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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헤리티지재단 보고서 “광주사태 재조명” (번역 및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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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1-04 14:27 조회18,9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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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헤리티지재단의 “광주사태 재조명”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REVISITED)


1985년 9월16일자 헤리티지 재단 아시아 연구센터에서 발행한“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south korea's kwangju incident-revisited)은 소요 첫날부터 뜬소문이 돌아다녔다고 기술하고 있다.“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첫날에는 사람들이 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40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는 소문을 들은 시민들도 있었다. 신군부가 군인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며칠씩 밥을 굶긴 후 마약을 투여해 가지고 광주로 보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바로 이런 유언비어를 들은 시민들이 흥분하여 시위에 가담했던 것이다. 5월20일, 폭도들은 시청과 TV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강제 징발한 택시와 버스가 시내를 질주했고, 4명의 경찰관이 차량에 깔려죽었다 ”(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 4쪽)  


“처음부터 시위를 조직했던 학생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극렬분자들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알고 ”이건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는데“하며 아연실색했다. 당초에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시민들 역시 5월22일에는 ‘이건 아닌데’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60명이 나서서 광주사태수습시민위원회가 설치됐다.”(남한의 광주사건재조명, 6쪽) 


“사망자는 191명, 기독교 교회목사인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광주시만 포함 49명이 시체확인 작업에 참여했으며, 사망자수는 정확히 191명이라고 헤리티지 조사팀에 말해주었다. 이중 50명은 광주교도소를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총격전에서 발생했다. 그런데도 사망자에 대한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1,000명 이상, 심지어는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사망자는 2천명이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남한 광주사건재조명, 7쪽)


“미국이 신군부와 공모하여 광주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광주사건 진압을 미국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 광주사태를 진압하는데 한국정부가 군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은 한국정부 고유의 권한이며, 미군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 미국이 간여해야 하는 경우는 북한이나 외국의 침공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이런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광주사건의 아픔을 치료하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재생산하여 한미우호관계를 이간질 하려는 사람들이다.”(남한 광주사건재조명, 10쪽))    


광주사건은 한국에서 191명의 생명을 앗아간 일대 민중반란(civil uprising) 사건이었다(보고서 1쪽). 아래에 보고서의 핵심만 요약한다. 


                       <서론>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광주사태를 강력한 도구로 활용했다. 반대자들은 정부가 사전에 모의하여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꼼꼼히 조사한 결과 이러한 주장은 과장된 것이었다.


                      <원인>  


10.26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잠정적인 대통령이 됨으로써 격렬한 정치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숙청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야당인 신민당은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당권경쟁이 치열했다. 1980년4월, 김대중은 당내 지지세력이 미약함을 파악하고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당 밖에서 찾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정치 불안은 더욱 격심해갔다. 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곧바로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거리투쟁으로 나갔다. 탄광노조가 폭력시위를 일으켜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16일, 김대중은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서울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투쟁을 고무하는 연설을 했다. 4월 중순에 노동시위가 경찰관을 살해했다. 5월15일 서울의 학생시위가 또 한사람의 경찰관을 살해했다. 곳곳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5월16일, 학생조직 대표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5월22일을 기해 계획된 전국규모의 시위를 지지한다는 결의를 했다.    


폭력의 위험수위가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최규하 대통령이 5월17일 자정을 기해 계엄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대학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계엄군 배치계획에 따라 7공수 여단의 33 및 35대대가 광주시의 북쪽(금마)에서 광주사내로 이동했다. 이 때 광주시 인구는 80만이었다. 여러 곳에서 남한을 뒤흔들던 시위는 끝이 났음에도 유독 광주에서는 폭동(riot)이 일어났다.


                        <격돌>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맥명의 학생이 투석을 하여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켰다. 다음 날 시위자들은 경찰서와 방송국2개를 습격하고 재산을 파괴했다.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위자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적대적이었다. 백병전을 본 사람들은 두 가지로 말했다. 한쪽은 경찰과 군인들이 너무 난폭했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목격자들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시민과의 격돌을 피하였다고 증언한다. 극심한 격돌로 부상자들이 속출했지만 초기의 격돌 2일간의 사망자는 2사람뿐이었다. 폭력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지역삼정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중앙정권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전라도를 차별하고 경상도에만 혜택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격돌이 발생한 것은 김대중을 체포하는 등 계엄확대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조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요 첫날부터 뜬소문이 돌았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다. 첫날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지만 이날 소문은 40명이 죽었다고 했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해괴한 소문에는 군인들에게 밥을 며칠 간 굶기고 마약을 투여하여 군인을 흥분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민들은 이 뜬 손문을 믿고 시위에 동참했다.


5월20일 폭도들(rioters)은 시청과 텔레비전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렸다. 도청건물 앞에서는 이를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했다. 정부당국도 제어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악화되었다. 이런 사태는 5월21일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해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하면서 사태는 불길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았다. 장갑차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되었다.


동시의 인접지역 소도시에서도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되었다. 화약재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TNT도 탈취했다. 오후에는 폭도들이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해놓고 군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장갑차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반란의 규모가 확대되자 군인들은 5월21일 오후 6시에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이로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갔다.


최초에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극렬분자들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알고 아연실색했다.“이건 우리의 의도가 결코 아니다.”당초 시민들은 폭넓은 지지를 표했으나 폭력이 극심해지자 충격을 받았다. 5월22일에는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60여명의 유지가 광주 사태수습시민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들은 정부 당국과 난동군중 중간에 서서 협상을 맡아 나설 것을 자청했다.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 되었다. 5월23일까지 사태수습시민위원회는 약간의 성과를 거두는 듯 했고 광주시에는 평온이 찾아오는 듯 했다. 약간의 무기가 반납되고 무장시위대 34명이 자수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사태는 악화방향으로 돌변했다. 선동분자들이‘앞으로 며칠만 버티면 정부는 쓰러진다.’고 외쳤다. 산발적 접전이 도시주변에 배치된 군 병력을 상대로 재발했다. 다음날에는 또다시 시내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5월26일 계엄군은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몇 개 방향에서 시도를 했으나 시민군은 격렬하고도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 시민군은 체계를 갖춘 지휘체제를 확립하고 광주시를 더욱 튼튼히 틀어쥐고 있었다. 계엄당국은 드디어 행동을 결심했다.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 극소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했다. 공중정찰에 의한 사진뿐만 아니라 광주시내에 있는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함으로써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그리고 5월 27일 시민들이 잠든 새벽 1시에 계엄군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병력을 소부대단위로 편성하고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대결상황이 계속된 전 기간 중 정부와 계엄당국은 협상에 의한 사태수습을 애써 시도했다. 5월22일에는 국무총리가 광주에 와서 질서회복을 호소했으며 5월22일에는 최대통령도 광주에 와서 같은 호소를 되풀이 했다. 광주시 전역에 무기반환을 호소를 하는 전단이 살포되고 헬리콥터와 비행기 차량이 확성기를 달고 호소문을 전파했다. 계엄당국은 광주시민위원회에 협력했으며 시민위원회를 중간에 두고 폭도 대표들과 5회에 걸쳐 접촉을 하면서 협상을 시도했다. 신뢰회복을 위해 연행했던 시위자들을 여러 차례 풀어놓기도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투항자가 있었고 무기도 다소 반환되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후유증 정부가 사망자 191명, 부상자852명(중상자122명)이었다고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은 웃기는 자료라 하면서 믿지 않았다. 이 불신은 일부 외신 보도와 반정부 인사들의 언동에 기인한다. 외신보도는 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면서도 불신하는 내용들을 보도했다. 어떤 외신은 적어도 1,000명은 죽었다고 잘라 말했고 어떤 이는 2,000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5월27일 이후 중간에서 협상에 참여했던 시민위원회는 계엄사와 합동으로 철저한 시체 확인과 검시 작업에 들어갔다. 민간의사들, 군의관들, 성직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광주시민을 합하여 49인이 조사와 확인 작업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오래 거주한 기독교 목사인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본 헤리티지 재단과 면접한 자리에서 자신이 사망자 시체 확인을 했다고 밝히고 191명의 숫자는 정확한 것 이였다고 강조했다.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사한 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광주교도소에서는 50명 이상이 죽었는데 이것은 중무장한 폭도들이 정부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하면서 이어진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이다. 정부는 광주지역 원호단체들과 협조하여 모든 사망자 가족에게 16,000달러 상당을 각각 지불했으며 모든 부상자들에게 치료비를 보상 했다. 기타 시민들에게 비상식량과 연료비조로 200만 달러 상당이 지원됐다. 파괴된 가옥과 영업소에 대해서는 수리와 복구를 위한 지원 예산이 집행됐다. 구속된 시민들은 2,522명이며 이중 404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3명에 대해 사형, 7명에 대해서는 종신형이 선고 되었으나 추후 형량은 모두 감경 되었고 그 후 사면조치로 풀려 나왔다. 현재 광주 사건으로 복역 중인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미국의 역할>


반대자들은 미국을 한국정부와 공동 모의했다고 비난한다. 광주시에 투입된 한국군 부대의 사용에는 미국의 사전허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한미연합군은 북한이나 기타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국내목적에 한국군 병력을 사용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고유 권리다.


                        <결론>


광주사태는 한국정부가 죄 없는 전라도 도민을 학살할 의도와 목적아래 사전에 모의해서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며 미국이 게재된 사건도 아니다. 이 반란사태(insurrection)의 규모가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근소한 것이며 이 사실은 한국정부가 인명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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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광주사태 재조명" 영어원문

September 16, 1985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 Revisited
by Plunk, Daryl M.
Asian Studies Backgrounder #35
(Archived document, may contain errors) No. 35 September 16, 1985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 REVISITED

INTRODUCTION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occupied 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Building in Seoul for four days this May, demanding a U.S. apology for its alleged complicity in what is known as the "Kwangju incident" of May 1980. The Kwangju incident was in fact-a major civil uprising in the Republic of Korea (ROK) that resulted in the death of 191 Koreans. The student action at the USIS building reveals that even after five years, the violence in Kwangju continues to haunt South Koreans. In fact, the uprising has become a powerful. political weapon for opponents of the current government of President Chun Doo Hwan. During the National Assembly session this June, for iristance, the opposition New Korea Democratic Party demanded an official investigation of the incident. Despite explanations by the government, many critics continue character- izing the Kwangjulincident as a brutal and premeditated massacre of civilians by the government. Critics accuse the Chun Adminis- tration of a coverup, claiming that the official death toll of 191 is vastly underestimated. Yet a careful investigation of the facts reveals that%the Kwangju uprising has suffered from great exaggeration and dis- tortion, including the allegations of a U.S. role in the matter. The Kwangju tragedy left deep scars on the psyche of all Koreans. Unintentional or deliberate hyperbole, however, cruelly and needlessly prolongs the national grief. It is time that the incident be eval!uated freshly and dispassionately.'

This paper is based largely on personal interviews during June and July 1985 with South Korean government officials, National Assembly members, military officers, Kwangju residents, and Kwangju Citizens' Committee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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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OF'THE TROUBLE

The regime of President Park Chung Hee, which had begun in 1961, unexpectedly ended in October 1979 when he was assassinated by a disgruntled aide. Martial law was declared, Prime Minister Choi Kyu Ha became interim president, and the stage was set for an intense political struggle. While the ruling Democratic Republican Party wrestled with the problem of purging corrupt members who had exploited their positions, the opposition New Democratic Party was racked by bitter infighting between former party chief Kim Dae Jung and the new leader, Kim Young Sam. By April 1980, it became clear that Kim Dae Jung lacked the support to recapture the leadership post. He announced he.would seek his political base elsewhere.

Political uncertainty intensified as South Korea's economic situation began to deteriorate.' For the first time in 16 years, the economy stopped growing. Tensions heightened when university classes resumed and students took to the streets demanding an end to martial law. On April 16, Kim Dae Jung, in violation of martial law, addressed a huge student rally in Seoul. Earlier, a mine workers' protest resulted in the death of a policeman. On May 15, another policeman.was killed during a student riot in Seoul, and large-scale demonstrations erupted in several other major cities. On May 16, student association representatives met at Ewha University in Seoul and endorsed a resolution calling for nationwide demonstrations on May 22.

in response to the rising level of violence, President Choi imposed a heightened state of martial law at midnight May 17. Universities were closed, and political activity was prohibited. Kim Dae Jung was arrested and charged with inciting riots by funneling money to student demonstrators and conspiring to over- throw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explained these steps were necessary "to restore public peace and order."

The extension of martial law included the deployment of troops to major cities. As part of this plan, the 33rd and 35th Battalions of the@7th Airborne Brigade were moved into Kwangju from an area north of the city. Kwangju, with a population of about 800,000, is the capital of South Cholla Province, the home district of Kim Dae Jung. The demonstrations that had rocked South Korea for weeks ended guickly in most areas of the country. Rioting in Kwangju, however, continued.

CONFRONTATION On the morning of May 18, several hundred rock-throwing students clashed with troops at Kwangju's Chonnam university. That afternoon, the students marched into downtown Kx4angju where confrontations with the authorities continued. Violence escalated the next day, when the demonstrators vandalized police property and two television stations and set fire to a number of veh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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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nitial stage of the trouble was characterized by fierce hand-to-hand fighting between police and military author- ities and the demonstrators. Many demonstrators were armed with rocks and iron pipes and were extremely hostile and aggressive. A number of observers charged the policemen and troops with excessive brutality, but other eyewitnesses noted that "for the most part, the army avoided an open fight with the rioters.,,2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Regional tension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escalating violence. Many citizens of Cholla Province, located in the southwestern section of the peninsula, feel their region has suffered discrimination by the central government for hundreds of years. Some claim that the late President Park, a native of neighboring Kyungsang Province, deliberatedly neglected Cholla's economic development while fostering progress in his home region. The arrest of Kim Dae Jung and the clashes between troops and Kwangju citizens fueled local speculation that the extension of martial law was aimed specifically at Cholla Province. On the first day of the riots, the rumor spread that soldiers of Kyungsang Province had come to kill the Cholla people. There were reports that as many as 40 people had been killed during the first day of strife; in fact, no one had been killed. Some residents were told that Kim Dae Jung had been executed. The most bizarre rumor was that, to make them more fierce, the troops had been starved for several days and given drugs before coming to Kwangju. Some of these tales were believed by residents, prompting many nonstudents to sympathize with the rioters.- In addition, the specter of troops and police battling and arresting young people on the streets of Kwangju quickly turned public opinion against the authorities. By May 20, thousands of students and other citizens had taken to the streets. Rioters torched City Hall and a television station. Commandeered busses and taxis sped wildly through the streets. At the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four policemen were killed when a car crashed into a police barricade. The situation rapidly was getting out of the authorities' control. The violence continued into early morning May 21. Events took an ominous turn when rioters attacked an army reserve base and seized rifles, ammunition, and other weapons. About 9 a.m., an automobile factory was sacked, and several hundred cars were stolen along with a number of armored personnel carriers. Other military and police facilities were raided in nearby villages and hundreds of firearms were taken. A large amount of TNT was seized from an explosives manufacturer.

2 Time, June 2, 1980,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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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the afternoon rioters installed a machine gun on the roof of a downtown building and fired on troops. On the outskirts of the city, meanwhile, soldiers guarding the Kwangju Prison were attacked by waves of well-armed rioters in armored personnel carriers and fire trucks. Apparently aimed at freeing the prison's inmates, the attacks continued until the-next morning. In the face of a large-scale insurrection, the troops were forced to withdraw from Kwangju at 6 p.m. on May 21, leaving the entire city in rebel hands.

Some of the student leaders who initially had organized the demonstrations-were stunned. They had lost control of events to .much more radical and violent elements. Said one university student: "This is something we never intended.113 While popular support for the demonstrators at first was widespread, most Kwangju citizens were shocked by the escalating violence. on May 22, a Committee for Settling the Kwangju Turmoil was formed by a group of about 60 Kwangju civic leaders, including doctors, lawyers, journalists, and religious figures. The group offered to negotiate between the authorities and the rioters. The Com- mittee also called on all armed citizens to surrender the 5,008 rifles, 395 shotguns, 288,680 rounds of ammunition, 526 hand grenades, and 3,000 boxes of dynamite believed to be in the public's hands .4

By May 23, the'Committee seemed to be making progress. Relative calm settled over the city. Some weapons had been turned over to the authorities, and 34 armed rioters had sur- rendered to the Martial Law Command.

The following day, the situation worsened dramatically. At a large downtown rally, some rebels proclaimed that, if they could hold out for several more days, the ROK government would fall. Scattered fighting occurred along the troop perimeter around the city. Another large demonstration took place the next day. Although the Committee continued its negotiation efforts, it had reached the limit of its influence.

On May 26, martial law troops made several advances toward Kwangju, encountering fierce and well-organized resistance. The "citizens army" was tightening its grip on the city and developing a systematic command structure. In response, martial law author- ities decided to act.

Given the extent of the insurrection, the retaking of Kwangju by martial law troops was a well-planned and well-executed opera- tion designed to minimize casualties and property damage. Using aerial reconnaissance photographs and intelligence gathered from

3 Ibid., p. 38. 4 Korea Herald, June 9, 1985, p.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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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nts inside the city, the authorities pinpointed rebel strong- holds. On May 27 at 1 a.m., when most citizens were asleep, the troops moved in. Using small units and carrying out surgical strikes, the mission recaptured the city in a few hours. Only 17 rebels were killed. Throughout the confrontation, the ROK government and the Martial Law Command vigorously sought a negotiated settlement. On May 22, for example, the Prime Minister came to Kwangju appeal- ing for order, as did President Choi on May 25. Leaflets calling on citizens to put down their weapons were scattered throughout the city. Helicopters, planes, and vehicles equipped with loud- speakers broadcast appeals. Martial law authorities cooperated with the citizens' committee. Five times during the incident, the authorities met with rebel representatives using the Committee as mediator. To show its good faith, the Martial Law-Command on several occasions released groups of demonstrators who had been arrested. Although a number of rebels surrendered and some weapons were turned over, the negotiations were largely unsuc- cessful.

THE AFTERMATH

The most controversial issue concerning the Kwangju uprising is the number of casualties. The official death toll announced after a ten-day investigation was 191--comprising 164 civilians, 23 soldiers, and four policemen. A total of 852 were injured, 122 seriously. Yet these official figures have been ridiculed as too low. This stems' from reports by some foreign press sources and critics of the ROK government. News accounts frequently cited the official number but stated that "others say the figure actually was much higher.115 Some reports said bluntly that "at least 1,000 people were killed.,,6 Others claimed that "no reputa- ble source puts the death toll . . . at under 1,000 and many estimates are closer to 2,000.117 These claims rest on specu- lation and are completely unsubstantiated.

Unlike other aspects of the complex and highly emotional Kwangju issue, the facts of the casualty rate are clear. When the incident ended on May 27, members of the citizens' committee involved in negotiations were invited by the Martial Law Command to participate in counting the dead and performing autopsies. A group of 49 civilian and military doctors, religious leaders, lawyers, and other Kwangju citizens was involved. A Christian minister and long-time resident of Kwangju, who acted as chairman

5 Washington Post, May 24, 1985, p. A21. 6 Sanford J. Ungar, "A Korean Exile's Long Journey Home," New York Times Magazine, December 23, 1984, p. 32. 7 Christopher Hitchens, "Going Home with Kim Dae Jung," Mother Jones, May 19 85,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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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citizens' committee, told The Heritage Foundation that he participated in the death count and stressed that the reported toll of 191 deaths is correct.8 Most casualties in Kwangju resulted from fierce fighting between two heavily armed camps and not from innocent citizens being cut down in the streets by troops.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n the tragedy's aftermath, the government, together with a Kwangju-based relief organization, gave about $16,000 to the families of each of the dead. The government also paid medical expenses for all those wounded. Nearly $2 million was spent'on emergency food and fuel for needy citizens, and assistance programs were initiated to help bring Kwangju back to normal. Grants were given to Kwangju citizens to reconstruct destroyed houses and businesses. Of the 2,522 citizens arrested during and immediately fol- lowing the uprising, 404 were tried in military courts. The most serious charges resulted in death sentences for three and life terms for seven. All these penalties subsequently were reduced. The remainder ofthose tried in military courts received varying prison sentences or conditional releases. All eventually were released and granted amnesty. No one arrested in connection with the Kwangju uprising remains in prison.

THE ALLEGED U.S. ROLE

Critics of the ROK government's handling of the Kwangju riots recently accused the U.S. of complicity. This charge stems from the unique relationship between the ROK military and the 40,000 U.S. troops in South Korea, which function as. a joint force under the United Nations Command (UNC). The U.N. Commander in South Korea is an American general who concurrently commands U.S. forces in the ROK. Some interpret this relationship to mean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must secure formal permission from the U.N. Commander prior to using any ROK military forces. This has prompted supposition that the U.S. approved the use of ROK troops in Kwangju.

This supposition is incorrect. -Former U.S. Ambassador to South Korea William Gleysteen explains that, as long as the use of ROK troops creates no "threat to national security," Seoul need only "notify" the U.S. of its actions.9 During the Kwangju uprising, the ROK government took care to inform the U.S. of its decision to redeploy its 20th Division and to insure that its

Interview, July 16, 1985. Interview, August 26,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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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s did not compromise national security. Ultimately, the ROK government's right to use those forces was a function of its sovereignty. The U.S. does not and, indeed, should not have absolute authority to command the ROK military. U.S.-ROK joint forces agreements and the UNC itself are designated specifically to guard against provocation or invasion by communist North Korea or any other external thre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has the authority to use its military for domestic purposes. As a matter of historical record, Ambassador Gleysteen told The Heritage Foundation that the U.S. Embassy was not aware of the seriousness of the Kwangju situation until "roughly two days" into the riots.10 On the last day of the crisis, the retaking of Kwangju was accomplished by elements of the 20th ROK Army Division based near Seoul. Ambassador Gleysteen accepted the decision, calling it a "highly sensible action," given the fact.that these troops were well-trained and experienced in riot control." The U.S. Embassy's acceptance of the troop redeployment did not constitute "approval" or complicity.

CONCLUSION

The events of May 1980 were not a deliberate plot by the ROK government to massacre innocent civilians in South Cholla Province. Nor was the U.S. involved in the incident-. Given the extent of the insurrection, the death toll was remarkably low--a fact that reflects the ROK government's efforts to minimize casualties. Those who continue to distort what happened'at Kwangju should have their motives questioned. They seem determined to prevent the wounds from healing and to drive a wedge between the U.S. and the Korean people. The ROK government, by contrast, has been trying to put the Kwangju incident to rest and to heal the country's physical and emotional wounds.

Daryl M. Plunk Policy Analyst

10 Ibid. 11 @_hin Dong-A Magazine, Seoul, Korea, July 1985.



http://www.heritage.org/Research/AsiaandthePacific/asb35.cfm


2010.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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