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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앞 발포는 팩트 없는 유언비어 [60쪽 신국판 80%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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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5-11 14:32 조회1,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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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앞 발포는 팩트 없는 유언비어

 

        금남로 살육전 벌여놓고 도청 앞 발포로 모략

                 - 건국대 이용식 교수의 분석을 중심으로 - 




저자 지만원

 

 

              목 차

 

15.18 시체장사의 모델, 조사천 부자

이 불쌍한 아버지를 죽인 존재는 잔인무도한 계엄군입니다

조사천 사망원인에 대한 광주의 자료조작

한겨레신문의 황당한 모략

계엄군이 소지한 카빈총의 진실

5.18조사위 위원장 송선태의 거짓 발표

건국대 이용식 교수가 밝힌 사실

5.18조사위, 증거는 없고 2년 동안 조사한 건 전라인들의 증언들뿐

5.18진상조사는 전라인들이 벌이는 후안무치한 돈 잔치

 

2장 도청앞 발포 없었다. 오로지 금남로 인간사냥만 있었다

광주사망자 154명에 대한 사망원인 조사는 1980.5.28.일부터

1980년 조사 결과와 1995년 조사 결과와의 차이

총상에 대한 상식

521일 오후 1, 계엄군에 의한 집단 발포는 없었다

도청 앞 발포는 유언비어

금남로 옥상을 점령한 존재가 계엄군일 수 없는 이유

 

3장 윤석열 대통령께

국민 위해 목숨 바치는 군을 멸시 조롱하는 나라, 이대로 좋으신지요?

국가를 공격한 폭력집단이 준-헌법기관이라니요?

광주는 왜 계엄군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할까요?

당시 계엄군은 어떤 존재였나요?

1997년 대법원 판결은 사실 오인 판결이었습니다

[결산]없는 [통합] 없습니다

국군을 살인마 집단으로 끝까지 인식되게 하실 건가요?

국가의 적은 앵벌이 세력입니다

대통령 위에 광주시장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광주교도소 공격 누가 했는지, 이 하나만이라도 따져 주십시오

진실이 유린되도록 방치하실 것인지요

문재인의 날치기 역사왜곡에 새 대통령께서 동참하실 건가요

역사를 헌법에 넣는 것은 법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 상식 같은데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무소불위의 횡포가 존속돼야 하는지요?

 

             제15.18 시체장사의 모델, 조사천 부자

 

위 사진은 조사천 부자의 사진이다. 아들 이름은 조천호, 들고 있는 사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어린 아이가 시선 없이 멍하니 영정사진 들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진 자체가 던지는 엄청닌 공감력을 이용하여 좌파들은 이 사진을 지난 40여 년간 시체장사 수단으로 우려먹으면서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오월의 아이”, “오월의 꼬마 상주”.

 

       ‘이 불쌍한 아버지를 죽인 존재는 잔인무도한 계엄군입니다

 

좌파가 팔아먹어온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 이 불쌍한 꼬마 상주를 탄생시킨 존재가 바로 인면수심의 계엄군이라는 것이었다. 521일 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가 이 가여운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메시지였다. 이 사진을 보고 눈시울을 적신 전 세계 인류들이 대한민국 국군을 멸시하고 증오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대한민국 국군을 살인마 집단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조사천 사망원인에 대한 광주의 자료조작

 

하지만 계암군은 절대로 조사천을 죽이지 않았다. 조사천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에 맞았다. 그것도 계엄군이 사격할 수 없는 곳을 지나다 8층 건물 옥상을 점령한 괴집단에 의해 저격당했다. 괴집단이란 고도의 체력과 전투기술 그리고 강심장을 연마한 북한 특수군이었다. 5.18자료를 관리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은 2016~2022사이에 1980년 당시의 시체 검시 자료를 변조-조작했다. 그가 카빈소총에 사망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차마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에 맞아 사망했다고는 변조하지 못했다. 단지 카빈총상을 그냥 총상으로 바꾸는데 그쳤다.

 

하지만 조작의 주체는 5.18기념재단만이 아니다. 2019.5.16. 한겨레신문은 그가 계엄군이 소지한 카빈소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2021.12.27.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 송선태는 도청을 지키고 있던 11공수 소속의 한 모 일병이 시민을 학살하라는 명을 받고 도청 부근의 전일빌딩 10층 옥상에 올라가 조사천을 조준사격 하였다는 증언을 했다고 KBS방송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조사천이 카빈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공수부대 일등병에 의해 M16으로 저격됐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황당한 모략 

 

5.18진상조사는 전라인들이 벌이는 후안무치한 돈 잔치 2019516, 한겨레 기사는 두 가지 허위주장을 폈다. 하나는 1980528일 광주의 민간의사, 군의관, 민간검사, 군검사, 변호사, 광주유지 등 모든 관련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성한 합동조사반’(합조반)이 검시한 자료는 계엄군에 의해 강제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사진에서 계엄군 1명이 들고 있었던 카빈총 사진을 제시하면서 조사천은 계엄군이 휴대한 카빈총에 죽었다는 주장이다.

  

                계엄군이 소지한 카빈총의 진실

 

한겨레신문이 게재한 위 사진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단이다. 20사단은 520일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하차하려 했다. 그래서 제3공수 5개 대대가 20사단 병력의 하차과정을 엄호하기 위해 광주역 앞에 집결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광주의 북한군은 광주시민 수만을 동원해 1천명도 채 안 되는 공수부대를 완전 포위했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 집합돼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차량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3공수 5개 대대는 밤 10시까지 수만 시위대에 포위돼 몰살 위기에 있었다.

 

한편 이후 21일 새벽 광주역 하차를 포기한 20사단은 송정리역에서 하차했다. 송정리역에서 트럭을 타고 광주시로 진입하려 했지만 이 역시 북한군이 지휘하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결국 제20사단은 521일 새벽부터 527일 새벽까지 광주시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전남도청을 지키던 4개 공수대대는 521일 오후 5, 도청을 포기하고 구사일생으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오후 7, 어둠을 이용해 무등산 자락을 타고 시 외곽으로 야반도주했다. 이때 11여단의 여단장 모 준장은 지프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시위대로부터 스나이핑을 당해 지프차를 버리고 운전수와 함께 무등산 꼭대기 미 방공포 부대로 기어가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했다.

 

시 외곽으로 쫓겨난 공수부대는 527일 새벽 1. 극비리에 1개 조당 30~60명 단위의 특공조를 편성해 도청, 광주공원,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로 극비 진입했다. 그리고 새벽 4, 사살 17명이라는 예상외의 극소한 희생자를 내면서 10일 동안의 광주소요를 완전 진압했다. 527, 진압에 성공한 공수부대는 곧바로 원대로 복귀했고, 공수부대가 아닌 제20사단이 40일 동안이나 광주에 남아 평정에 필요한 잔무를 수행했다. 시민들에게 쌀 등 식품을 공급하고, 사상자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고, 방화와 파괴로 얼룩진 도시 잔해를 청소하는 등의 복구작업을 해준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계엄군을 모략하기 위해 게재한 위 사진은 528일 이후 파괴의 잔해를 청소하는 20사단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조사천은 이미 521일에 사망했다. 20사단 병사가 광주시를 청소하고 있을 때, 들고 있던 총은 521일 조사천을 살해한 그 총이 아니라 521, 무기고에서 나온 총이다. 그러면 제20사단에는 왜 M16이 없었는가? M16 국산화 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해 1971년에 시동됐다. 그리고 1978년에 첫 생산품이 나왔다. 신형 소총 M16은 가장 먼저 전방병력에 보급되기 시작해 1980년에는 공수부대에까지 보급되었다. 1980년 당시 양평이라는 후방에 주둔해 있던 20사단에게는 M16100% 지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5.18조사위 위원장 송선태의 거짓 발표

 

202112275.18 진상규명조사위원장 송선태는 2년 동안의 조사결과를 KBS방송을 통해 내보냈다. 여러 가지 거짓말들 중 하나가 조사천에 대한 거짓말이었다.

 

조사천은 전일빌딩 옥상에 올라가 있던 11공수 한 모 일병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 조사위원회는 한 모 일병의 증언을 확보했다. 당시 검시조서에는 사인은 칼빈에 의한 왼쪽 앞가슴 부위 맹관 총상이며 사입구 아래쪽 피하에 10X16cm 크기의 피하 혈반이 있었다.”

 

송선태의 이 말, 사실인가? 100% 허위다. 조사위는 왜 허위를 조작하는 것인가? 조사천에 대한 진실이 곧 5.18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건국대 이용식 교수가 밝힌 사실

 

이용식 교수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가 작성한 증언자료와 1980528일의 검시결과를토대로 도청 앞 발포의 진실을 아애와 같이 밝혔다

 

                    <조사천을 저격한 총알의 궤적>

 

목격자들의 증언들과 의사들의 검시결과를 종합해 추론해보면 조사천의 사인은 다음과 같다.

 

 

조사천의 총상 부위는 좌측 머리, 좌측 턱, 좌측 목 부위와 좌측 앞가슴으로 보인다. 좌측 머리와 좌측 턱을 부순 총알이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후, 다시 좌측 앞가슴 속에 박힌 것이다. 그럼 머리와 가슴 중 어느 것이 치명상일까? 몇몇 목격자들은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머리는 가죽만 손상된 것이 아니라 머리뼈를 부순 총알이 측두골 부위의 뇌정맥동 즉 측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에 손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피가 나오면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흥건히 적시기에 충분하며 곧 사망에 이른다.

 

 

가슴에는 직경 1cm의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함께 가로 10cm, 세로 16cm의 피멍이 생겼는데 이 피멍은 총알이 피부 밑으로 진행하면서 벌려놓은 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생긴 것이다. 즉 총알은 피부 밑을 지나며 흉곽과 나란히 진행하였던 것이므로 이 총알이 흉곽내부로 들어갔더라도 심장을 뚫지는 않고 폐 속에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 총상으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총알이 가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갈 경우는 이런 크기의 피멍이 생기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조사천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총알이 측두골을 깨부수고 측부 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을 찢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대량의 피가 쏟아져 곧 죽게 된다.

 

조사천에 대한 검시는 사망일로부터 7일이나 지나, 시신이 부패했을 때 행해졌기 때문에,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나 검사들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는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으로 덮인 측두부의 총상이나 일부러 턱을 치켜들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턱밑 피부 열상은 구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검시관들 눈에는 가슴에 난 카빈 총알구멍과 그 구멍 아래로 16cm 정도의 길이와 10cm 정도의 폭을 갖는 피멍 자국만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사고 당시 증언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조사천의 상처부위를 다시 추론해보면, 탄도가 머리 위에서 가슴을 향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총알은 카톨릭센터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현장 목격자 중 윤석진과 나상옥은 총알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날아왔다고 생각했고, 이용일은 이 사건 바로 전에 카톨릭센터(5.18기록관)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자기 옆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사천이 탄 장갑차는 카돌릭센터에 가장 가까운 차로(3차로)에서 도청을 향해 천천히 운행하고 있었다(임병석).

 

당시 금남로는 콩나물시루처럼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길을 비켜 주어야만 차량이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차의 속도가 빠를 수 없었다. 금남로를 서서히 달리던 장갑차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던 조사천에게 누군가가 대형 태극기를 건네주었다. 그가 일어나 태극기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카톨릭센터 앞을 지날 때, 그 건물 7층 옥상에서 발사된 카빈소총 실탄이 그의 왼쪽 머리 측두골을 깨고, 턱뼈 왼쪽 부분을 부수고(위 사진 참조)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뒤, 다시 왼쪽 가슴 피부를 스치듯 뚫고 가슴속에 박혔던 것이다.

 

검안서에도 1x1cm 총상 주위에 16x10cm의 피하출혈이 있었던 사실이 총알이 피부 밑으로 16cm 정도를 주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 앉았다는 서채원의 표현에서 총알이 머리 부분을 맞혔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내려 쏜 총알에 맞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그리고 서채원의 말 그대로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던 것이다. 이 총알로 인해 좌측 턱 근처 목 피부와 근육이 손상되어 목이 터졌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고(장종필),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덜렁거린 인상(이규홍)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검안서에도 사인은 카빈 탄환에 의한 왼쪽 앞가슴 맹관 총상(총알이 몸 안에 박혀 있는 상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보도 바로 옆을 지나가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을 저격하였다. 건물에서 장갑차까지의 거리가 약 7m, 건물의 높이가 약 21m 이므로 발사각이 약 72도였을 것이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의 피격 탄도각과 비슷하다. 사진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구청 건물이다.

 

34세 조사천의 시신은 5.21일 오후 1~1:30 피격되었고, 바로 직후 마치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처럼 시체장사용으로 전환됐다. 장갑차에서 총을 맞은 직후 곧장 지프차 보닛 위로 옮겨져 선동에 이용되다가 기독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시신은 도청으로 옮겨져, 상무관에 안치되었다가 528일 오전 11, 광주지방검찰정 검사 한광수의 지휘아래, 의사 최유섭과 군의관 박승일이 검안하였다.

 

<조사천이 금남로 옥상 저격부대에 의해 피살됐다는 증언들>

 

1) 광주 카톨릭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유팔동씨의 증언(유팔동, 5.18의 기억과 역사 5, 527)

 

광주 카톨릭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유팔동은 무장 괴한들이 카톨릭센터 옥상에 올라가 금남로 시민들을 향해 총질을 했다고 증언한다.

 

시민군들이 이렇게 총을 가지고 우리 (카톨릭)센터 옥상으로 올라갈라 그랬어요. 그래서 , 그러냐그랬더니 옥상에서 봐야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 센터 건물이 그때는 광주 금남로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 거기서 도청을 향해 총질을 좀 하겠다. 그 양반들이 총을 들고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그분 말릴 수도 없고그때 시민군하고 저쪽(공수부대)하고 교전이 조금 있었어요.”

 

2) 일본 프리랜서 기자 카지마 고이치 증언

 

내가 촬영하고 있던 건축 현장에도 십여명의 시민들이 달려와서는 커다란 나무기둥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집어올려서 군인들의 머리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젊은이를 대여섯 명 태우고 있던 장갑차가 군이 바리케이트로 치고 있던 버스를 밀어 제치면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대세는 완전히 데모군중들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우리들이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면서 저기에 기자들이 있다고 외쳐 대자 돌팔매가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날라왔다. 아래에서 공중 높이 날려 보내는 돌팔매여서 맞아도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드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던 광주시 유일의 호화 관광호텔의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가까스로 관광호텔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 종업원으로부터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 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여행객 한 사람(힌츠페터)이 완전 소등되어서 깜깜해진 건물 안으로부터 커다란 백을 메고 나왔으며, 그는 호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치 탈출의 길이라도 재촉하듯 총총히 밖으로 사라져갔다.

 

. . AP의 서울지국에 근무하는 젊은 기자와 나는 도청 뒤에 있던 東子여관으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 . 동자여관에는 나 외에도 한국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 다섯 사람이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이젠 별 도리가 없다고 하며 짙은 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은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때마침 나타난 무장데모대들이 당장 나가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여관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무장 데모대로부터 폭행은 안 당했다고 했다(風間公一 카지마 고이치).

 

3) 정건호 22, 건국대학생 증언

 

‘521일에는 길거리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엄군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고 도청을 제외한 시내 일원에는 계엄군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마침 집에 와 있던 성일(정성일, 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1년이었던 사촌동생)이와 안심하고 11시쯤에 밖으로 나갔다.’

 

4) 나상옥 21, 대학생의 증언

 

내가 탄 차가 관광호텔 부근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장갑차에 탔던 청년(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음)이 장갑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다가 목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 .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이 목에 맞은 것은 정조준에 의한 것이었다. 오른쪽 목에 맞은 점을 미루어 아마 관광호텔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금남로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는 도청 쪽을 보아도 군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피격탄도에 대한 증언들>

 

1) 부인 정동순의 증언(19888, 5.18기념재단 사이버추모공간)

 

‘. . 목에 총알이 관통한 상태로 눈을 뜬 채였다. . .망월동으로 갔다. . 시체가 부패해서 관이 터지고 시체 썩은 물이 흘러 나왔으나 어떻게 손을 볼 수가 없어 관을 비닐로 싼 채 그냥 묻었다. .’

 

2) 최인영 17, 용접공

 

‘. . 정오쯤 되자 점점 불어나는 시민들과 차들로 금남로는 가득가득 메워져 있었다. . .공수부대를 향해 무섭게 달려든 청년은 머리에 횐 띠를 동여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갑차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금남로 사거리에 모여 있었다. 장갑차가 동구청 부근까지 가자 갑자기 총성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순식간에 시민들은 흩어져 도망갔다.‘

 

3) 김행주 17, 고등학생

 

‘. . 오후 2시경이었다. 그 장갑차는 위 뚜껑을 열고 그곳에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 . .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져 버렸다.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

 

4) 윤석진 19, 재수생

 

‘. . APC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돌진해 갔다. 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 뚜껑을 열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가 나왔다.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 ."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턱 부분이 아예 날아가 버렸다. 목뼈가 허옇게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 . .전일빌딩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총알이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 (턱을) 분리를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

 

5) 김용오 21, 식당종업원

 

‘. . 21, . 12시경 유동삼거리에서 장갑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 위에선 대형 태극기를 든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이 "애국시민 여러분은 동참하라"고 외쳤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지만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 앞장서는 것을 보고 나는 장갑차에 올라탔다. 장갑차 안에는 6명 정도의 젊은이가 타고 있었다. 사방이 막혀 있어 밖을 내다보지는 못했으나 장갑차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제일은행 부근쯤이었을까? 갑자기 '!' 하는 총성이 울려 깜짝 놀랐다. 운전수는 급히 차를 돌려 유동삼거리로 되돌아갔다. 차에서 내려보니 장갑차 위에 탔던 고등학생이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언뜻 보아 얼굴에 총을 맞았는지 입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다.‘

 

6) 이규홍 26, 당구장 지배인

 

‘521일로 기억된다. 유동 삼거리에 많은 인파가 몰리고 어떤 청년 하나가 시위진압용 경찰장갑차를 타고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도청으로 진격하자고 했다. 그래서 도청 앞으로 올라가고 시위군중들과 함께 나도 따라 올라갔다.그런데 관광호텔 부근에서 장갑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상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청 앞에서 쏜 M16총에 턱 부분을 맞고 쓰러졌다. 곧 유동 삼거리로 데려와 살펴보니 장갑차 윗부분에는 피가 흥건히 젖어 있고 청년의 목이 겨우 매달린 정도였다.시위군중들은 얼른 그 사람을 장갑차에서 내려 지프차에 헝겊을 깔고 누이고 대형 태극기로 덮었다. 이어서 지프차를 시내로 몰고 다니면서 스피커로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고 궐기하라고 말했다.’

 

7) 이용일 19, 재봉견습생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 것 없이 총을 들었다. 그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 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8) 장세경 25, 소방공무원 시험 치루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시민들 사이에서 총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갑차 위에 탄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카빈총을 거꾸로 매고 도청을 향해 간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말렸으나, "죽어도 간다."고 하며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청년이 탄 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연발 총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뒤로 넘어졌다.장갑차가 되돌아오는데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으으!" 하는 저음의 신음 소리가 났다. 청년은 코에 구멍이 뚫리면서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나도 모르게 ""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9) 서채원 19, 무직 

‘1230분경 시위대의 장갑차 한 대가 유동 쪽에서 도청 쪽으로 왔다. 장갑차의 앞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태극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모든 시민들의 눈은 그 장갑차로 향했다. 장갑차가 광주관광호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총성이 울려퍼졌다. 순간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서 있던 젊은이가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정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을 본 시민들은 모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5.18조사위, 증거는 없고 2년 동안 조사한 건 전라인들의 증언들뿐

 

조사천이 총에 맞은 장소는 송선태의 말처럼 전일빌딩 앞이 아니라 전일빌딩에서 빌딩숲 거리로 300m 떨어져 있는 카톨릭센터(5.18기록관), 그 현관문으로부터 7m 떨어진 3차선 도로 위였다. 빌딩 숲에 막혀 전일빌딩 옥상으로부터는 사격 받을 수 없는 지점이다. 전일빌딩에서 카톨릭센터 앞 도로에 차를 타고 있는 조사천을 총으로 쏘려면 그 조사천이 눈으로 보여야 하는데 아래 도면이 보여주듯이 전일빌딩과 카톨릭센터 빌딩 사이에는 5~6개의 다른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시선이 막힌다. 군사용어로 사선(사격선)이 형성되지 않는 곳이다. 

 

당시 도청을 지키고 있던 제11공수와 7공수는 도청의 넓은 울타리 벽을 따라 강강술래 식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일부 병력이 정문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10만 인파로 로부터 공격을 받고, 장갑차가 지그재그 궤도를 그리며 쏜살같이 '공수대원들'을 향해 돌진하였기 때문에 공수대원들은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도 벅차했다.

 

그런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1공수의 한 대대장이 어리버리 계급인 일등병 한 명을 전일빌딩 옥상에 저격수로 배치하여 카돌릭센터 앞길에 있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을 저격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설사 저격병을 보낸다 해도 여러 명의 고참 중사 및 상사들로 팀을 짜서 보내는 것이 군대 상식이다. 그런데 어리버리 일등병 한 사람을 그 무서운 곳으로 보냈다 하니 말문이 막힌다.

 

공수부대 대대장이 얼룩무늬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하나를 전일빌딩으로 보냈다? 도청정문에서 전일빌딩으로 가려면 그 넓은 광장을 빽빽하게 메운 성난 군중을 뚫고 가야 한다.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한 사람이 그 군중 사이로 걸어갔다면? 삽시간에 짓밟혀 가루가 됐을 것이다. 송선태와 그 휘하의 전라도 사람들은 군대를 무슨 존재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걸 믿으라고 KBS를 통해 방송을 하는 것인가? 조사위원장이라는 송선태는 그 일등병이 한 모 일병인데, 조사위가 그 일병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방송했다. 그 한 모 일병은 아마도 전라도 출신일 것이다. 송선태는 한 모 일병의 신원을 밝히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상관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아가지고 몇 발의 실탄을 누구로부터 받아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성난 군중을 뚫고 전일빌딩 옥상에까지 가서 어떻게 조사천을 저격했는지 육하원칙에 의해 밝혀야 할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는 100% 거짓이다.

 

         5.18진상조사는 전라인들이 벌이는 후안무치한 돈 잔치

 

당시 공수부대는 미CIA 보고사가 증명한 바와 같이 병사 각각에 주어진 정당방위권을 포기한 채 광주시민을 보호했다. 폭탄을 조립/해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군무원을 도청 지하실로 몰래 잠입시켜 폭도들이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조립해 놓은 2,100발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시키고, 500여 개의 수류탄 뇌관들을 제거케 했다. 광주사람들은 지금 은인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전라도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국민이론이 형성된 것이 아니겠는가이처럼 조사위원회의 조사내용을 보면 증거는 단 한 개도 없고, 증언들뿐이다. 증언자들의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들이다. 조사위 쪽 사람들이나 거짓 증언에 임한 사람들이나 다 같이 전라도 사람들인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국고를 탕진해 가면서 후안무치한 모략질과 사기극을 화려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제2장 도청앞 발포 없었다. 오로지 금남로 인간사냥만 있었다

 

           광주사망자 154명에 대한 사망원인 조사는 1980.5.28.일부터

 

당시 시위대 측은 시민들을 자극하고 선동할 목적으로 각 병원에서 보관하던 시신을 전부 도청 앞 광장에 운반시켰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도청광장 건너편 상무관이라는 곳으로 운반했고, 무연고 시신은 도청 안에 보관해 놓았다. 527일 상황이 종료되고 이어서 민군 검찰, 민군 의사, 광주의 유지, 변호사 등 모든 관련 전문가들과 유지들을 동원하여 528일부터 6월초까지 사망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합동조사반의 검시조서와 병의원에서 발행된 사체검안서가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입증자료다.

 

            1980년 조사 결과와 1995년 조사 결과와의 차이

 

5.18당시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54명이다. 이 중 총상 사망자 수는117, 117명 중 88명이 카빈소총 등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총상 사망자의 75%를 시민군이 사살했다면 이는 단순한 오발이 아니라 조직적인 살인일 것이다.

 

그런데 1995년 민주화세력에 떠밀려 검찰이 5.18관련 사건을 재수사했을 때, 위 사망원인에 대한 통계가 대폭 변경되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총상 사망자가 카빈소총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소총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통계다. 이 통계는 1982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쪽에 기재돼 있고, 동시에 1985. 5.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보고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의 자료를 정리하면 도출된다.

 

하지만 1995년 검찰이 발표한 통계는 위와는 정반대다. 카빈총상이 26, M16 총상이 96, 132명이 총상사망자라는 것이다. 이 자료는 월간조선 20051월호 별책부록에 실려 있다. 총상 사망자가 16명이나 늘어났고, 카빈총상 사망자가 85명에서 26명으로 줄어든 반면, M16 총상 사망자가 31명에서 96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1995년 당시 사망자들의 뼈는 1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있었다. 설사 땅을 파서 뼈를 꺼낸다고 해도 뼈를 가지고는 사망원인을 밝힐 수 없다. 1995년 검찰이 통계를 광주에 유리하도록 함부로 조작한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의 기록들이 몰래 조작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총상에 대한 상식

 

1980518일 오전 930분부터 시발된 광주폭동은 1980527일 새벽 4시경에야 종결됐다. 5.28일 민군 검사, 경찰, 변호사, 의사, 군의관 그리고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서 시신을 검시할 때 어느 총기에 맞았는지를 감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제원의 탄두직경이 잣대가 되었다.

 

M16 탄두직경은 5.56mm, 카빈 및 M17.62mm. 카빈은 탄두 끝이 둥그스럼해서 피부를 뚫고 들어간 구멍이 M16보다 조금 더 크고, 들어간 자리와 나간 자리의 크기가 거의 동일하지만, M16의 경우에는 들어간 자리는 아주 작고 나간 자리는 주먹 크기 정도로 넓다. 당시의 시체 검안보고서에 따르면 총상 사망자의 75% 정도가 카빈 또는 M1 소총에 의해 사망했다.

 

당시 M16 소총은 계엄군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아 등 뒤로 메고만 다녔고, 무장 시위대들도 최소한 34정의 M16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빈총상과 M16총상은 확연히 구분돼 있었지만 그 외 총상은 그냥 총상으로만 기재돼 있었다. M16 총상 이외의 모든 총상은 무기고로부터 탈취한 총기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M16소총의 총상은 원체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총상과 혼동될 수 없다. 따라서 1980년에 시체를 직접 검시하여 내린 판단은 정확하고 1995년 유가족들의 진술에 의한 총상 변경은 모두 허위일 수밖에 없다. 당시 유가족들은 M16에 맞았다고 진술해야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선동됐을 것이다.

 

             521일 오후 1, 계엄군에 의한 집단 발포는 없었다

 

1995년 검찰이 다시 작성한 사망 원인 통계에 의하면, 5.18사태 소요 10일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날은 521일이다. 그날 광주 일원에서 사망한 시민은 모두 61, 이 중 32명은 M16총상이고, 17명은 카빈 등 무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 이날 계엄군 총기에 의해 32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료는 민주화세력의 입김으로 조작된 자료이기 때문에 진상규명 용도로는 사용될 수 없다.

 

1980528일 합동조사반 검시 결과에 의하면계엄군 총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전무하다. 1980년의 검시보고서에 의하면 521, M16총상 사망자는 14명이다. 14명 중에는 등 뒤로부터 날아온 총을 맞은 사람이 6명이나 된다. 계엄군과 미주하고 있었던 시민들 6명이 총을 맞았으면 가슴 등 신체의 앞부분을 맞았어야 한다. 등 뒤로부터 날아온 총알에 의해 사망한 광주시민의 이름은 장하일, 채이병, 김용표, 김완봉, 나종기, 박세근이었다.

 

M16 총상자 14명 중 나머지 8명은 임균수를 포함해 머리 위에서 발사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다. 금남로는 6차선 거리로 서울에 비하면 골목이나 다름없는 거리였다. 도로 양측에는 7~10층 건물들이 가로수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이 골목길은 도청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계엄군의 시야에 잡히지도 않았고, 총알도 날아갈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지상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발사된 총은 운집해 있는 군중의 가장자리 사람을 맞춘다. 그런데 오후 1시를 전후하여 사망하고 부상당한 80여명은 빽빽한 군중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다.

 

계엄군은 비록 M16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이 없는 빈총이었다. 521, 전남도청은 7공수 1개 대대, 11공수 3개 대대 그리고 광주에 소재한 제31향토사단 소속의 1개 소대가 있었다. 그 소대장이 한동석 중위였다. 한동석 소대는 그날 오전 사단장 정웅이 헬리콥터를 보내 철수시켰다. 공수부대와 잠시나마 함께 했다가 혼자 철수하는 한동석 중위의 마음이 아팠다. 곧 결전의 순간이 올 것만 같던 절체절명의 순간, 한 중위는 공수부대를 남겨두고 자기혼자 철수하는 것이 참으로 마안하고 가슴 아팠다. 공수부대에 실탄이 단 한발도 없다는 사실을 안 한동석 중위는 자기가 자위(정당방위)용으로 가지고 있던 M16 실탄 45(3개 탄창)을 공수부대 대위에게 건네주고 갔다. 이것이 도청 앞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가지고 있던 실탄의 전부였다. 45발은 계엄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장갑차를 향해 다 사용했다.

 

하지만 그 시각 시위대에는 적어도 34정의 M16과 많은 실탄이 있었다. 시위대는 21일 아침 행군해 오는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면서 실탄과 함께 M16도 탈취했다. 시위대가 당시 보유했던 M1634정이나 되었다. 따라서 M16총상이라 하여 모두 계엄군이 발사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계엄군과 마주한 곳에서 사망했느냐, 아니면 계엄군이 없던 곳에서 사망했느냐다.

 

                         ‘도청 앞 발포는 유언비어

 

이용식 교수는 전남대 5.18연구소가 보유한 자료 중 102개를 확보해 분석했다. 그는 사망자 또는 부상자 바로 옆에 있었던 목격자의 증언 48, 실제로 부상을 당한 사람의 증언 31, 의사의 검시 결과 23개를 종합하여 아래와 같은 결론을 냈다.

 

521, 오후 1시 이전, 무장괴한들이 무서운 얼굴을 해 가지고 높은 건물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위협하여 추방해 버린 후 옥상들을 장악했다. 무장한 괴한들이 장악한 건물은 전일빌딩, 카돌릭센터, 광주은행, 수협, 노동청, YMCA 등이다. 오후 1시 전후에 사망하고 부상당한 시민 대부분이 이 옥상들로부터 사격을 당했다. 70도 내외의 각도로 내려다보고 쏜 것이다. 조남신과 최미애는 계엄군이 존재하지도 않는 먼 곳에서 머리에 M16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5.18유족회의 초대회장 전계량의 아들 전영진은 노동청에서 도청을 향해 트럭을 타고 돌진공격을 하다가 오른쪽 관자놀이에 M16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역시 계엄군의 총알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박창권은 오른쪽 팔 상위에 총상을 입었지만, 치명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직접 사인은 여러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조대훈의 경우는 14:00에 이미 기독병원에 사체가 옮겨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집단 사격 이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당한 사람들의 증언,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시민을 직접 옆에서 보았던 시민들의 증언, 그리고 검시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집단 발포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도청 앞 집단 발포는 팩트 없이 지어낸 거짓이었다. 도청 앞 사격 45발은 오로지 계엄군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던 장갑차를 향해 연발로 다 날렸다. 결론적으로 [도청 앞 발포]는 모략용으로 만들어낸 유언비어였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여성들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놓았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동급의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521일의 진실은 금남로 옥상으로부터의 집단발포다. 금남로에 울려 퍼진 총성은 결국 금남로 빌딩 사이사이를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채우고 있던 시민들을 향해 수많은 옥상 스나이퍼들이 발사한 인간사냥의 오케스트라였다. 순식간에 금남로 빌딩 숲에서는 40명이 즉사했고, 또 다른 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도청 앞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계엄군에는 실탄조차 없었다.

 

            금남로 옥상을 점령한 존재가 계엄군일 수 없는 이유

 

일본 프리랜서 기자, 카지마 고이치가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관광호텔 옆에 신축 중인 광주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가 돌팔매에 못 이겨 내려와 관광호텔 옥상에서 촬영하려고 접근하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누군가가 호텔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누구든 호텔 안에 사람을 들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며 종업원들이 못 들어가게 사정사정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도청 뒤 동자여관으로 들어갔더니 마침 취재하려고 전일빌딩 옥상에 올라가 있던 기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쫓겨나 여관으로 왔다고 말했다 한다. 당시 금남로 건물에 계엄군이 없었다는 점은 황석영 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에도 밝혀져 있다. 광주 카톨릭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유팔동 역시 무장 괴한들이 카톨릭센터 옥상에 올라가 금남로 시민들을 향해 총질을 했다고 증언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기록에 의하면 계엄군 측에서 4층 건물인 도청별관 옥상과 상무관 등에 공수부대원이 배치된 때가 있었다. 시민군 장갑차의 공격을 2번이나 받고 나서 3번째 3차 공격이 시작되었던 오후 250분 이후였다(5.18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3). 따라서 오후 250분 이전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가 아니다. 게다가 이 때 계엄군에게는 총알이 전혀 없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를 시작한 시각이 5시였다. 6시경에야 인간방벽을 간신히 뚫고 조선대에 집결할 수 있었다. 조선대에서 석식을 하고 오후 7, 어둠을 틈타 무등산 방향으로 광주를 탈출했다. 따라서 6시 이후에 도청부근에서 총격을 받은 사람도 계엄군의 사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3장 윤석열 대통령께

 

       국민 위해 목숨 바치는 군을 멸시 조롱하는 나라, 이대로 좋으신지요?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입니다. 지금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가서 여름이면 모기에 뜯기고, 겨울이면 엄동설한 이겨내면서 국민 편히 주무시라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장병들이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려고 고되게 훈련하는 장병들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깍듯하게 대우받는 국군이 이 나라에서는 살인마로 손가락질받고, 군발이라 불리며 조롱받고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 하여 받은 무공훈장을 놓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저런 훈장을 받느냐, 훈장은 살인증명서다멸시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용사를 이토록 조롱하고 멸시하겠습니까? 군은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입니다. 평시에는 멸시하면서, 전쟁이 나면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던 그 국가와 그 국민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 달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나라를 이렇게 망가뜨렸습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5.18입니다. 5.18이라는 글자는 이 나라에서 금단의 성역이 되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성역이 허용될 수 있는지, 그 당위성부터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치인들이 출세를 하려면 광주부터 찾아가 절을 합니다. 그들이 광주에 갈 때마다 국군의 위상이 추락합니다. 국군의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리판단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가를 공격한 폭력집단이 준-헌법기관이라니요?

 

겉으로 보기에 5.18은 광주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세력이 득세했던 1997, 대법원은 광주시위대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으로 정의하였습니다. 반면 이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던 계엄군을 내란에 동원된 '살인마'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 대부분이 국군을 살인집단으로 이단시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계엄군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습니다. 이들의 죄가 무엇인가요? 아니 이들에게 죄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요?

 

            광주는 왜 계엄군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할까요?

 

광주시민들은 어째서 계엄군을 인면수심의 살인마로 인식했을까요? 제가 20여 년 동안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유가 3가지 있습니다.

 

첫째, 유언비어입니다. 너무나 악성적이어서 좀처럼 뇌리에서 씻어지지 않는 유언비어, “계엄군이 여성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대검으로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모략입니까?

 

둘째, 영화 [화려한 휴가]의 심리전 효과입니다. 영화는 도청 앞에 진열한 계엄군이 애국가를 부른 광주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했다고 묘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략입니다. 1980521일 오후 1시 경에 집단 총격은 도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금남로에서 발생했습니다. 같은 시각 금남로 6차선 양쪽에 늘어선 고층 건물 옥상들은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멋모르는 시민들이 유동 쪽으로부터 금남로로 밀려갔습니다. 옥상을 점령한 괴한들이 70도 내외의 각도로 스나이핑을 가했습니다. 순식간에 40명이 즉사했고, 4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도청앞 발포사건]이라며 계엄군에 뒤집어 씌웠습니다.

 

셋째, 19805.18사태가 종결되자마자 이른바 42분짜리 [광주비디오]가 전라도 지하의 전역을 돌며 시청되었습니다.이 동영상이 계엄군을 잔인한 살인마로 묘사했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면 계엄군을 증오하지 않을 없습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이 동영상은 1980년 북한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광주현장에 대한 촬영 주권이 북한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 이상 어떻게 더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은 광주시민을 유언비어로 선동했고, 이어서 왜곡한 기록영화로 선동하여 국가를 등지게 만들었습니다. 위와 같은 세 가지 이유로 광주/전라도 주민들이 계엄군을 증오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당시 계엄군은 어떤 존재였나요?

 

과연 계엄군은 광주에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허가돼 있는 자위권을 포기하고, 부당한 공격을 당하면서까지 광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습니다. 2020511, 미국이 한국정부에 이관한 CIA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군을 극찬하였습니다. 계엄당국은 한 폭탄 기술자를 도청으로 잠입시켜 목숨을 걸게습니다. 광주시를 잿더미로 날릴 수 있는 2,100발의 폭탄을 해체한 것입니다. 핀센트 식 점령이라는 기발한 작전으로 광주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면서 폭동을 진압시켰습니다.

 

미국은 이 두 개의 사실을 들어 한국군을 극찬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적을 미국은 알아주는데 어째서 이 나라 국민은 무시하는 것입니까? 계엄군은 도청에서 광주시민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실탄도 45발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지그재그로 달려드는 장갑차를 향해 사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계엄군은 억울한 것입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은 사실 오인 판결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났습니다.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나타나고, 자성의 분위기가 일고 있습니다. 계엄군 쪽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국민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보면 1997년 대법원 판결은 [사실 오인]이라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광주의 희생은 계엄군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북한군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가 42개나 나왔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인 것입니다.

 

                [결산]없는 [통합]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국민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습니다. ‘통합이 중요하다고 해서 문정권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를 덮고 간다면 국민이 통합할까요? 더욱 심하게 갈라질 것입니다. ‘통합을 하려면 결산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5.18을 결산하지 않으면민주화세력과 국군세력 사이에 분열이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국군을 살인마 집단으로 끝까지 인식되게 하실 건가요?

 

계엄군에 대한 정서가 이대로 굳어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연년세세 국민은 국군 전체를 인면수심의 살인집단으로 매도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군복입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사기가 무너지고, 영혼이 없는 이런 군대 왜 필요한가요?

 

상호불신,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불신이 지속되는 한 국민통합은 없습니다. 통합의 지름길이 있습니다. 국민이 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입니까? 인면수심의 악행을 저지른 그 존재, 계엄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실을 광주가 인정하는 그날, 비로소 분열이 종식될 것입니다.

 

                국가의 적은 앵벌이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진실을 차단해야만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희생자들을 앵벌이 하여 세도를 부리고 부를 축적하는 집단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에서 사망한 304명의 아이들을 앵벌이 하여 세도와 부를 누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앵벌이 하여 세도와 부를 누리고, 154명 광주 희생자들을 앵벌이 하여 국가 위에 군림하는 치외법권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집단들이 폭력과 세도를 가지고 진실을 차단하고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집단이 좌파집단입니다. 이를 방치해온 나라, 제대로 된 나라인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위에 광주시장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모든 국가유공자들은 대통령이 선정하고 대통령이 시행합니다. 그런데 5.18유공자만은 광주시장이 선정하고 대통령이 시행합니다. 광주시장이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이는 시정의 대상이지 포용해야 할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5.18유공자들이 받는 혜택이 하늘이라면 다른 국가유공자들이 받는 혜택은 땅바닥입니다. 5.18유공자가 해마다 늘어납니다. 1999년에는 한번에 177명이나 늘었습니다.

 

국민은 알고 싶어 합니다. 유공자 혜택을 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무슨 공로를 세웠는지, 가산점으로 취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냉담합니다. 5.18은 제2의 마그나카르타이고, 민주화역정에 세워진 숭고한 금자탑이기 때문에 모든 국민은 자손만대에 걸쳐 숭배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 그 내막은 알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이런 것이 민주화인지, 대답해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광주교도소 공격 누가 했는지, 이 하나만이라도 따져 주십시오

 

1997년 대법원 판결서에는 광주 무장시위대가 5회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교도소를 공격한 행위는 민주화운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광주시장과 5월 단체들은 대법원 판결이 허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교도소를 끈질기게 공격한 무장집단은 누구입니까? 5월단체들은 그 무장집단이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부대라 주장합니다. 억지이지요. 억지를 부리지 않으면 5.18을 성역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이 유린되도록 방치하실 것인지요

 

521일의 군경 상황일지에 기록된 무력행위는 광주의 초중고 학생, 껌팔이, 구두닦이 등이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는 행위들이 아닙니다. 이동 중인 20기계화사단 지휘부 차량을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습격했습니다. 600명의 조직화된 어깨들이 군납업체를 털어 장갑차와 군용트럭 370여 대를 끌고 나와 불과 4시간 만에 전남 17개 시군에 철저하게 위장돼 있는 무기고 44개를 털어 5,4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하였습니다. 전남도청에 2,100발의 TNT 폭탄을 조립해 광주시를 히로시마로 만들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이것이 10, 20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인지 사실관계를 결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재인의 날치기 역사왜곡에 새 대통령께서 동참하실 건가요

 

문재인은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5.18진상규명법을 만들었습니다. 국방부에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휘부 위원들과 조사관들이 모두 5.18을 수호해온 이해당사자들입니다. 그 중 이동욱 비상임 위원이 피조사자를 밤중에 모텔 등으로 불러내 한번은 4시간, 또 한번은 1시간 동안 협박하고 회유하여 강제진술을 받아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론을 내면 국민은 그에 반하는 의견을 표현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헌법에 넣는 것은 법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 상식 같은데요

 

어제의 진실이 오늘에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세월이 알려준 상식이고 이론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도 깊이 연구해 보면 허위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역사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게 돼 있습니다. 5.18처럼 충돌의 역사에는 당사자가 있습니다. 5.18은 전라도와 국가사이에 발생한 충돌입니다. 그런데 전라도가 헌법전문을 점령한다면 국가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세력이 성역화하는 그 5.18을 헌법전문에 넣으면, 그 헌법은 공산주의 헌법이 되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충돌의 역사는 절대로 헌법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무소불위의 횡포가 존속돼야 하는지요?

 

국회도서관 등에 5.18의 진실을 밝힌 책들을 반입하지 못하게 하고, 특정인을 점찍어 신문에 의견광고, 책광고를 내지 못하게 압력을 가합니다. 학생들에 5.18역사책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3명의 교수를 해직시키는 세도를 부리고 있습니다. 5.18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내용이 조금만 들어 있어도 유튜브계정이 즉각 폭파당합니다. 귀중한 자료와 구독자가 한 순간에 날아갑니다. 5.18에 대한 재판만 열리면 집단으로 법정에 몰려와 집단폭행을 가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폭력적 특권이 허용돼야 하는 것인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지만원

(02) 595-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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