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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라리 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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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28 18:25 조회13,9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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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


오라리 사건은 참으로 하찮은 사건이다. 김익렬도 하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하찮은 두 개의 존재가 좌익들에는 매우 위대한 모양이다. 4.3 폭동사건에 대한 조작과 모함을 하기 위해서다. 오라리 사건부터 요약한다. 1948년 4월 30일, 오라리 부락에 무장 폭도가 출현하여 대동청년단 요원의 부인 2명을 산에 끌고 가 1명은 살해하고 1명은 나무에 묶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다음 날인 5월 1일, 피살자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울분을 참지 못한 청년단원들이 입산한 폭도들의 가옥을 불태웠다. 당시 오라리에는 입산한 무장 폭도들이 꽤 많았고, 불을 지른 가옥은 5세대, 사랑채, 마굿간 등을 합쳐 12 채였다. 이 소식을 접한 폭도들이 또 마을에 출동하여 경찰관 모친 1명을 즉석에서 살해하고 돌아갔다. 4.3의 폭동 사건치고는 비교적 간단한 이 사건을 놓고 좌익들이 마치 큰 사건이나 되는 것처럼 분칠을 했다. 4.30 사건은 여성 2명을 산으로 납치하여 살해한 사건이고, 5.1사건은 그 분풀이로 입산한 폭도들의 가옥을 태운 사건이다. 그리고 또 그 분풀이로 폭도들이 죄 없는 경찰과 모친을 살해 한 사건이다.


3명의 여성을 납치 살해한 것과 폭도의 집들을 태운 것은 그 죄질이 매우 다르다. 좌익들이야 말로 조작과 모함의 명수들이며 조작과 모함은 좌익들의 DNA인 것이다.


4월 28일에 25세의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28세의 김익렬 9연대장이 평화협상을 하였는데 미군정이 5.1의 오라리 사건을 일으켜 협상을 파탄시켰다는 것이 좌익들의 주장이다. 여기에 무슨 미군정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인가?


북한의 논문 자료에 나타난 김익렬과 한라산 유격대 상황일지에 나타난 김익렬을 보면 김익렬이 지휘한 9연대는 그야말로 빨갱이들이 득실대는 민병대였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프락치를 4명이씩이나 보냈고. 대대장인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 소령이 빨갱이였고 오일균의 부하인 문상길은 김익렬 후임으로 부임한 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고, 부대 내에 수많은 좌익조직을 심었다.

김익렬은 오일균에게 놀아나 김달삼과 비밀협상을 했고, 작전마다 실패하는 데다 비밀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파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손수 김달삼에 카빙총 실탄 15발을 넘겨주었고, 그의 부대로부터 수많은 병졸들이 유격대에 투항하여 합세했고, 그의 부대는 유격대의 병기 창고나 다름 없었다.

토벌대 대장이 유격대 대장과 비밀회동을 하여 실탄을 넘겨주고, 취약기를 맞은 적을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는 좌익에 놀아난 사람이거나 좌익에 이용당한 사람일 것이다. 북한 책은 그를 좌익으로 평가했고, 연대에서 좌익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김달삼을 만나 협상을 했다고 썼다. 한 발 더 나아가 북한 논문은 김익렬을 자기편이었다고 썼다. 김익렬이 김달삼과 4가지를 비밀로 약속했다는데 미제와 리승만 역도의 방해책동으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쓰고 있다.


첫째 단선단정반대, 둘째 경찰 완전무장해제와 토벌대 즉시철수, 셋째 반동 테러 단체 즉시 해산과 서청원 즉시 철거, 넷째 피검자 즉시 석방과 비법적인 검거, 투옥, 학살 즉시 중지.


이 4개의 항에 김익렬이 합의했다면 그는 좌익이다. 이 4개의 항은 김익렬이 보장해 줄 수도 없고, 김달삼 역시 이 4개 항을 김익렬이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합의를 했다면 그 정신에 합의했을 것이고, 그런 방향으로 협조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래 강준만이 쓴 말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4월말로부터 5.10선거까지는 토벌의 의지와 강도가 매우 강했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군정이 휴전을 원했을까? 미군정의 협상지시가 있었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4월 하순이라면 미군정이 김익렬의 무능함을 인지하고 있었었던 그런 시기다.

김달섬의 극비 상황일지에 의하면 4.3 직전에 김달삼이 9연대 프락치로부터 받은 보고가 있다. "연대 병력 800명 중 400명은 4.3작전에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을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없다"

이처럼 김익렬이 지휘하는 9연대는 민병대 수준도 못되었다. 미군정이 이런 
민병대 대장인 김익렬에게 그것도 토벌해야 할 인민유격대 대장과 협상을 하라는 전권을 주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시 미군정의 도덕과 명예감으로는 불법적으로 조직되고 불법과 만행을 저지르는 도적떼요 반란떼에 불과한 무장공비와 협상을 하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의 명예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시 미군은 독일도 항복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도 항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권을 주었다는 발상을 착안해 낸 빨갱이들의 저의는 매우 확실해 보인다. 늘 빨갱이들이 주장해왔던 4.3 왜곡의 테마를 보강하기 위해서다.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4.3의 테마는 이러한 것이다.  "국가 공권력과 인민유격대는 동급이었다" "4.3은 미국의 압잡이인 군경과 김일성과 함께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국가공권력과의 전쟁이었다" "인민유격대가 왜 나쁘냐, 이승만의 군경이 포악하고 잔인했다" 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지어낸 핵심 인프라인 것이다. 

인민유격대 상황일지에는 김익렬이 경찰을 적으로 생각하고 유격대와 협력하기로 했다는 말이 등장한다. 유격대와 김익렬이 심정적 한편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김달삼이 쓴 상황일지에는 "김익렬과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2회에 걸쳐 면담을 했고 그 후 5․10 투쟁까지는 국경으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없어 우리의 활동에는 크나큰 이익을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 9연대도 토벌을 하지 않을테니 유격대도 9연대를 잘 봐달라, 또 9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말아달라'는 정도의 암묵적 이해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 하면 김익렬이 해임되고 박진경이 연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6월 18일 새벽 03:15분 문상길 소위가 부하들을 시켜 박진경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좌익들이 득실대는 이런 무서운 부대 분위기를 평소 김익렬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을 것이다. 당시 김익렬은 외부의 적인 김달삼보다 언제 자기를 살해할지 모르는 내부의 적들을 더 무서워 했을 것이고, 내부의 적의 위압에 못이겨 김달삼과 만났고, 그후 토벌을 형식적으로만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강준만이 쓴 오라리 사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8~110쪽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요지는 김익렬과 김달삼 사이에 4.28평화협상이 있었는데 미군의 앞잡이 경찰이 폭도로 위장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우리 군과 미군을 공격한 후 이를 폭도들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협상이 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2. 평화협상을 깬 '오라리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미 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공격 대상은 경비대나 미군이 아닌, 경찰과 우익단체였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 등 우익 청년단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원성을 산 서청(서북청년단)이 주요 공격 목표였다. 그리하여 유격대를 결성하였는데, 3월 28일 현재 8개 읍면에 걸쳐 모두 320명이 편성되었다. 이들이 확보한 무기는 겨우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에 대한 도민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 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출동에 주저하였다. 경찰은 경비대가 사태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자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스스로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후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부터였다.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4월 28일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두 사람은 네 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과 같은 3개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둘째,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셋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변을 보장해준다. 또한 귀순자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평화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총격을 가한 자들은 경찰로 드러났다. 경비대의 취조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오라리 사건에 대해선 미국이 그 배후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국 촬영반에 의해 공중과 땅에서 모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 기록영화는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 편집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8~110쪽 그대로 인용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쓴 오라리 사건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 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북한 논문이 규정한 오라리 사건


4.3봉기발발당시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련대와 군정경찰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빚어져 점점 확대되었다. 경비대는 구성상 근로인민의 자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무장봉기를 류혈로 탄압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고 현지경찰의 지원요청을 묵살하였다. 반면에 경찰 측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다. 또한 미군정은 경찰을 중시하면서 경비대와 경찰에 대한 보급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두었다. 경찰은 경비대란 자기들을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정했고 경비대쪽에서는 자신들이 보조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국방경비대 9련대장과 무장대측사이의 협상을 둘러싸고 격화되다가 5월 5일 련대장 김익렬과 경무부장 조병옥 놈의 정면충돌로 폭발하고 그것은 미군정장딘이란 놈이 김익렬을 해임시킴으로써 경찰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게 되었다. 경찰의 지원요청에 응하지 않던 9련대는 무장대지휘부와 접촉하면서 주민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무장대 측과 평화협상을 가지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3가지 조건에 합의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미군정은 교활한 방법으로 이를 파탄시키기 위 한 음모를 꾸미었다. 미군정은 먼저 이 협상을 파탄시키기 위한 류언비어를 나돌리며 그들 사이에 리간을 조성시켰다. 이러한 때에 미군정장관 딘놈이 극비밀리에 제주도에 나타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무장대측이 평화협상을 먼저 파탄시키려고 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교활한 연극을 꾸미었다.


또한 방화사건 직후에 경찰기동대와 함께 오라리 현장에 도착한 동아일보 특파원이란 자는 미국 놈의 각본에 따라 현지답사기라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미제의 본색을 교묘하게 가리우려고 획책하였다.


또한 군정장관 딘 놈은 5.3기습사건을 도발하여 '초토화 작전'의 구실을 더욱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창국의 쓴 '륙사졸업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5월 3일에 발생했다. 하오 3시쯤  '반도' 200여명이 하산하여 제주비행장에 설치한 수용소에 귀순해오겠다 하여 9련대 병사 7명과 미군사병 2명이 미고문관 드루스 중위 인솔 하에 호송해오는데 무장대가 카빙총과 중기관총을 란사한 것이다. 귀순자 일부가 죽고 생존자는 다시 산으로 도망쳤다. 미군들이 반격해 무장대 5명을 사살했다. 부상된 무장대를 드루스 중위가 데려다 치료해주고 알아보았더니 그들은 제주경찰서(서장 문용재 )소속 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묘한 조작극으로 '국방경비대'와 인민무장대의 평화협상을 파탄시킨 딘놈은 제주도에서 이른바 수뇌회의를 소집하고 극악한 반동두목 조병옥을 시켜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파면시키는 연극을 꾸며 내고는 반동들을 내세워 제주도인민항쟁을 탄압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에로 내몰았으며 그것을 무력으로는 뒷받침 해주었다.


                                           진위 가리기


정부보고서, 북한 논문, 강준만의 저서를 보면 오라리 방화사건은 우익청년단이 저지른 것인데 미국이 이를 인민유격대가 저지른 것으로 모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 3일에 무장대가 미군과 국경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알아보니 국경과 미군을 공격한 무장대는 인민무장대가 아니라 제주경찰서 경찰관들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이 저질러놓고 이를 무장대에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강준만이나 정부보고서를 보면 4월 28일 미군정의 지시에 의해 김익렬이 김달삼과 이른바 평화협상을 체결했고, 그날로부터 3일 이내에 피차 공격을 중단하고 안전계수를 더 주어서 5일이 지난 5월 3일 이후에 공격을 하면 이는 배신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를 해놓고도 미군이 야비하게 평화협상을 깼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5.1의 오라리 방화사건과 5.3의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의 조작극이었다는 것이다.


비바람이 연재하는 김익렬 편을 보면 비바람은 4월 28일 평화협상이 없었다고 한다. 필자는 미군정이 김익렬에게 평화협상을 하라는 지령을 주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가 김달삼과 비밀로 만나 허튼 짓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을 것이라고 본다. 평화협상은 순전히 좌익들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4월 28일에 평화협상을 했고, 이 협상을 미군정이 이를 3일 만인 5월 1일과 5일 만인 5월 5일에 어겼다면, 4월 28일부터 5일 동안은 인민유격대 즉 무장대에 의한 공격이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무장유격대의 상황일지를 보면 그게 아니다. 


                         무장 유격대 상황일지에는 4.28이 없었다.


유격대 ‘극비’ 문서(한라산은 알고 있다)를 보면 4.28평화협상이 있었다는 기간은 무장유격대의 제3차 작전기간(4.20-5.10)이었고, 이 기간에는 조직을 정비-확대하고, 엄호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부락주둔을 개시하고, 반동 숙청에 주력했다 했다.


협상되었다는 평화기간인데도 무장유격대는 제주읍에서 아래와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아래는 공비가 쓴 상활일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28 합의는 없었던 것이다.


4월 27일에는 리구장 집에서 경관이 식사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경관(개)은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 1명을 잡아다가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노형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22명과 아부대 20명이 약 6시간 접전 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경관(개) 3명이 부상당했고, 경관 모자 1개, 문서 다수, 카빈 탄창 2개, 카빈 탄환 9발, 백미 1두(斗)를 노획했다.


5월 1일에는 경관 7명, 반동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한 상태에서 아부대원 20명이 포위하고 도주하는 경관들을 추격했지만 반동 1명만 숙청했다.


5월 3일~7일까지에는 동, 서 각 지구에 아부대 각각 1대대씩 주둔하면서 1개 대대는 본부 근무했다. 노형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반동 3명을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적 기동부 약 30명과 20분간 접전 후 적의 다른 부대에 포위당해서 퇴각했다. 상호간 희생은 없었다. 월평리에서 5월 4일 소각하다가 남은 경관집을 완전 소각했다. 5월 6일에는 서 대대가 산으로 가던 도중 적 기동대 약 30명과 조우하여 약 8시간 동안 접전 후 이를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경관 2명이 즉사했고, 우리대원도 2명이 희생됐다. 7일에는 화북리의 반동분자 4명, 삼양리 2구의 반동분자 2명, 삼양리 3구의 반동분자 2명, 도련리 1구의 반동분자 2명 계 15명의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죽성리에서 반동분자 3명을 숙청했다.


5월 8일에는 삼양리로부터 화북에 이르기까지의 전선을 완전 절단했다. 아침에는 죽성의 반동 거두의 가옥 4호를 소각하고, 반동분자 11명을 숙청하고 반동의 집 2호를 소각하고, 반동의 가족 2명을 숙청했다. 아라리 1구의 반동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반동 가족 2명을 숙청했다.


5월 10일에는 도두리의 반동 4명을 숙청했다. 읍사무소(투표장소)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투표를 방해했다.


대정면에서는 아래와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4월 27일에는 동일리의 반동 거두 1명을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아 부대 8명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반동직원 1명을 숙청하고 1명에  부상을 입혔다.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못해 동무직원 1명이 희생당했다.


4월 30일에는 모슬포지서를 습격했다. 아 부대 15명을 후면으로 배치하고 전면으로는 국방경비대의 보초(동무)를 배치하고, 측면으로는 여관 2층에 특무대를 2명 배치, 특무원이 지서를 향하여 황린탄을 투척하고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포위 습격하기로 작전했으나 황린탄 불발로 인하여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5월 1일에는 신평리와 영락리에서 각각 반동 1명씩 숙청했다.


5월 4일에는 무릉지서를  습격했다. 적은 개(경관) 12명이고, 아 부대는 30명. 약 20분 접전 하였으나 지형상 불리하여 퇴각했고, 동무 1명이 희생됐다.


5월 5일에는 보성리의 반동 1명, 영락리의 반동 고술생(高戌生)외 가족 2명을 숙청하고, 그 가옥을 소각했다.


안덕면에서는 4월 하순에는 동광리 반동 1명을 숙청했다.


                                  북한 논문에도 4.28은 없었다. 


북한의 박설영은 그의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4월26일 새벽 3시 30분경 삼양리에서 6명의 폭도 마을습격, 4월 27일 하모리에서 2개다리 파괴, 선거업무차로 한림에 갔다 오던 관리 6명이 신엄지경에서 피습, 낮 12시~27일 오전8시 사이에서 제주읍부근의 전화선절단, 도련마을에서는 경찰과 무장대가 교전하였는데 무장대는 기관총도 사용하였음, 4월 28일 새벽3시 30분경 14명의 폭도들이 신엄리 습격"


4월 28일에는 화북3구 ‘황새와’마을 선거관리위원장 오두현이 산사람들에 의해 랍치되었는데 마을에서 2키로 가량 떨어진 소나무밭에서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와 투표소에 대한 습격은 5월로 접어들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G-2보고서는 이 무렵 ‘선거사무소에 대한 많은 공작으로 인해 선거관리 위원들은 투표용지와 투표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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