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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영화와 송두율 영화가 웬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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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3-04 19:48 조회18,7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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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영화와 송두율 영화가 웬말인가?


북한이 만든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곡’과 남한이 만든 5.18영화 ‘화려한 휴가’는 모두 미국을 원쑤로 하고, 대한민국을 저주케 하는 반역의 영화다. 송두율은 정신적으로 북한 사람이고, 노근리는 반미의 상징으로 악용돼 왔다. 최근 이 두 영화가 버젓이 만들어져 곧 개봉된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600억원을 들여 만든 4.3공원이 이념교육장으로 사용되어 제주도민은 물론 제주를 찾는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이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정부는 방조하고 있다. 여기에 줄줄이 반미-반국가를 내용으로 하는 영화들이 속속 만들어져 상영된다면 도대체 이 나라는 무슨 나라가 된다는 것인가?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우선은 노근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정리해 본다.


                                노근리란?


2002년 2월 2일 우리 언론은 BBC 방송을 인용하여 당시의 미군을 무자비한 살인집단으로 매도했다. 주한미군 철수, 반미감정, 염군사상, 병역의 양심적 기피 등 김정일 전략을 대행해주는 세력들이 득세할 때였던 것이다. 


1950년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짓밟힌 역사에서 벗어난 지 불과 5년이 되는 해였다. 해방직후 4.3사건, 여순-순천 방란사건을 위시하여 동족간에 집단 살인 행위들이 있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 북의 남침으로 발발했다. 전쟁준비가 미미했던 남한은 소련제 무기로 장비된 북한의 적수가 아니었고, 그래서 서울은 불과 3일만인 6월 28일 오전 10시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미국의 스미스 대대가 폭우를 뚫고 부산으로 날아으면서 부터 미군이 한국에 속속 들어왔다. 3년동안 180만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 결과 미군은 56,000여명의 생명을 잃었고, 11만5천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미국은 한국을 도와주려고 왔는가 아니면 한국주민을 학살하려고 왔는가?


노근리에서였다. 양민을 가장한 게릴라들, 여성을 내세운 부녀자들이 수많은 미군들을 속여 미군을 학살하고 미군을 곤경에 빠트렸다. 필자는 월남전에서 44개월간 전투를 했다. 지휘관들은 부하가 죽으면 눈이 뒤집힌다. 월남 도지사나 군수의 허가를 받아 마을을 통 채로 불바다로 만든 적이 많다. 이는 노근리 사건보다 20여년 이후인 1970년대의 일이었다. 


                        일본 전사책에 기록된 노근리


일본이 본 "한국전쟁"이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발행이다. 그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 1950년3월초, 1주일간 29회의 공비습격이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18회의 분쟁이 있었다. (p.37)


* 3월 위기설이 있었다. 북괴가 곧 남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북괴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p.38).


* 5.11일, 이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괴군의 남침이 임박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다. 그래서 5.6월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p.38).


* 북괴군은 18만4천 명, 야포 609문, 전차 272대, 전투기 168대였고, 한국군은 병력 9만8천, 야포 91문, 훈련기 10대였다(p 38-39).


* 6.9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연대장과 사단장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5.17일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를 장악하고 지형을 익숙 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일(토요일), 육군장교 클럽(구락부) 개관 축하연회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번화가에서는 1사단(백선엽 대령, 개성포진) 및 7사단(유재흥 준장, 의정부 포진) 장병들과 연회에 참석했던 장병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각 사단에는 "내일은 좋은 날이니까 규정외의 외출 외박을 허가해도 좋다"는 전문이 있었기 때문에 춘천에 포진한 6사단(김종오 대령, 춘천 포진)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장병들을 내보냈다(p.44).


* 육본은 6.25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 1에 게 휴가를 주었다(이형근 회고록)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은 주무시는 총장님을 깨울 수 없다며 끝내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부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은 채병덕 장군도 수상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군들이 채병덕 장군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참전 장군들 증언).


* 6.28일 0시 15분에 의혹의 미스터리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폭파경위는 다음과 같다. 한강교는 한가의 유일한 교량이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 사이에는 "적의 전차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한 것을 채병덕 장군이 확인했을 때 폭파한다"는 약속이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갑자기 깨졌다. 주 병력이 아직 강북에 있고, 모든 무기가 강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 고문단 부참모장인 그린윗드 중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다. 그린윗드 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다. 김백일 참모부장의 말이 "국방차관 장경근 장군이 01시30분에 폭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제2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와서 제2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했다. 김백일 장군이 이를 받아들여 작전국방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중지를 명했다. 장창국 대령이 짚차로 달려갔지만 도로가 피난민으로 채워져 있어 시간이 지연됐다. 28일02시15분, 드디어 한강교 위에 3열로 뻗은 인파와 차량이 2회의 섬광이 번적 하는 사이에 희생됐다. 주력부대인 2,3,5,7 및 수도 사단이 서울 외곽에 있었다(p.87-89).


* 6.28일 11시30분, 서울이 함락됐다. 한국군은 퇴로가 차단된 사실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채 사우고 있었다(p.89).


*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는가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렸다. 채병덕 장군은 "군사지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고 증언했고, 국방차관 장경근은 "나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스위치를 누른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50년 9.21일 부산교외에서 총살 집행되었다(p.91).


* 인민군이 입성하자 서울시에는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인파가 의외로 많았다(p.91).


* 6.29일 0600시, 맥아더 원수가 그의 전용기 바탄호(C-54)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정상 조직을 갖춘 한국군이 불과 2만2천명, 피난민과 섞여 뿔불히 철수해오는 병사들을 보고 파병을 결심했다(p.115).


* 6.30일 04:57분, 트루먼 대통령이 맥가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2개사단과 1개 전투연대 파견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p.117)


* 미군 충원병의 70%는 19-20세였다(p.118)


* 6.30일, 맥아더 원수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제24, 제25시단의 출동을 전화로 명했다(p.128).


* 6.30일 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24사단에게 전화로 한국 출동명령을 내렸다(p.130)


* 7.1일 03시, 비가 쏟아지는 구마모도를 출발, 08:05분에 이다쓰게에 도착했다(p.131)


* 7.1일 08:45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 내릴 수 없었다.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출발, 7.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스미스 중령 지휘)(p.132).


* 7.8-15간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p.193)


* 7.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지휘를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p.195)


* 24 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다.  이어서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P.237).


*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재가 되던 8.25일 북괴에 포로가 됐다. 평소 체중은 86kg이었으나 체포됐을 대의 체중은 58 kg이었다. 그는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9월4일 판문점으로 돌아왔다(p.239)


*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 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끼어서 사단 陣內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의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의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射彈을 조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 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 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 영동의 7.26일 날이 밝아올 무렵, 먼저 수백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 왔다. 그 후방에는 전채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 때, 지뢰가 폭발하자 주위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 없이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다시 계속했는데 지뢰는 또다시 폭발했다. 실은 북괴군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p.254-255).



2010.3.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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