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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김익렬의 미스테리 (2)(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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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1-03-22 19:49 조회12,9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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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익렬 중령

2. 김익렬의 4.3

3. 김익렬의 난투극

4. 김익렬 난투극의 비밀

5. 김익렬의 기고(寄稿)와 유고(遺稿)

6. ‘4.28 평화회담’은 없었다.

7. ‘평화회담’이 아니라 ‘면담’이었다

8. 붉은 9연대

9. ‘평화’에 속은 대가(代價)

 

 

2. 김익렬의 4.3


 4.3이 발발했을 때 9연대는 꿈쩍도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이 내건 명분은 4.3은 제주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치안상황’으로 간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이들의 명분은 중립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진압협조를 요청했을 때에도 경비대는 묵살했고, 상부로부터 진압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김익렬은 선(先) 선무(宣撫)를 내걸고 꾸물거리다가 세월만 보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은 내부적으로 두 가지 연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4.3이 터지자 김익렬이 취한 조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주출신의 사병들을 사복으로 입혀 휴가 명목으로 부락으로 내보내 정보를 수집해오라는 것이었고, 하나는 보급관이던 전순기 대위를 긴급전령으로 경비대 총사령관이던 송호성 장군에게 보냈다. 상황에 대한 9연대의 행동에 관한 명령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대로 귀대한 사병들은 이런 정보를 김익렬에게 내놨다.


 ‘폭동발생의 주원인은 밀수혐의 등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와 고문치사 강간 등에 대한 보복에서 비롯되었다. 폭도들의 최초의 목적은 경찰에 구치되어 매일같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도들의 성분은 주로 그들 가족들이다. 해방직후 ‘제주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편승하여 이들을 선동하고 조직‧지휘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폭도의 대부분은 그들을 따르면 가족을 구출하게 될 것으로 믿어 가담하게 됐다.1)

 

 전순기 대위가 경비대 총사령부로부터 가지고 온 지시사항도 경비대의 행동을 금지하는 명령이었다.


 ‘지시내용은 대략 제주도 폭동사건은 치안상황이며 경찰의 책임 상황이므로 상부 명령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중략) 연대장이 경솔한 판단이나 개인적인 영웅심이나 공명심으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도록 엄중히 금하며, 명령 없이 행동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므로 부대단결과 훈련이나 잘하라는 내용이었다.’2)


 9연대의 제주 출신 사병들이 가져온 정보는 치명적일 정도로 부정확한 것이었다. 폭도들의 주 공격 대상은 경찰과 서북청년들이 아니라 경찰과 제주지역의 우익인사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단정반대’였다. 4.3 하루 동안 발생한 피해는 경찰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사망 8명, 부상 19명이었다.

 그리고 폭도들이 4월 3일 새벽에 공격한 12개의 경찰지서에 수감되어 있던 피의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폭도들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을 공격하게 됐다는 정보는 순전히 유언비어였다.

 

 이런 유언비어에 가까운 정보가 왜 김익렬에게 들어오게 된 것일까.

 9연대에 소속된 제주 출신 사병들은 거의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그 중에는 남로당 프락치들도 있었다. 당시 9연대에는 두 개의 남로당 프락치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리하는 중앙당 프락치와 전남도당에서 관리하는 도당 프락치였다. 제주 출신의 사병 프락치들은 도당 소속이었다.

 

 이들 프락치들은 장차 4.3폭동에서 경비대의 정보를 인민해방군에게 알려주고, 무장대에게 무기를 공급하며, 9연대장을 암살하고 제주인민해방군에 가담하는 등, 4.3폭동을 확대 증폭 시키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9연대의 사병들이 김익렬에게 준 정보는 9연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로당을 위한 정보였다. 이런 정보는 국방경비대와 경찰 간에 증오심을 불어넣어 이간질을 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김익렬에게 진압 자제를 명령한 송호성 장군도 정체가 틀려먹었기는 마찬가지였다.

 송호성 총사령관은 육사 3기 입학식에서 “조선 국방경비대는 좌도 좋소, 우도 좋소. 한국군에서 사상적 배경을 문제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환영사를 했었고, 6.25 때 북한군이 남침하자 송호성은 서울에 잔류했다가 인민군에 합류하여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쑤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며 방송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송호성에게 지시를 하달 받았으니 명령다운 명령이 내려올 리가 없었다.

 

 김익렬은 당시에 얻었던 두 가지 정보로서 평생 4.3에 대한 인식을 결정했던 것일까.

 김일렬의 유고에서 보이는 그의 정체성은 별로 선명하지 못하다. 4.3을 관(官)에 대항해 민(民)이 들고 일어선 ‘민중항쟁’ 쯤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서 김익렬은 4.3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을 받아야 하거나, 유고를 쓸 당시에 수정주의나 ‘민주화’라는 좌경적 조류에 몸을 기탁해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4.3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고 앞부분에서는 ‘민중폭동이 공산폭동으로 발전하였다’고 썼다가 유고 말미에 가서는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9연대로 들어오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행위에 대한 ‘해괴한’ 정보에도 ‘사법(私法) 행위로서 일종의 약탈행위였다’고 비판하였다가 나중에는 ‘서북청년단원과 경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 중상모략하는 언행이며, 경비대 군인들을 선동하여 이간시키려는 유언비어라고 판단하였다’고 하는 등, 김익렬의 유고는 시종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러나 4.3 초기에 쓴 다른 자료에서 보이는 김익렬의 정체성은 인생의 말년에 쓴 유고에서 보이는 것만큼 좌경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40여 년이 흐른 후 인생의 말년에서 김익렬은 사상의 정체성을 바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붉은 색이었던 그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가 인생 말년에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김익렬은 한림면(翰林面)에 소재한 한림여관에서 4.3을 맞았다. 제주읍에 공무 차 들렸다가 그의 일행들과 꿩 사냥을 하면서 부대로 귀대하던 중 한림에서 날이 어두워 여관에 일박하게 되었다. 한림은 4.3 발발 당시에 인민해방군으로부터 습격당한 12개 지서 중 한 곳의 소재지였으며, 김익렬이 묵었던 여관도 공교롭게도 습격 대상 중의 한곳이었다. 한림여관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 위문단이 숙박하고 있었다.

 

 습격 당시 한림여관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총알이 날아들었고 김익렬 일행은 간신히 여관에서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다른 곳보다 피해가 적었던 한림지서에서는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우익인사 6명이 부상당했다.

 김익렬은 한림지서와 거리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부대로 귀대할 때는 도로의 전주와 전선들이 대부분 절단되어 넘어져 있는 심각한 상황도 목격했다.

 

 4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폭도들의 습격에 ‘폭도의 천하가 된 듯한’ 세상도 목격했고, 폭도들이 경찰에 협조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부락 입구나 마을 복판에서 나무에 결박한 후 부락민들을 집합시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폭사시키는 만행을 목격하기도 했다.

 폭도들에게서 벌어지는 이러한 폭력과 만행들을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고 지서에 구금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김익렬은 유고에서 주장했다. 전신주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파괴하고, 사람을 폭살 시키는 행위를 유치장에 갇힌 피의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은 김익렬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거나 아니면 김익렬은 폭도들을 변호하기 위한 황당한 논리를 무리하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유고에서 보이는 김익렬의 ‘이성’은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났고 ‘상식’은 비상식적이다.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김달삼은 월북하여 영웅칭호를 받고 다시 남파되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국군에게 사살된 사실은 이미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김익렬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공명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들이 꾸며낸 조작극’으로 치부해버린다.

 

  김익렬은 심지어 여러 가지 황당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김달삼은 제주에서 사망했을 거라는 추측성 주장이나 김달삼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는 주장, 4.3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역사적 기술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고의적으로 그럴싸하게 허위 날조하여 기술된 것이라는 주장 등은 김익렬의 무지(無知)가 상당하게도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더욱이 4.3 직후에 벌어진 경찰의 진압작전에 대하여 김익렬은 ‘초토작전’으로 평하였다.  일본군이 만주 지역에서 벌였던 ‘부락의 전 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를 소각하여 전 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하는 작전’과 경찰의 진압작전을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악의적이다. 4.3 초기에 ‘초토작전’이라 이름 붙일만한 강력 진압은 존재하지 않았다. 4.3 시기에 벌어졌던 강경진압이라고 할 만한 것은 4.3 중반 시기에 벌어졌고, 경찰이 아니라 경비대에 의한 것이었다.  

 

 유고에서 김익렬의 증오는 세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뿜어진다. 경무부장 조병옥, 초기 토벌사령관이었던 김정호, 9연대장 박진경이다. 세 사람은 조기진압책 주장으로 김익렬의 반대편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4.3의 무대에서 강력한 반공주의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김익렬은 김달삼과 문상길에게는 호감과 애정을 드러낸다.

 폭도사령관이었던 김달삼에 대해서는 미남형이었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만한 청년이었고, 또 대단히 겸손했고 침착하게 보였다고 평했다. 그리고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의 재판을 묘사하면서는 그의 암살 행각을 애국적 결단으로 윤색한 문상길의 주장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문상길이 국가와 민족의 수호자로 둔갑하는 주장을 여과 없이 그의 유고에 싣고 있다는 것은 문상길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뜻이었고, 이것은 김익렬의 이성이나 정체성에 심각한 장애가 있다는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제3자의 말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문상길이가 사형 직전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불렀다고 묘사하는 부분은 완전히 날조에 가깝다. 문상길 중위는 남로당 중앙당의 프락치로서 4.3폭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문상길은 박진경 9연대장 암살의 주범이었고, 경비대의 무기와 사병들을 인민해방군으로 유출시키던 주범이었다.

 

 김익렬은 사망하기 전에 이런 사실을 알았었는지 궁금하다.

 4.3 당시에 9연대 김익렬의 일부 부하들은 제주인민해방군의 한 부대로 편성되어 ‘반동의 아성인 제주읍의 감찰청(監察廳)과 제1구서(第1區署)’3)의 공격에 할당되어 있는 상태였다. 9연대는 4.3폭동을 발발시키는 반란군의 한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9연대는 제주읍의 경찰청과 경찰서 공격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투쟁보고서’4)에는 4.3 폭동을 앞두고 인민해방군 측에서 경비대의 남로당 프락치에게 연락을 취해 동원 가능한 인원을 문의 하였더니, 9연대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9연대의 인원 중 절반 이상은 언제든지 남로당 측에서 동원이 가능한 인원이었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과 중앙당 프락치였던 문상길과의 연락 차질로 4.3폭동 당시 국방경비대의 제주읍 공격은 미수에 그쳤다.

 

 남로당에게 일이 잘 풀렸다면 4.3의 그 밤에 김익렬은 부하인 문상길에게 사살 당하거나, 아니면 제주읍 공격에 앞장 서야 했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처지였다. 문상길이가 여순반란의 지창수였다면 전자의 상황이었을 것이고, 김익렬이가 여순반란의 김지회였다면 후자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문상길이가 4.3에 끼친 해악은 김달삼과 이덕구 다음으로 꼽을 정도로 지대한 것이었다. 문상길이가 죽으면서 만세를 불렀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민공화국 만세였다. 그런 그가 죽으면서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불렀다고 묘사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조롱이자 모독이다.

 

 유고에 나타난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 중장으로 예편하고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사람의 이념적 정체성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김익렬의 정체성은 불그스름한 것이다. 김익렬의 주장은 좌익정권 시대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걸핏하면 공안사건을 고문조작으로 몰아가던 반국가적 좌익 사범의 주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김익렬의 유고가 세상에 나왔던 때는 80년대 후반이다. 80년대라면 4.3에 대한 자료가 일반인들에게 많이 노출되었던 시대이다. 김익렬의 인식과 주장에 존재하는 오류를 확인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70년대에 작성된 김익렬의 유고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류 부분에 대해서 수정할 시간도 충분했다.

 그러나 김익렬의 유고는 오류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논리에 어긋나지 않아 보인다.

 

 장황한 김익렬의 유고에서 김익렬이 주장하는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제주4.3폭동에서 김익렬은 무죄하지 않다. 그는 화평을 주장하면서 화평을 관철 시키지도 못했고, 중요한 진압 시기에 시간을 늦춰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를 했다. 김익렬이가 박해를 받은 것은 없다. 그는 최고수뇌회의에서 폭력을 행사한 하극상에 대하여 문책을 받았을 뿐이다. 오히려 김익렬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애정을 별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대한민국에서 승승장구했고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혔다.

 

 김익렬의 유고가 좀 더 양심적이었다면 그의 유고는 세상에 일찍 나왔어야 했다. 그의 행태는 대한민국의 단물을 평생 동안 빨다가 마지막에는 침을 뱉으면서 떠난 것이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보다 자기의 책임에 대한 통감을 먼저 말했다면 그의 유고는 좀 더 겸손해 보였을 것이다. 김익렬은 유고를 솔직하게 써야 했다. 그의 유고는 거짓말투성이이었고  그가 말하는 4.3에는 진실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인생 또한 믿을 수 없는 것 천지였다.

 

 그의 유고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김익렬의 유고는 꿋꿋한 삶을 살았던 무인(武人)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유고는 4.3의 시기에 비겁했거나 반역적이었던 한 인간이 거짓으로 얼룩진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4.3은 80년대의 좌경적 조류에 몸을 실은 비겁한 기회주의의 산물이거나, 평생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던 비겁했던 인간의 마지막 커밍아웃이었다.


 

1) 김익렬 유고 ‘4.3의 진실’

2)김익렬 유고 ‘4.3의 진실’

3)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감찰청은 경찰청, 제1구서는 제주경찰서.

4)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김달삼이 해주대회에 참석 할 때 보고용으로 쓰기 위해 인민해방군 자체적으로 작성한 문서로서 4.3반란군측이 폭동현장에서  작성한 유일한 문서이다 .  폭동 직전인 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이덕구가 사살될 당시에 소지하고 있던 문서를 당시 이덕구 체포작전을 지휘했던 화북지서장 문창송 씨가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한라산은 알고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이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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