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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쓴 제주 4.3사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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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06 15:08 조회7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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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쓴 제주4.3사건-3

                 3. 5․10단선을 반대하는 제주도인민의 4.3봉기

1) 제주도에서 4.3무장봉기 폭발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선참으로 폭발한 투쟁은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저작집 4권, 376페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는 폭발적인 투쟁도 아니었으며 우연적일 폭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8.15후 새 사회 건설과 나라의 자주적인 통일독립을 위하여 줄기차게 벌려온 제주도 인민들의 선행투쟁의 계승 발전이었으며 참을 수 없이 악랄해지는 적들의 식민지파쑈통치와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자유와 나라의 통일을 위한 정의의 반미애국투쟁이었다.

제주도인민들은 미제와 반동통치배들의 5․10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대중적인 무장봉기에 앞서 지휘부에서는 각 면단위로 투쟁대오를 편성하고 무장을 갖추도록 하였으며 행동임무를 주어 각기 자기 위치에 대기시키었다.

4월 3일 새벽 행동개시 시각이 다가왔다. 이 시각 각 면단위로 편성된 인민자위대는 산, 들, 동굴, 밀림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행동개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 2시 한나산의 령봉을 비롯한 각지에서 신호총소리와 홰불이 일제히 타오르자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손에 무장을 들고 원쑤 격멸에로 총궐기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 지’ ‘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건 하루 전인 1948년 4월 2일 각 읍, 면 단위로 마을 가까운 동굴과 야산에 집결, 무기를 지급받았던 ‘무장자위대’란 이름의 재산폭도들은 ...4월 3일 새벽 2시 한나산 정상을 비롯한 전도의 산악고지에서 일제히 봉화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력봉기를 했다.”

4.3봉기가 개시된데 대하여 ‘로동신문’에는 다음과 갈이 씌어 있다.

“1948년 4월 3일 절해의 고도 제주도에서 정의의 홰불은 올랐다. 새벽 2시를 기하여 제주도인민들은 뼈에 사무친 원한을 폭발시켜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반동의 거점인 도내 경찰지서를 일제히 습격 하였다.”(1949. 4. 3)

무장대들은 은밀하고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적들에게 무리죽음(주: 집단사살)을 주었다. 봉기자들은 수십 개의 무장습격조를 편성한 후 한개 습격조에 한개 습격대상을

담당시키는 원칙에 기초하여 동일한 시간에 일제히 통일적 행동을 개시하여 적을 치고 신속히 퇴각하는 전술을 적응하였다. 이것은 적을 분산된 상태 에서 각개 격파함으로써 적이 다른 곳에 있는 력량을 집중하며 기동반격 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남원면 남원경찰지서에 돌입한 90여명의 무장대는 총과 도끼, 몽둥이 등을 가지고

2명의 악질 경찰을 처단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여러 정의 무기를 탈취한 후 지서 건물을 완전히 불태워버리었다.

애월면 구엄 경찰치서를 습격 한 100여명의 대 부대 는 4-5개 조로 나누어 반역자들의 집을 습격하머 놈들을 처단하고 집에 불을 질러 인민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한림면 한림려관에 ‘서북청년회’ 테로단원 7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안, 한 애국청년은 단신 칼을 품고 기습하여 15분 내에 7명 전부를 살해하였다(로동신문 1949. 4. 3).

무장자위대는 조천, 함덕, 삼양. 외도, 한림, 저지, 고산, 애월, 성산,안덕, 중문, 대청, 무릉 등 14개 경찰지서, 출장소와 제주, 서귀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서청’의 숙사와 교형리들의 앞잡이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국민회’, ‘독촉 국민회’, ‘대동청년단’의 반동무리들과 악질관공리의 집, 행정기관들을 기습파괴 하였으며 많은 경찰, 관공리 등 반동들을 체포하여 현지 인민재판에서 처단하였다. 그들은 이날전투에서 경찰지서 2개소를 불태웠으며 경관11명, 테로단 11명, 악질반동 10여명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경관 4명 반동분자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미국제 카빙총과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로동신문 1948년 8.29) 이것은 첫 무장봉기에서 철저히 무장한 적과 싸워서 얻은 제주도인민들의 거대한 승리였다.

이 첫 봉기에는 500여명의 인민무장자위대들을 선두로 하고 로동자, 농민, 사무원,

어민, 해녀, 목동들과 학생 등 3,0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칠순의 백발로인과 애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인 죤 메릴은 자기의 저서 ‘제주도반란’에서 “4월 3일 반란군의 주력은 500명 정도‥‥ 게릴라들이 하산하자 약 3.000명의 주민들이 가세했다.”고 썼다. (‘사회와 사상’ 서울한길사. 1989년 10월호 366페지).

봉기 참가자들은 총과 칼, 낫, 죽창, 수류탄, 폭발물, 곡괭이, 삽 등으로 무장하였다. 인민무장대는 반동단체에 가담한 량심적인 청년들과 전체 도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보냈다.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만과 같이 서고 있다! 량심 있는 공무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량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량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 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배족노들을 꺼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말라. 량심적인 경찰원, 청년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애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존경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들의 아들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매국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적 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자료집’ 84∼85페지)

애국심에 불타는 제주도인민들은 이 애국적 호소에 따라 인민유격대를 물심양면으로 원조 후원하였고 그들의 투쟁을 힘 있게 고무하였다. 제주읍 리호리와 로형리를 비롯한 서부 8개 부락의 수천 명 인민들은 즉시 인민대회를 열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고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제주읍 봉개리 30여 명의 로인들은 청장년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죽창을 들고 인민유격대에 합류하였다.

또한 한림면 금악리 인민들은 전승고 높이 올리며 돌아오는 인민유격대를 따뜻이 대접하였고 조천면 조천리와 애월면 동부 인민들은 인민유격대에 수집한 무기를 제공해주었다. 자동차회사 종업원들을 비롯한 수많은 로동자, 사무원, 학생들은 무장투쟁을 열렬히 지지하여 즉시로 파업,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산으로 들어갔다.(로동신문 1949. 4. 3)

원쑤들을 일시에 족쳐버린 제주도의 거리와 마을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들끓었으며 승리자들의 기세는 승천하였다. 각지에서 “매국단선단정을 절대 반대한다!”, “유엔 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미제의 주구를 타도하라!”, “조선통일 만세!” 등의 구호를 들고 원쑤들의 죄행을 규탄하는 성토대회와 군중시위를 벌리었으며 인민대회들에서는 군중심판에 회부된 악질반동들을 처벌하였다.

이날 놈들이 받은 타격에 대해서 제주도 경무부장이란자는 다음과 같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 피해상황을 찾아보면 경찰지서 습격 11개소, 테로 11건, 경찰관피습 2건,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4명, 경찰관 가족사망 1명,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량민(앞잡이-인용자) 사망 8멍, 부상 30명, 전화절단 4개소, 방화 경찰관서 3개소, 량민가옥 6개소, 도로교통파괴 9개소 등이다.(동아일보 1948. 4. 7).

봉기자들은 원쑤들에 대한 공격에서 얻은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4월 4일에 다시 폭동을 일으켜 11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파괴하고 여러 명의 경찰과 반동놈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하여 재남조선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략칭 G-2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월 4일에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경찰 사망 4, 부상 5, 행불 3, 우익사망 4, 부상 16, 행불 4, 미국제 카빙총 6정, 일본제 소총 1정, 탄약 119발 로획 당함”

4월 3일 봉기에 의하여 심대한 타격을 받은 미제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적들은 살인적인 ‘토벌’ 폭압체계를 가일층 강화하였다. 4월 5일에는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4개의 경찰서를 증설확장하고 경찰직속의 ‘토벌대’, ‘별동대’를 조작하였다. 또한 ‘국군’, 경찰, 무장테로단을 철저하게 제주도 밖의 출신으로 배치함으로써 그들에게 지방차별감정을 촉발시켜 잔인한 살륙전을 감행하도록 선동하였다. 미군정당국은 봉기가 일어나자 각 도 경찰청에서 출동시킨 1,700여명의 경찰을 급히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월남한 악질반동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혼성 제11련대를 주둔시켰으며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다른 지방출신의 가장 악질적인 테로단들을 긴급히 섬으로 끌고 와서 제주도출신의 경찰들과 교체하였다.

놈들은 제주도 인민들과 외부사이에 연락이 맺어지는 것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적들은 도령으로 제주도와의 선박출입을 일체 금지하여 외부와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놈들은 ‘유격근거지’와 민간부락들에 경찰지서, 파출소, 출장소, 창고, 지하실 등의 인간도살장을 수많이 신설확장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추방하거나 그들을 ‘빨갱이’, ‘산부대와 련락자’라는 죄명으로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어떠한 탄압학살만행도 죽음을 각오하고 반미애국투쟁에 나선 제주도인민들의 완강한 애국항쟁을 저지시킬 수 없었다. 원쑤들의 발악이 심하면 심할수록 애국적 봉기자들은 놈들에게 백 배 천배의 보복적 타격을 가하였다.

미군사령부 G-2보고서에 축소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무장대는 4월 6일 새벽 2시 20분경에 리도리를 습격하고 새벽 4시 40분경에는 봉개리를 습격하여 악질 ‘대청’단원 3명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였다. 4월 7일에 하가리 습격조는 다리를 파괴하고 4월 8일 내도리와 외도리를 습격한 무장대는 다리를 파괴하고 놈들의 전화통신을 두절시켰으며 악질반동들의 집 3채를 불태워 버렸다.

4월 10일에는 용담지서를 습격하여 여러 명의 경찰, 반동들을 처단하고 다리를 파괴하였으며 신엄에서는 3명의 반동분자를 처단하였다. 4월11일에는 애월에서 경찰과 ‘대청’단원 여러 명을 부상시켰고 4월 13일 용담지경에서도 악질 경찰 1명이 처단되였다. 4월14일 조천리를 2차례나 습격하고 여러 명의 악질경찰을 처단하였다.

2) 제주도인민들의 무장투쟁 앙양

4월 3일부터 4월14일에 이르는 10여 일간의 투쟁과정에서 인민무장대의 력량은 질량적으로 장성강화되였다. 이 투쟁에서 인민무장대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일정한 교훈을 찾아내었다.

이미 이룩한 성과에 기초하여 무장투쟁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원쑤들에게 보다 큰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서는 이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 정치적 대책을 세워야 하였다. 이로부터 1948년 4월15일 항쟁의 세찬 불길 속에서 무장봉기자 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4.3봉기를 총화한데 기초하여 5․10단선음모를 결정적으로 분쇄하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군사 정치적 대책을 강구하였다 .

대회에서는 인민무장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을 소유한 우수한 청년들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인민유격대의 조직은 강철 같은 규률과 전투력을 가진 혁명적인 무력을 가지고 강대한 적과의 투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였다.

인민유격대는 위에 ‘제주도인민유격대 지휘부’를 두고 그 밑에 련대 (지대)와 그에 직속하는 소대를 두었다. 그리고 지휘부 직속으로 특공대(정찰공작)와 특경대(지방반동의 동향감시)를 조직하였다. 인민유격대는 3개의 련대(지대)로 구성 되었으며 그의 지방별 배치는 다음 페지의 표와 같이 하였다.

유격대원들은 각 면에서 선발된 로동자, 빈고농, 어민 등 기본계급출신 가운데서 혁명성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구성하였다. 유격대의 련대, 소대, 독립소대 내에는

유격대의 사상정치교양을 위한 정치소조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공화국북반부에서 이룩된 민주개혁의 자랑찬 성과들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혈하’, ‘인민통신’ 등과 같은 출판물들을 통하여 애국주의교양을 강화하였다.

련대별 활동구역표

련대

활동구역

지대이름

1

2

3

조천면,제주읍, 구좌면

애월면, 한림면, 대정면, 안덕면, 중문면

서귀면, 남원면, 성산면, 표선면

3,1지대

2,7지대

4,3지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88페지 )

유격대의 편성과 함께 각 읍, 면 단위로 새로이 자위대를 조직하고 비밀활동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자위대는 유격대와 군중과의 련계를 긴밀하게 보장하면서 마을마다에서 행패를 부리는 반동들을 극비밀리에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광범한 인민대중 속에서 농민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혁명조직들을 조직-확대하여 군중적 지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무장대에 대한 원호사업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진행하도록 하였다

인민유격대는 4월 3일 무장봉기 이후 로획한 현대식무기와 피복, 군수물자 등으로 장비를 강화하였으며 ‘가장기동대’, ‘가장경찰대’, ‘가장국방대’를 편성하여 대낮에 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애국적 인민들과 함께 연달아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도로와 적 통신망들을 파괴하는 등의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그리고 무장대는 민활하고도 기동적인 변장술을 쓰면서 정면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반역자들을 처단하였다.

인민유격대는 4월 15일 적 기동부대 25명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한 애월면 광령부락 매복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큰 전투들과 단신 또는 2~3명의 무장소조원들로 적의 처단과 무기탈취 투쟁 등 기동적인 습격전투를 전개하여 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4월 16일에는 제주도인민유격대 명의로 5.10망국단선반대를 위한 무장봉기성명을 발표하여 미군과 그 앞잡이 악당들에게 일대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와 함께 애국적 인민들에게는 ‘5. 10단선’ 반대투쟁에 호응 궐기하여 단선을 결사적으로 분쇄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애국적 인민들의 투쟁 기세는 비상히 앙양되고 반미 애국적인 무장투쟁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동경은 더욱 높아갔다.

무장대의 맹렬한 활동에 대해서 미군사령부 G-2보고서까지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17일 새벽 조천 남서쪽 3마일 지점에서 대청단원 3명 사살, 조천 북서쪽 1마일지점에 있는 신촌에서 경찰부친, 량민부부 피살, 4월 18일 새벽 2시 도평리 투표소가 피습당해 선거명부 도난, 4월 19일 200여명 의 무장대가 오형리습격, ...제주읍에서 동, 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전화선과 전주가 절단됨, 제주읍내와 공항을 련결하는 전선을 보수하던 경찰분견대가 총격을 받음, 4월 20일 새벽 3시 200여명 무장대 모슬포습격, ...4월 21일 밤10시경 대정면 동일리에 있는 투표소가 습격당하여 선거위원 피살됨, ‥‥ 4월24일 오후1시 15분경 제주공항에 착륙하려던 C-47기 총격 받음‥‥군정청내 PX건물이 피습‥‥4월26일 새벽 3시 30분경 삼양 리에서 6명의 폭도 마을습격, 4월 27일 하모리에서 2개 다리 파괴, 선거업무 차로 한림에 갔다 오던 관리 6명이 신엄지경 에서 피습 ‥‥도련마을에서는 경찰과 무장대가 교전하였는데 무장대는 기관총도 사용하였음‥‥))

이 자료는 무장대의 활동정형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서도 무장대의 활동이 얼마나 맹렬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인민유격대는 공격성과를 확대하면서 적들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고 량심적인 경관들을 무장대에 인입시키는 사업도 진공적으로 벌려나갔다. 인민유격대의 정치소조원들은 ‘국방경비대’안에 침투하여 5․10단선의 매국적 본질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로 학살하는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들과 함께 반미애국투쟁에 궐기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속에서는 봉기자들의 투쟁을 각종 형태로 지원하고 토벌에 미쳐 날뛰는 경찰대와 무장충돌을 일으키며 인민의 편으로 의거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4월 27일에는 국방 경비대 제9련대의 한 개 중대 100여명 군인들이 련대장놈을 처단하고 애국적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제주도인민들의 무장력량을 강화하고 적들 속에 심각한 혼란을 조성시켰다

량심적인 경관들을 무장대에 인입하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함덕경찰지서원 한 명이 의거하도록 하고 그에게 임무를 주어 지서장을 비롯한 지서전원을 유인하여 포로하게 하고는 인민의 심판에 넘겨 처단하게 한 것은 그 실례이다. 이와 같은 의거 경관들은 그 밖의 지역에서도 나왔다. 그들 중에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경관도 있었고 경관 자신 뿐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 인민의 편에 서서 ‘토벌대’의 동향을 탐지하는데 적극 참가시킨 사실이 있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리는 조건에서 무장대의 력량만으로써는 놈들을 성과적으로 짓부실 수 없었다. 오직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 밑에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여 싸울 때만이 보다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시기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무장대의 군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섰다. 그들은 아끼고 아끼던 식량, 피복을 비롯한 많은 지원물자들을 무장대에 보내었다. 심지어 농촌로인들까지도 짚신과 양말을 만들어 식량과 함께 등에 지고 캄캄한 밤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지정된 지점까지 운반해다놓군 하였다. 녀성들도 무장대를 지원하여 적극적으로 떨쳐나섰다. 그들은 군중 속에 들어가 대중교양과 조직사업을 진행하였고 중요한 련락임무도 수행하였으며 식사보장, 빨래, 환자치료사업등을 맡아 나섬으로써 무장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애국적 인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무장투쟁에 과감히 떨쳐나서자 민족적 량심을 가진 ‘국민회’, ‘대동청년단’ 원. 관공리들도 미제의 학살만행을 배격하고 매국단선을 반대하는 반미 애국항쟁을 지원해나섰다. 이렇듯 제주도 무장부대도 인민대중과 혈연적 련계를 맺고 그들의 열렬한 지지성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처럼 어려운 조건에서도 놈들을 족치고 큰 투쟁성과를 이룩할 수 있있던 것이다.

3) 남북련회의후 제주도인민들의 투쟁 고조, 5․10단선 파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당시 조성된 내외의 정세를 명철하게 통찰하시여 미제의 단독선거 책동을 짓부시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남북은 모든 애국적력량을 통일단결시킬데 대한 진공적이며 적극적인 조치로서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조선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분렬을 꾀하는 미제의 책동을 폭로하시고 우리 인민 앞에 나서고 있는 최대의 민족적 과업은 미제가 감행하려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고 민주주의적 원칙에서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워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를 위하여 전민족이 거족적인 반미구국투쟁을 벌릴 것을 강조하시었다.

남북련석회의는 민족분렬의 엄중한 위기가 닥쳐온 준엄한 력사적 시각에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이 한 결 같이 떨쳐나 미제의 ‘단선단정’음모를 파탄시키기 위한 거족적 투쟁을 더욱 힘 있게 벌려 나갈 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력사적인 4월 남북련석회의가 있은 후 4월말∼5월초에 이르러 ‘5. 10단선’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항쟁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제주도인민들은 전체 조선인민들과 함께 4월 남북련석회의의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투쟁대책을 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매국배족적인 통치배들은 ‘선거놀음’을 기어이 성사시켜보려고 ‘5․10토벌공세’를 준비하였다. 미군정과 그 앞잡이 경무부는 본래의 감찰청을 경찰국으로, 대정, 성산 지서를 경찰서로 승격시키고 제주, 서귀, 대정, 성산 등의 4개 경찰서를 증설 확대한 다음 인민무장대와 애국세력을 몰살하기 위한 ‘토벌대’를 조작하였다.

놈들은 그 기동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분대, 소대, 중대, 대대로 편성하고 별동대란 것을 특별히 두었다. 도내에는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각 경찰서, 지서, 작전명령소, 지휘소, 련락소들이 설치 되었다. 도내의 말단행정단위에 이르기 까지 경찰지서, 출장소, 파견소, 주둔소 등을 신설 확장하여 거기에 종래의 수배에 달하는 1,500여명의 완전무장한 성원들과 깡패들을 배치하여놓았다. 이와 함께 적들은 3,000여명의 괴뢰국방경비대 병력과 수천 명의 무장 테로단을 동원하였다.

제주도 전역에는 중무장한 반동경찰이 수많이 늘어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동원되었으며 특별히 편성한 테로단인 ‘향보단’까지 배치하였다. ‘단기작전’, ‘지역별 토벌전’을 벌리기 위하여 매개 지역과 산, 부락을 빈틈없이 ‘토벌대’로 뒤덮어놓았다. 미제침략군의 엄호밑에 제주도전역에는 기동사찰대가 배치되었으며 경찰서 앞에는 기관총 좌지가 설치되고 반동기관과 ‘선거장’앞에는 바리케트를 쌓아놓았으며 골목골목에는 무장경찰과 테로단이 배치되었다. 놈들은 또한 제주도를 바다로부터 완전히 봉쇄하고 ‘야간통행금지’, ‘불필요한 외출금지’, ‘최단거리 이외의 통행금지’ 등을 강요함으로써 인민들의 손발을 얽어내놓으려고 하였다.

놈들은 대중적 학살과 ‘초토화 작전’을 배합하면서 수많은 부락을 불태워버리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갈 이 교시하시였다.

“‥놈들은 류혈적 폭압으로도 제주도인민들의 봉기를 진압하치 못하였으며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는 선거가 완전히 파탄되였습니다.”(김일성저작집 4권, 377페지)

제주도인민들은 적들의 탄압만행과 토벌공세를 맞받아 주도권을 틀어잡고 4월말~5월 초부터는 유격대의 무장투쟁, 대중적 폭동과 시위 등 각종형태의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선거자등록’의 거부, ‘선거자명부’의 탈취, ‘선거사무소’의 습격파괴, 경찰과 반동의 처단 등과 같은 투쟁을 벌려나갔다.

이에 대하여 ‘제주신문’ 특별취재반은 자기들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주도 내에서의 투표소 피습은 4월 18일 도평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새벽 4시께 투표소가 피습, 선거명부가 탈취당한 사건이 그것이다. 19일에는 신촌투표소가 습격당해 역시 선거명부를 잃었으며 21일에는 동일리 선거관리위원장 강왈침이 자기 집에서 피살되었다. 그의 집에 보관 중이던 선거관련서류도 없어졌다. 4월에만도 이밖에 북촌과 모슬포, 이호, 내도, 화북 마을 선거 관리소나 선거요원들이 련이어 피해를 입었다. 대정면사무소에 경찰복으로 위장한 무리들이 침입, 당시 숙직 중이던 면직원 박근식 등을 살해한 것은 4월21일 밤과 22일 새벽께로 알려지고 있다. 4월 28일에는 화북3구 ‘황새와’마을 선거관리위원장 오두현이 산사람들에 의해 랍치되었는데 마을에서 2키로 가량 떨어진 소나무밭에서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와 투표소에 대한 습격은 5월로 접어들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G-2보고서는 이 무렵 ‘선거사무소에 대한 많은 공작으로 인해 선거관리 위원들은 투표용지와 투표함을 투표장소로 배치하는데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인민유격대는 적에 대한 습격작전을 더욱 맹렬하게 벌렸다. 5월 7일에 애월면 장전과 수산사이의 소나무수림에서 인민유격대 10여명이 조병옥이 소위 토벌대란 명목으로 보낸 경찰전문학교 학생 100명과 5시간이나 격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경찰전문학교 학생 22명이 처단되고 남은 자들은 모두 도주하였다. 그 후 놈들은 도저히 전투를 못하겠으니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면서 3일간이나 버티기 투쟁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공포 속에서 제주도를 떠나고 말았다 한다.(로동신문 1949. 4.3)

인민무장대는 5월 8일 도순, 화순, 상, 하 가리에서 적들을 맞받아 치렬한 전투를 벌리고 놈들에게 섬멸타격을 주었다. 애국적 인민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원쑤들에 대한 항거의 기세를 높이면서 삶과 민주주의와 인권옹호를 요구하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영웅적으로 싸우는 무장대와 협동하여 과감하게 벌려나갔다.

인민들은 낮에는 벼락데모 밤에는 홰불시위를 벌렸고 여러 공장, 기업소의 로동자, 사무원과 함께 적 통치기관의 하급관리들까지 파업과 태업으로 선거를 반대하는 자기들의 립장을 표시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놈들의 어마어마한 탄압망, 정탐망을 뚫고 도처에서 과감한 시위를 벌렸다. 시위 군중들은 분노와 저주에 찬 함성을 지르며 삐라를 살포하였다. 이러한 대중투쟁은 무장대의 엄호 하에 매일 진해하였다. 도청, 군청, 경찰서 등 관공서들과 국방경비대 병사들에게까지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삐라,벽보, 전단 등 문건들이 살포되었다. 이것은 놈들로 하여금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제주도에 파견된 국방경비대 제9련대 병사들 속에서도 반미애국투쟁 기운이 높아졌다. 반동통치가 낳은 부패한 현실을 증오한 9련대의 일부 애국적 군인들은 5․10망국단선은 반동적인 선거이기 때문에 마땅히 분쇄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미제와 매국노들의 손발로 되여 있는 경찰테로단들의 살인 만행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인인들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여 나섰다. 이들은 제주, 서귀, 대정 등지의 민가에 정보보의 간판을 내걸고 인민들과 련계를 취했다. 그들은 적들의 야망을 격파하기위하여 유격대와의 협동작전을 전개할 준비태세를 취하였다. 련대병영 내에는 매일과 같이 “당신들은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탄압 살해하는 미제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의 손발이 되지 말라”,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로 학살하는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들과 함께 반미애국투쟁에 궐기하라”, “인민들을 탄압 학살하는 미군 경찰 테로 분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리라”는 등의 격문, 호소문이 수많이 뿌려졌다. 애국적인 일부 군인들은 이와 같은 구호를 은연히 내걸고 인민들의 투쟁을 방조하여 나섰다. 그 결과 경찰대와 국방경비대와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더우기 5․10망국단선을 며칠 앞두고 인민들과 유격대의 반항투쟁이 보다 발전하여가는 정세 속에서 9련대장은 련대 내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미봉책의 하나로서 유격대와 경찰대와의 3자회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경찰대에 “동족살륙적인 범죄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권유해 나섰다. 그러나 미군과 괴뢰두목이 회담을 반대하여 결국 파탄되게 되었다.

그러자 9련대장은 유격대 측에 량자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무장대 대표 김달삼과 9련대장 사이에 량자회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회담에서 9련대장은 다음과 같은 유격대 측의 요구조건에 응하였다.

첫째 단선단정반대, 둘째 경찰 완전무장해제와 토벌대 즉시철수, 셋째 반동 테로 단체 즉시 해산과 서청원 즉시 철거, 넷째 피검자 즉시 석방과 비법적인 검거, 투옥, 학살 즉시 중지 등. 이 인민의 요구는 미제와 리승만 역도의 방행책동으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경찰대와 국방경비대 호상간 갈등이 격화 되였으며 그들 사이는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국방경비대의 일부 애국적 병사들은 그 후에도 계속반미 애국투쟁에 합류하였다. 9련대 문상길 중대는 유격대와의 련계를 긴밀히 취해왔다. 4월 27일 약 100여명의 애국병사들은 중대장의 지휘 밑에 대촌병사의 군기고를 해쳐 수많은 무기와 군수품으로 장비하고 대정, 보성, 안덕, 중문, 서호, 신효, 법환 등지의 토벌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그들은 계속하여 서귀 ‘토벌군’에 타격을 가한 다음 적들의 아성인 제주성을 포위공격하고 단번에 온 섬을 해방시키려고 작정 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사변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완전무장한 채 근거지로 넘어와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애국적 병사들이 이러한 의거는 다른 병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탈주, 리탈, 의거, 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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