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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라리 방화사건과 김달삼의 모략 작전 5.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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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7-31 19:31 조회13,5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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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오라리
방화사건과 김달삼의 모략 작전 5.3사건

                                          오라리 사건

1948년 5월 1일에 발생한 오라리 사건은 참으로 하찮은 사건이다. 김익렬도 하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하찮은 두 개의 존재가 좌익들에는 매우 중요한 모양이다. 좌익들이 쓴 책과 정부보고서에는 이 두 존재가 왜곡돼 있고, 크게 부각돼 있다. 4.3 폭동사건를 조작하고 모함하기 위해 이 두 개의 존재를 매우 귀한 소재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여러 자료들과 증언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오라리 사건은 이렇다.

오라리는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제주읍에서 한라산 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지해 있다. 당시의 주민은 3,000여명, 가구 수는 600호 정도였다. 이 마을에서는 4월 11일부터 좌익과 우익들 사이에 보복전이 연속됐고, 보복은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처참하게 죽이는 무서운 것들이었다.

좌우간의 싸움은 인민무장대가 먼저 시작했다. 4월 11일에 인민 무장대가 경찰관 가족을 살해한 것이다. 4월 29일에는 이 마을의 대청단장 박두인과 부단장인 고석종이 납치되어 산으로 끌려갔으며, 그 다음날인 4월 30일에는 대청단원 부인 2명, 즉 강공무(23)와 임갑생(23)이 산으로 끌려 갔다. 강공무는 무참히 살해됐고, 임갑생은 나무에 묶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다음 날인 5월 1일, 강공무 여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30여 명의 우익청년들이 돌아오는 길에 울분을 참지 못해 입산한 폭도들의 가옥들을 불태웠다. 당시 오라리에는 입산한 무장 폭도들이 꽤 많았고, 불을 지른 가옥은 5세대로 사랑채 마굿간 등을 합쳐 모두 12 채였다. 이 소식을 접한 폭도 20여 명이 마을로 쳐내려오자 우익청년들은 도망을 쳤다. 폭도들은 걸음이 빠르지 못한 42세의 여인 고순생을 붙잡아 밧줄로 목으로 조른 후 무참히 살해했다. 이 여인은 김규찬 순경의 어머니였다.

경찰의 모친이 살해당하자 이에 흥분한 경찰들이 흥분하여 폭도들을 수색하자 마을의 어느 여인이 마을 밖으로 달아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정지하라”고 소리를 쳤지만 이 여인은 달리기만 했다. 경찰은 이 여인에게 총을 발사했다. 도망치다가 죽은 여인은 41세로 이름은 고무생이었다. 여기까지가 오라리에서 발생한 연속사건들인 것이다.

                          모략을 목적으로 김달삼이 기획한 5.3사건

5월 3일 15:00시 경, 한라산에 입산하여 고생을 하고 있던 주민 200-300명 정도가 귀순해 오겠다는 반가운 연락을 해왔다. 미고문관 드루스 중위가 미군 병사 2명과 9연대 병사 7명을 대동하고 이들 하산주민들을 제주비행장을 향해 인솔하고 있었다. 이 때 정체불명의 무장대 50여 명이 갑자기 나타나 기관총과 카빈총을 난사했다. 몇 명의 귀순자들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도망을 쳤다. 이 때 미군이 반격에 나서 무장대 5명을 사살하고 몇 명의 부상자를 생포했다.

미군에 생포된 자들 중 한 사람은 자기가 제주경찰서 소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이 제주 경찰서에 신원을 확인한 결과 그자의 말은 거짓이었다. 미군과 경찰 사이를 이간질시키려는 계획된 음모였다. 200-300명을 하산시킨 것은 머리 좋은 김달삼이 미군과 경찰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꾸민 고도의 모략전이었던 것이다.

                         좌익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왜곡했는가?

사건 치고는 비교적 단순 간단한 이 사건을 놓고 좌익들은 이 사건이 마치 큰 사건이나 되는 것처럼 분칠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익렬이 미군정의 위임을 받고 4월 28일,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했고, 쌍방이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했는데 미군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고 5월 3일 200-300명의 산사람들이 귀순하는 것을 경찰이 무장대로 위장하여 귀순자들을 습격함으로서 김익렬-김달삼 사이에 맞은 4.18평화협상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김달삼과 김익렬은 평화의 전기를 마련했는데 미군과 경찰이 두 개의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에 김달삼-김익렬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미군과 경찰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 위 2개의 사건을 왜곡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4.28평화회담을 가공해낸 것이다.

김익렬은 1988년 12월에 사망했으며, ‘4.3의 진실’이라는 유고(遺稿)를 남겼다. 김익렬이 제주에 주재했던 기간은 약 9개월이었고 그 중 4.3을 겪었던 기간은 4월 3일부터 그가 파면되던 5월 6일까지 불과 1개월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남로당 빨갱이들이 득실대는 부대에서 그들을 도와주면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며, 하도 뻥과 구라를 잘 쳐서 ‘김 대포’로 통했던 사람이다.

그의 전임자 두사람도 문상길에 의해 독약을 먹었고, 그의 후임자인 박진경은 문상길에게 총살당했으며 그 다음의 연대장 최경록은 독일산 셰퍼드에 의해 목숨을 간신히 부지했다. 9연대에 부임하는 모든 연대장들이 다 남로당 세포들의 제거대상이었는데 김익렬만이 제거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4.3에 대한 지식 역시 좌경화된 지식일 것이다. 그가 데리고 있던 참모들과 지휘관들은 거의가 다 남로당 세포이며 그가 알고 있는 4.3지식 역시 남로당이 주입시켜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지휘하던 9연대의 족적을 보면 김익렬은 연대장이 아니라 문상길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5월 3일까지의 연이은 공비들의 기습사건으로 인해 5월 5일, 조병옥과 딘 장군, 맨스필드 대령을 포함한 군정당국자들이 제주도에 와서 최고수뇌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익렬은 폭도를 옹호하고 경찰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조병옥은 그가 파악한 김익렬에 대한 정체를 폭로했다. “김익렬은 공산주의자이고, 그의 부친도 소련에서 교육받은 공산주의자였다” 이에 정체가 노출된 김익렬은 미군정 당국자들 앞에서 조병옥을 향해 달려들어 난투극을 벌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파면됐다. 이런 그가 4.3에 대한 책을 쓴 것이다.

김익렬은 유고에서 자기 부하들을 ‘군기는 엄격하고 일치단결되어 있는 장병’들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김달삼의 극비 상황일지에 의하면 4.3 직전에 김달삼이 9연대 프락치로부터 받은 보고가 있다. "연대 병력 800명 중 400명은 4.3작전에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을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없다" 여기에서부터 김익렬의 유고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말 책이다. 그런 거짓말이 원고지 400매 분량으로 소설화돼 있다. 이런 김익렬의 유고이지만 그 유고에도 4.28이라는 숫자는 없다. 누군가가 가공해낸 숫자다. 미군정이 김익렬에게 평화회담을 위임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김익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북한의 논문 자료에도 나타나 있고, 한라산 유격대 상황일지에도 나타나 있다. 북한 자료와 유격대 자료를 보면 김익렬이 지휘한 9연대는 그야말로 빨갱이들이 득실대는 붉은 군대였다. 유격대가 작성한 상황일지를 보면 김익렬은 오일균에게 놀아나 김달삼과 비밀협상을 했고, 작전을 할 때마다 정보가 유격대에 넘어 가 실패하는 데다 그의 부대로부터 수많은 병졸들이 유격대에 투항하여 합세했고, 그의 부대는 유격대의 병기 창고나 다름없었다. 그 스스로도 손수 김달삼에 카빙총 실탄 15발을 넘겨주었고, 취약기를 맞은 적을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급기야는 비밀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파면되었다.

그가 김달섬을 만나 직접 카빈 소총탄 15발을 건네 준 것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김달삼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보인다. 북한이 발간한 4.3역사책은 김익렬을 좌익으로 평가했고, 연대에서 좌익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김달삼을 만나 협상을 했다고 썼다. 한 발 더 나아가 북한 논문은 김익렬을 자기편이었다고 썼다. 김익렬이 김달삼과 4가지를 비밀로 약속했는데 미제와 리승만 역도의 방해책동으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쓰고 있다. 좌익들의 주장은 바로 이 북한 역사책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단선단정반대, 둘째 경찰 완전무장해제와 토벌대 즉시철수, 셋째 반동 테러 단체 즉시 해산과 서청원 즉시 철거, 넷째 피검자 즉시 석방과 비법적인 검거, 투옥, 학살 즉시 중지.

한마디로 토벌대는 무장해제하고 유격대에 항복하라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대로 이 4개의 항에 김익렬이 합의했다면 그는 분명한 좌익이다. 이 4개의 항은 김익렬이 보장해 줄 수도 없고, 김달삼 역시 이 4개 항을 김익렬이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4월말로부터 5.10선거까지는 토벌의 의지와 강도가 매우 강했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군정이 휴전을 원했을까? 미군정의 협상지시가 있었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4월 하순이라면 미군정이 김익렬의 무능함을 인지하고 있었었던 그런 시기요, 조병옥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그를 내보내 적장과 평화협상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뻥이다. 당시 미군정의 도덕과 명예감으로는 불법적으로 조직되고 불법과 만행을 저지르는 도적떼요 반란떼에 불과한 무장공비와 협상을 하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의 명예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시 미군은 독일도 항복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도 항복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미군정이 김익렬에게 협상의 전권을 주었다는 발상을 착안해 낸 좌익들의 저의는 확실해 보인다. 4.3 왜곡의 테마를 보강하기 위해서다.  좌익들이 주장하는 4.3의 테마는 이러한 것들이다.  "국가 공권력과 인민유격대는 동급이었다." "4.3은 김일성과 함께 통일국가를 열어가려는 인민유격대와 이를 방해하는 미국 및 그 앞잡이인 군경과의 전쟁이었다" "인민유격대가 왜 나쁘냐, 이승만의 군경이 포악하고 잔인했다"  인민유격대 상황일지에는 김익렬이 경찰을 적으로 생각하고 유격대와 협력하기로 했다는 말이 등장한다. 유격대와 김익렬이 한편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김달삼이 쓴 상황일지에는 "김익렬과 김달삼은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2회에 걸쳐 면담을 했고 
그 후 5․10 투쟁까지는 국경으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없어 우리의 활동에는 크나큰 이익을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       

                                 강준만이 쓴
오라리 사건

강준만은 그의 저서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2권 108~110쪽에 오라리 사건을 왜곡했다. 요지는 김익렬과 김달삼 사이에 4.28평화협상이 있었는데 미군의 앞잡이 경찰이 폭도로 위장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9연대 병력과 미군 병력을 공격한 후 이를 폭도들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협상이 깨졌다는 것이다. 강준만의 왜곡은 중간제목 “평화협상을 깬 '오라리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미 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공격 대상은 경비대나 미군이 아닌, 경찰과 우익단체였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 등 우익 청년단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원성을 산 서청(서북청년단)이 주요 공격 목표였다. 그리하여 유격대를 결성하였는데, 3월 28일 현재 8개 읍면에 걸쳐 모두 320명이 편성되었다. 이들이 확보한 무기는 겨우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에 대한 도민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 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출동에 주저하였다. 경찰은 경비대가 사태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자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스스로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후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부터였다.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4월 28일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두 사람은 네 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과 같은 3개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둘째,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셋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변을 보장해준다. 또한 귀순자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평화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총격을 가한 자들은 경찰로 드러났다. 경비대의 취조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오라리 사건에 대해선 미국이 그 배후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국 촬영반에 의해 공중과 땅에서 모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 기록영화는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 편집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쓴 오라리 사건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 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북한 논문이 규정한 오라리 사건

4.3봉기발발당시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련대와 군정경찰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빚어져 점점 확대되었다. 경비대는 구성상 근로인민의 자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무장봉기를 류혈로 탄압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고 현지경찰의 지원요청을 묵살하였다. 반면에 경찰 측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다. 또한 미군정은 경찰을 중시하면서 경비대와 경찰에 대한 보급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두었다. 경찰은 경비대란 자기들을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정했고 경비대쪽에서는 자신들이 보조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국방경비대 9련대장과 무장대측사이의 협상을 둘러싸고 격화되다가 5월 5일 련대장 김익렬과 경무부장 조병옥 놈의 정면충돌로 폭발하고 그것은 미군정장관 딘이란 놈이 김익렬을 해임시킴으로써 경찰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게 되었다. 경찰의 지원요청에 응하지 않던 9련대는 무장대 지휘부와 접촉하면서 주민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무장대 측과 평화협상을 가지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3가지 조건에 합의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미군정은 교활한 방법으로 이를 파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었다. 미군정은 먼저 이 협상을 파탄시키기 위한 류언비어를 나돌리며 그들 사이에 리간을 조성시켰다. 이러한 때에 미군정장관 딘놈이 극비밀리에 제주도에 나타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무장대측이 평화협상을 먼저 파탄시키려고 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교활한 연극을 꾸미었다.

또한 방화사건 직후에 경찰기동대와 함께 오라리 현장에 도착한 동아일보 특파원이란 자는 미국 놈의 각본에 따라 현지답사기라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미제의 본색을 교묘하게 가리우려고 획책하였다.

또한 군정장관 딘 놈은 5.3기습사건을 도발하여 '초토화 작전'의 구실을 더욱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창국의 쓴 '륙사졸업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5월 3일에 발생했다. 하오 3시쯤  '반도' 200여명이 하산하여 제주비행장에 설치한 수용소에 귀순해오겠다 하여 9련대 병사 7명과 미군사병 2명이 미고문관 드루스 중위 인솔 하에 호송해오는데 무장대가 카빙총과 중기관총을 란사한 것이다. 귀순자 일부가 죽고 생존자는 다시 산으로 도망쳤다. 미군들이 반격해 무장대 5명을 사살했다. 부상된 무장대를 드루스 중위가 데려다 치료해주고 알아보았더니 그들은 제주경찰서(서장 문용재 )소속 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묘한 조작극으로 '국방경비대'와 인민무장대의 평화협상을 파탄시킨 딘놈은 제주도에서 이른바 수뇌회의를 소집하고 극악한 반동두목 조병옥을 시켜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파면시키는 연극을 꾸며 내고는 반동들을 내세워 제주도인민항쟁을 탄압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에로 내몰았으며 그것을 무력으로는 뒷받침 해주었다.

                                             진위 가리기

여기에서 눈이 확 트인다. 4.28에 대한 남한의 기록은 없다. 그냥 뻥이요 가공해낸 것이다. 뻥쟁이인 김익렬의 유고에도 4.28은 없다. 그러면 4.28이라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로 북한논문이다. 북한의 박설영은 4.3사건에 대한 논문(박설영)을 1991년에 내놓았다. 정부보고서는 2003년에 나왔다. 정부보고서가 보고 베낀 “4.3은 말한다”(제민일보 4.3 취재반/ 도서출판 전예원)는 1994년에 나왔다. 여기에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4.28을 가공해낸 것은 바로 북한의 박설영의 논문에 야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 좌익들이 북한 자료를 베껴 쓰는 행위는 5.18 역사쓰기에서도 나타나 있다. 남한의 5.18역사는 1985년에 황석영이 처음 썼다. “어둠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도서출판풀빛)이었다. 그런데 이 황석영의 책은 계엄군과 미국과 국가를 모략-저주하면서 적화통일을 지지하는 책이었다. 그 내용들을 보면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듯이 실감나게 썼다. 그런데 앞뒤를 보면 자가당착이 많고, 사실들 역시 수사기록과 정 반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황석영의 책은 북한의 5.18역사책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쓴 것이었다. 하다못해 차량번호까지 일치했다. 5.18역사책은 북한이 먼저 썼다.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라는 역사책을 썼다. 이어서 1985년에 조선노동당출판사가 ‘광주의 분노’를 내놨다. 내용을 대조해보니 황석영은 이 두 책을 거의 다 베껴 썼다. 남한이 2007년에 개봉한 5.18영화 ‘화려한 휴가’는 북한이 1991년에 개봉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거의 다 베꼈다. 한마디로 남한에서 좌익들이 발간하는 역사책은 북한이 내놓은 역사책을 판박이 한 것들이었다.

정부보고서, 북한 논문, 강준만의 저서를 보면 오라리 방화사건은 우익청년단이 저지른 것인데 미국이 이를 인민유격대가 저지른 것으로 모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 3일에 무장대가 미군과 국경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알아보니 국경과 미군을 공격한 무장대는 인민무장대가 아니라 제주경찰서 경찰관들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이 저질러놓고 이를 무장대에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강준만이나 정부보고서를 보면 4월 28일 미군정의 지시에 의해 김익렬이 김달삼과 이른바 평화협상을 체결했고, 그날로부터 3일 이내에 피차 공격을 중단하고 안전계수를 더 주어서 5일이 지난 5월 3일 이후에 공격을 하면 이는 배신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를 해놓고도 미군이 야비하게 평화협상을 깼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5.1의 오라리 방화사건과 5.3의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의 조작극이었다는 것이다.

평화협상은 순전히 북한과 좌익들이 미군과 대한민국을 모략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만일 4월 28일에 평화협상을 했고, 이 협상을 미군정이 이를 3일 만인 5월 1일과 5일 만인 5월 3일에 어겼다면, 4월 28일부터 5월 3일 동안은 인민유격대 즉 무장대에 의한 공격이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무장유격대의 상황일지를 보면 그게 아니다. 

                          무장 유격대 상황일지에는 4.28이 없었다.

유격대 ‘극비’ 문서(한라산은 알고 있다)를 보면 4.28평화협상이 있었다는 기간은 무장유격대의 제3차 작전기간(4.20-5.10)이었고, 이 기간에는 조직을 정비-확대하고, 엄호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부락주둔을 개시하고, 반동 숙청에 주력했다.

협상되었다는 평화기간인데도 무장유격대는 제주읍에서 아래와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아래는 공비가 쓴 상활일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28 합의는 없었다.

4월 27일에는 리구장 집에서 경관이 식사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경관(개)은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 1명을 잡아다가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노형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22명과 아부대 20명이 약 6시간 접전 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경관(개) 3명이 부상당했고, 경관 모자 1개, 문서 다수, 카빈 탄창 2개, 카빈 탄환 9발, 백미 1두(斗)를 노획했다.

5월 1일에는 경관 7명, 반동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한 상태에서 아부대원 20명이 포위하고 도주하는 경관들을 추격했지만 반동 1명만 숙청했다.

5월 3일~7일까지에는 동, 서 각 지구에 아부대 각각 1대대씩 주둔하면서 1개 대대는 본부 근무했다. 노형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반동 3명을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적 기동부 약 30명과 20분간 접전 후 적의 다른 부대에 포위당해서 퇴각했다. 상호간 희생은 없었다. 월평리에서 5월 4일 소각하다가 남은 경관집을 완전 소각했다. 5월 6일에는 서 대대가 산으로 가던 도중 적 기동대 약 30명과 조우하여 약 8시간 동안 접전 후 이를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경관 2명이 즉사했고, 우리대원도 2명이 희생됐다. 7일에는 화북리의 반동분자 4명, 삼양리 2구의 반동분자 2명, 삼양리 3구의 반동분자 2명, 도련리 1구의 반동분자 2명 계 15명의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죽성리에서 반동분자 3명을 숙청했다.

5월 8일에는 삼양리로부터 화북에 이르기까지의 전선을 완전 절단했다. 아침에는 죽성의 반동 거두의 가옥 4호를 소각하고, 반동분자 11명을 숙청하고 반동의 집 2호를 소각하고, 반동의 가족 2명을 숙청했다. 아라리 1구의 반동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반동 가족 2명을 숙청했다.

5월 10일에는 도두리의 반동 4명을 숙청했다. 읍사무소(투표장소)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투표를 방해했다.

대정면에서는 아래와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4월 27일에는 동일리의 반동 거두 1명을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아 부대 8명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반동직원 1명을 숙청하고 1명에  부상을 입혔다.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못해 동무직원 1명이 희생당했다.

4월 30일에는 모슬포지서를 습격했다. 아 부대 15명을 후면으로 배치하고 전면으로는 국방경비대의 보초(동무)를 배치하고, 측면으로는 여관 2층에 특무대를 2명 배치, 특무원이 지서를 향하여 황린탄을 투척하고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포위 습격하기로 작전했으나 황린탄 불발로 인하여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5월 1일에는 신평리와 영락리에서 각각 반동 1명씩 숙청했다.

5월 4일에는 무릉지서를  습격했다. 적은 개(경관) 12명이고, 아 부대는 30명. 약 20분 접전 하였으나 지형상 불리하여 퇴각했고, 동무 1명이 희생됐다.

5월 5일에는 보성리의 반동 1명, 영락리의 반동 고술생(高戌生)외 가족 2명을 숙청하고, 그 가옥을 소각했다.

안덕면에서는 4월 하순에는 동광리 반동 1명을 숙청했다.

                                    북한 논문에도 4.28은 없었다. 

북한의 박설영은 그의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4월26일 새벽 3시 30분경 삼양리에서 6명의 폭도 마을습격, 4월 27일 하모리에서 2개다리 파괴, 선거업무차로 한림에 갔다 오던 관리 6명이 신엄지경에서 피습, 낮 12시~27일 오전8시 사이에서 제주읍부근의 전화선절단, 도련마을에서는 경찰과 무장대가 교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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