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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의 제주도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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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25 21:32 조회16,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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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공간의 제주도 프로필

 

제주도는 동서 73㎞, 남북 41㎞, 둘레 298km, 면적이 1,840㎢이며 해안을 따라 촌락과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다. 정부부고서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해방직전 제주도의 인구는 22만으로 추정한다 했고, 다른 책들에는 15만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행정상 전라남도에 예속되어 일본인 "오노" 도사(島司)가 다스리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말기인 1945년 초 일본군은 이 섬을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할 목적에 제17방면군 예하의 3개 사단과 1개 여단 등 6만 여명을 배치했고 이로 인해 제주도에는 미군 전투기에 의한 폭격과 함포 사격이 이어졌다. 400여 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주민 500여명이 피해를 입게 되자 마을마다 방공호를 만들게 되었으며, 곡물의 공출과 생필품의 부족하여 주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


해방 직전의 제주도의 인구는 22만 명에 불과하였으나, 해방 후 일본과 중국대륙에서 귀환한 동포들로 불과 1년 사이에 28만으로 급증했다. 오사카와 제주 사이에는 5천톤 급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었고, 공산품의 40%를 포함하여 생필품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는 바람에 빗길이 끊기고 생필품의 부족은 물론 오사카에 나간 가족들이 보내는 돈이 끊김으로서 생활이 갑자기 궁핍해 지기 시작했다.  


해방후 제주도로 유입된 6만 가운데는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 군속, 징용 노무자들 그리고 중국에서 팔로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경험한 좌익계 과격인물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련공산주의 도입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였고, 여운형, 박헌영 등이 모두 소련공산주의인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공산주의 조직은 전세계로 확산돼 나갔다.

일본에서도 일본공산당이 생겼고 수많은 공산당 서클들이 우후죽순으로 번창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지식인이 된 많은 한국인들이 이들 공산주의 조직들에 가담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제주도에도 1921년부터 1931년 사이에 ‘서울청년회’, ‘반역자 구락부’, ‘고려공산청년회’, ‘제주신인회’,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등 수많은 공산조직들이 번성했다.


제주도에는 해방된 지 44일 후인 9월 28일에야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긴 했지만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10일,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의 제주지부(의장 오대진)를 조직하고, 9월 22일에는 이를 개편하여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했고, 동년 12월 9일에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12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했고, 동년 2월 23일에는 민민전(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한 후 산하조직을 확장하여 사실상 제주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인공’의 시대가 제주도에서도 열린 것이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선량하고 순박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섬사람들을 인권이니 토지무상 분배니 하는 달콤한 말들로 선동했다. 동네마다 친척들과 사돈으로 이리저리 얽혀진 제주도 주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다단계식으로 넘어가 순식간에 공산주의로 물들어 갔다. 이에 비해 경찰병력은 매우 적었고, 여기에 더해 미군정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며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치했다. 이러한 관계로 제주도 도민의 8할이 좌경화되고 좌익분자들의 본성인 사회파괴 책동으로 인해 행정기능이 마비됐다.

이에 더해 무장 세력이 판을 쳤다.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봉의 사위인 김달삼(25세)이 제주도 인민유격대(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500명 정도의 유격대가 형성되어 무장을 갖추고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한라산에 매립한 무기와 탄약을 찾아내어 무장을 갖추는 한편, 팔로군 출신들로 하여금 그들이 중국에서 사용했던 유격전술을 가르치게 했다.


1949년 6월 7일, 제2대 유격대 사령관인 이덕구가 경찰에 의해 사살될 때 경찰에 입수된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초기의 유격대 총 인력은 100명, 자위대 인력은 200명, 사령관 김달삼 직속부대로 편성된 특경대(필자주: 우리의 본부사령)는 20명, 전체 320명이었고, 이들이 보유한 병비는 99식 소총 27 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유격대는 김달삼이 직접 지휘하는 기동부대이고, 자위대는 마을에 위장하여 유격대와 군중을 연결하면서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는 반동들을 극비에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유격대와 자위대는 공히 소대-중대-대대로 편제되었고, 각 소대는 10명, 각 중대는 2개 소대로, 각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했다. 유격대는 제주읍, 조천, 애월, 한림. 대정, 중문, 남원, 표선 등 8개면에 조직됐고 무장대는 이로부터 점점 확장되어 갔다. 


가장 왕성할 때의 무장병력은 1,500명 정도였다 하지만 169개 마을에 10명씩 배치된 마을 자위대 1,700명 정도를 총병력은 3,200명 규모에 이르렀을 것이다. 실제로 데로 이들은 남한이 곧 공산화된다는 신념하에 제주도를 장악하기 위해 경찰력과 행정력을 공격하고 그들에 반대하는 우익인사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경찰은 ‘개’로 호칭하고 그들의 노선에 반대하는 우익인사들을 ‘반동분자’라 호칭했다. 


일제시의 제주도에는 경찰이 101명, 일본인이 50명, 한국인이 51명이었다. 일본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제주도 경찰은 1947년 2월 당시 330명으로 충원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는 물론 전국의 경찰조직을 일제가 운영하던 그대로 유지했다. 경찰 임무는 아무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되어 있고 노하우가 있고 보고서를 쓸 줄 알고 그 지역을 파악하고 있는 경험자여야 수행할 수 있다. 해방 후의 문맹율은 90%를 넘는다. 그러니 누가 당시의 치안을 책임진다 해도 일본경찰에서 경험을 쌓은 경찰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20년대부터 일본경찰은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공산주자의를 사냥했다. 공산주의를 무자비 하게 사냥하기로는 미국도 매 한가지였다. 따라서 경찰은 제주도에서 확산되는 공산주의 파괴활동을 천성적으로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3.1사건이 발생하자 타 지역으로부터 100명의 응원경찰이 내도했고 4월에는 550여 명으로 증원됐다. 뒤를 이어, 해방 후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월남한 과격한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 500여명을 제주도에 보내 좌익계열을 제압하도록 하여 좌익계에 대한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폈다. 그리고 1948년 4.3폭동 직후에는 육지로부터 약 1,600명 정도가 증원되어 2,000여명이 됐다. 경찰의 75% 정도가 타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경찰이라는 존재는 당시 제주도 주민들에게 낯선 이방인들로 비쳤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청은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국방군 창설을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5개월 과정을 졸업한 110명의 졸업생 중 87명이 일본군 출신이고, 만주군 출신이 21,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군을 창설하려고 했던 미군정청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국군 창설 계획을 보류하고 그 대신 하지 중장의 재량으로 치안유지 차원에서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1월부터 서울(1연대), 대전(2연대), 이리(3), 광주(4), 부산(5), 대구(6), 청주(7), 춘천(8)에 총 8개 연대가 창설됐고, 같은 해 8월 1일 제주가 전라남도로부터 분리  승격함에 따라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도 제9연대가 창설되었고, 초대 연대장에 장창국 소령이 임명되었다.


각 연대는 그 지역 출신들을 모병하여 병력을 채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9연대는 1947년 3월부터 적극적인 모병활동을 개시했다. 그해 10개월 동안 8회에 걸쳐 많게는 80명, 적게는 40명씩 8회에 걸쳐 1기생으로부터 8기생까지 모병한 결과 1948년 1월 당시의 9연대 병력은 겨우 400명 정도가 되었다. 그 후 제주도 청년들만 가지고는 연대 병력을 채울 수 없어 경상도와 전라도 청년들을 모집함으로써 4.3당시의 연대 병력을 800명 선으로 늘어났다. 창설은 했지만 먹거리를 비롯해 보급이 경찰에 비해 열악하여 수제비를 먹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모병된 청년들 중에는 내무생활이 싫다며 도망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좌파가 득세하던 제주에서는 “국경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경찰은 오합지졸 같다는 이유로 9연대를 얕보았다.     


미군정이 이념중립을 선포함에 따라 국방경비대(국경)는 신원조사 없이 모병을 했기 때문에 국경에는 좌익들이 대거 입대했다. 그리고 남로당은 여기에 프락치들을 잠입시켜 군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공비를 토벌하는 데 있어 극히 미온적이고 저항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초기 한동안에는 토벌에 적극적인 경찰과 마찰이 잦았다. 1947년 4월 22일, 제주신보에는 9연대 모병광고가 게재돼 있었는데 모병의 핵심 문구에는 “국경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익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으로 분열돼 있어 이를 바로 잡을 여력이 없었다.  

 

2011.3.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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