 

 

배나tv, [몰랐수다 북한수다]209- 김영순 여사, 북한 정치범 수용소, 요덕 수용소, 장진 광산, 탈북자, 북한, 1호 범죄자, 성혜림 친구

조회수 331,4142016. 12. 15.

https://www.youtube.com/watch?v=JemUGwNfhMw

3810~4300

이상 다인 녹취록에 기재

 

배나tv, [몰랐수다 북한수다]209

00: 1970.10.1. 요덕수용소 정문 도착 (33)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들 0(막내- 사망), 4,7(사망), 9(큰딸),7순이 넘은 부모

 

[탈북자 증언]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코너스넷) 2012.10.5.

https://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9426

 

레이디 경향 20093월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2204

 

무용배우출신 김영순 할머니자유아시아방송 2004-11-17

https://www.rfa.org/korean/in_focus/kim_young_soon-20041117.html

 

불루투데이 2012.10.9.

북한 북한인권[탈북자 증언]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https://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1796

 

[weekly chosun] [김영순의 육필 수기] 체포에서 탈북까지 처참했던 나의 35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02/2009010201012.html

북경기신문(2011.10.9.) 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1):

http://www.bkknews.kr/?m=bbs&bid=m4&uid=3216

 

김영순의 책,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2008.1.15. 서울문학출판부

 

성혜림의 친구였다. -북한민주화위원회 고문 김영순 2009.3.14.

https://blog.daum.net/hanikoo/11860568

 

2009.3.10. 서울상대 제17회 포럼 초청 강연

https://blog.daum.net/hanikoo/11860568

 

RFA, 2018.3.1. 내 인생을 묻은 요덕 수용소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d81ae08c99d-d480c5b4c90db2c8b2e4/askquesiom-02282018151029.html

 

닥터K의 군사학 이야기 2016.2.4. ‘김대중정부가 돌려보낸 거물급 북한 간첩 신광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tx111&logNo=22061818811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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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1937모든 자료

 

                               남편의 행불

 

“197074,남편은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죄명도 생사도 모른다”. (135)

 

“(나는) 수용소에서, 남편이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2009.1.2. 주간조선)

 

남편은 197074일에 체포된 이후 행방불명이 됐고(132), 김영순이 보위부에 취조받으러 끌려간 날은 197081일이었다(17).

 

 

후에 알고 보니 내 남편을 밀고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심광수였다. 심광수2000년에 북송된 비전향장기수였다.

 


2018.3.1. RFA 방송에서는 남편은 신광수의 밀고에 의해 못나오는 수용소에 간지 금년이면 48년입니다라는 기재가 있다.

 

심광수는 신광수의 오기로 보인다. 2016.2.4.닥터K의 군사이야기에는 아래의 기재가 있다. 신광수는 1929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출생했고, 해방과 함께 귀국해 포항중학교에 다녔다. 1948(19)부터 좌익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도피해 보성중학교 4년에 편입했다. 6.25(21) 북한군에 입대하였고, 1954.10.~1960.10. 사이 루미니아아 부카레스트 공대 기계학부에 유학했다. 그 후 1970년까지 10년 동안 북과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71년부터 25개월 동안 인민무력부 정찰국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73년 일본으로 밀입국하여 197713세의 여아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하였다. 1985.2. 서울로 잠입하였다가 체포, 1988년에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99년 김대중이 사면시켜 20009월 김대중에 의해 북송됐다.

 

                                        수용소

 

“197081, 보위부로 끌려가 여러 날 취조를 받았다. 내 나이 34세였다.”(17)

요덕 수용기간:1970. 10.1~1979.1. (주간조선)

 

수용가족: 1970101일 요덕에 수용될 때 내 가족은 7순이 넘은 양부모, 0, 4, 7, 9살 배기 아이들이 함께 갔다. <2016. 12. 15.배나tv 앞 부분>

 

2012.10.9. 불루투데이:연좌제는 해당 정치범을 포함하여 아래로 3대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부모님은 법상 수감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용소에 들어가 고생을 할 내가 걱정되어 자청하여 수용소행을 택하셨다. . 197185일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실 아버지는 나의 생부가 아니셨다. 친자식도 아닌 나를 위해 선뜻 수용소행을 택할 만큼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주간조선: 수용소에 들어올 무렵인 197010월부터 4년간은 생리조차 멎었다.

 

주간조선: 1973년 여름 큰아들 세영이가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간조선: 마지막 보루였던 어머니도 19761영양실조로 세상을 등졌다

 

                            오빠의 정체

 

레이디 경향, 20093월호: 김영순씨의 친오빠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때문에 김씨 일가족은 상위 1% 계층으로 북한 당국의 보호와 김일성의 배려 등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다. 김씨는 일반 북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밍크코트를 서른 살부터 입기 시작했고, 하루에 2번 이상 옷을 갈아입을 만큼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불루투데이(2012.10.9.) 우리집은 인민군 참모장이었던 오빠 덕분에 혁명열사가족으로 평양에 있는 고급군관아파트에 머물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오빠 김창수는 후에 김석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 창군멤버로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정치에 입성하라는 김일성의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 철도 경비대 대대장으로서 인민군에 남아 북한군 창설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빠는 참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였는데 오빠가 공식적으로 북한 혁명열사와 내각 공로자 명단에 등록되게 되어 우리 일가는 혁명열사 유가족으로서 많은 배려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오빠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 훗날 모두 북한의 핵심적인 고위 관료가 되어 우리가족도 자연스레 혜택을 얻곤 했다.

 

불루투데이: 휴전 전부터 김일성의 종파 숙청의 피바람이 노동당, 인민군, 예술계 등을 휩쓰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의붓오빠김석산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고위 간부들이 숙청당하였는데 세계적인 무용수로 주목을 받던 나의 은사 최승희 선생님과 많은 인민군 고위 간부들이 관료주의, 군벌주의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북창수용소로 끌려갔다.

북창수용소로 끌려갔다.

북경기신문(2011) :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치는 1953727일까지 운영되다.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학원(초대 간부 양성소)출신으로 제3근위 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던 오빠는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투쟁, 6.25참전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 할 수 있었다.

 

 

소결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연안파에 속하며 인민군 창설에 대거 참여했다. 6.25전투를 치렀지만 6.25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58년까지 거의 다 숙청되었다. 조선의용대가 발전해 조선의용군이 되었고, 이들은 연안파로 세력화됐었다. 6.25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숙청된 오빠가 어떻게 혁명열사로 분류되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탈북동기

 

내가 국경을 넘은 것은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2009.1`.2. 주간조선)

 

“20012월에 탈북한 것은 오로지 북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JemUGwNfhMw3810~4300

  

                                 부모

 

아홉살에 부모를 따라 북조선으로 들어온 이래 평생 사회에 충성을 바쳤다” (227)

 

북경기신문(2011.10.9.) : 저의 고향은 경남이고 안동 김씨이며 부모님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중국 심양으로 이사 왔고, 저는 1937년 중국 심양 서탑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그 후 북경, 화북성을 거쳐 1945년 해방이 되자 우리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다. 1947년 임시인민위원회가 선포되기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다녔고, 찬송가도 곧잘 따라했다. 평양 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고, 나남여자중학교 시절 6,25가 발발했고,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치는 1953727일까지 운영되다.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학원(초대 간부 양성소)출신으로 제3근위 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던 오빠는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투쟁, 6.25참전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 할 수 있었다.

 

                               성혜림과의 관계

 

함흥 지역 보위부 직원이 어느날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유언비어다. 어디서 들었다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내가 요덕에 가게 된 까닭이 거기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소 직후 평양을 잠시 방문했던 때 고영희가 성혜림 이후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영희가 김정일의 처가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요덕에서 출소한 시점과 일치했다.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2009/1/2/ 주간조선)

 

“18년 후에나 알게 되었지만 나의 죄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댁(김정일 부인)으로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김씨 집안의 일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극악무도한 죄가 되었다” (22)

 

불루투데이: 나는 해방 직후 평양 최고 명문이었던평양2인민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재학 중 무용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무용과 인연을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10월 말부터는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군 간부 가족들이 중국 동북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리 일가도 회령을 거쳐 흑룡강성 동부의 영안현 세화진 녹도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나는 훗날 김정일의 처가 되는 성혜림을 만났다. 정전 후 나는 전후 문예부문 재건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양종합예술학교에 무용학부로 입학했다

 

80~81: 195010월 전선이 밀려 북한의 간부가족들 후퇴작전의 일환으로 회령에서 무개화차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영안현에 도착한 우리는 중국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중국 농가를 비우게 하고는 우리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식구당 20만원씩의 생활비를 제공받았는데 우리 가족은 3명이었기 때문에 60만원을 받았다. 나는 영안현 송강성 11년제 중학교에 전입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13).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학교들이 속속 개교를 했다. 아버지가 같은 소재지에 위치한 후근(후방근무)가족병원 후방과에 근무함에 따라 나도 이사를 와서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때 동창으로 성혜림을 만났다.

 

주간조선:혜림이와는 1937년생 동갑내기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헤이룽강성 융안현에서 임시로 거주할 당시 11년제 나남여중을 함께 다녔다. (나남은 함경북도 청진시 소속, 군사도시)

 

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1) - 북경기신문

평양 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고, 나남여자중학교시절 6,25가 발발했고,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

 

불루투데이: 정전 후 나는 전후 문예부문 재건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양종합예술학교에 무용학부로 입학했다. 성혜림 또한 동교(同校)에 영화연극학과로 들어와 나와 친분을 쌓아갔다. 평양종합대학 졸업 후에는19569화성리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무용부 전문배우로 입대하여 당대회공연, 국가연회 등 중요한 공연에 주로 참가하였다.

 

주간조선: 출소 직후 평양을 잠시 방문했던 때 고영희가 성혜림 이후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영희가 김정일의 처가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요덕에서 출소한 시점과 일치했다.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불루투데이: 1989년 말에는 함경도 보위부 청사로 소환 당한 일이 있었다. 평양 중앙보위부 고위간부인 반탐국장이 말을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던 중 드디어 나는 20년 만에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은 적이 없으며 그러한 유언비어를 듣거나 퍼뜨렸을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옛 친구 성혜림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이다. . . 1979년 여름에는 올케(김창수의 처)가 힘을 써준 덕분에 9년 만에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이동의 자유는 있었는데 정부의 지시에 의해서만 다른 지방을 갈 수 있으니 실로 종살이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평양에서는 외사촌 언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감사하게도 형부와 언니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평양에서 고영희가 성혜림에 이어 김정일의 다음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소결

 

김영순의 주장 성혜림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동기동창이며 친구였어요. . 김씨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점은 성혜림 이후,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시점과 비슷했다.”

 

성혜림은1951(14) 평양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졸업, 1955(18)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

 

김영순은1950년 중국으로 피난하여 11년제 (나남)중학교에 전입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13). 1953년 휴전 이후 평양종합예술대학에 입학했다.

 

: 김영순이 요덕에 수용된 기간은 1970~79년이다. 김영순은 18년 후인 1988년에야 그가 왜 요덕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