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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생 작성일11-05-24 22:33 조회11,57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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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6월 18일 천주교 신부들이 정부를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9월 8일에는 "후에"시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안쾅 불교파에서도 정부가 베트콩과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데모를 벌였다.
이 연이은 데모의 와중에서 월남 정부는 베트콩과 싸우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취할 수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국경부근과 위험지역에서 철수하려하자 월맹군이 후퇴로를 막고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다.

미공군과 해군이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들의 후퇴로를 열려하자 월남의 언론이 벌집을 쑤신듯 난리를 쳤다.

폭격을 하게되면 월맹영토를 폭격하게 될지도 모르고 평화협정을 위반한다며 오도방정을 떨었다. 폭격은 민간인을 죽이는 야만행위라며 언론과 사회단체가 비난하였다.

월맹이 미국의 경제제제로 궁핍해지자 역시 언론이 난리를 쳤다.

월맹을 도와야 한다며 같은 민족이 굶어죽는다며 이럴때는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한다며 난리를 쳤다.

월맹사람과 손을 잡거나 같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모습으로 방송에 나오고 국민들이 그 장면을 보고 월남국민들이 월맹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평화롭게 지내자고 생각했다.

TV와 방송의 젊은 기자들은 방송을 만들고 거기에 국가가 통제를 가하면 국민의 알권리를 국가가

침해한다며 반발했다.

1975년 4월30일 소련제 월맹군 탱크 845호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월남기(旗)가 내려지고 월맹기가 올랐다.

사이공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 탱크와 304사단 보병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자유베트남은 패망 이전 수년간 시종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했던 '공산프락치'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3년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됐고, 그 해 3월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 철군했었다.

그 이후 2년 만에 완전 공산화 된 것이다.

미군철수 후 대화로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평화협정문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월남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은 부패척결과 반미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연중 계속된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티우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애국을 표방하는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시작했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1975년 자유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무릎을 꿇기에 앞서 이들에게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正體)이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호치민이 1930년 창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전체인구의 0.5%인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이 베트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 간첩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이후였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순수한 애국자연(然) 했고, 미국에서의 반전(反戰)운동에 결정적인 불씨를 지폈다.

간첩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 반전평화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침투가 쉽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기반 확대로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인사들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투쟁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베트남 패망 30년을 맞는 현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그 추(錘)가 친북 좌익세력에게로 기울어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와 반전평화운동이라는 명분아래 연일 공공연히 반미집회를 자행하고 있으며,

북한의 요구를 복창하듯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유 민주시민들은 그들에 의해 수구 냉전주의자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언론매체들이 늘고 있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그런 논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대세에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

월남은 1975년에 망했고 천만에 이르는 이들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끌려가 서서히 죽어갔다.
106만여명의 난민이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보트를 타고 도망쳤다.
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월남 정부에는 간첩이 많았다.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인도주의자로 위장했다.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수천만 민족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죽고, 갇히고, 신음하고, 도망한 이후에야 알려졌다
.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다.
티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 후에야 알려졌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여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 말이 미국에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했다.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며 파리 평화회담에 반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악착같이 데모를 주동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전략을 추구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되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문서였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다.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등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다.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모두가 환상이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다.

매년 80만 ~ 100만톤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에는 수많은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 속에는 혁명정부 청사까지 들어서 있었다.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내용이 단 하루만에 여기에 보고되었다.
티우가 공산 프락치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

가장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하여 정치인, 관료들이 간첩이었다.
이는 망한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들이다.
정보기관에 가장 많은 간첩이 들어 차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경제 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무드에 들 떠 있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좌익이 시민, 종교단체를 장악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팀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 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정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암살과 각종의 압력들이 사회적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어
그들의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이 침묵했다.

1975년 1월 8일, 드디어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이 월남 공격에 투입되었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되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부패했던 군인들이 앞을 다투며 가족을 데리고 배와 비행기로 탈출했다.
남침 후 한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4월 30일 정오, 월맹 탱크부대가 독립궁을 점령했다.
5명의 월남 장군들이 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되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월남군 부대시설을 개조한 것이다. 한 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의회와 언론은 더 큰 협정위반자인 월맹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에 덤벼들었다.

미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변명해야 할 판이었다.

미 국방부는 의회로부터 국방예산 심의를 받아야 할 시점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수빅만을 출항하자말자 하노이는 또 다시 미국이 침략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쳤다.

미 국방성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통킹만 접근계획을 취소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방어 의지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수상 팜 반 동은 “우리가 미국에 뇌물을 주어서 개입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을 구해보려고 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 가는 월남정부에 대해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을 하려고 미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비난해오던 반공의 보루 헨리 잭슨 상원의원도 “인도지나의 문제는 3억 달러의 무기구입비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1973년 노벨 평화상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越盟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하여 월남전의 휴전문제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수상 결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지난 1월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서명되자 전세계적으로 평화에 대한 희망과 환희가 물결쳤다.

휴전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의 理想에 맞추어 일했는 바,

국제분쟁은 전쟁이 아닌 협상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월남전 당사자들이 전쟁으로 상처 받은 인도지나 반도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월남의 휴전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인 책임을 공유할 것을 희망한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1년 반 뒤 월남의 평화협정은 월맹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깨지고 월남은 공산화 통일되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도 모르고,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생리도 모르는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두 사람에 대해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차라리 코미디이다.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反戰 시위대의 출현을 겁내 수상식엔 불참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의 수상자 결정 이유문을 읽고 있노라면 이들이 전쟁의 속성, 국가의 생리,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전략에 대해서 너무나 무식한 데 놀라게 된다.

순진하다고 할지, 위선이라고 할지.

키신저와 레둑토가 합의한 월남휴전협상안을 미리 읽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유양수 주월대사에게

“이런 문안에 합의하면 월남은 1년안으로 공산화된다”면서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충고해주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유양수 대사에게 티우 대통령은 자신도 박대통령과 동감이라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키신저와 레둑토는 월남정부를 빼돌리고 월남민의 운명을 결정할 비밀협상을 진행해왔는데 그 협상안이란 것이 가관이었다.

그때 17도선 이남의 월남 땅에는 약14만의 월맹 정규군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월남출신의 베트콩을 지휘하고 있었다.

월남정부를 따돌리고 미국과 월맹이 합의한 휴전안에 따르면 이 월맹군의 현위치 주둔을 허용하면서

주월미군의 전면철수를 규정했다.

더구나 월남에 세워질 연립정부는 월남과 월맹, 베트콩 3者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연립정부는 공산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정부가 될 것임을 티우도 간파했다.

티우에게 이 휴전안을 수용하도록 강요한 것은 키신저였다.

그는 재선된 닉슨 대통령이 취임식을 갖기 전에 월남평화협정을 발효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티우는 키신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티우 대통령이 요구한 보장책으로서 미국은 닉슨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깰 때는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미국 의회가 월남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동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월남은 버림받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5년 봄 월맹은 정규군을 앞세운 남침으로써 월남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김대사는 철수선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4월9일 두척의 해군 LST 수송선이 부산항을 떠났다.

두 배의 함장들은 사병들에게는 ‘남지나해상 훈련’을 하러간다고 알렸다.

이 철수선이 월남을 향해 가고 있을 때에도 사이공에서는 월남이 망하리라고 보는 이들은 소수였다.

전쟁에 오랫동안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있던 사람들보다 대체로 사태를 낙관했다.

4월24일 티우를 이어 대통령이 된 트란 반 홍은 두옹 반 민 장군을 총리로 초대했다.

민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국회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 장군은 권력투쟁에서 티우 대통령에게 진 뒤에는 친공적인 성향을 보여왔다.

그는 월맹이 자신을 상대해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4월27일 민 장군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말자 월맹에 대해 휴전과 정치협상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29일 그는 모든 미국인이 24시간내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월맹은 민 대통령의 존재가 다 끝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보고 29일 사이공에 대한

최후 공세를 명령했다.

4월29일 탄손누트공항에 대한 월맹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포드 대통령은 최후의 철수령을 내린다.
공산군은 베트콩과 월맹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었다.
이에 비해 월남군은 115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 공군은 1,800대나 되는 공군기를 가진 세계 제 4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도 보급도 모두 공산군보다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월남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후퇴만 했다
.
후퇴마저 제대로 못 해 수백대의 전투기를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었다.
월남군이 공산군에게 넘겨준 무기는 무려 50억달러어치나 된다.
다낭에서는 공산군이 공격해 온다는 풍문만 듣고 군대가 배를 타고 후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도 공산군이 왔다는 소식이 없어
다시 상륙해 시내에 들어가보니 아직 공산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파리 평화회담에서 남북이 앞으로 싸움 하지말자고 결의했다.

그래서 남쪽이 베트콩과 협의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절대 우리민족끼리 싸우지말자고 했는데 북쪽은 달랐다.

어떻게든 미국을 내쫓고 남북통일, 즉 적화통일 하겠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패하기도 했다. 군대가 강하고 장비가 좋고 그래도 소용없더라...경제가 암만 우위고 잘살아도 그것이 적을 막아낼 수는 없다.

결국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하는데 그게 없었다.


2007년 대선에서 친북·좌파 세력이 재집권한다면, 한반도 안보구도는 근본적 변화를 맞을 것이다.

전시작통권 이양에 따라 한·미 연합방위체제 붕괴가 확실시되고,

UN司 재편의 향방에 따라 한·미 동맹의 좌표가 설정될 것이다.


1975년 1월 8일 월맹이 총공격을 개시한 후, 4월 말에 사이공은 함락되고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역사에서 ‘설마’ ‘혹시’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냉엄한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월남 경우와 한반도는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있다.

두 경우를 비교·분석, 월남 패망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우리의 생존전략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사점: 북적화전략 불변, 안보태세 해이, 미군철수 조짐

‘북폭’을 견뎌낸 월맹과 같이, 북한의 대남 적화의지는 불변이며 군사 능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특히 위협을 ‘평화·민족·반외세’ 등으로 위장하여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공통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내에서 北의 WMD 개발과 인권탄압 및 범죄행위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안보의식은 실종되고 있다.

北정권을 ‘적’이 아닌, ‘우군’으로 보는 ‘민족공조’ 시각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현상은 국가 공권력과 거대한 대중 매체에 의해 조직적으로 주도되고 있다.

내부 친북·좌익 세력의 준동과 대한민국 파괴 시도는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된 가운데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미국은 키신저 국무장관 주도로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에 조인했으며, 1973년 1월 27일 전쟁은 종식되었다.

미국과 월남은 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월맹이 남침할 경우, 즉각 해공군력을 투입하고,

북폭을 재개하기로 약속했으며,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들을 월남군에 이양했다.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에 마크됐다.

당시 월맹은 미국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미국은 월남전의 장기화에 진저리를 치고, ‘베트남전의 베트남화’ 구호를 내걸며, ‘명예로운 철군’을 감행한 것이다.

이대용 전 월남공사의 지적처럼,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월남의 티우 정권은 확실한 반공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내부의 반미·친월맹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대조적으로 한국은 김대중·노무현 친북좌파 정권이 8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친북·좌익을 위한 기본 토대는 많이 형성됐다.

1998년 전교조가 합법화됐으며, 민노당은 10석의 소수당이긴 하지만, 합법 공간 내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권 핵심에 친북세력이 포진하고 있으며, 국가공권력이 친북세력의 조직화에 선도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파탄에도 불구하고 재래식 전력 면에서 북한의 군비태세나 군사능력에는 변화가 없으며 핵과 미사일 등 전략무기보유로 비대칭전력의 불균형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북한경제파탄을 초래한 장본인인 김정일이 현지방문의 70% 이상이 경제분야가 아닌 군부대방문으로 이는 선군정치의 대내통치와 무력통일의 대남전략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시사한다.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전한반도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 500기 이상을 실전배치함으로서 남북한군사력균형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였다.

한국국민들이 북한이 보유한 핵을 미국과 일본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도 한반도평화를 위해 북한의 인질이 되어 있는데 한미동맹이 해체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한국은 생존을 위해 핵을 보유한 김정일의 지시대로 인질 노릇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한국이 핵을 보유하지 않는 한 미국의 핵우산제공은 더욱 절실한데 남북민족공조전략에 이용되어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조치는 극히 우려되는 사항이다.

해방이후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시킨 애치슨라인을 발표하고 1949년 주한미군을 철수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역사적 교훈을 상기해야한다.
김정일은 남북정부가 회담하면 군은 더욱 전투준비를 하라고 강조하고 서울답방은 점령군사령관으로 서울을 방문하겠다는 언급은 북한정권의 이중성과 공산주의자와의 합의는 무의미함을 경계해야한다.

우리의 자유민주체제는 “자신의 능력과 의지가 없으면 지켜지지 않으며 어떤 우방도 대신 지켜주지 아니 한다”는 월남패망교훈과 “평화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우리의 방위능력과 우방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안보에 대비해야하며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평화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햇볕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해 두고 싶다.




1975년 4월 30일 : 월남 패망 후.. | 박정희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 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목숨도 불위하겠다는 결심과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해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3. 1월에 파리평화협정으로 휴전이 성립될 당시의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수준은 언론의 자유,

재산소유, 자영농업, 자유상업, 죄형법정주의(형법규정에 없으면 처벌불이익을 줄 수 없는 인권보호

제도), 신앙자유 등의 기준으로 보아 다른 주변 국가들(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폴, 필리핀, 대만)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전도상 이었습니다.

1973. 3월까지 남부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 완료하였습니다.

말이 휴전이지 북베트남(월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은 각자 공산주의체제와 자유사회체제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각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는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대통령이고, 1973. 8월 선거에서 티우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주당(Dan Chu)이 승리하여 1974. 1월에 헌법을 개정하고 1년 9개월 후인 1975. 10월에 대통령 선거를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과 그의 남부 침투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전면 군사공격을 하기 전에, 남베트남의 내부로부터 혼란을 가져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순서였습니다. 이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을 격퇴 분쇄하는데 월남공화국이 실패한 것입니다.

언론자유와 인권보호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월남공화국이 내부혼란, 와해를 막으려면 지식인들의 통찰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에 가담한 것입니다.

가톨릭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돌보던 구엔 녹 란신부가 반전과 평화를 외치면서『반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공산전체주의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먹히느냐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공화국 수도 사이공에서 가톨릭 사제복을 걸치고 평화와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역시 가톨릭 사제인 찬 틴신부는 교도소개혁위원회의 이름으로 인권운동과 반전투쟁을 하면서 월남정부의 대공방어전쟁을 비판하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들은 멋모르는 많은 사제와 신도들의 지지와 추종을 이끌어 냈습니다.

고 딘 디엠을 지지하던 가톨릭 사제 찬 후 탄신부까지도 1974. 9월부터『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티우 대통령을 위시한 월남정부는 가톨릭 사제의 그런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인프레와 불경기로 시달리게 되고, 미국도 월남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고 있을 때, 이 가톨릭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은『월남민주공화국』과 그 산하조직인『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기획, 조직하여 사이공을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벌이게 한 식량요구데모, 공무원 처벌요구데모에 합세한 것입니다.

휴전이 발효한 1973. 1월부터 8월말까지 8개월 동안 월남정부군 41,000여명이 전사하고, 4,000여명이 실종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매일같이 직장을 달라, 식량을 달라는 데모가 사이공거리를 휘저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식량과 의복을 요구하고, 해고무효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제2도시 다낭 길거리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1974. 11. 1.에 란 신부가 사이공 시가지 데모 중에 경찰에 구타당하였고,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 티우 정부에 항의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자, 공산군과 싸우던 월남공화국 군인들이『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생명을 바치는가?』라고 회의를 품게 되고 사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월남민주공화국』군대가 진격하자『월남공화국』군대는 어이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고, 1975. 4월 30일에 월남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월남은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형법정주의의 법치를 잃어버리고, 가톨릭 신앙이 공산당의 허가와 제한을 받는 처지로 떨어진 것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은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이 번영하는 경제 대신 공산당이 통치하는 극빈국의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타락하여 갔습니다.

베트남을 공산전체주의의 족쇄로 몰아넣는데 크게 기여한 란신부는 그런 후 사제를 그만두었습니다.

두고두고 표창 받아야 할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월남민주공화국』당국은 란 신부 같은 분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1990. 8월 5일부터 가택연금 시켜버렸습니다.

월남공산전체주의 승리에 도움을 준 틴 신부는 통일『월남민주공화국』당국에 의하여 1990.에 형을 선고받고 1993.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틴 신부가 언론자유의 월남공화국 시절에 떠들었던 반정부(反政府)의 1/5도 안 되는 발언을 한 점(데모는 고사하고 그냥 공산당원들의 과오를 지적한 것만 가지고)이『월남민주공화국』형법의 내란죄로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법 제285조 제1항이『성직자들은 개별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신분에 부적합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같은 제2항이『성직자들은 불미한 것이 아니라도 성직자 신분에 안 맞는 것은 피해야한다』고 규정한 것은 2000년의 파란만장한 가톨릭 역사를 겪어오는 동안 교회와 교황성하들이 거듭 확인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1973. 1월의 파리평화협정 때부터 1975. 4월 30일 월남공화국 패망 때까지 2년 3개월여 동안 베트남의 똑똑한(세속적인 뜻에서) 일부 신부들이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제 겨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하는『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이런 적대진영 안의 자해분자들을 두고 레닌은 쓸모있는 바보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무렵 1972년에 남미 페루의 G 구티에레스 신부가 발표 출판한『해방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정의』를 내세우는 신부들이 공감을 하였을 수 있습니다.

성직자가 스스로의 정의감을 믿고 사회체제를 바꾸자고 발언하기 시작하면 『그 분야의 경험』이나『그 분야의 전문이론』이 없으므로『직관』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직관은 지구가 돌지 않고 태양이 도는 것으로 봅니다.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만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 5월 12일에『사제는 사제여야 한다. 정치는 평신자의 책임이다』라고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konas)

이 글은 임광규 변호사(前 반핵반김국민협의회 운영위원장)가 카돌릭 평신도들이 운영하는 '광야의 소리'(http://www.aware.co.kr/)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 입니다.
2006-09-06 오전 10:44:13 입력 

댓글목록

민사회님의 댓글

민사회 작성일

잘못은 우리 안에 있다.

보수우익대동단결이 없다면
젊은세대 보기 부끄러워진다.

보수우익대동단결만이 살 길이다!

HiFi님의 댓글

HiFi 작성일

너무도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좀 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읽을 수 있도록 퍼트려야 하겠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네요. 이런 글들이 더 많이 계속계속 늘어나서 요즘 청소년들이 읽는 반국가공산주의에 젖은 잡소설들을 대체하고 제대로된 의식과 감정과 이념을 가진 시민들을 양성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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