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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명 탈북자의 5.18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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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2-06-26 23:25 조회14,9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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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북한이 개입한 무서운 사건이었다.                                   

글쓴이: 이지명


                                  1. 광주사태에 대한 당시 북한의 선전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남쪽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대 민중봉기는 30년 세월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북한 인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변으로 기억된다. 나는 2005년에 북에서 남한에 온 사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땅의 사람들은 5,18사건을 민주화 운동의 한 부문으로 기억할 뿐 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독재를 부수고 민주를 쟁취하려는 애국학생들과 시민들의 일방적인 투쟁이라고 단순히 기억할 수만은 도저히 없는 기막힌 사건중의 사건인데도 말이다. 내가 감히 이 운동을 사건이라고 말함은 그럴만한 반증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에는 북한 특수군이 관여했다. 그러한 증언 자료들은 북한 전역 어디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다. 5,18사건이 있은 후 북한 전 지역은 벌 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했다. 중앙 KV와 조선중앙1,2,3방송들은 연일 남조선에서의 광주인민 봉기에 대해 대거 선전했다. 군에서 갓 제대해 나온 그때 나는 그 선전을 들으며 당장 이 땅에 전쟁의 나는 줄 알았다. 방송뿐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일제히 강연회를 열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영웅적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에 대해 연설했다.

강연내용에는 기막힌 참상들이 생생한 화폭으로 열거돼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전달뿐이 아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격분과 증오로 가슴을 불태울 가혹한 잔행들로 역어져 있었다. 강연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

5,20일 이렇듯 잔혹한 명령을 받은 수천 명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 최신무기들로 장비한 후 광주시내로 진입한다. 당시 광주는 폭동시민들의 손에 완전 장악되어 있었다. 도시진입부터 계엄군은 앞에 나타나는 도시민들에 있어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서라는 명령에 불복하거나 겁을 먹고 뛰면 즉시 사살했다.

도시군의 항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시내의 경찰서 무기고를 점령하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자동총으로 무장했다. 이것은 철두철미 총과 총이 대결한 가혹한 ‘내전’이라고 강연자는 격앙에 넘쳐 연설했다.

-진압현장에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은 말 그대로 듣는 사람이 증오를 최대한 끌어내는 짐승도 낯을 붉힐 야수적 행동이었다. 그들은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낸다. 끄집어 낸 태아를 대검 끝에 꼬나들고 휘저으며 밀집된 시위 군중을 위협했다. 젊은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철사로 포박해 군용차에 매달아 끌고 다녔다. 쇠파이프로 군중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즉사시키고 연발발포로 무차별 사살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이 강연 참가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명령만 떨어지면 단숨에 남쪽나라 광주까지 달려 나가 전두환 계엄군을 소탕할 열기로 전국이 들끓었다. 5월 25일 전 북한 전역에서는 광주참사를 주도하는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규탄 대회와 각종 모임들이 진행됐다. 사실상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들은 사람들치고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강연은 가장 반인륜적인 인간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참혹한 참살현황을 너무도 생동하게 엮어냈던 것이다. 어이하여 민주를 위해 일떠선 자국민들을 그렇듯 참혹한 방법으로 도살할 수 있느냐는 것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안겨왔던 것이다. 계엄군은 시내에 돌입한 후 국내외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했다. 이미 안에 있던 외신기자들의 밖으로 빠져 나올 때도 그들은 소지한 모든 기재들과 자료들을 무조건 압수했다. 그렇듯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 차단한 상태의 광주 현황을 어떻게 그리도 생동이 전하는지 모두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벌어진 사태가 너무도 참혹한 것이기에 그것을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폭동은 시민들 손에 장악된 지 10일 만에 다시 계엄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민주를 위해 피를 바친 전 시민들의 애국적 행동은 영원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라는 연속 진행된 강연은 전 북한 인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남한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했다, 그는 조선 영화사 작가와 의합하여 시나리오 ‘님을 위한 교향시’ 를 쓰고 이내 제작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북한 전역에서 대 성황리에 상영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광주폭동 진압 시 위에서 말한 잔혹한 살인 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남한 사람들은 말하는데 황석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내용의 시나리오를 썼는지 의문이 깊어진다. 영화는 남녀 두 대학생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는데 시대 앞에 지닌 젊은이들의 위치와 자각에 대한 양심을 그린 영화다. 남해의 어느 섬에서 휴양을 즐기는 두 남녀, 그때 광주폭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주력군이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으나 남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남대학생은 대학교 학생회장이었기에 알기만 하면 무작정 폭동 현장으로 달려 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시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섬지기 여자의 삼촌도 광주폭동사실을 알았다. 삼촌은 이 두 남녀를 못마땅하게 지켜본다. 시대를 선도하는 젊은이들이 남들은 피 흘리며 싸우는데 한가하게 연애에 묻혀 세월을 탕진하면 역사 앞에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냐고 말한다. 얼마 후 남자도 폭동 사실을 알았다. 더 지체할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만을 남겨놓고 시내로 들어와 폭동에 합세한 주인공은 군중과 함께 계엄군을 물리치려 용맹하게 싸운다. 싸움 현장은 치열했다. 위에서도 열거했지만 대검으로 찌르고 배를 가르고 옷을 벗겨 군용트럭에 끌고 다니는 등 강연회 때 선전한 모든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문제는 남한 작가였다. 남한작가가 쓴 영화의 장면이었기에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북한 사람들은 광주폭동진압사태의 잔인성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환각제 복용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두환은 자기의 정치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남조선 군부 다시 말하면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해 치를 떨었다. 과연 외세와의 싸움도 아닌 자국 국민을 상대로 저렇듯 참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도처에서 광주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들이 열렸다. 물론 그러한 집회들은 모두 해당 당 조직들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광주시민들은 자기의 손에 도시를 장악했으나 결국 무차별 살육으로 벌어진 계엄군의 진압에 실패로 돌아갔다, 수천 명의 희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를 남긴 이 폭동은 그렇게 진압되었으나 남조선 혁명에서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민족혁명이라고 북한 정부는 선전했다.

그 후 일 년 쯤 지난 81년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라고 기억된다. 중급 간부들만의 모인 간부 강연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연사는 도당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는데 직급은 도당 위원회 통보 과 지도원이라 소개했다. 그 사람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현 정세는 바야흐로 조국통일의 대 사변을 준비 있게 맞이해야 할 준엄한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사는 그 예들을 조목조목 실례를 들어 이야기했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얼마 전 당 중앙 정치국 위원회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벌써 세 번에 걸쳐 조국통일의 기회를 제때에 활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첫 번째가 1960년 4,19 인민봉기 때이며 두 번째는 1968년 겨울 미군 최첨단 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도대체 언제인가 하는 의문에 강사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 대목을 말할 때 강사의 눈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관중도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5,18 광주폭동 때였다는 것이었다. 남조선 전역이 전두환 군사 파쑈 정권을 반대하는 반정부 기운이 광주폭동과 더불어 최고도로 무르익은 그때 인민군의 남진이 이루어 졌더라면 통일은 시간 문제였다는 대목에서 관중은 자못 긴장해졌다. 강사는 간부들뿐이기에 말한다고 했다.

광주 폭동은 전적으로 우리의 대남공작의 빛나는 승리의 결과라고 했다. 최근 남조선 정세는 우리 공화국의 의도에 맞게 아주 긍정적인 발전단계를 거쳐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반외세 애국적 투쟁으로 이름이 있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남조선 전역에 걸쳐 우리 공화국을 동경하고 민족의 앞길을 위대한 지름길로 이끄시는 수령님을 흠모하고 칭송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강경하게 울려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일 혁명당 전라도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영도 서울시 인민위원회 김종태 위원장 그들은 이미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조선 전역에 뿌린 수령님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깊숙이 그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목포를 중심으로 지하조직, 반 지하조직들의 활발한 반정부 투쟁은 잠재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대중 운동으로 전환될 시기라고 말하며 바로 광주 폭동은 이 끓어오르는 군중운동을 한 계단 더 높은 단계에로 끌어 올리는 우리당의 대남정책 실현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은 언제나 남조선 혁명은 자국 내의 인민 각성과 주권을 쟁취하려는 스스로의 운동이 폭력 전쟁으로 일어나고 전개 되어야만 비로소 혁명승리를 거머쥘 수있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산된 대중운동을 한 곬으로 집결시키고 그러자면 노숙한 당의 주도 세밀한 원칙에 의거한 유일 영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바로 그러한 노선에 따라 지난 수십 년 전개된 노동당의 대남정책은 비로소 8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제 지금껏 축적한 군중운동의 힘을 한 곬에 모을 폭발적인 사변이 절실히 필요했는바 그 실현이 바로 전라도 광주 폭동이었다는 것이다.

모두는 강연을 들으면서 조였던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광주 폭동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전국에 쫘 악 퍼져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조직적인 지시가 없었기에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발설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또 소문뿐이었지 그것을 확증 즉 증명할만한 사안들이 극히 드물었던 때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무엇인가 더 알고 싶어 몸살을 떤다. 이 구석 저 구석 앉으면 쉬쉬 하던 그 소문의 진가를 바로 강연 연사가 시원히 알려주자 일순간 장내는 벌 둥지를 쑤셔 놓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심지어 그 좋은 통일의 기회를 왜 그렇게 속절없이 흘려보냈을까 하고 못내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게 된 데는 바로 김일성이 통일기회 세 번 중의 마지막 하나였다고 했다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강사는 다시 격앙에 넘쳐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꼼꼼히 들여다보며 한자라도 틀릴세라 읽던 중앙에서 인쇄한 원문을 보지 않고 말했다. 이제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군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은 한 개 대대인원이었다.

잠수함과 공중으로 은밀히 전라도에 스며든 우리 군은 자정이 지난 깊은 밤 환각제를 복용한 전두환 계엄군을 광주시 교외에서 먼저 기습했다. 물론 기습할 때는 군복이 아닌 학생복과 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고 사격했다. 뜻밖의 총격을 받은 계엄군은 일단 뒤로 물러났으나 잠시 후 다시 탱크와 장갑차들을 동원해 물밀듯이 시내로 진입하려 했다.

총격전으로 온통 소란스러워지자 시내에 있던 폭동군중은 모두 잠에서 깨어 대기태세로 이전했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무등산으로 피난을 갔다. 만약 그때 우리 특수군이 계엄군을 제때에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소리 없이 숨어 든 계엄군에 의해 광주시는 말 그대로 피의 바다가 범람했을 것이라고 강연자는 말했다.

폭동군중은 시민으로 위장한 북한 군인들에 의해 이내 경찰서를 비롯한 주요 군부대 기관들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했고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곳곳에서의 저항에 의해 계엄군은 부득불 시내에서 철수하여 외곽에 모였다. 그들은 이렇게 그저 순수한 폭동자들이 무기까지 사용하며 저항할 줄 미처 몰랐던지 급히 전장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각의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에게 선전 공세를 했다. 훗날 퍼져나간 말이었지만 북한군인 여러 명도 광주에서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훗날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빙자료가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은 그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휘발유를 뿌리고 태워버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은 북한 전역에 퍼져 나갔어도 하등 문제시 되는 것은 없었다. 북한 체제가 강요했듯 당시 북한인민들의 국가관은 대단했다. 국가관이라기보다는 수령관이다.

당과 수령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그것은 성스러운 일이었고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안고 수령의 기억 속에 영생하는 복 받은 삶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그리고 수령님을 위해 남조선 혁명에서 한목숨 바쳐 싸웠다면 그토록 자랑스러운 일과 명예는 다시없다는 말이다.

1980년대 초반에 전 북한을 경악으로 뒤흔든 전라도 광주폭동은 날자가 흐름에 따라 ‘영명하신 수령’ 김일성에 대한 위대함으로 점차 그 기수를 바꿨다. 악명 높은 전두환 정권의 야수적 국민 탄압에서 받은 전율보다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과 간부강연을 통해 그것이 이내 양상을 바꿔 김일성의 위대함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던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통일의 위대한 성전을 승리로 맞을 수 있다는 승리의 신심으로 가슴 불태웠다는 얘기다.

이것이 국민계몽을 위해 북한 정권이 만들어낸 거짓 강연인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나 아무리 그래도 없는 사실을 오도하여 특수군 광주폭동 개입을 강연까지 해가며 선전했다는 것은 어딘가 어불성설이다.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을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흰 것도 검다고 곧잘 우겨대는 북한 정권이 행태로 봐서는 능히 그런 거짓말도 꾸며 낼 수도 있지만 당시의 환경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세 번의 조국통일 기회를 놓쳤다는 김일성의 말과 관련 된다. 북한군 특수부대까지 한 개 대대 역량이나 파견하는 상황이었다면 남침도발을 벌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었다. 한 개 대대 파견은 그 진상여부를 진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고 전혀 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전라도에서 싸웠을 비밀 조직들에 미안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입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원리를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통일기회를 놓쳤다는 망언은 거대한 효과를 북한전역에서 거두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남정책은 그러한 과정을 남조선 혁명의 단계별 성장과장이라고 규정지으며 그러한 폭동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확산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광주폭동이 광주 한 지역에서 국한되지 않고 그 여파를 타고 남한 전 지역 봉기로 넘어갔다면 북한군이 남한으로 제꺽 진격했을 것이다. 김일성 또한 그것을 바라고 광주폭동을 주도했으며 특수 군까지 파견해 각종 반인민적인 만행이 발생하도록 유도했다. 80년 당시 인민군은 비상전시 태세에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반도의 남단 아래쪽에서 일어난 봉기에 왜 괜히 북쪽에서 신발 끈을 조여매고 대기 태세로 돌입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그러나 북한이 바라던 대로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전국적인 반정부 기운이 무르익어 갔으나 당시 남한은 폭동 그 자체가 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세 번의 통일기회를 놓쳤다고 측근 간부들 앞에서 역설했고 전국적인 간부 강연회를 열고 그 같은 진실게임을 벌인 것이었다. 그 강연을 들은 후 간부들은 내 놓고 광주폭동에 우리 군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말만 빼고 어느 때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통일 위업에 대비하라고 선전했다.

2, 내가 만난 친구의 형의 증언

그 후 나는 우연히 (정확한 날짜는 기억되지 않는다.) 친구의 친구라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밝힐 수도 있으나 본인의 승인 없이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 친구의 형이 거이 폐인이 되다시피 되어 가지고 군에서 제대하여 집에 내려 왔는데 그가 바로 광주폭동 현장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초가을에 접어드는 화창한 날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강변에 나갔다. 그냥 가면 된다는 말에 빈손으로 갔는데 아늑한 풀밭에는 숯불이 이글거리고 통통 살이 찐 검은 색깔이 돼지 한 마리가 벌건 불에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자 두 명과 그 형이라는 사람과 그리고 또 한사람의 알지 못할 남자가 있었다.

통돼지를 굽고 있는 현장에 나 같은 사람은 난생 처음이어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친구는 이미 익숙한 자리었는지 스스럼없이 나를 불 앞으로 이끌었다. 벌써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원래 고기라면 나무라지 않는 나는 벌써부터 목을 적시는 군침을 애써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그 사람들을 살폈다.

당시 특수 병종 군인들이라면 북한 젊은이들은 모두 무조건 선호했다. 군대에 나갈 나이가 되면 무조건 특수병종에 배치받기를 원했다. 그만큼 강한 남자에 대한 선호는 당시 젊은이들 속에서 유행되었다. 형이라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넌 어디서 군복무를 했느냐고? 나는 숨김없이 말했다. 진정 우러르려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이 없다. 생기기는 여자처럼 왜소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벌써 말하는 품이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미리 가져다 놓은 술이 거나하게 돌아가자 그 형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 마디마디 터놓는 말이 모두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어서 바싹 당겨지는 구미를 느꼈다. 옆에서 시중들다시피 살뜰하게 구는 여자가 이따금 눈을 할쭉거렸으나 술잔이 하나 둘 비워질수록 그 사람이 말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헤엄친다.

모두 군에서 있은 무훈담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광주봉기에 대한 말까지 튀어 나왔다. 자기는 직접 남조선까지 나갔다 온 특수 요원이었다는 것이다. 일이 그쯤 되자 나는 서슴없이 물었다. 그때는 이미 나도 어지간히 술에 취해가던 것 같다. 진짜로 특수 군이 광주폭동에 참가했냐고 묻자 그 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럼 내가 공연히 희떠운 소리나 하는 인물로 보이냐는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내가 손을 홰 홰 내 젖자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 같이 2제대에서 군복무를 한 놈이 어찌 우리 같은 군인들의 무훈담을 알겠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광주사태를 반영한 영화 모두가 거이 진실과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엄군의 만행은 모두 북에서 들어 간 우리 특수군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모두의 눈은 자연스레 그 형이 얼굴에 집중되었다. 정말 싸울만한 전투였다,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진행된 일이어서 어쩌면 재미까지 있었다는 거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총탄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결코 재미란 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이 하는 이야기이기에 언제 그것을 탓할 경황도 없었다.

총성이 울리게 함으로써 계엄군이 부득불 무장을 사용하게끔 유도했다는 이야기였다. 계엄군은 실지 현지에서 총격전을 치렀다. 결과 부득불 시위진압이었지만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너들 영화에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목격했지? 그랬다고 하며 친구가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 형은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하며 한참 갑 자르다가(우물쭈물 하다가) 사실 그건 우리부대 특전사들이 한 짓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들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에로 유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적후에서의 특수부대의 임무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만행이 백주에 감행되자 말 그대로 시민들의 격분은 하늘을 찔렀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정치 공작임무를 맡은 인원들의 국내외 기자들에게 그 사진을 넘기며 온 세상에 이 용서 못할 만행을 고발해 달라고 부탁하는 공작도 진행했다. 그렇게 한 목적은 다른데 있지 않다. 그 결과로 전 남조선 땅에 이 처절한 실태를 알리고 세계에 이슈화함으로써 전 남조선 땅에 반정부 시위로 들끓게 하고 세계 앞에서 북한군 진입의 구실을 마련하자는데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께서 구상하신 위대한 통일 전쟁이며 한반도에서의 승리의 서곡이 될 수 있는 멋진 작전이었다고 긍지에 넘쳐 말했다. 듣는 우리 모두의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진정 역사적 순간에 진입한 사람이 심정이 되어 그 형이 다음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형이 말이 끝나자 우리 모두의 입에서는 하나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왜?? 그 형이 웃었다. 독한 소주를 고뿌 채 들이키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일이란 언제나 변수를 안고 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바라는 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바로 세상만사라는 것이었다. 만약 바라는 바대로 그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자기가 지금 여기 촌구석에 와서 이 같은 소주나 병들이 할 까닭이 있겠냐는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전쟁이었다고 했다.

전쟁?? 그럴만한 타당성이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살사건이 일어 난지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12,12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가로챈 전두환 군독재 정권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떤 외부의 물리적 힘이 동반된다면 능히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정부의 시기론이었다.

적절한 시기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가장 유효적인 기회인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 조직으로부터 희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당시 합법적이다시피 맹활약 중이던 친북 조직은 광주 폭동의 시발점에 불을 지르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김일성도 이것을 기회로 봤다. 수 십 년 꿈꾸던 통일광장의 유일 대통령이 되어 전 인민의 환호를 받는 신적인 자기의 멋진 모습이 상상만 해도 즐거웠을 거였다.

광주폭동을 기점으로 남조선 전역에 4,19와 꼭 같은 민주항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처럼 멋진 기회는 다시없을 거라고 결론짓고 인민군 특수부대 파견을 서둘렀다는 거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주 폭동은 그렇듯 심혈을 기울이고 특전부대까지 동원되었으나 별로 탐탁한 실효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기에 진압됐고 다른 도시들에는 퍼지지 않았다. 나는 간부 강연에서 들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조국통일의 세 번째 기회. 김일성의 그 세 번째 기회는 그렇게 대해의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때 만약 60년 4,19처럼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났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또다시 한차례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만약 그때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느 쪽이 이길 거냐를 떠나서 그 무지한 총포탄의 작렬 속에 한 민족의 가슴 아픈 참혹한 후진을 무엇으로 보상했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때는 가슴을 울렁이며 그 형이 이야기를 격동 속에 들었지만 남한에 떳떳한 국민으로 입국해 사는 지금의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형이 이야기가 결코 지나간 허풍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아귀가 잘 맞는 소리였다. 그 후 그 형은 다시 몸이 완쾌되어 본 부대로 돌아갔다. 가면서 다시 친구와 나를 불러놓고 신신당부했다. 어디 가서 그때들은 말은 없던 것으로 하라고,, 술기운에 뱉은 말이지만 너무도 중대한 사안이어서,,,,,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강연을 통해 다 알려진 일이라고, 아마 이일을 모르면 북조선 사람이 아닐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거? 그거 말이야?? 우리 둘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안다고 철부지가 아니니 걱정 말라고,

전 북한 주민이 영화를 보며 치를 떨었던 바로 그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 낸 천인공노할 극치의 만행을 바로 북한군의 시민감정을 유도하려 저지른 행위였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그건 함부로 지껄일 말이 아니었다, 출처를 캐려 들면 말한 그 형은 물론 들어버린 우리 둘(그때 두 여자까지) 역시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어느 누구나 들으면 치를 떨 만행이지만 그러한 일이 국가를 위해 어떤 정의를 위해 부득불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적 범죄여서 그런 것인가? 죄를 지으면 사형을 집행하는 것도 결국은 범죄다. 하지만 그것을 범죄로 규탄하기는 이르다. 북한 사람들은 이제 반세기 이상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함은 아주 있을 법한 일로 여기며 또한 응당한 행위로 간주한다.

하물며 국가의 최대숙적인 남조선에 대한 폭력 같은 것은 그것이 어떤 만행을 동반했던 두 손 모아 기립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북에 살던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테러적 행위가 얼마나 큰 동족말살 행위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 후부터 남침할 대 이변적인 사건들이 남조선에서는 없었다. 없을뿐더러 북한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대 발전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세기를 주름잡으며 일구어 낸 한강기적은 이 한반도 땅에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음을 알려준다. 그 무엇도 대비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앞서 가버린 이 땅의 기적, 이 편한 지상천국에서 나는 북을 향해 단죄한다. 더는 동족에게 죄짓는 일을 삼가라고, 그리했다 해도 조금도 거둘 것이 결여된 아득한 하늘이 돼 버린 오늘이 남한 현실이다. 이 땅의 아들로 우뚝 선 것이 마냥 자랑스러운 오늘이기도 하다.

2009년 11월 23일 이지명 씀

2012.6.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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