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다시 되돌려 준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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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2-05-20 00:02 조회11,9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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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다시 되돌려 준다 해도!
경기도와 강원도가 만나는 접경에 구둔이라는 동네가 있다. 중앙선에 매달린 구둔역이 바로 내가 자란 고향역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촌 마을이다. 6살부터 13살까지 불과 7년 동안 살았던 구둔이지만 어렸을 때 살았던 고장이기에 제1의 고향이다.
해방 후 70년이 되도록 개발의 손톱자국이 나 있지 않은 원시의 고향 구둔, 구둔의 중심은 중앙선이 흐르는 구둔역일 것이다. 최근 달마(경기병)님이 강원도 인제에서 4-5시간 동안 손수 구둔을 찾아가, 하루 종일 촬영해서 자유게시판에 동영상을 올렸다. 검색 창에서 구둔역을 치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려서 산보라도 하고 싶은 원시의 고향이 아마 이 곳일 것이다.
그 다음의 내 고향은 서울과 수도권일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긴 삶을 살았다. 그 다음은 베트남에서의 44개월, 그리고 미국에서의 9년이다. 꿈을 꾸면 이 네 개 정도의 고향의 모습이 한 번쯤은 나타났을 것이지만, 꿈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배경은 언제나 어릴 때 뛰어놀던 구둔의 모습이다.
강원도 횡성에서 강보에 싸여 여러 곳을 거치다가 다섯 살 때부터 열세 살까지 구둔에서 자랐다. 아홉 살 때 6.25가 터졌다. 충북 음성에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마을이 거의 불타버렸다. 구둘 속에 묻어놓았던 쌀이 불타버렸고, 처마 밑에 파묻었던 김치도 그을려 버렸다.
먹을 게 없던 바로 그 때에 나는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아프리카 소년처럼 뼈만 앙상해 기어다닐 힘마저 없었다. 가족들은 며칠 후에 나를 묻을 생각을 하면서 한숨만 내 쉬었다. 바로 이 때 먼 동네에 사시는 한약방 할아버지가 혀를 차고 가시더니 마지막으로 먹여나 보라며 약을 지어보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 10명이 서울 신당동 소재의 광희중학교에 시험을 보러 왔다. 나 혼자만 합격을 했지만 서울로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 혼자 6학년으로 재학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30리 떨어진 읍내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여름날, 친구들은 가파른 고개를 힘들게 올라가는 미군 트럭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차가 꼬불꼬불한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전복이 되어 이웃에 사는 친구가 죽고 많이들 다쳤다. 그 때도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동네에 사는 부자 집 형들이 청량리에서 자취를 했다. 나는 그 형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숭인동 변두리에 있는 중학교 야간반 2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신문도 돌리고, 서비스 공장에도 다니고, 막노동도 했다. 돈이 생기면 학교에 나가고 떨어지면 슬그머니 쉬었다.
청계천 헌 책방에서 책을 사서 독학을 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다시 나가면 언제나 선생님은 나를 반겨주시며 옛 학우들과 한 방에 넣어 주셨다. 중2 때 3개월, 중3 때 4개월 다니다가 고1에 들어갔다. 이런 3류 학교가 내게는 정말로 고마운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장안평에서 답십리를 지나 청계천 둑을 따라 걸어서 숭인동에 있는 학교에까지 가는 길은 동네가 없는 허허 벌판이었다. 걸어다니는 밤길이 고단하기는 했지만 고단한 것은 무서운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공동묘지를 앞에 둘 때마다 동행자가 혹시 있을까 해서 길목에서 한참씩 기다렸다. 비가 쏟아지는 날엔 그야말로 칠흑 같은 논길을 더듬으면서 걸었다. 무서움과 벌이는 사투였다. 그 공포는 14세의 나이에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다.
얇은 흙벽돌로 지어진 오두막에서 때 묻은 이불을 손끝까지 감싸고 수학과 영어 책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밤을 지샌 적도 많았다. 부뚜막에 두었던 밥에 바늘 같은 어름이 솟아 올랐다. 왜간장을 넣고 숟깔로 비벼서 입에 넣고, 다시 입에서 한참씩 씹어 얼음을 녹여 먹었다. 이로 인해 위경련이 일어나 몇 시간씩 배를 잡고 뒹굴었다.
때로는 먹고 잘 데가 없었다. 용두동 미나리 밭 가운데 검은 판자로 지은 학교가 하나 있었다. 여름에 거기에서 책상을 포개놓고 자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세찬 바람이 공포의 귀신 소리를 내면서 나의 사지를 오그라트렸다. 창문을 열어 제치고 무작정 뛰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가로등이 나왔다. 아름다운 은가루가 세찬 바람에 옆으로 날렸다. 몸이 젖어도 그 곳은 무섭지 않고 아늑했다. 내가 아는 모자원 건물에는 손바닥만한 연탄 부뚜막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 곳을 향해 달려가 부뚜막 위에서 새우잠을 잤다. 새벽에 주인이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주인은 없는 돈을 할애하여 나를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극기의 기간은 박사과정 3년이었다. 3년 안에 응용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첫 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나의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나는 내 배에 침을 꽂아가며 매일 뛰면서 건강과 체력을 지켰다.
국방연구원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군수 비리, 예산 관리, 율곡비리와 뒤엉켜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구소에서 기득권 행세를 하는 3인의 전라도 동향 사람들이 벌이는 텃세와 싸웠다.
나는 견디다 못해 장관실을 찾았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 조항을 넣어 주십시요.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렇게 당한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성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그런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텃세로 똘똘 뭉친 3총사는 이렇게 해산됐다. 그리고 나는 미국 휴즈사에서 속아 산 방공자동시스템을 물고 늘어졌다. ‘방공자동화사업’(222사업)만 하면 하늘에 나는 새 한 마리까지 모두 잡는다던 시스템이 중국에서 날아온 여객기가 휘젓고 다니고 이웅평 등이 안내해 달라면서 휘젓고 다녀도 탐지하지 못했다.
D;한심한 사태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방장관(이기백)과 공군총장(김인기)을 꾸짖었다. 대통령에게 꾸중을 들은 장관과 공군총장 등은 나를 문제아라며 비방했다.
1987년, 대령 계급장을 내던지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홀트양자회에서 어린 입양아 3명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여러 장 주었다. 4개월간 실의에 차 있을 때 미 국방성에서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던 장군급 공무원이 20만 달러를 내주면서 모교의 교수로 채용시켜 주었고, 나는 3년간의 계약기간만 끝내고 귀국하여 프리랜서의 길을 개척했다. 이 프리랜서의 길이 20여년 동안 계속돼 왔지만 결국 그 길은 자유의 길이 아니라 가시밭 길이었다.
남들이라면 평탄하게 살았을 인생을 나는 참으로 어렵고도 거칠게 살았다. 만일 절대자께서 내게 어린 시절로 되돌려 줄테니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느냐고 제의하신다면 나는 즉석에서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꾼 나에 만족한다. 이 만족감을 얻으려면 나는 내가 지나왔던 그 길을 다시 선택할 밖에 없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 걷기에는 그 길은 너무나 험했고, 불확실했고, 안쓰러운 길이었다.
2012.5.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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