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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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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1-04 12:22 조회1,8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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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프로필

 

박전희는 1917년 11월 14일생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군관학교 졸업 성적이 2등이었기에 성적우수자로 추천받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후 1944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군만 알고 세상물정

몰랐던 필자는 197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미국 경제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가장 훌륭한 경제성장 모델로 예시돼 있었고경제학 교수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이 때 필자는 대한민국의 장교가 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크게 느꼈고 낯선 이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스럽게 저는 한국인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다. 5천년 역사가 흘렀지만 UN에 등록된 당시 120여 개 나라들 중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 살던 나라를 230여 개국 중에서 11위로 잘 사는 국가로 개조해 놓은 지도자는 박정희였다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전두환은 그가 레일 위로 올려놓은 기관차를 가시켜 세계 최고의 고속 성장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974년만 해도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백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흑인이 갈 수 없었다이런 시절에 한국사회에서 유독 민주화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닌 세력들이 있었다그 중 가장 큰 세력이 간첩과 연계된 좌익들이었다. “선생님민주화 하셔야지요.” 간첩들이 한국 사회의 불평-불만분자들을 포섭할 때 사용한 첫마디가 바로 이 말이었다. 5.18 이전에는 민주화가 지하에서만 통용되던 말이었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민주화는 공공연한 지상 용어가 되었고이에 따라 지하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졌던 좌익활동이 보란 듯이 지상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바로 이 민주화 세력의 조상이 김대중이었다.

 

1)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60년 12월호 한은 조사월보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59년 사이(15)에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26억 9,000만 달러, 5.16혁명 전해인 1959년도의 원조액은 2억 달러였다이 중 78%는 소비재 원조였고 22%는 생산재 원조였다미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 중에서 잉여 농산물과 석유 및 유연탄은 시장에 매각하여 세출 예산으로 사용했다이는 '대충자금'이라 불렸다기업이라고는 별반 없었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환경이었으니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이 유입됨에 따라 농촌은 더욱 피폐해 졌고젊은이들은 너도 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렸으며 이로 인해 수백만의 도시 실업자들이 양산됐다.

 

보잘 것 없긴 하지만 당시에 존재했던 기업들은 모두 일본인으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당시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대충자금)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밀수품이 범람했다정경유착으로 인해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깡패들과 연결된 사기꾼들이었다. 1961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경제원조가 2.8억불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에 인구증가율 3%, 그런데도 미국은 박정희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그래서 미국은 주던 원조를 대폭 삭감해 버렸다이에 박정희는 서독에 광부를 팔고간호원을 팔았다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 6천이 몰렸다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서독 방송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가발을 만들어 수출했다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쥐잡기 운동을 벌여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그 결과 1965수출이 1억 달러가 됐다박정희가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며 욕을 했고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담당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시신이 대통령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수부에 증언했다. “당시 박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넥타이핀은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혁대도 헤어져 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근무할 때 양주를 마신 적이 한 번도 없고 막걸리를 즐겨했다고 한다당시 현장을 검증한 장경삼 검찰관(판사를 지내고 현재 변호사)는 서거 당시 대통령이 마신 술이 시바스리갈이 아니었고 국산양주였는데 이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다고 한다현장접근이 금지됐던 기자들이 현장 사진에 나타난 술병의 모양만 보고 추측성 기사를 쓴 것으로 판단된다당시는 국산품 애용시대였고양주와 양담배는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배척됐던 시기였으며외화에 대한 통제가 각별했던 시대였다이런 분위기에서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양주를 마셨다는 것은 납득가지 않는 대목이다대통령 전속이발사는 대통령이 입은 러닝셔츠에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고 밝혔다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서거한 다음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2)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7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소련중공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4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미국은 발을 빼려하고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한국에 월남전은 제2의 전선이었다박정희는 미국 대통령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군 파병을 생각해냈고미국을 설득시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와 안보의 큰 물고를 텄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정치학 박사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1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이어서 김용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그래서 1964년 315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새문화연구회청맥회동학회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그러나 이들은 19688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김대중김영삼문익환함석헌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3) 한일협정과 박정희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였나한일회담 14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타결 액은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총 8억 달러였다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매년 무상 3,000만 달러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등이 이때 이뤄졌다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필리핀한국인도네시아미얀마베트남이었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한국이 3억 달러인도네시아 22,308만 달러미얀마 2억 달러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을 것이고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북한보다는 50배 더 잘 산다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모범을 보인 훌륭한 기업인으로 일본 국민의 신앙이 됐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4) 조선과 대한민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대장금 문화에 빠져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약육강식 시대에 이러했으니 누구에겐들 먹히지 않았겠는가? 1905년 7월 29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키라는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희생되는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이었고이승만박정희였다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5%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그야말로 불문법으로 다스리는 한심한 부족국가였다꼴찌 쪽에 속했던 한국축구가 히딩크라는 지도자를 만나 세계 4강으로 뛰어 올랐듯이 거지의 나라 한국도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만나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5)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7,250만 달러였다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베트남에의 군납파월 기술자 송금파월 지원경비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credibility)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원조차관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 사이의 외자 도입액은 32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군원이관 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이는 1965년 6월 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이런 건의를 올렸다"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입니다금녀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1965-73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5천만 달러, 76년에는 24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6)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박정희가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제당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박정희는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댐 공사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박정희는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 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그 기발함이 실로 놀랍다.

 

그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표기된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에 잘 나타나 있다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이러한 미래지향적 안목을 가지고 그는 빠듯한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는 공식적으로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7)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얼마를 받느냐는 상대방에 달려 있다청구자금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은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철로도로터널교량항만발전소비행장 등 산업 인프라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조선의 위정자들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투자를 해놓았다고 주장했다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의 자본도 많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36년간 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지만 투자한 것이 많아 배상금은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배상금을 주었는가미국 때문이었다미국이 일본을 윽박질렀다당시의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다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다싱가포르 리콴유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바로 이게 자존심이다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국교가 정상화되고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8) 귀속재산을 아는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금전적 비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그 아이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바로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이다귀속재산이라는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일본이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라는 뜻이다국민 중에서 이 금전적 항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이 귀속재산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미국과 일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1945년 해방직후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철도도로항만전기광공업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추방당했다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갔다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북조선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이 횡재로 굴러왔다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일본재산은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에 이양했다이는 당시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한마디로 이 귀속자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에는 실체가 없었다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여 받은 액수는 3억 달러위의 23억 달러는 이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이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온 27명의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도로를 닦아놓았는가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그 27명의 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그래서 있던 길도 없앴다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27명의 왕들은 아래 사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쌓아올린 재산은 초가집도로 없는 서울똥오줌으로 수놓은 소로민둥산미신거짓과 음모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올렸다이 엄청난 재산을 미국이 빼앗아 보관했다가 대한민국 건국자 이승만에게 선물처럼 주었다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조선인들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이 두 가지 구체적 선물에 대해 우리는 미국과 일본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다이 중요한 사실이 묻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었고그 배은망덕의 소치는 순전히 빨갱이들의 역사왜곡에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매우 다행하게도 곧 이어 사유재산까지도 압류했다(군정법령 제8, 1947.10.6.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을 했다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이 모두를 합한 총 재산은 291,909건이었다일본이 팽개치고 나간 회사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다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1961년 5.16군사혁명 후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과 교토직물의 를 따서 지은 것이다. . .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 .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이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지금 메리츠 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9) 당시 박정희의 선택

 

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해 저들은 뭐라고 비방하는가청구권 자금을 103만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포항제철에 쏟아 부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한다사실 피해자가 103만이라는 것은 일본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당시 전국을 조사했지만 모든 읍면동에서 나오는 자료는 허무맹랑한 자료이어서 신뢰성이 없었다지금부터 불과 50년 전베트남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개인이 월남전에 참전했는지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에 없다개인이 보관했던 사진과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그런데 100년 전에 누가 피해를 보았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모든 증거자료가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박정희의 집중된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있다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생각할 게 또 있다지금 북한에서 김정일의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들은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남한에서 살아온 일제 피해자들은 박정희의 덕을 보았지만북에 있는 동포들은 박정희의 혜택은커녕 김정일 학정 하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고 짐승 같은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일제 피해자들에 동정심을 표하는 사람들필자는 그들의 체 하는 도덕심을 믿지 않는다남한에 사는 일제 피해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고생하는 북한 인권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아무런 죄 없이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나라를 지키려다 북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는 침묵하는 사람들툭하면 도덕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를 북한에 흡수시키려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온갖 거짓말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10) 박정희의 율곡사업

 

1950년대에는 한국군의 봉급까지도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 1970년에 한국의 국방비는 2억 달러에 불과했다그러나 1980년의 국방비는 38억 달러나 되었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는 북한의 연속적인 도발 행위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김신조 사건과 1월 23일에 있었던 미정보함 프에블로 호의 납치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우리는 영원한 혈맹’ 미국이 북한에 대해 상당한 경고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다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기는커녕 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짐을 지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이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배신 행위였다이로부터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전력 증강 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차 전력 증강 사업이 1974~1981의 8개년 계획으로 시작됐다이때부터 전력 증강 사업은 강병론자의 상징인 율곡 선생의 이름을 따서 율곡 사업으로 명명됐다박 대통령은 국방비를 GNP의 4.5퍼센트 수준으로 올릴 것이라는 파격적인 결심을 했다이에 따라 8개년 간 총국방비는 88억 달러로 예상됐다이러한 국방비 증가는 누구의 눈에나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그런데경제 성장 속도는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88억 달러로 예상했던 8년간의 총국방비가 실제로는 1903천만 달러나 된 것이다경제가 그가 예측한 것보다 2.2배 더 성장한 것이다.

 

1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에서 81년까지의 율곡사업비는 국방비의 17%에 해당하는 15.3억 달러로 계획됐었다그러나 이 역시 예상 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60.3억 달러로 늘어났다. 4배인 것이다이는 국방비의 3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그러나 당시 군 간부들의 의식과 경영기법을 가지고는 이 큰돈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많은 낭비가 있었지만 그 때까지 미군이 대주던 물자만 사용해 왔던 군에 갑자기 경영능력이 생길 리 없었다2차 율곡 사업은 82년에서 85년까지의 4개년에 걸쳐 계획되었으며 사업비는 50.3억 달러였다그 후 미국 국방성의 새로운 경영기법인 PPBS가 도입되면서부터 율곡 사업 계획은 몇 차 몇 개년 계획 식으로 하지 않고소위 PPBS(기획-계획예산시스템)주기에 따라 연동제로 계획되어 왔다그래도 우리나라에 PPBS라는 최첨단 경영 기법을 도입한 곳은 당시 군대뿐이었다율곡 사업 예산은 82년도에 10억 달러 규모에서 1985년에는 15억 달러 그리고 93년엔 37억 달러 규모로서 매년 경제 성장 속도만큼 확장돼 왔다.

 

1974년에는 1억 달러가 투자되어 소화기, 105밀리 곡사포고속정해공군 유도탄들이 구입됐다. 1975년에는 3억 달러가 투자되어 나이키호크대전차 유도탄발칸포팬텀기들이 구입됐다특히 1975년도에는 월남 패망김일성 북경 방문, 10월 위기설 등으로 긴장이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1977년에는 7억 달러가 투자되어 155밀리 개량포전차방공 자동화 장비다연장로켓포들이 구입됐다그러나 1978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의 투자는 주로 부대 증창설을 위한 기지건설에 사용됐다제대로 된 70만 대군이 형성된 것이다. 1~2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부터 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총 율곡 사업비는 경상가로 110.5억 달러였으며 이는 1985년도 불변가로 148억 달러에 해당했다이후 전력 증강비는 1980년대에 연간 평균 15억 달러 그리고 1990년대에 연간 30억 달러 규모로 투자돼 왔다. 19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전력 증강비는 1985년 불변가로 쳐서 150억 달러였다이는 북한 전력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늘 확실한 지시를 했다그는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청와대에 불러 M-16소총과 81미리 박격포를 내놓고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 고 지시했다소니의 초대회장 이부카는 미국에서 사온 포켓북을 책상에 내놓고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들라고 지시했다이렇게 확실한 목표를 주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그는 언제나 목표와 청사진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어 갔으며 모든 지시는 구체적으로 했다.

 

2021.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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