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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뽀 뻥쟁이 김성민(270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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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3-30 23:37 조회1,2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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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뽀 뻥쟁이 김성민(270광수)

 

 

증거자료

 

2012.9월호 월간조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9100028

 

2014. 08. 10 경기일보

[통일 이야기탈북자 1호 시인 김성민

https://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812996

 

2017.05.21. [주간조선암투병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눈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9/2017051902372.html

 

 2020.3.29. 남북통일당(탈북자정당대표 김성민의 정체

김성민(270광수, 본명 김진) 녹취록

왈가왈북tv, 연대 통일학 유영호 박사와 탈북자 홍강철 대화<녹취록>

https://youtu.be/9M10_cVZ5UY

139~2619

 

2001.11.15.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1/11/15/2001111570289.html

2003.2.18. 조선일보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02

 

20038월호 레이디 경향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3277

 

 

김성민 프로필

 

평양 옥류관 인근의 좋은 동네에서 자란 소년 김진(김성민 대표)14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누나 5명 중 첫째와 둘째는 철들기 전 시집을 갔고,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작가동맹에선 살던 집을 내놓으라 했고, 그는 얼마 후 군에 입대했다. “사병생활을 총 10년 동안 했는데, 글을 무지 많이 썼습니다. 시인 김순석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처음 4년간 근무했던 28사단 경보대대는 남한의 특전사와 비슷합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써서 노동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어요.” 입대 6년차 되던 해 사단 본부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라는 명령을 받았고, 후에 군단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몇 해 후 김정일의 명령으로 군단 선전대가 해산됐다. 선전대가 한 연대에 들어갈 부식물을 다 먹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인민군 총정치국 문예창작실로 옮겨 1년간 더 근무하다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에 소속됐다. “글을 꽤 잘 쓰니까 군에서 직접 대학을 추천해 보내주는 겁니다. 비용은 군에서 모두 지원했어요. , 3년간 교육받고 졸업하면 다시 군대로 간다는 조건이었죠. 재담(만담), 사이극(막간극)을 군인교육용으로 제작해 무대에 많이 올렸어요. 한국으로 치면 코미디 작가, 희극 작가였죠. 짬짬이 부업으로 시도 썼는데, <병사의 자서전> 같은 작품은 비슷한 또래 탈북자들이 지금도 달달 외웁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황해북도 신계의 주체포(한국의 자주포) 군단으로 소속됐다. 해산됐던 선전대가 다시 부활해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부대 메인 작가로도 활동했다. 당시 북한은 25개 군단의 선전대가 1년마다 경연을 벌였다. . . 25개 부대 중 12개 부대가 선정돼 김정일 앞에서 직접 공연을 실시했는데, 그는 두 차례 작품이 출품돼 모두 김정일로부터 방침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1년마다 한 번씩 승진해 대위 계급까지 달 정도로 잘나가는군인작가가 됐다.

 

2014. 08. 경기일보,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재능이 남달랐다. 소년은 14~15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혼자 고아로 살다 17살에 군대에 들어갔다. 군인이 된 소년은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3년제)에서 시()를 전공하고, 대위로 조선인민군 212군부대 예술선전대 작가로 복무했다. . (남한에 와서는) 탈북자 출신으론 처음으로 시인으로 데뷔했다. 개인적으로도, 탈북자로서도 큰 타이틀 아닌가. .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하지만 시는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 . 지금은 북한망명펜센터 한국 펜본부가 지원하고 30여 명의 탈북 문인으로 구성돼 있는 북한망명펜센터이사로 활동 중이며 지난해 창간한 탈북 작가들이 만든 문학잡지 망명북한작가 PEN문학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2017.5. [주간조선김성민씨는 1962년 북한 자강도(평안북도) 희천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김진인 그는 시인의 핏줄을 물려받았다. . 시인의 아들인 김성민씨가 평양이 아닌 자강도 산골에서 태어난 이유는 아버지 김순석씨가 1961혁명화 대상자로 낙인찍혀 평양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흔히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쓰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주로 쓴 것이 추방 이유다. . .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성민씨는 17세 때 군에 입대했다. 106개월 동안 사병으로 생활하며 군인잡지에 시를 투고했다. 사병 생활을 끝낸 뒤 북한 최고의 교원양성기관인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군위탁생으로 들어갔다. 투고한 시 덕분이었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김씨는 3년간의 교육을 마친 뒤 장교로 임관해 예술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다. 사령관이나 정치위원의 보고서를 써주고 예술단 공연의 코미디 작품을 쓰는 것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 . 김씨는 한국에 와서도 시인으로서의 꿈을 잃지 않았다. 연세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 뒤 중앙대 예술대학원(문예창작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여름호에 총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탈북민 1호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 김씨는 14(1976)에 양친을 모두 여의었다. . 사병생활을 마치고 찾아온 고향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개인 소유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 북한에선 사람이 살다 죽으면 집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된다. . . “내가 살던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계단을 올랐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2020. 3. 왈가왈복, 96년도에 탈북을 해서 중국에서 한 3년 있다가 99년도에 거기 대한민국에 입국을 해서 그 다음부터 여기에서 반북활동을 쭉 해오고 있는 그런 나름대로 탈북자 중에는 좀 거물이라고 그래야 되나? 이런 사람이에요. . 1974년도에 아버지 김순석 시인이 돌아가시고, 그렇게 하고 집을 회수당했대요. 작가동맹에서 집을 뺏었다는 거죠. 그러면 74년이면 이 사람이 김성민이라는 사람이 62년생이거든요. 그러면 12살 때입니다. . . 그 위로 누이들이 있었고, 누이들 셋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그런 집을 뺏지 못합니다. 그 집은 작가동맹 집이 아니고 국가의 집이거든요. . . 군복무 할 때도 보면 이 사람이 이제 자기 말로는 군에 있을 때 자기 재능을 인정받아서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으로 위탁교육을 가서 거기에서 3년간 공부를 했다 이러는데 어떤 인터뷰에서는 보면 사병 때 갔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 어떨 때는 자기가 총정치국 선전대에 있으면서 거기로 갔다 이런 거고, 뭐냐, 그 간 때, 그 위탁교육 받을 때 지위들이 다 달라요. 그 인터뷰에 따라, 그러니까 좀 의아해하더라고요.. . 그 다음에 지금 이 사람이 아까 총정치국 뭐라 그러지? 총정치국 문예창작실에 있었다 그러는데, 대학도 이게 정식 대학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 정규과정이 아니겠죠, 작가양성반이라면.. 3년이라는 걸 봐서는 정규양성반이 아닙니다. 정규과정이 아니죠. . .

 

그리고 또 하나 집 빼앗는 얘기, 이 사람 인터뷰에 따라 좀 다르더라고요. 예를 들면 월간조선에 인터뷰할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974) 그 다음에 집이 환수됐다 이거예요. 집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자기는 그래서 참 처참했는데 그 다음에 자기가 입대했다. 그런데 또 주간조선에서는 인터뷰할 때는, 몇 년 뒤죠. 한 몇 년 뒤에 주간조선에 인터뷰할 때는 군대 갔다 와서 보니까 집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74년도에 사망을 했는데 74년도면 만 12세인데, 그렇잖아요. . 17세에 군대를 갔는데 집을 빼앗겼다 치더라도 그 시기가 인터뷰 때마다 다 달라요.

2001. 11. 조선일보,. 우리 가족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의 작가 아파트에 살았고, 나는 평양의 명문인 대동문인민학교와 련광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시분과위원장의 아들로 학급반장과 소년단 간부를 연임할 수 있었다. . .아버지와 나의 이같은 권위가 일시에 무너진 것은 19711230, '당중앙의 선물'이 작가아파트의 몇몇 집에 전달될 때 우리 집이 빠지면서부터였다.

 

2003. 레이디 경향, 평양 시내의 한 작가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월급까지 받아가며 시를 썼던 김성민씨(41).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잘나가던 직업작가였다그러나 그가 열다섯 살 나던 해에 부친이 작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졸지에 혼자가 된 것. 위로 다섯 분의 누님이 계셨지만 모두 시집을 간 터라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곧 군대에 입대했다.

 

김성민 프로필에 대한 의견

 

김성민은 1962년생이다. 20038, 레이디 경향에서는 15세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누나가 5명 있었지만 모두 시집을 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2년에는 누나 둘이 미성년기에 출가를 했고, 누나 셋이 함께 살았다고 했다. 2003년에는 평양 시내의 한 작가아파트에서 월급까지 받으면서 시를 쓰다가 남한에서 날아온 전단지를 보고 남한을 동경해 탈북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사병복무 10년을 한 후 3년 동안 작가공부를 한 후 장교가 되어 대위로 근무하다가 일제 악기를 도둑질한 사건으로 탈북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고 했다.

 

김성민은 1962년생이고, 위키백과를 보면 그의 부친은 1972년에 작고했다. 김성민이 10살 때 아버지 김순석이 작고한 것이다. 1974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작가동맹에서 집을 내놓라 하였고, 자기는 17세였던 1979년에 군에 입대하여 10년 동안 복무를 했는데 복무 중에 글을 많이 써서 노동신문에도 기고했다고 한다. 입대 6년차 되던 해 사단 본부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라는 명령을 받았고, 후에 군단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고 했다. 인민군 총정치국 문예창작실로 옮겨 1년간 더 근무하다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에 입교하여 3년 동안 위탁교육을 받고 김정일로부터 인정을 받아 1년마다 한 번씩 승진해 대위 계급까지 달 정도로 잘나가는군인작가가 됐다고 했다.

2014년 경기일보에서 그는 14~15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살다가 17세에 입대했다고 했다. 106개월 동안 사병생활을 끝낸 후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서 3년 간 위탁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해 작품 쓰는 일을 했다고 했다. 14세에 양친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사병생활을 마치고(1989) 집에 와보니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위 내용들에서 중요한 대목은 부모가 떠난 시점, 누나에 대한 말이 말할 때마다 다르다는 점, 17세에 입대했다는 점 그리고 부친이 작고하자 살던 집을 작가동맹에서 내놓으라 했다는 점이다. 그의 부친은 1974년에 작고했다. 이 때 김성민의 나이는 14세도 15세도 아닌 10세였다. 기사를 보면 그의 모친이 언제 왜 작고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2014년에 작가동맹에 집을 빼앗겼고, 17세에 입대했다면 2014년부터 3년 동안 김성민 자신과 3명의 누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본인은 고아로 살았다 하지만 4남매가 누구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인가. 북한에서의 좋은 집은 모두 노동당 소유다. 그런데 작가동맹에서 집을 내놓으라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

 

김형직사범대학은 교원양성기관으로 6년제다. 위키백과에는 이 대학에는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위탁하여 작가를 양성하는 2년제 작가 양성반이 있다.”고 기재돼 있다. 그런데 김성민은 3년제라고 했다. 2012년에는 군사병으로 있었던 시기에 위탁교육을 받았다 했고, 2017년에는 사병생활 106개월을 마치고 난 후에 위탁생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김성민은 시와 작품을 북한 사병생활 10, 장교생활 3(1년에 한계급씩 진급) 게속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자신의 시가 노동신문에도 실렸다고 했다. 김정일이 인정하는 시인이라 소위로부터 대위에 이르기까지 1년마다 진급이 됐다고 했다. 과연 그의 시가 얼마나 우수하길래 그 정도였을까. 그의 대표 시 두 개를 아래에 소개한다.

 

동작대교 위에서

 

다리 위를 걷는다

강물이 비껴간다

잿빛 연기 속에 질주하는 승용차들

어디선가 굴러온 휴지 한 조각이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소리로부터

차창 속 버들거리 눈빛들로부터

피할 길 없는 삶이 야속할 만큼 보고파지는

그리워지는 옥류교 난간에 몸을 던진다

 

나무야

 

영문도 모르는 아픔에 꿈틀거리다가

문득 부러진 나무

없어져 버린 허리 아래 만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반생의 아픔을 안고 있다

 

나는 허공을 움켜잡고

통곡하는 나무였다

속살을 허옇게 드러내고 울던 그 나무

고향 숲- 노래로부터 멀어져간 설움이여

마른 잎 되어 발밑에 쌓여가던 해묵은 관념이여

이제 과거를 믿지 않는 나무는

더 이상 아픈 몸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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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를 보니

아픔도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어의 유희일 뿐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장진성의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비하면

낙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가 탈북한 해는 1996년 만 34세였다. 그런데 그는 그 시점에까지 북한에서 결혼을 했는지, 자식이 있는지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북한측 발표에 의하면 그에게는 처 김명화가 있었고, 딸 김별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김순석) 프로필

(1922.10.28.~1974.12.26)

 

김 대표의 아버지는 더 유명한 시인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김순석(金淳石·1922~1974)황금의 땅등 시집을 출간해 북한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작사한 벼가을 하러 갈 때란 노래는 상당수 탈북자가 가사를 외울 정도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광복 직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1954년엔 소련 작가동맹 초청으로 3년간 소련 각지를 여행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1959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배부른 개인 취미로 시를 쓰는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 자강도 희천의 공작기계 공장으로 좌천됐다.

 

2014. 08. 경기일보,아버지(김순석)70년대 초까지 북한 시단을 이끌었던 서정시인으로 작가동맹 중앙위 초대 시분과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를 지내셨다. 아버지는 3천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셨다.

 

2017.5. [주간조선],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유명 시인 김순석(1921~1974)씨다. 김순석씨는 광복 후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종군 기자로 6·25전쟁을 겪은 뒤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지도교수로 일하면서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차승수, 조빈, 서진명 등을 가르쳤다. 2007문학과 지성사가 출판한 북한 문학의 편집진은 김순석씨를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다고 평가한다. 1958년 낸 황금의 땅이 그의 대표 시집이다.. . 김순석씨는 희천 공작기계공장에서 2년간 일하면서 항상 그이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을 만들어 출판했다. “수령이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내용의 김일성 찬양 시집이었다. 찬양 시집의 내용에 감명받은 김일성이 김순석을 원상 복귀시키라고 지시하면서 1963년 김순석씨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돌아왔다.

 

김순석이라는 사람이 북에서는 유명한 작가이고 자기 아버지라는데 . . 71년도에 다른 작가들은 다 김정일 위원장한테 선물을 받는데 선물을 못 받아갖고 고꾸라졌다, . 왕따, . . 71년도부터 74년도에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인생 말년이 뒤집혔다 이런 식인데, . 71년도면 김정일 위원장이 선물 줄 위치에 있지 않지요. 806차 당대회 때인가 후계자로 인정이 되는 건데. .

 

 

 

2001. 조선일보아버지 는 몇몇 작가들이 다시 '천연색 텔레비전'을 선물로 받던 19741224, 쉰 다섯 나이로 돌아가셨다. 30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003. 조선일보김씨는 "김정일이 작가들에게 보내는 선물을 받지 못한 711230일 이후 아버지의 권위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시 한편 지어내지 못했으며 돌아가신 몇 년 후 박세영 시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자강도로 추방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김성민 부친에 대한 의견

 

1922년에 출생한 김순석은 북한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가 김성민의 아버지라는 증거는 순전히 김성민의 말뿐이다. 김성민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시를 잘 쓴다고 자화자찬하지만 그의 시를 직접 보면 잡문 수준이다. 김순석은 그가 38세였던 1959년 부르조아 시를 쓴다는 사상적 비판을 받아 자강도에 귀양 가 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그는 김일성에 충성하는 시를 써서 1963년 다시 평양으로 귀환해 거기에서 1974(52)까지 살았다. 평양에서 11년 산 것이다. 죽기 3년 전인 1971, 그는 김정일이 다른 작가들에는 선물을 보냈는데 자기만 돌려놓았기 때문에 기가 죽어, 3년 더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1년이면, 김정일이 작가들에 선물을 보낼 그런 시기가 아니었다. 김정일은 1980년 무대에 등단하기 시작했고, 김일성은 1994년에 죽었다.

 

북한이 폭로한 김성민의 정체

 

2020. 왈가왈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