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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고소자 김영순(283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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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04 16:54 조회1,0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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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 김영순 (283광수)

 

1937년생

한국 도착: 2001.1.25.에 북한을 탈출해 2003.11.25.에 한국에 왔다(나무위키에는 2002년 중국으로 탈북)

고소 요지: 5.18 때 나는 장진 금광에 있었다.

총평:김영순의 탈북스토리는 창작된 허구다. 그는 성혜림팔이 장사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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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 자료

 

2016. 12. 15. 배나tv, [몰랐수다 북한수다]209- 김영순 여사, 북한 정치범 수용소, 요덕 수용소, 장진 광산, 탈북자, 북한, 1호 범죄자, 성혜림 친구

https://www.youtube.com/watch?v=JemUGwNfhMw

3810~4300

이상 [다인 녹취록]에 기재

00: 1970.10.1. 요덕수용소 정문 도착 (33)시 동반 인원: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들 0(막내- 사망), 4, 7(사망), 9(큰딸), 칠순이 넘은 부모

[탈북자 증언]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코너스넷) 2012.10.5.

https://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9426

레이디 경향 20093월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2204

무용배우 출신 김영순 할머니자유아시아방송 2004-11-17

https://www.rfa.org/korean/in_focus/kim_young_soon-20041117.html

불루투데이 2012.10.9. “북한 인권[탈북자 증언]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https://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1796

[weekly chosun] [김영순의 육필 수기] 체포에서 탈북까지 처참했던 나의 352009.1.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02/2009010201012.html

북경기신문(2011.10.9.) “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1):

http://www.bkknews.kr/?m=bbs&bid=m4&uid=3216

김영순의 책,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2008.1.15. 서울문학출판부

성혜림의 친구였다. -북한민주화위원회 고문 김영순 2009.3.14.

https://blog.daum.net/hanikoo/11860568

2009.3.10. 서울상대 제17회 포럼 초청 강연

https://blog.daum.net/hanikoo/11860568

RFA, 2018.3.1. 내 인생을 묻은 요덕 수용소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d81ae08c99d-d480c5b4c90db2c8b2e4/askquesiom-02282018151029.html

닥터K의 군사학 이야기 2016.2.4. ‘김대중정부가 돌려보낸 거물급 북한 간첩 신광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tx111&logNo=22061818811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1) 남편의 행불

 

135: “197074, 남편은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죄명도 생사도 모른다”.

 

남편은 197074일에 체포된 이후 행방불명이 됐고(132), 김영순이 보위부에 취조받으러 끌려간 날은 197081일이었다(17).

 

“(나는) 수용소에서, 남편이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후에 알고 보니 내 남편을 밀고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심광수였다. 심광수는 2000년에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였다

 

남편은 신광수의 밀고에 의해 못나오는 수용소에 간 지 금년이면 48년입니다

 

심광수는 신광수의 오기로 보인다.

 

신광수는 1929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출생했고, 해방과 함께 귀국해 포항중학교에 다녔다. 1948(19)부터 좌익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도피해 보성중학교 4년에 편입했다. 6.25(21) 북한군에 입대하였고, 1954.10.~1960.10. 사이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대 기계학부에 유학했다. 그 후 1970년까지 10년 동안 북괴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1971년부터 25개월 동안 인민무력부 정찰국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73년 일본으로 밀입국하여 197713세의 여아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하였다. 1985.2. 서울로 잠입하였다가 체포, 1988년에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99년 김대중이 사면시켜 20009월 김대중에 의해 북송됐다.

 

의 견

 

남편에 대한 김영순의 말은 날짜에 따라 바뀐다. 20081월에는 그의 저서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 남편은 197074,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로 감금됐고, 그 후 27일 만인 81일 자기는 보위부에 취조 받으러 갔다고 했다. 38년이 지난 20081월까지도 남편의 죄명도 생사도 모른다고 썼다. 200912,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는 남편이 국경을 넘다가 총 맞아 죽었다고 했다. 1년 만에 생사가 확인됐다고 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20093월에는 전혀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197713세의 여아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후 1985.2. 서울로 잠입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던 신광수가 남편과 한 직장에서 근무했었는데 신광수가 밀고를 해서 남편이 잡혀갔다는 것이다. 무슨 혐의로 밀고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남편의 죄명을 모른다고 했다가 남편이 국경을 넘다가 총 맞아 죽었다고 했다가 20093월에는 남편이 무슨 혐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광수에 의해 밀고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경을 넘다가 총살당했다는 말은 무효가 되었고, 남편은 죄명도 생사도 모르는 원상태로 환원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광수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대 기계학부를 졸업한 후 1970년까지 10년 동안 북괴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밀봉교육에 차출됐던 과학도다. 남편이 북한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 근무했다면 상당한 엘리트다. 만일 그랬다면 김영순은 벌써 그의 자랑스러운 남편에 대해 이 사실을 그의 책에 썼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녀의 남편은 공학연구소에서 무슨 의심받을 일을 했기에 북한측 애국자에게 밀고를 당했다는 말인가? 20093, 그녀는 이 정보를 어떤 계통으로부터 전해 들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뒤늦게 신광수와 엮어 남편의 신분 상승을 도모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 그녀는 자신을 성혜림과 억지춘향으로 연관을 지어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왔다. 그녀가 요덕에 간 이유가 과연 행방불명된 남편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성혜림과 동기동창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차차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2) 수용소는 왜 갔는가?

 

“197081, 보위부로 끌려가 여러 날 취조를 받았다. 내 나이 34세였다.”(17)

 

요덕 수용기간은 1970. 10.1~1979.1. 이었다.

 

1970101일 요덕에 수용될 때 내 가족은 순이 넘은 양부모, 0살짜리 막내, 4, 7, 9살 난 아이들이 함께 갔다. <맨 앞 부분>

 

연좌제는 해당 정치범을 포함하여 아래로 3대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부모님은 법상 수감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용소에 들어가 고생을 할 내가 걱정되어 자청하여 수용소행을 택하셨다. . 197185일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실 아버지는 나의 생부가 아니셨다. 친자식도 아닌 나를 위해 선뜻 수용소행을 택할 만큼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수용소에 들어올 무렵인 197010월부터 4년간은 생리조차 멎었다. . 1973년 여름 큰아들 세영이가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 . 마지막 보루였던 어머니도 19761월 영양실조로 세상을 등졌다,.

 

의 견

 

남편이 행불된 날은 197074, 그로 인해 자기가 보위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은 날은 약 1개월 후인 81, 자기와 가족들이 요덕에 입소한 날은 취조일로부터 2개월 후인 101일이라 한다. 남편은 반역죄를 지어 다시는 올 수 없는 수용소로 잡혀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영순과 그 가족은 연좌제에 의해 남편이 지은 죄를 함께 져야 한다. 그래서 수용소에 온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김영순은 성혜림을 끌어들여 성혜림팔이를 했다.

 

3) 부모와 의붓 오빠의 정체

 

277, “1945년 아홉 살에 부모를 따라 북조선으로 들어온 이래 평생 사회에 충성을 바쳤다”(2008)

 

저의 고향은 경남이고 안동 김씨이며 부모님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중국 심양으로 이사 왔고, 저는 1937년 중국 심양 서탑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그 후 북경, 화북성을 거쳐 1945년 해방이 되자 우리 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다. 1947년 임시 인민위원회가 선포되기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다녔고, 찬송가도 곧잘 따라했다. 평양 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고, 나남여자중학교 시절 6,25가 발발했고,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치는 1953727일까지 운영되었다.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학원(초대 간부 양성소)출신으로 제3근위 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던 오빠는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 투쟁, 6.25참전 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할 수 있었다.(2011)

 

김영순씨의 친오빠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때문에 김씨 일가족은 상위 1% 계층으로 북한 당국의 보호와 김일성의 배려 등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다. 김씨는 일반 북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밍크코트를 서른 살부터 입기 시작했고, 하루에 2번 이상 옷을 갈아입을 만큼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우리집은 인민군 참모장이었던 오빠 덕분에 혁명 열사 가족으로 평양에 있는 고급 군관아파트에 머물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오빠 김창수는 후에 김석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 창군 멤버로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정치에 입성하라는 김일성의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 철도 경비대 대대장으로서 인민군에 남아 북한군 창설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빠는 참모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였는데 오빠가 공식적으로 북한 혁명 열사와 내각 공로자 명단에 등록되게 되어 우리 일가는 혁명 열사 유가족으로서 많은 배려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오빠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 훗날 모두 북한의 핵심적인 고위 관료가 되어 우리 가족도 자연스레 혜택을 얻곤 했다.

 

휴전 전부터 김일성의 종파 숙청의 피바람이 노동당, 인민군, 예술계 등을 휩쓰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의붓오빠 김석산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고위 간부들이 숙청당하였는데 세계적인 무용수로 주목을 받던 나의 은사 최승희 선생님과 많은 인민군 고위 간부들이 관료주의, 군벌주의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북창수용소로 끌려갔다.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치는 1953727일까지 운영되다. 귀국 사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학원(초대 간부 양성소)출신으로 제3근위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던 오빠는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 투쟁, 6.25참전 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의 견


김영순은 원래의 아버지가 안동 김씨로 경남에 살다가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 심양으로 가서 자기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도 의붓이고, 두 오빠도 의붓이라 하는 것이다. 1937년 자기를 심양에서 낳아 9살에 북조선으로 데려온 안동 김씨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로 금방 사라지고 어디에서 갑자가 의붓부모와 의붓오빠들이 등장하는가? 부모가 바뀌는 전환기의 역사가 공백인 것이다.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연안파에 속하며 인민군 창설에 대거 참여했다. 6.25전투를 치렀지만 6.25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58년까지 거의 다 숙청되었다. 조선의용대가 발전해 조선의용군이 되었고, 이들은 연안파로 세력화됐었다. 6.25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숙청된 오빠가 어떻게 혁명 열사로 분류되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영순은 의붓오빠가 둘이었는데 한 사람은 김석천, 또 한 사람은 김석산인데 김석천은 6.25때 전사해서 친정이 6.25참전 유가족이 되었고, 살아있던 김석산은 숙청되었다고 한다. 연안파 모두가 숙청되는 마당에 숙청 대상자가 전사했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보훈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그리고 김정아와는 전혀 달리 김영순은 자기가 무슨 사연으로 의붓딸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해 일체 설명이 없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김영순이 시집을 갔는데 친정 오빠의 유공자 공로가 여동생인 자기의 시댁에까지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반역죄를 지었으면 시부모가 요덕에 가야지, 어째서 친정 의붓부모가 요덕에 가야 하는가?

 

4) 탈북동기

 

내가 국경을 넘은 것은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2009.1.2)

 

3810~4300,

“20012월에 탈북한 것은 오로지 북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2016)

 

의 견

 

김영순의 탈북 동기도 시차별로 다르다. 2009년에는 한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어서 탈북했다고 했다가 2016년에는 오로지 북한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의 결과였다고 했다.

 

5) 성혜림과의 관계

 

함흥 지역 보위부 직원이 어느 날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유언비어다. 어디서 들었다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내가 요덕에 가게 된 까닭이 거기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소 직후(1979) 평양을 잠시 방문했던 때 고영희가 성혜림 이후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영희가 김정일의 처가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요덕에서 출소한 시점과 일치했다.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2009.1.2.)

 

22, “18년 후에나 알게 되었지만 나의 죄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댁(김정일 부인)으로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김씨 집안의 일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극악무도한 죄가 되었다.

 

80~81: 195010월 전선이 밀려 북한의 간부가족들 후퇴 작전의 일환으로 회령에서 무개 화차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영안현에 도착한 우리는 중국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중국 농가를 비우게 하고는 우리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식구당 20만원씩의 생활비를 제공받았는데 우리 가족은 3명이었기 때문에 60만원을 받았다. 나는 영안현 송강성 11년제 중학교에 전입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14).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학교들이 속속 개교를 했다. 아버지가 같은 소재지에 위치한 후근(후방근무)가족병원 후방과에 근무함에 따라 나도 이사를 와서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때 동창으로 성혜림을 만났다.(2008)

 

나는 해방 직후 평양 최고 명문이었던 평양제2인민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재학 중 무용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무용과 인연을 맺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10월 말부터는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군 간부 가족들이 중국 동북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리 일가도 회령을 거쳐 흑룡강성 동부의 영안현 세화진 녹도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나는 훗날 김정일의 처가 되는 성혜림을 만났다. 정전 후 나는 전후 문예부문 재건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양종합예술학교에 무용학부로 입학했다(2012)

 

혜림이와는 1937년생 동갑내기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헤이룽강성 융안현에서 임시로 거주할 당시 11년제 나남여중을 함께 다녔다. (나남은 함경북도 청진시 소속, 군사 도시)

 

평양 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고, 나남여자중학교시절 6,25가 발발했고, 1950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

 

정전 후 나는 전후 문예부문 재건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양종합예술학교에 무용학부로 입학했다. 성혜림 또한 동교(同校)에 영화연극학과로 들어와 나와 친분을 쌓아갔다. 평양종합예술대학 졸업 후에는 19569월 화성리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무용부 전문배우로 입대하여 당 대회 공연, 국가 연회 등 중요한 공연에 주로 참가하였다.

 

1989년 말에는 함경도 보위부 청사로 소환당한 일이 있었다. 평양 중앙보위부 고위 간부인 반탐국장이 말을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던 중 드디어 나는 20년 만에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은 적이 없으며 그러한 유언비어를 듣거나 퍼뜨렸을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옛 친구 성혜림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이다. . . 1979년 여름에는 올케(김창수의 처)가 힘을 써준 덕분에 9년 만에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이동의 자유는 있었는데 정부의 지시에 의해서만 다른 지방을 갈 수 있으니 실로 종살이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평양에서는 외사촌 언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감사하게도 형부와 언니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평양에서 고영희가 성혜림에 이어 김정일의 다음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의 견

 

북한의 의무 교육은 11년제, 유치원 1, 인민학교 4, 중고등학교 6년이다. 6살 때 유치원을 시작하여 11년 의무교육을 다 마치면 17살이 되고, 남자는 그 나이에 군대에 간다. 김영순은 9살 때인 1945년에 부모를 따라 평양에 왔다고 했다. 북한의 교육 제도에서 9살 아이라면 인민학교 4학년 졸업반에 해당하지만 편입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냥 평양 최고 명문인 평양제2인민학교에 입학하여 무용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인민학교에 입학하는 나이는 7살이다. 그런데 김영순은 9살에 중국으로부터 북한에 왔다. 성혜림은 7살에 인민학교에 입학했고, 김영순은 9살에 입학한 것이다. 김영순이 1학년일 때 성혜림은 3학년이었다. 똑같이 1937년이라 해도 두 사람은 동기동창일 수가 없다. 참고로 구글에서 평양제2인민학교는 잡히지 않는다.

 

김영순은 주장한다. “성혜림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동기동창이며 친구였고, 자기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점인 1979년은 성혜림 이후,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시점과 비슷했다.” 하지만 같은 1937년생인 성혜림은 1951(14) 평양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졸업, 1955(18)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했다. 반면 김영순은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나남여중을 다니다가 1950년 중국으로 피난하여 중국에[서 문을 연 11년제 (나남)중학교에 전입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14)고 주장한다. 평양에서 인민학교를 다녔다면서 어째서 중학교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다녔는가? 반면 성혜림이 함경북도 나남중학에 다녔다는 기록은 없다. 객관적 자료에 나타난 성혜림의 학력은 김영순의 학력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평양종합예술대학은 검색되지 않는다.

 

김영순이 요덕에 수용된 기간은 1970~79년이다. 김영순은 18년 후인 1988년에야 그가 왜 요덕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했다. 성혜림이 김정일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북한에서 극비에 속하기 때문에 그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보위부가 그녀를 성혜림의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입을 막기 위해 1970101, 요덕에 잡아넣었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과 같은 책의 제목을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고 달았다.

 

성혜림이 김정일 부인 자격을 박탈당한 시점은 1979년이 아니라 1974년이다. 김영순은 성혜림이 1979년에 고영희와 맞교대를 했기 때문에 그해인 1979년에 자기를 풀어주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성혜림은 1973년에 김영숙에 바통을 넘겨주었고, 김영숙은 1976년에 고영희에 바통을 넘겼다. 김영숙이 요덕에서 풀려난 1979년은 성혜림과도 고영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김영순의 주장에는 맞는 것이 단 한 개도 없다.

 

그런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김영순은 1968년 지득한 '5호댁 비밀을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보위부가 무슨 수로 김영순이 ’5호댁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해냈다는 말인가? 성혜림이 보위부에 말해서 김영순을 가두라고 말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혜림은 68년과 7081일 이전까지는 무엇하고 있다가 하필이면 197074, 김영순 남편이 사라진 직후에 보위부에 지시를 내렸을까? 김영순 주장의 여파를 따져보면 실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6) 막내아들

 

225, 막내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도 못 갔지만 1미터 80센티의 키에 처녀들이 줄을 설 정도로 미남이었다.

 

“1988년 막내아들 충국이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5년 동안 수용소에 감금됐고 재탈북 도중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때부터 나는 북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180센티미터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막내아들은 2.8 비닐론 공장 용접부에서 근무했는데 1988년 겨울에 탈북을 시도하다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 몇 년 후 성천구역 안전부 예심과에서 아들을 사랑하던 여자가 찾아와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탈북을 재시도하다가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의 견

 

1970년생인 막내가 요덕수용소 생활을 한 기간이 0~9살이었고, 김영순의 의붓부모가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30대 초반이었던 김영순 본인도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4년 동안 생리가 중단되었고, 굶어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했었다고 본인 스스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생후 9년 동안 최악의 환경에서 자란 막내가 그 후 산업공해가 최악이라는 비닐론 공장의 막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떻게 해서 키가 180cm로 성장한 미남이 되어 여성들이 줄줄 따랐다는 말인가? 2012년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북한 남성의 평균키가 158cm이라 했고, 성균관대 쉬베켄디엑 교수는 그 원인을 유전자가 아닌 경제력 차이로 분석했다. 또한 한 연구에 의하면 여자 아이는 15, 남자 아이는 17세에 성장판이 닫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막내아들의 경우에는 1986년에 성장판이 닫힌 것이 된다. 김영순은 또 말한다. “막내아들이 1988년 탈북하다가 잡혀 총살을 당했다.” 그렇다면 막내의 범죄로 인한 연좌제는 바로 김영순에게 적용됐어야 한다. 그런데 김영순은 1988년부터 12년 동안 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있었다. 아무런 소용없는 막내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데에는 초점도 흐리고 가련한 막내가 안타까워 자랑이라도 해보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설사 그것이 돌연변이적으로 사실이라 해도 이런 이야기는 김영순의 신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스토리다.

  

 

7) 탈북 과정

 

1989(52)에 장진에서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25가구를 감시하는 인민 반장이 되었다. 함흥에서 15년 살았다.

 

226~227, 내가 탈북을 모색한 시기는 1993막내아들이 총살당한 직후였다. 그 후 1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었다. 1997년 중국의 사촌을 만나려고 기차를 타러 나갔다. 식량난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 억지로 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보위원이 양팔로 기차 문을 막아섰다. 나는 그의 윗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기차를 탔다. 기차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다. 통로가 없어서 병사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 내 머리를 밟기에 항의했다. “이거 왜 이러나”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렇잖나! 이 간나야!” 함흥을 출발한 기차는 가다 서다 하기를 연속하여 3일 만에 무산역에 도착했다. 무산에서 칠성세관을 거쳐 잠덕이라는 곳을 통해 불법으로 국경을 건넜다. 워낙 굶주림에 따라 중국 방문은 묵인되었다. 돈으로 여행증을 사서 열차를 타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외가가 모두 중국에 있기 때문에 연길에서 외사촌 동생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동생은 한사코 북한에 가지말라고 말리다가 따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남한으로 가라, 아직도 김정일이가 그렇게 좋은가?" "어떡하냐? 아들 하나 게 있는데. . ." 그래서 도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아들이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 남한에 갑시다, 우리가 살 곳은 남한이야." 부랴부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행증을 1,000원에 샀다. 아들은 노동자, 나는 노무자 가족으로 위장했다보위지도원에게 500원 뇌물 주고, 한상 차려 먹였다. 보위지도원이 전지불 들고 탈북을 호위해주었다.

 

227: 아들이 탈북 경로를 눈여겨보았다. 부랴부랴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들어 두었던 옷을 팔아 조선돈 6만 원 정도를 마련했다. 집은 일본제 열쇠로 채웠다. 1,400원을 주고 군부여행증을 샀다. 겉으로 표시나지 않게 하기 위해 몸단장을 최고급 수준으로 했다. 준비를 마친 후 보위원을 찾아갔다. 적어도 15일 동안은 우리를 뒤쫓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지난번에도 다녀왔던 중국의 사촌에게 먹을 걸 구하러 갑니다. 다녀오면 좋은 일이 있을테니 보름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시오. 요즘 식량 사정이 안 좋다보니 . . 하여튼 빨리 다녀 오시오” “:우리 반 담당인 안전원에게도 잘 말했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 밤 나는 옛 생각에 하염없이 울었다. 아홉 살에 부모를 따라 북조선에 들어 온 이래. .. . 1,400원을 주고 군부여행증을 샀다. 아들이 잘 아는 보위지도원 소위를 만나 앞으로의 뇌물을 약속한 후 보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10~4300, 200121, 둘째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다. tv를 팔아 여행증을 1,000원에 샀다. 아들은 노동자, 나는 노무자가족으로 위장했다. 침대권도 300원에 샀다. 보위지도원에게 500원 뇌물 주고, 한상 차려 먹였다. 뒷길로 남양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21일이라 강이 얼어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최고의 외제 복장으로 차려입었다. 보위지도원이 전지불 들고 탈북을 호위해주었다. 20012월에 탈북한 것은 오로지 북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중국에서 26개월 식당에서 일해 돈 많이 벌었다. 요덕은 내게 최고의 인생대학이었다. 그곳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자랑스런 표정으로). (: 요덕에서 아들 잃고 부모를 잃었는데도?)

 

228~229, 2001131, 함경도 겨울밤은 매서웠다. 부족한 식량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기차는 복잡했다. 우리 두 사람의 주머니에는 3백원을 주고 산 침대권이 들어 있었다. 두만강 1열차는 밤 9시 넘어 출발했다. 밤늦게 청진에서 갈아탄 기차는 이튿날인 31일 밤이 돼서야 남양에 도착했다. 남양역에 도착하자마자 뒷문으로 우회해서 나온 후 아들이 지난 번 국경을 넘을 때 도와주었던 보위지도원을 만나러 갔다. 그의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10일 후에 돌아올테니 안심하고 보내주시오. 더 푸짐하게 챙겨 오겠소” 그 마을의 어느 반장에서 북한 돈을 중국 돈으로 바꿨다. 두만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1210, 도문에서 온성쪽으로 1백 미터 가량 거슬러 올라가 보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새벽 2, 아들이 지난번에 들렸던 집에 도착했다. 이튿날 조선족 교회를 찾아 한국으로 보내달라 했더니 돈이 있어야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반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도문시는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함경북도 온성군을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변방 도시)

 

“1997년 나는 중국 사촌 집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인 탈북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돈이 급선무였다. 뇌물로 상납할 돈만 있으면 탈북은 충분히 가능했다. 20026월까지 나는 국경을 통과할 때 쓸 로비 자금을 마련했다. 아들과 함께 두만강 1열차를 타고 청진, 남양을 거쳐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이동하는 곳마다 감시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뇌물을 주기도 하고 숨죽이며 밤길을 걸어야 했다. 어렵게 국경을 넘어왔지만 창춘시 교화현 소재 교회에 숨어 있던 아들은 2002년 중국에서 외몽골로 탈출하려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북송된 내 아들은 또 다시 세 차례에 걸쳐 탈북을 시도했다. 국경의 삼엄한 수비도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결국 아들은 중국 지린성에서 익명의 남한 목사를 만나 허난성으로 갔고 이후 약 5개월 동안 공안과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며 태국까지 이동했다.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의 인삼가든에서 탈북자를 돕는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로 이동한 후 200310월 태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와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3개월 만에 재회했다.(2009.1.2.)

 

20031124일에 한국 행 비행기에 탑승해 25일 새벽 5시에 자유의 조국 대한민국에 도착하였다.

 

“1997년 나는 중국 사촌 집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나서 구체적인 탈북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돈이 급선무였다. 뇌물로 상납할 돈만 있으면 탈북은 충분히 가능했다. 20026월까지 나는 국경을 통과할 때 쓸 로비자금을 마련했다. 아들과 함께 두만강 1열차를 타고청진, 남양을 거쳐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동하는 곳마다 감시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뇌물을 주기도 하고 숨죽이며 밤길을 걸어야 했다. 어렵게 국경을 넘어왔지만 창춘시 교화현 소재 교회에 숨어 있던 아들은 2002년 중국에서 외몽골로 탈출하려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북송된 내 아들은 또 다시 세 차례에 걸쳐 탈북을 시도했다. 국경의 삼엄한 수비도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결국 아들은 중국 지린성에서 익명의 남한 목사를 만나 허난성으로 갔고 이후 약 5개월 동안 공안과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며 태국까지 이동했다.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의 인삼가든에서 탈북자를 돕는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로 이동한 후 200310월태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와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3개월 만에 재회했다.(2009.1.2.)

 

의 견

 

          <2001년의 뇌물 도강, 스토리 외상 뇌물이냐, 현금 뇌물이냐>

 

2008.1.15.에 저술한 책 227쪽에는 2001.1.31. 두만강 도강을 위해 아들이 잘 아는 보위지도원 소위를 만나 앞으로의 뇌물을 약속한 후보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는 내용이 있다. 반면 2016.12.15. [배나tv 209]에는 보위지도원에게 500원 뇌물주고, 한상 차려 먹였다. 1210, 도문에서 온성 쪽으로 1백 미터 가량 거슬러 올라가 보위원이 전지불을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는 기재가 있다.

 

2001.1.31. 두만강 도강을 위해 매수한 보위부 사람이 말할 때마다 다르다. 매수 방법과 호위  방법도 말할 때마다 다르다. 거짓말인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지 않은 것으로밖에 달리는 인식되지 않는다. 더구나 김영순은 200121일 새벽 1210분에, 도문에서 온성 쪽으로 100미터 가량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런데 온성은 북한 땅이고, 도문(圖們)은 중국 땅이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함경북도 온성군을 마주보고 있는 변방 도시인 것이다. 중국 땅에서 북한 땅인 온성 쪽으로 100미터 거슬러 올라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는 매우 코믹한 이야기기 된다. 이런 내용이 보도 매체에 기재된 것이 아니라 그의 책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229쪽에 기재돼 있는 것이다.

 

                                <여행증>

 

2008.1.15.에 저술한 책 227쪽에는“1,400원을 주고 군여행증을 샀다는 기재가 있다. 반면 2016.12.15. [배나tv 209]에는 여행증을 1,000원에 샀다. 아들은 노동자, 나는 노무자 가족으로 위장했다는 대화 내용이 있다. 군여행증은 설사 있다 해도 김영순이나 당시 노동자로 위장한 27(1974)의 둘째 아들에 해당하는 여행증이 아니었다. 2008년에 말할 때에는 군여행증을 1,400원에 샀다고 했고, 2016년에 말할 때에는 일반여행증을 1,000원에 샀다고 했다. 그런데 국경 연선 지역에 갈 때에는 일반여행증이 아니라 푸른줄 두 개가 그어진 특수여행증을 가져야 한다. 이는 김영순이나 당시 27세였던 둘째 아들에 어울리는 여행증일 수 없다.

 

                      <1997년의 탈북>

 

2009.1.2.자 주간 조선에는“1997년 나는 중국 사촌 집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기재가 있다. 2008.1.15.에 발행한 책226~227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1997년 중국의 사촌을 만나려고 기차를 타러 나갔다. 식량난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 억지로 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보위원이 양팔로 기차 문을 막아섰다. 나는 그의 윗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기차를 탔다. 기차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다. 통로가 없어서 병사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 내 머리를 밟기에 항의했다.‘이거 왜 이러나’,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렇잖나! 이 간나야!’ 함흥을 출발한 기차는 가다서다 하기를 연속하여 3일 만에 무산역에 도착했다. 무산에서 칠성세관을 거쳐 잠덕이라는 곳을 통해 불법으로 국경을 건넜다. 워낙 굶주림네 따라 중국 방문은 묵인되었다.”

 

1997년이 고난의 행군 시기라 해도 주민들이 기차의 객실 내부를 빼곡하게 메우고 그것도 모자라 객차의 지붕 위에까지 탔다는 것은 북한 당국의 주민통제체제가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직까지 이러한 상태가 발생했었다는 보도가 없었다. 더구나 북한의 산악지대에는 터널이 많다. 일본이 건설한 기차 터널은 위에도 양 옆에도 여유 공간이 거의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열차 지붕에 사람들이 올라탄다면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그들의 머리가 온전할 리 없을 것이다. 주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열차 안을 메웠다면 앉지 못하고 서있을 터인데 그 서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병사들이 밟고 다녔다면 객실의 천정은 사람 키의 2배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묘사는 공상이지 현실일 수가 없다. 옷을 최고급으로 차려 입었다는 60세 여인이 보안원이 기차 문을 가로 막자 돈을 찔러주고 가랑이 밑으로 올라탔다는 것도 공상이다. 이렇게 빼곡한 상태에서 기차를 탄다면 여행증은 왜 야매로 사야 하는가? 김영순은 200121일에 두만강을 건널 때에는 보안원에 뇌물도 먹이고, 여행증도 야매로 비싸게 샀는데 그보다 3~4년 전인 1997년에는 그냥 이웃 다녀오듯이 두만강을 건넜다. 1997년과 2001년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다는 것인가?

 

                             전체적인 결론

 

깁영순은 자기 부모를 생부모라고도 했다가 의붓부모라고도 했다. 그녀는 북한에서 최상류 1%에 해당하는 호화를 누렸다고 했다. 그 배경은 의붓오빠 김창수라는 존재가 깔아주었다. 김창수가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인민군 창설의 주역이었다가 6.25전투에서 전사해 항일-6.25전사자의 공로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에 창설되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의 나이는 당시 26, 의붓오빠 김창수가 조선의용대 창설에 주역이었다면 나이는 최소한 30세 전후는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창수는 김영순보다 30년 내외의 나이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반면 김영순은 자기를 심양에서 1937년에 낳아준 아버지를 안동김씨라 했고, 1945년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한으로 이주했다고 했고, 이주하여 곧바로 인민학교를 입학했다고 했다, 그러면 생부는 어디로 가고 의붓아버지와 의붓오빠가 등장했는가? 꼭 도깨비놀음을 보는 것 같다.

의붓오빠가 조선의용대 출신이면 6.25의 책임을 지고 부관참시를 당했을 텐데 그런 오빠의 혜택으로 1%의 상류사회에 속해 있었다는 것도 황당하다. 탈북스로리 중 앞뒤가 일치하는 것이 전혀 없다.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는 소설들이다. 보위부 요원을 자유자재로 구워삶았다는 이야기가 탈북스토리를 지배한다. 도강 과정도 보위부가 전담했다는 말도 한다. 북한의 모든 것은 보위부가 다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소설을 쓴 것이다. 남한에 와서는 자기의 신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성혜림 스토리를 창조했다. 그가 엮은 스토리는 황당하다. 진정한 탈북스토리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녀는 성혜림의 친구도 아니었고, 성혜림으로 인해 요덕에 간 것도 아니었다. 성혜림 장사를 한 것이다.

 

2021.8.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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