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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토벌작전(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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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5-17 19:49 조회14,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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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토벌작전(연속)


                  제2연대 작전(1948.12.29-1949.2.28)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12월 29일 대전에서 제주도로 이동했다. 이때의 공비는 1920년생인 이덕구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상당수가 사살되고 귀순하여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에 발령됐던 비상계엄령은 1개월 보름만인 12월 31일, 해제됐다. 그거나 그게 아니었다.


제주도 공비는 1개 대대 이상이었으며 암암리에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일 새벽 진눈깨비가 내리는 시각에 이덕구가 인솔하는 공비 주력이 오동리 화엄사에 주둔하던 제3대대를 포위 기습하였다. 교전 끝에 공비는 10여구의 시체를 유기하고 도주했으며 제3대대 소속 7명이 전사했다. 제2연대장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의 지원을 받아 토벌작전을 폈지만 지형 미숙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전 중 연대장은 많은 주민들이 한라산 동굴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소탕작전보다는 선무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토벌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산사람들의 근거지가 되는 산간마을을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산간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군이 마련해준 수용소로 내려와 살거나 아니면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함대령이 불쌍하게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산간마을 살다가 공비를 따라 산속으로 간 사람들이었다.


함대령은 이들을 불러 내리기 위해 갱생원(피난민집단수용소)을 설치하고 집중적인 선무활동을 벌였다. 1개월 사이에 1,500여 명이 산에서 내려와 갱생원으로 갔다. 이와 아울러 마을을 상대로 주민홍보를 했다. 읍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면민 대회를 개최하여 공비들의 만행을 소개했고, 새로 도입된 신무기들을 전시하여 공비 가족들로 하여금 공비들이 이런 신무기를 상대로 하여 싸우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갱생원에는 많은 지원과 관심을 쏟았다. 이에 주민들은 군을 신뢰하게 되었고, 이와 비례하여 무장공비들과 산사람들도 줄을 이어 하산했다. 돌아선 주민들의 제보로 인해 2연대는 1월 13일,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서 공비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작전(1949.3.2-5.15)


제2연대의 효과적인 작전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준동은 시들 줄 몰랐다. 이들은 군경의 무기를 탈취하여 경비가 소홀한 부락을 습격하고, 청년들을 납치해다가 공비로 훈련시키면서 공비를 꾸준히 양성했다. 때는 흘러 국방경비대가 육군본부로 탈바꿈 했다. 육군본부로서는 이런 제주도가 골치 덩이가 아닐 수 없었다.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열심히 공격적인 군사력을 기르고 있을 때인 1949년, 남한은 제주도라는 섬 하나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 길은 먼데 계속적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제주도 빨치산 유격대에 육군본부라면 당연히 화가 날만 했다. 육본은 녹음이 짙푸르기 전에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해동이 되자마자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약칭 ‘제주전투사’는 2연대, 제주경찰 그리고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독립 제1대대로 구성됐다. 사령관에는 유재흥 대령, 참모장 자리는 제2연대장인 함병선 대령으로 하여금 겸임케 했다. 제주전투사의 작전개념은 사실상 함병선 대령이 주도한 것이다.


‘선-선무 후-토벌’, 사령부 작전은 함병선 대령의 작전 개념을 그대로 수용했다. 도내의 지도급 청년들이 산으로 들어가 선무공작을 수행했다. 수용소를 추가로 설치하고 여기에 도청과 협조하여 구호미 의류품을 제공하고 생활자금도 2배로 늘려주었다. 하산한 주민들로 하여금 직접 간접으로 공비들을 설득하게 했고,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무수한 선무 삐라를 살포했다. 귀순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공비토벌작전은 제2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펼쳤고, 해안지역 작전은 경찰이 담당했다. 경찰은 마을마다 ‘민보단’을 편성하여 낮에는 농민을 보호하고 밤에는 공비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게 했다. 전투사령관은 민관군이 총체적으로 동원되는 유기적인 작전을 위해 이를테면 합동군을 생각해 냈다. 민보단 1개 소대(25명)에 군인 및 경찰 각 1개 분대를 보태 민-경-군 혼성부대를 여러 개 만든 것이다.


혼성부대들은 교사들, 군청 및 면사무소 직원, 청년단 간부들로 조직되었으며, 1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을 거쳐 군사화 됐다. 그리고 이들은 소탕적전에도 동원됐다. 예를 들어 제2연대 1대대 정수정 상사가 지휘하는 혼성부대는 공비의 아지트를 찾아내 30여 명을 생포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혼성부대의 역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생포한 자들 중에서 공비의 세포인 고씨를 전향시켜 공비두목 이덕구와 김민성(군사부 조직책)의 아지트를 알아내고 지체 없이 급습하여 사살했다. 하지만 이덕구는 공비병력을 이끌고 출동한 상태였기에 그를 잡지는 못했다. 이덕구는 6월 7일에 사살됐다. 따라서 이들 혼성부대들은 공비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순하는 자들이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공비의 무기고들이 연이어 군경에 피탈 당했다. 특히 한라산 서쪽 6km 지점의 어승생악에 위치한 그들의 비밀병기창이 발각당해 소총 370종와 다수의 실탄 등을 노획 당했다. 무기 없는 공비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공비가 재기 불능상태인 것으로 파악하여 5월 15일부로 제주지구전투사령부를 해체했다. 그리고 5월 20일에는 5개월간의 토벌적전 중 산화한 토벌대 요원 119명에 대한 위령제를 제주읍에서 거행했다. 그리고 한편 군경에 대해 저항적이었던 제주도민들은 제2연대의 공적을 찬양하고 이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했다. 이덕구가 사살된 지 만 1개월이 지난 7월 7일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한라산 정상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제주도민들로부터 숭앙을 받은 함병선 대령을 강준만의 ‘현대사산책’과 고건 및 박원순 등 좌파들이 주도한 정부보고서는 최악의 악랄한 살인마요 초토화의 장본인이라고 모함한 것이다.  


                    독립제1유격대 작전(1949.8.13-12.28)


제주도지구전투사열부가 해체되자 제2연대는 8월 13일, 제주도 경비 임무를 독립제1유격대대에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했다. 이는 육본이 ‘제주도 공비의 대부분이 섬멸되고 작은 불씨만 남아 있다’고 판단한 것을 의미했다. 이때의 잔여공비는 불과 100명 정도인 것으로 판단했다. 이 100명의 공비는 9연대에서 탈주한 고성구가 지휘했고, 무기가 부족해 무장1명, 비무장 2명의 3명 1개조로 움직였다.


하지만 공비는 매우 끈질겼다. 육본의 판단이 너무 안이했던 것이다. 이들은 한라산 중턱을 연하는 순환도로(일명 머리띠 도로)를 중심으로 도서남북 4개의 위병소를 설치하고 도처에서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양민을 학살하여 민심을 교란하고 감언이설로 민심을 자극했고 약탈과 방화를 계속했다. 이에 정부는 진주에 주둔하면서 4개월간 공비소탕작전을 펴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를 제주도로 보냈다. 상황판단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정부의 대응도 왔다 갔다 한 것이다.


                     해병대사령부작전(1949.12.28-50.6.25)


해병대 역시 소탕작전에 앞서 민심작전을 우선했다. 무의촌에 의무대를 보내고 순회 진료를 전개했다. 도로와 하수도 공사를 해주고, 농번기에는 대민지원을 제공하고 순회강연을 통해 주민들을 계몽했다. 이에 주민들은 군에 대한 공포심을 접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비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다음 해병대 역시 1950년 2월부터 5월까지 5개월 동안 한라산 공비토벌 작전을 과감하게 전개했다. 수많은 교전을 통해 공비를 사살하고 공비의 야전병원을 찾아내 소탕했다. 


6.25가 발발하여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해병사령관은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북괴가 계속 남하하자 해병대 사령부의 1개 대대(고길훈소령)가 군산-장항 지구에 투입됐다. 축소된 해병대 사령부는 제주도에서 신병 3,000명을 훈련시켜 증편한 다음, 9월 6일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곧바로 인천상륙적전에 참가했다.

                           이후의 제주도 공비토벌


전쟁기간 중에는 제주도에 훈련소가 생기고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어 감히 공비가 준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연명을 위해 간헐적으로 마을을 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면서 민심을 교란했다. 6.25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있었던 1952년에 이르러서는 공비가 다시 기승을 부려 제주방송국과 서귀포 발전소를 습격했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을 중요시해야 한다. 좌파들은 4.3사건이 단순히 미군정 및 대한민국이 제주도 주민을 괴롭힌데 대한 정당한 저항권의 행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좌파들도 인정하듯이 제주도 공비들의 만행은 대한민국이 북괴와 전쟁을 하고 있는 기간에도 끊임없이 국가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죄 없는 제주도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를 놓고 좌파들은 제주도 공비를 인민해방군이요 통일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김달삼은 해주에 가서 스탈린원수 만세를 불렀으며, 그는 물론 이덕구까지 현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1m높이의 흰 대리석을 끼고 누워있다. 그리고 북으로 간 김달삼은 6.25직전 500명 정도의 김달삼 부대를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와 공비로 준동하다가 1950년 3월 22일 18:00시 태백산 ‘반론산’에서 8사단 21연대의 토벌작전에 걸려들어 사살됐다. 이를 놓고 제주 4.3반란이 북한과 무관하다 하니 할 말을 잃는다. 


제주도에 공비가 또 준동하자 정부는 제주경찰국 예하에 제100전투경찰대를 편성하여 공비토벌을 다시 시작했다. 1953년 1월 29일에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를 한라산에 추가로 투입했다. 결국은 제100전투경찰대와 무지개부대가 5개월에 걸친 토벌작전을 펼친 끝에 한라산 공비를 완전 소탕했다.


1957년 4월 4일, 제주신보는 “토벌전에 종지부!-9년만에 평화 찾은 한라산, 최후의 잔비 ‘오’를 생포, 유격대, 2일 송당리 장기동서”라는 제하에 기사와 “공비완멸의 의의와 민심개방의 새 과제”라는 제하의 사설을 썼다.


“경찰은 4월 2일 상오 10시 마지막 잔비 오원권을 생포했다. . .48년 이래 계속 출몰하면서 부락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양민 납치 학살을 일삼아 전 제주민을 암흑과 불안 속에 몰아넣은 4.3사건의 여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경찰기록을 더듬어 보면 공비수가 16,900명에 달했으며, 그중 7,893명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고, 2천여 명이 귀순, 7천여 명이 생포되었다. 128명의 경찰이 전사했고, 89명의 군인이 전사했으며 군경 146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비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은 공무원을 포함하여 1,300여명에 이른다.”


당시의 일반 여론 역시 4.3사건을 무장공비들이 일으킨 사건이고, 부락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양민 납치 학살을 일삼아 전 제주민을 암흑과 불안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을 놓고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뒤집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참고로 1980년 광주폭동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에 불과하다. 이 166명을 놓고 그토록 요란을 떠는 존재가 바로 검을 것을 놓고 희다고 주장하는 좌파들이요, 거짓말도 100번 하면 참말이 된다는 것을 교육받은 레닌의 후예들인 것이다. 지금도 5.18측 사람들은 민간인 사망자가 3,000을 넘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아직도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믿는 국민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정부보고서는 1947년 3월 1일을 4.3사건의 시발점으로,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된 되었던 1954년 9월 21일을 4.3사건의 종결시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동의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다. 1954년 9월 21일에는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가 있긴 했지만 그 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무장공비가 소멸된 날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비의 세력이 미미하다 하여 경찰의 공비토벌 작전이 종결 수는 없는 것이다.

좌파 색채를 노골적으로 노출한 정부보고서는 4.3사건을 이념사건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4.3사건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 이념사건이다. 이념 사건을 ‘이념이 개입되지 않은 탄압과 저항 사건’으로 변질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훙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적화시켜보려는 야무진 착각에서, 순수한 도민을 감언이설로 선동하여 이들을 무기화 하고 방패 화하여 일으킨 반란사건’을 ‘미제, 경찰, 청년단이 유독 제주도민을 업수이 여겨 순수한 주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이에 항거하여 나선 무장대를 과잉진압 사건’이었다고 몰아가기 위한 흉계인 것이다.  5.18사람들의 주장과 꼭 빼닮은 것이다.


결론 적으로 4.3사건은 해방직후에서부터 1957년 4월 2일까지 만 11년 8개월 동안 벌인 지독한 반란사건이었다.    



2011.5.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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