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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고모델, 조사천과 조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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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5-06 14:45 조회1,7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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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고모델, 조사천과 조천호

 

 

                      계엄군 모략용 세일즈 광고판

 

위 사진은 조사천 부자의 사진이다. 아들 이름은 조천호. 들고 있는 사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어린 아이가 시선 없이 멍하니 아버지 사진 들고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사진 자체가 던지는 엄청남 공감력을 이용하여 좌파들은 이 사진을 5.18장사에 열심히 우려먹었다. “오월의 아이”, “오월의 꼬마 상주”.

 

         좌파들의 세일즈 메시지, ‘이 불쌍한 아버지를 죽인 존재는 잔인무도한 계엄군입니다

 

좌파가 팔아먹어온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 이 불쌍한 꼬마 상주를 탄생시킨 존재가 바로 인면수심의 계엄군이라는 것이었다. 521일 도창 앞에 있던 공수부대가 이 가여운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메시지였다. 이 사진을 보고 눈시울을 적신 전 세계 인류들이 대한민국 국군을 멸시하고 증오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대한민국 국군을 살인마 집단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5.18기념재단의 자료 조작

 

하지만 계업군은 절대로 조사천을 죽이지 않았다. 조사천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에 맞았다. 5.18자료를 관리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은 1980년 당시의 시체 검시 자료를 변조-조작했다. 그가 카빈소총에 사망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차마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에 맞아 사망했다고는 변조하지 못했다. 단지 카빈총상을 그냥 총상으로 바꾸는데 그쳤다.

 

                     한겨레신문의 황당한 모략 

 

 2019516, 한겨레 기사는 두 가지 허위주장을 폈다. 하나는 1980528일 광주의 일반의사, 군의관, 일반검사, 군검사, 변호사, 광주유지 등 모든 관련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성한 합동조사반이 검시한 자료는 계엄군에 의해 강제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사진에서 계엄군 1명이 들고 있었던 카빈총 사진을 제시하면서 보라, 계엄군이 카빈총을 휴대하지 않았느냐, 조사천은 계엄군이 휴대한 카빈총에 죽은 것이다이런 주장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ea/894245.html

 

                    계엄군이 소지한 카빈총의 진실

 

한겨레신문이 게재한 위 사진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단이다. 20사단은 521일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하려 했다. 그래서 제3공수 5개 대대가 20사단 병력의 하차과정을 엄호하기 위해 광주역 앞에 집결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북한군은 광주시민 수만을 동원해 1천명도 안 되는 공수부대를 포위했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집단을 향해 굴리고 차량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3공수 5개 대대는 밤 10시까지 수만 시위대에 포위돼 몰살 위기에 있었다. 광주역을 포기한 20사단은 송정리에서 하차했다. 송정리역에서 트럭을 타고 광주시로 진입하려 했지만 이 역시 북한군이 간접 지휘하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결국 제20사단은  5월 20일 새벽부터 527,새벽까지 광주시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지키던 5개 공수대대는 5월 21일 오후 5시, 도청을 포기하고 구사일생으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오후 7시어둠을 이용해 무등산 자락을 통해 시 외곽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이때 모 여단의 여단장 모 준장은 지프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시위대로부터 스나이핑을 당해 지프차를 버리고 운전수와 함께 무등산 꼭대기 미 방공포 부대로 기어가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1시. 극비리에 30명 내외의 단위로 특공조를 편성해 도청, 광주공원,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로 극비 진입했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시위대를 모두 정복함으로서 10일동안의 광주소요를 완전 진압했다. 공수부대는 5월 27일, 진압에 성공한 직후 모두 원대로 복귀했고, 20사단은 광주에 더 남아 40일 동안 평정에 필요한 잔무를 맡았다. 시민들에게 쌀 등 식품을 공급하고, 사상자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고, 방화와 파괴로 얼룩진 도시 잔해를 청소하는 등의 복구작업을 맡아 했다. 

  

한겨레가 계엄군을 모략하기 위해 게재한 위 사진은 528일 이후에 촬영된 청소/복구 사진이고, 조사천은 521일 죽었다. 20사단 병사가 광주시 청소 시기에 들고 있던 총은 521일 조사천을 살해한 그 총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제20사단에는 왜 M16이 없었는가? M16 국산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해 1971년 지휘부가 구성되어 1978년 첫 생산품이 나왔다. 이 신형 소총 M16은 가장 먼저 전방병력에 보급되기 시작해 1980년까지에는 공수부대에까지만 가까스로 보급되었다. 후방인 양평에 주둔한 20사단은 그래서 1980년 당시 카빈총으로 무장해 있었던 것이다.

 

      조사천은 계엄군 총알이 날아갈 수 없는 곳, 옥상 스나이퍼에 조준 사격당했다

 

202112275.18 진상규명조사위원장 송선태는 출범 2주년 기념 주요 조사결과를 KBS방송을 통해 내보내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조사천에 대한 거짓말이다. “조사천은 전일빌딩 옥상에 올라가 있던 11공수 한 모 일병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 조사위원회는 한 모 일병의 증언을 확보했다. 당시 검시조서에는 사인은 칼빈에 의한 왼쪽 앞가슴 부위 맹관 총상이며 사입구 아래쪽 피하에 10X16cm 크기의 피하 혈반이 있었다.”

(https://youtu.be/Pj3IQIlxO5U

 

이 말이 사실인가? 100% 허위다. 조사위는 왜 허위를 조작하는 것인가? 조사천에 대한 진실이 5.18의 진실의 핵심모델이기 때문에 좌파들이 저토록 진실 뒤집기에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용식 교수의 연구결과

 

이용식 교수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가 작성한 증언자료와 1980528일의 검시결과를 토대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냈다.

 

                  <조사찬을 저격한 총알의 궤적>

 

목격자들의 증언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 않는 점은 있으나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 추론해보면 조사천의 사인은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그의 총상 부위는 좌측 머리, 좌측 턱, 좌측 목 부위와 좌측 앞가슴으로 보인다. 좌측 머리와 좌측 턱을 부순 총알이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후 다시 좌측 앞가슴을 뚫고 가슴 속에 박힌 것이다. 그럼 머리와 가슴 중 어느 것이 치명상일까? 몇몇 목격자들은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머리는 가죽만 손상된 것이 아니라 머리뼈를 부순 총알이 측두골 부위의 뇌정맥동 즉 측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에 손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피가 나오면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흥건히 적시기에 충분하며 곧 사망에 이른다.

 

가슴에는 직경 1cm의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함께 가로 10cm, 세로 16cm의 피멍이 생겼는데 이 피멍은 총알이 피부 밑으로 진행하면서 벌려놓은 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생긴 것이다. 즉 총알은 피부 밑을 지나며 흉곽과 나란히 진행하였던 것이므로 이 총알이 흉곽내부로 들어갔더라도 심장을 뚫지는 않고 폐 속에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 총상으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총알이 가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갈 경우는 이런 크기의 피멍이 생기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조사천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총알이 측두골을 깨부수고 측부 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을 찢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대량의 피가 쏟아져 곧 죽게 된다.

 

조사천의 검시는 사망일로부터 7일이나 지나서 시신이 부패했을 때 행해졌기 때문에,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나 검사들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는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으로 덮인 측두부의 총상이나 일부러 턱을 치켜들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턱밑 피부 열상은 구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검시관들 눈에는 가슴에 난 카빈 총알구멍과 그 구멍 아래로 16cm 정도의 길이와 10cm 정도의 폭을 갖는 피멍 자국만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사고 당시 증언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조사천의 상처부위를 다시 추론해보면, 탄도가 머리 위에서 가슴을 향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총알은 카톨릭센터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현장 목격자 중 윤석진과 나상옥은 총알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날라왔다고 생각했고, 이용일은 이 사건 바로 전에 카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라와 자기 옆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사천이 탄 장갑차는 카톨릭센터에 가장 가까운 차로(3차로)에서 도청을 향해 천천히 운행하고 있었다(임병석).

 

당시 금남로에는 약 오천 명의 군중이 길을 메우고 있어서 그들이 길을 비켜 주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차의 속도가 빠를 수가 없었다. 금남로를 서서히 달리던 장갑차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가 대형 태극기를 건네주었다. 그가 일어나 태극기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카톨릭센터 옆을 지날 때, 조사천의 앞 바로 머리 위 카톨릭센터 빌딩(지상 7층 건물) 옥상에서 발사된 총알이 두 손에 태극기를 든 채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있던 그의 왼쪽 머리 측두골을 깨고, 턱뼈 왼쪽 부분을 부수고(위 사진 참조)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뒤, 다시 왼쪽 가슴 피부를 스치듯 뚫고 가슴속에 박혔던 것이다.

 

검안서에도 1x1cm 총상 주위에 16x10cm의 피하출혈이 있었던 사실이 총알이 피부 밑으로 16cm 정도를 주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 앉았다”(서채원)는 표현에서 총알이 머리부분을 맞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위에서 쏜 총알에 맞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그를 짓눌러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던 것이었다. 이 총알로 인해 좌측 턱 근처 목 피부와 근육이 손상되어 목이 터졌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고(장종필)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덜렁거린 인상(이규홍)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검안서에도 사인은 카빈 탄환에 의한 왼쪽 앞가슴 맹관 총상(총알이 몸 안에 박혀 있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보도 옆을 지나가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을 저격하였다. 건물에서 장갑차까지의 거리가 약 7m, 건물의 높이가 약 21m 이므로 발사각이 약 72도였을 것이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의 피격 탄도각과 비슷하다. 사진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구청 건물이다.

 

 

34세 조사천의 시신은 5.21일 오후 1~1:30 피격되었고, 바로 직후 마치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처럼 시체장사용으로 전환됐다. 장갑차에서 총일 맞은 직후 곧장 지프차 보닛 위로 옮겨져 선동에 이용되다가 기독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시신은 도청으로 옮겨져, 상무관에 안치되었다가 528일 오전 11, 광주지방검찰정 검사 한광수의 지휘아래, 의사 최유섭과 군의관 박승일이 검안하였다. 

 

5.18조사위, 증거는 없고 2년 동안 조사한 건 홍어들의 증언 잔치상 - 도로를 산보하던 개들이 웃는다

 

조사천이 총에 맞은 장소는 송선태의 말처럼 전일빌딩 앞이 아니라 전일빌딩에서 빌딩숲 거리로 300m 떨어져 있는 카도릭센터(현 5.18역사기록관), 그 현관문으로부터 5~6m 떨어진 도로상이다. 빌딩 숲에 막혀 전일빌딩 옥상으로부터는 사격 받을 수 없는 지점이다. 전일빌딩에서 카돌록센터 앞 도로에 차를 타고 있는 사람을 총으로 쏘려면 그 피저격자가 눈으로 보여야 하는데 아래 도면이 잘 보여주듯이 전일빌딩과 카돌릭센터빌딩(5.18역사기록관) 사이에는 5~6개의 다른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시선이 막힌다. 군사용어로 사선(사격선)이 형성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당시 도청을 지키고 있던 제11공수와 7공수는 도청의 넓은 울타리 벽을 따라 강강술레식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일부 병력이 정문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10만 인파로 로부터 공격을 받고, 장갑차가 지그제그 궤도를 그리며 쏜살같이 '집합해 있는 공수대원들'을 향해 돌진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는데에도 벅차했다. 그런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1공수가 전일빙딩 옥상에 어리버리 계급인 일등병을 저격수로 배치하여 카돌릭센터 앞길에 있는 장갑차 승차원을 저격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설사 저격병을 보낸다 해도 고참 중사 상사들로 팀을 짜서 보내는 것이 군대 상식이다. 그런데 어리버리 일등병 한 사람을 그 무서운 곳으로 보냈다 하니 말문이 막힌다. 공수부대 대대장이 얼룩무늬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하나를 전일빌딩으로 보냈다? 도청정문에서 전일빌딩으로 가려면 그 넓은 광장을 빽빽하게 채운 성난 군중을 뚫고 가야 한다.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한 사람이 그 군중 사이로 걸어 갔다면? 삽시간에  짓밟혀 가루가 됐을 것이다. 송선태와 그 휘하의 전라족들은 군대를 무얼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걸 믿으라고 KBS를 통해 방송을 하는 것인가? 조사위원장이라는 송선태는 그 일등병이 한 모 일병인데, 조사위가 그 일병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방송했다. 그 한 일병은 아마도 전라도 출신일 것이다. 

 

                    5.18진상조사는 홍어족들의 후안무치 퍼레이드 

 

당시 공수부대는 미CIA 보고사가 증명한 바와 같이 병사 가각각에 주어진 정당방위권을 포기한 채 광주시민을 보호했다. 폭탄 조립/해체 기술을 가진 군무원을 도청 지하실로 몰래 잠입시켜 폭도들이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조립해 놓은 2,100발의 나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시키고, 500여 개의 수류탄 뇌관들을 제거케 했다. 광주족들은 지금 은인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전라도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 국민적 상식이 돼 버린 것이 아닌가. 이처럼 조사위원회의 조사내용을 보면 증거는 단 한 개도 없고, 증언들 뿐이다. 증언자들의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들이다.  조사위 족들이나 증언 족들이나 모두 전라족들이다. 전라도 것들이 국고를 탕진해 가면서 육갑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