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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1-10 23:46 조회5,3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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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사건’은 ‘36년간의 제주공산화사업’


                                  제주공산화의 뿌리
(남한 공산화의 향도)

제주4.3사건을 겉으로만 바라보면, 1948년 4월 3일 한라산 무장반란군이 새벽 2시에 한라산 89개 봉우리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는 것을 공격개시 신호로 하여 제주도 12개 경찰서와 경찰가족 그리고 애국인사들을 습격하여 살인 방화 납치를 자행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5.10선거를 방해하고 이어서 경찰과 군과 애국인사들을 몰살시켜 제주도를 남한공산화의 교두보로 확보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여 1957년 4월까지 무려 9년 동안 지속된 ‘제주공산화사건’ 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인식돼 있는 정사였다.  

하지만 이 제주공산화 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비로소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코민테른에 의해 세계적으로 확산된 국제공산화 작전의 일환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1919년에 세계의 모든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을 선동하여 이상적인 공산주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창립되면서 1920년에는 세계 30개국에 33개 지부를 두는 등 공산주의바람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1925년부터 서울에서도 불기 시작했다. 안동의 한 농촌 중학교 출신인 김재봉이 상해를 거쳐 러시아로 가서 한국 최초의 국제공산당원이 되어가지고 1922년 서울에 들어와 조선일보에 위장해 있다가 1925년4월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설하고 박헌영과 함께 남한 내에 공산주의를 심기시작하면서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의 확산은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심각한 골치덩이 였다. 조선공산당은 세력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했고, 일본 경찰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은 창설했다 소멸되는 과정을 5치례나 반복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해방 후에는 박헌영의 남로당으로 결집하기에 이르렀다. 

제주의 공산화 운동 역시 소련의 국제공산당 세력의 확장전략에 의해 시동되었으며, 제주도의 공산화 운동은 서울보다 먼저 출발했다.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과 만주 소련에서 공산당 훈련을 쌓은 후 귀국했다. 제주도 공산화의 시조는 김명식이다. 김재봉은 농사꾼에 중학 정도를 나온 그야말로 배움이 일천한 다혈질의 사람이었지만 제주출신 김명식은 머리가 명석한 와세다 대학 출신이었다.

그는 1921년 1월, 서울에 M-L 라인의 세포조직인 “서울청년회”을 결성했고, 이를 교두보로 하여 제주공산화를 위한 세포확산에 착수했다. 안세훈 오대진 김달삼 등 기라성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군정의 통제력이 미약하게 미치는 제주, 마을들이 거의 다 8촌 이내의 가족관계로 연결돼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제주를, 남한 적화통일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한라산에는 350-500명의 무장대를 양성하고, 마을에는 열혈 공산주의자들을 결성하여 제주도지사로부터 읍면리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정조직의 수장을 독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69개 부락 모두가 적화돼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에서 실시한 동향조사에서 당시 남한인구의 78%가 공산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고 하고 제주도 인구의 80%가 공산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사회를 변모시켜 만든 국가였다.

                                     제주공산화의 이정표 

제주공산화는 해방 이전 20여 년간의 식목기 및 세력확장기를 거져 뿌리를 내린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5.10선거 저지투쟁에 나섰다. 바로 이 선거 방해를 위해 벌인 전쟁이 1948년 4월 3일에 본격화된 것이다. 그 1년 전인 1947년 3월 1일에는 제주읍 북국민학교에 3만여 공산당원들이 모여 경찰을 압박했고, 이에 대한 반사작용에 의해 시위참여자 6명이 사망했고 8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서부터 시체를 악용한 좌익세력 특유의 군중선동이 시작되었고, 역사왜곡의 빌미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사람을 살해하는 미군정과 경찰의 만행과 학대가 있었기에 제주도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4.3항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내건 시위 슬로건을 보면 당시 시위의 성격과 수준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지금의 좌익세력의 민얼굴이 보이고, 1980년 5월 김대중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1. 학원을 민주화하라
2. 진보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3. 정권을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4. 박헌영 선생의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5. 민주애국 투사들을 즉시 석방하라
6. 남녀평등 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7. 근로인민은 남로당 깃발로!

                              <4월 3일의 인민유격대 습격사건> 

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의 기록병 수첩에서 발견된 상황일지에 의하면 4월 3일 새벽의 기습으로 인해 경찰관이 4명 살해됐고, 8명이 부상을 입었고, 2명이 행방불명이 됐다. 경찰가족 등 민간인이 8명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반면 당시 북한 노동신문에는 경찰서 2개가 방화되고, 경찰관 11명, 악질반동 10여명, 테러단 11명이 숙청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덕구 기록병 기록에 의하면 4월 3일부터 7월 24일까지 110일 동안에 무려 31회의 경찰 습격을 감행했다. 경찰관 74명, 경찰가족 7명을 살해했고, 23명에 부상을 입혔다. 우익 민간인 226명을 실해했고, 2명을 납치, 28명에 부상을 입었다. 120채의 가옥을 불태웠고, 940개의 전선을 절단하고 170개소의 도로를 파괴했다. 

심지어 이덕구 유격대 사령관은 1948년 10월 24일,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1주일후인 동년 11월 2일에는 대담하게도 9연대 제6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중대장 등 14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1월 17일을 기해 제주도에 계
엄령을 선포해 무장공비를 더욱 압박했다. 

                           <조병옥 박사가 쓴 4.3 사태의 실상> 

"(4월 3일)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았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 아니라,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18일 신촌에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잘라 죽인 후 수족을 다 절단하였으며, 임신 6개월 된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1일에는 임신 주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산 채로 매장하였고, 5월1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희와 3세된 장남을.30여 명의 폭도가 같은 동네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종삼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김수년, 36세 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 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어린이 등 11명을, 역시 고희숙씨 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히 난타한 후 눈오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 가서 늙은이, 젊은이 불문하고 50여 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 음부, 볼기 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하기도 전에 땅에 생매장 하였는데,그 중 김성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인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토 벌 기>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혼란 속에서 1948년 5월 15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만 2년 여 동안 집중적으로 수행됐다. 그 결과 제주도 주민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제주도민은 선무활동을 통한 토벌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공적비까지 세워주었다. 하지만 이 함병선 대령에 대해 54년 후에 정권을 잡은 노무현-고건-박원순은 정부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를 통해 “함병선 대령은 최악의 악랄한 살인마요 초토화의 장본인”이라 모함했다. 이 하나의 사실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옛날의 순수했던 제주도민이 노무현 세력에 의해 빨갛게 오염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토벌 2년여 동안 낮에는 군과 경찰이 마을을 점령하고 밤에는 마을을 인민유격대와 동네 좌익들이 장악하기를 반복했다. 밤에는 인민유격대나 마을 좌익들이 나타나 “낮에 군과 경찰을 도와주었다”고 죽이고, 낮에는 군과 경찰이 나타나 의심스러운 징후가 있는 민간인들을 죽였다. 이러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억울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죽을 짓을 한 좌익들’이 수두룩했다. 

                                          <소 멸 기>

6.25전쟁기간에는 제주도에 훈련소가 생기고 수많은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공비가 전처럼 준동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버릇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 6월 25일부터 51년 8월 31일까지 14개월 동안 한라산 33개 마을을 56회나 공격하여 29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56명에 부상을 입혔다. 10여명의 군인을 살해하고, 6명에 부상을 입혔다. 3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23명에 부상을 입혔고, 41명을 납치했고, 324개 가옥을 소실시켰다, 1952년에는 제주방송국과 서귀포발전소를 파괴하기 위해 습격했다. 이러한 파괴행위는 1957년 4월 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을 생포함으로써 종결되었다. 

                                      4.3에 대한 평가 

대구폭동사건이 10월1일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구폭동사건을 ‘10.1대구폭동사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10월 1일에 시작된 대구폭동은 대구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상남북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남도, 충청도, 서울 등 전국적인 반미폭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0월 1일에 종료되지 않고 60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마찬가지로 제주 4.3사건 역시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4월 3일에 종료된 것이 아니라, 1957년 4월에 종료되었다. 그 시작은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1921년 4월 김명식이 제주도출신 서울 유학생들을 포섭하여 제주도로 보내 “반역자구락부”라는 야체이카를 조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보면 제주4.3사건은 제주공산화 역사의 한 꼭지에 불과한 것이며 제주공산화는 1921년 4월부터 1957년 4월까지 무려 36년 동안 지속되었던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공산혁명전쟁이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정부기관들의 평가가 있고, 북한의 평가가 있고, 남한 좌익세력의 평가가 있다. 매우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정부 기관들이 내린 평가와 북한이 대남공작 역사책들을 통해 내린 평가는 서로 일치하는데, 오직 노무현이 만든 ‘정부보고서’만 외톨이처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대검찰청수사국(좌익사건실록), 진실화해위, 전사편찬위원회, 심지어는 김대중의 평가 모두가 일치한다. “제주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폭동”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박설영은 1991년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의 ‘력사과학론문집’ (129-192쪽)을 통해 “제주도인민의 4.3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4.3사건의 성격을 아래와 같이 규정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독괴뢰 정부조작책동을 반대하여 벌린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 책동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대중적인 반미 애국항쟁이였으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였다.”

1982년 평양 조국통일사가 펴낸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117-122쪽에도 “제주도 4.3인민봉기”라는 제하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규정했다. 

“미제의 남조선단독선거를 저지파탄 시키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서 맨 선참으로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인민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이 만들어 낸 정부보고서는 4.3을 이래와 같이 규정한다. 

“4.3은 미군정의 탄압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난 순수하고 의로운 민중항쟁이다” 


                               국가추념의 문제(결론)

                     4.3에 대한 추념, 무엇을. 누구를 추념해야 하나?

뜻을 추념해야 하는가? 또는 사람을 추념해야 하는가? 대통령은 선거 유세기간에 제주4.3에 대해 막연히 추념일을 지정하겠다 공약한 모양이다. 이는 제주도 좌익들의 막강한 세력이, 마치 지금 고교 현대사 역사책 선택 과정에 선보인 것과 같은 선동에 마비되어, 무망 결에 약속한 공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어째서 주민들이 갑자기 좌익세력으로 대거 올라타게 되었는가? 오직 돈과 분위기 때문이다. 공비토벌에 모범적이었고, 공비토벌에 사실상 최종적인 마침표를 찍은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에 대한 공적비를 세울 만큼 순수했던 제주도민이 지금은 돈에 오염되어 좌익들이 벌이는 적화전략에 부화뇌동하여 숫자놀음에 동원되고 있다. 역사를 평가하는 일에 돈이 흐르면 사람들이 오염되고 역사가 왜곡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생각해야 한다. 그가 4.3을 추념일로 정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그가 역사의 깊이를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집권 1년이 지났다. 그에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방대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참모진들이 있다. 이제는 모르고 실수했다 말하면 안 된다. 과연 제주4.3사건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뜻을 반드시 국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추념해야 할 뜻인지, 연구하고 나서야 한다.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정하기로 국회와 국무회의에서 다 통과됐다고 한다. 통과시킨 국회의원들, 통과시킨 국무위원들, 모두가 한심하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서명만 남아 있는 모양이다. 제주 4.3사건의 무엇을 추념해야 하는가? 그 추념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대통령은 확실히 국민에 설명해야 한다.

제주 4.3의 역사가 좌익사관으로 넘어가면? 국가는 제주도 사이비 희생자들에 최대 4조를 물어주어야 한다. 물론 국민세금이다. 이렇게 되면 6.25참전용사, 월남참전 용사를 비롯해 그동안 조국의 부름을 받고 희생한 수많은 애국군인 및 경찰들과 그 가족들에 대통령이 참기 어려운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된다. 국가를 지킨 애국자들을 멸시하고, 오직 5.18유공자들을 포함한 사이비 유공자들을 애국자로 등극시킬 것인가? 대통령은 지금 막중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주도 애국자 가족들을 처참하게 찔러 죽이고, 각을 뗀 야수 같은 공산주의자들, 그 명단이 상당히 많이 확보돼 있지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까 염려되어 명단만 끌어안고 가슴을 치는 제주도민이 매우 많이 있다. 선량한 이웃을 단지 그들의 테러행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잔인하게 찔러 죽인 수백의 공산당원들, 그들의 위패가 지금 제주도4.3평화공원에 정중히 안장돼 있다.

해마다 제주도를 방문하는 수천만 인구에게, 4.3역사를 장악한 좌익들은, 4.3평화기념관 전시물 등을 통해 미국과 대한민국을 증오하고 빨치산을 신성시하는 내용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적대한 폭도들을 신성시하는 이런 교육을 보다 강화시키려면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할 일이다.

광주에 조용히 날아가 5.18비석에 손을 얹고 광주의 마음과 마주하고 싶어 왔다고 온정을 베푼 박근혜. 이제는 4.3까지 추념일로 정해 매년 매 대통령들로 하여금 제주도로 날아가 4.3 폭동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대열에 앞장서게 할 것인가? 대통령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2014.1.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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