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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적색분자들이 일으킨 적화통일 전쟁인 근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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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5-18 16:52 조회19,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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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18의 목표는 ‘민족자주통일’(적화통일)로 명시돼 있습니다. 


1985년 당시 전남사회운동협의회 대표였던 전계량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풀빛, 1985.5)을 냈습니다(증44). 책의 내용은 황석영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5.18이 반미-반정부-자주민족통일(증44, 발간사 끝부분)을 위한 해방전쟁이라는 요지기 들어 있고, 5월 22일부터 26일까지를 해방기간이라고 정의했고(증44, 132, 183, 198쪽), 광주가 해방구였다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 . 시민들 자신의 도시 광주는 모든 좌절, 압박, 부자유, 반민주, 분단 등등의 쇠사슬과 질곡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놓여난 해방지구가 되었다.”(증44, 132쪽 줄친 부분). 북한에서 발간된 책들과 맥을 정확히 같이 합니다. “반민주, 분단 등등의 쇠사슬과 질곡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놓여난 해방지구”등 문맥이나 내용들에 있어 북한에서 발간된 책자와 그 주제 및 표현에 있어 거의 일치합니다. ‘주체’와 ‘해방’은 적화통일 차원의 용어입니다. 황석영은 1989년 3월 20일에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7번 만나고 북한의 대남-대미 모략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만든 좌익입니다. 증 44 황석영의 책 역시 북한과의 야합수단이라는 생각, 아니 들 수 없습니다. 


증44의 발간사는 “내 사람 5월, 내 사랑 영진에게!” 라는 제목으로 시작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독재의 총칼과 외세의 압제에 배반당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5.18이 반미-반파쑈 항쟁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이 발간사에는 “민중 자신의 힘으로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민주화, 민중수호, 민족통일의 깃발을 휘날리기 위하여!” 라는 글들이 주제어로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어서 섬뜩한 문장이 출현합니다. “민주화, 민중수호,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운동역량의 대폭적 증대와 그 공간의 확대, 그 싸움의 대상에 대한 절절한 분노와 확고한 인식이 더해져 가면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민족자주통일(적화통일의 북한식 표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운동역량을 강화하고 확대하고 ‘싸움의 대상’에 대한 적개심을 길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싸움의 대상’이란 누구입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대한민국(반파쑈, 반정부)과 미국인 것입니다. 북한의 전 지역에서 여러 날 동안에 걸쳐 거행되는 5.18기념행사의 주제도 “반미-반파쑈-민족통일”입니다.(증37, 통일원 주간북한동향 73호,229호, 487호 등)


황석영은 그의 저서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에서 계엄군이 철수한 5월 22일부터 26일까지를 ‘해방기간’으로 정의했습니다(증44, 132, 183, 198). 광주가 ‘해방구’즉 남한에 알박이 한 북한이라는 뜻입니다. 5.18이 ‘해방전쟁’ 즉 ‘통일전쟁’이었다는 뜻입니다. 증44의 205쪽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날이(주:5월 26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여학생이 청아한 목소리로 광장의 모퉁이에서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통일을 이루자/  노래는 군중등 사이로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드디어 광장 전체에 노래가 가득했다.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통일이여 오라”  5.18의 주제가 통일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황석영의 위 글은 북한책 증31,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1982.3.20.‘조국통일사’)이라는 대남공작 역사책에 있는 내용과 대략 일치합니다(증31, 597-598쪽). “광주의 봉기자들이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넘고 선혈로 물든 투쟁의 거리를 누비며 몸과 대오가 그대로 육탄이 되고 불덩이가 되어 원쑤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그 나날에 그들이 심장으로부터 부른 노래는 통일의 노래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통일이여 오라. 광주인민봉기자들이 투쟁의 광장에서 부른 이 노래는 그대로 광주인민봉기의 숭고한 정신이고 위력한 추동력이였다.  민주와 통일에 대한 광주 인민봉기자들의 이러한 뜨거운 열망은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를 통일조국에 모시고 그 따사로운 품속에 안기려는 숭고한 열망으로 세차게 굽이쳤다. 항쟁의 광장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친 광주의 이름 없는 한 녀학생에 대한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하여준다. 그는 항쟁의 거리를 누벼가는 시위대오에 서서 동료들과 함께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던 중 괴뢰도청 앞 광장의 격전장에서 불행하게도 흉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졌다. 치명상을 입은 녀학생은 자기를 둘러싸고 흐느끼는 동료들과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이 길을 달려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려 했어요. … 여러분, …  아버지 장군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서 노래를 불러요. 통일의 노래를 … 저 인간백정놈들을 요절내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의 문을 열자요.  아, 김일성장군님, 단 한순간만이라도 뵙고 싶어요. …≫ 채 피지도 못한 18살의 꽃나이 녀학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은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품만을 한없이 그리는 광주의 봉기자들과 남녘의 인민들 모두의 간절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 흠모하면서 그 이의 품에 하루빨리 안기려는 남조선인민들의 불같은 지향이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도도히 굽이치고 있기에 그 강력한 추세를 따라 광주인민봉기와 같은 력사에 빛날 대중적인 애국적 구국항쟁의 영웅서사시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인민봉기는 다음으로 가장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이다. 파쑈독재를 짓부시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반파쑈민주화투쟁은 남조선에서 오래 동안 진행되어 왔다. 이 반파쑈민주화투쟁은 광주인민봉기에서 가장 높은 형태의 투쟁으로 표현되였다.”(증31, 597-598쪽, 발췌문 끝)


황석영도 그의 책에서 “광장 모퉁이”에서 “여학생”이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표현했고, 북한 책도 “괴뢰도청 앞 광장”에서 “녀학생”이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황석영의 글과 북한의 글이 한 통속인 것입니다. 전계량, 황석영 등 5.18의 대표적인 거목들과 북한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반미-반정부-적화통일을 위해 내통 야합해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9.남한의 5.18 진영에서 발간한 ‘사망자 사진’과 북한이 발간한 ‘사망한 사진’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1987년 9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발간한 사진 책자가 있습니다. 제목은 “오월 그날이 오면”입니다(증46,1987년). 1990년 평양의‘한민전평양대표부’가 발간한 사진 책자가 있습니다. 제목은 “아! 광주여!”(증41, 1990년). 위 두 사진 책에는 5.18광주에서 죽은 시체들 중 얼굴이 가장 비참하게 으깨진 시체들의 사진들이 수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책의 사진들과 북쪽 책의 사진들이 모두 똑같습니다. 북한과 5.18단체들이 자료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1987년 남에서 만든 책이 1990년 북한에서 그대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남북이 연합하여 대남모략에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진 책을 발간한 북측의 의도와 남측의 의도가 같고 사진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10. 5.18광주에 북한이 운용하는 종합상황실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광주책과 북한책의 일치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에 발간한 “광주의 분노”라는 제목의 단행본이 있습니다(증38). 증38이 5.18에 대해 내린 정의는 ‘광주봉기는 민족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이었고, <광주민주국>을 세우는 데까지 성공했으며, 광주의 영웅들이 세운 위훈을 교훈으로 기려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한 마디로 미국을 몰아내고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입니다.“영웅적 광주인민들의 봉기는 바로 자주성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한 고리였다.”(증38, 3쪽 하3-4) “민주정권의 싹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울 수 있게 하였다.”(증38, 4쪽 11-12줄) “비록 그들의 육신은 죽었어도 그들이 이룩한 영웅적인 위훈만은 민족사에 불멸의 문자로 기록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증38, 4쪽 17-19줄)


5.18이 ‘자주성’을 위한 투쟁 즉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인 남조선 괴뢰정권으로부터 독립하여 민족끼리 통일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것입니다. 5.18이 민족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교훈적 사건이라는 것은 5.18이 북한에 그만큼 소중한 자산이며, 앞으로도 그런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는 전5.18유족회장 전계량의 표현인“민족자주통일은  . .그 싸움의 대상에 대한 절절한 분노와 확고한 인식이 더해져 가면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증44, 발간사 끝부분) 과도 맥을 같이하며, 황석영의 머리말의 끝부분에서 황석영의 표현인 “그렇다. 5월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광주의 5월은 비극적 참사가 아니라 전민족이 환희의 광장으로 나서는 출발점이며, 우리는 그 5월을 기념비나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화의 지평 위에 새로운 행동의 실천을 뿌리 내려야 하며, 그런 뒤에야 죽인이들의 피에 값하게 될 것이다.”는 내용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증38 <광주의 분노>에 실려 있는 계엄군에 대한 모략들은 이러합니다. “세 녀학생을 알몸으로 만들어 놓은 놈들은 한참 히히닥거리더니 군화발로 녀학생들을 걷어차며 <빨리 꺼져 이념들아, 지금이 어느 때라고 지랄이야> . . 녀학생들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알몸이 된 것이 부끄러워 앞가슴을 그려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었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생긴 한 놈이 <이 쌍년들이 살기가 싫은가봐>하고 지껄이며 녀학생들의 잔등에 차례차례로 총검을 내려 박았다. . .총검으로 엑스자를 북북 그어놓은 다음 쓰레기차에 싣고 사라졌다. . . 금남로2가에서는 체포한 청년의 손을 묶어 자동차 공무니에 달아매고  . . 시체들은 분간 못하게 각을 떼내거나 얼굴에 뼁키칠을 해놓았다.”(증38, 20쪽) 이는 황석영이 증44에서 계엄군을 모략한 것과 유사합니다.


남한 정보기관들의 자료보다 더 자세하고 더 구체적인 북한 자료들


증38의 21쪽에서 31쪽까지에는 “격노한 80만”(주: 당시 광주인구 80만)이라는 중간제목 아래 광주사태의 상황이 날자 별로 요약돼 있으며 이는 한국의 검찰보고서(증9)와도 대체로 일치하며, 계엄군에 대한 모략내용은 1982년도에 북한에서 발간된 증31 및 1985년에 황석영이 내놓은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증44)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증38의 32-51에는 “<광주민주국>의 출현”부분에서는 우리 경찰, 군, 국정원, 검찰의 보고서보다 더 상세합니다. 북한이 그 시기(1982,1985)에 이렇게 자세한 정보들을 어떻게 알았는가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안기부가 1985년에 작성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증8) 96-97쪽에는 사망한 33명의 학생들의 인적사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주의 분노'가 눈물 나는 사례로 거명한 학생 이름 9명을 안기부자료와 대조해 보니 이름도, 나이도, 학교명도 모두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증38, 70-73쪽에는 15세 박창권에 대한 최후가 장하고 눈물 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담일교사가 출석부를 들고 <박상권!>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박상권> 하고 불렀으나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 . 보통 이얼 때면 다른 학생들이 일어나 <결석입니다> <아파서 못 나옵니다> <구두닦이 하느라 좀 늦을 겁니다> 하고 대답하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날만은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조용히 울쩍거리면서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   누가 <창권이는 데모 때 총에 맞아 죽었어..> 하고 울먹이며 대답했다. . .누군가가 그의 책상 위에 흰국화와 안개꽃송이를 꺾어다 꽂아주었다.  . .광주숭의중학교 2학년생.(71쪽 3줄) 그때 겨우 15살밖에 안되던 박창권이는 과연 어떻게 되어 학급동무들이 기다라는 교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는가? 1980년 5월 전두환역적의 파쑈적인 광란을 반대하여 궐기한 광주의 봉기자들이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우고 피로서 지켜내기 위해 간고한 싸움을 벌리고 있을 때이다.  . .나이어린 창권이었지만 <공정대>의 총칼에 쓰러지면서도 <자유광주만세!>를 부르짖는 , ,>”


그런데 이 박창권이라는 이름은 안기부 자료 증8의 96쪽 14번에 박상권 나이 14 숭의중 2년 산수동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완봉은 증38, 74쪽 중간에 광주무등중학교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증8의 96쪽 5번에 김완봉은 무등중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증38의 76쪽 상반부에는 7명의 학생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최연(광주학운초등학교 1학년 7살)은 증8 97쪽의 32번 학생과 일치하고, 증38의 76쪽 상반부에 있는 전재수(호덕초등학교 4학년)는 증8의 97쪽 30번과 일치하고, 박광법(전남중악교 1학년)은 증8의 96쪽 16번과 일치하고, 증38 76쪽에 있는 김명숙(서광여중 3학년)은 증8의 96쪽 3번과 일치하고, 증38 76쪽의 박성용은 증8의 96쪽 13번과 일치하고, 증38의 76쪽 안동필은 증8의 96쪽 19번 안종필과 일치합니다. 북한자료 증38은 이들 학생들이 죽는 과정을 허위로 극화하여 계엄군을 모략하는 데 사용했지만 거리이름, 사람이름, 파출소 이름은 매우 정확하고 자세합니다. 북한이 어떻게 우리 정보기관들이 보유한 자료나 군의 상황일지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그 시기에 가지고 있는지는 통상의 환경에서는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광주의 분노'(증38)의 36쪽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북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증8 57쪽) 및 검찰자료(증9 101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는데,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로 특정하고 있습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 증 38(36쪽 상단 3개줄)이 훨씬 더 정확한 것입니다. 무기고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상황들도 자세히 기록돼 있고, 시가지의 방향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괴뢰군 제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증38, 36쪽 하5-7줄) “상무동 부근에서였다. 중앙여자공등학교 학생이 공정대의 총검에 찔리워 . . ”(증38, 22쪽 6-7줄) “무등운동장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도 격노한 주민들이 공정대를 향하여 사생결단으로 달려들었다 . .”(증38, 23쪽 10-11줄) “북쪽의 신전동으로부터 남쪽의 학동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우산동으로부터 서쪽의 상무동까지 시민들은 큰 길가와 골목들에서 놈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 ”(증38, 23쪽 하2-4줄) “5월 19일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1가에서부터 류동까지의 거리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는 공정대 31련대놈들과 폭동군중이 맞붙어 . .”(증38, 24쪽 6-8줄) “금남로에서 있은 일이다. 수천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한 개 중대 가량의 공정대놈들을  . .”(증38, 24쪽, 13-15줄) “싸움은 <계엄군통신지휘소>가 있는 <카톨릭센터>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공정대의 만행에 격노한 시민들은 카톨릭센터 차고에서 끌어온 4대의 승용차에 불을 달아 놈들의 저지선 안으로 몰아넣었다.” (증38, 25쪽 15-19줄) 카톨릭센터에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북한이 알고 있는 것인지, 광주에의 북한개입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됩니다.


“동아일보 광주지국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옳은 보도를 하지 않은 문화방송국과 방송공사를 불태워버렸고 기독교방송국도 점거하였다. . . 이날도 비는 계속 내렸다”(증38, 26쪽 하3-9줄) 평양에 앉아서 비가내리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금남로 남쪽에 자리 잡은 관광호텔 앞에서였다. 100여명의 공정대 놈들이 . .”(증38, 37쪽 하1-2줄) 관광호텔이 금남로 남쪽에 있다는 것, 거기에 100여명의 공정대원이 있었다는 세세한 사정을 어찌 평양에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카톨릭센터 앞에서는 200여대의 택시와 20여대의 버스, 3대의 화물자동차가 폭동군중에게 돌을 날라주었다. 그런가 하면 15대의 버스와 50대의 각종 자동차들이 야밤에 일시에 조명등을 켜서 놈들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봉기 군중을 진전시켰다.”(증38, 28쪽 하3줄-29쪽 3줄) 이런 자료는 계엄사 일지와 비슷하지만 계엄사 일지도 이렇게까지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이날(주:5.19) 폭동군중은 도청차고와 괴뢰세무서, 8개의 괴뢰경찰파출소, 3개의 신문사와 방송국, 우체국, 은행 등을 불태워버렸고, 놈들의 자동차 50여대를 파괴 소각하여 버렸다.”(증38, 29쪽 8-11줄) “이 싸움의 선두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 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 동신대학, 서강대학, 성인대학, 송원대학, 전남대학교간호전문대학 등의 10여개 대학 학생들이 섰다.”(증38. 29쪽 19-22줄)  


증38에 기록된 상황들은 광주의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캡처해놓은 상세한 자료입니다. 남한의 자료보다 더 소상하고 체계 있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현장에 있었다고밖에 해석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증38은 1985년에 북한에 발간된 책입니다. 1985년 당시 한국에는 이렇게 자세히 정리된 책이 없었습니다. 이보다 훨씬 덜 자세한 자료들이 중구난방식으로 기무사. 안기부, 치안보부, 군상황일지에 수록돼 있었지만 그 어느 기관의 자료도 체계 있게 정리된 것이 없었으며 ,이 자료에는 없는 내용이 저 자료에 있는 등 불균형적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런 중구난방식 자료들이나마 1995년 검찰의 최종보고서인 증8에 비로소 종합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위와 같이 북한에서 발간된 단행본 <광주의 분노>는 깨알 같은 글씨로 무려 100여 페이지에 걸쳐 광주의 상항들에 대해, 우리 계엄군 자료나 안기부 자료(증8) 및 검찰자료(증9)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계엄군을 모략한 것과 우리 측 자료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라는 것 말고는 대체로 1995년에 종합된 검찰보고서(증9)에 나열된 상황자료들과 대동소이합니다. 우리 측 자료는 2005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비로소 공개되었는데 북한이 어떻게 20년이나 앞선 1985년에 ‘한국이 비밀로 보관했던 자료’보다 더 자세하게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묘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깊습니다. 북한 측이 광주 현지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하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에 북한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증31의 546쪽에서 590까지 44쪽에 걸쳐 깨알 같이 기술된 상황일지(5.18직전 및 5.18과정) 역시 검찰 및 군인, 안기부, 치안본부 일지보다 더 자세합니다. “짙은 가스 연기 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증31, 576하5-8줄). 남한 자료 어디에도 차번호까지는 없습니다. “광주봉기자들은 버스에 나뉘어 타고 목포와 라주 등 전라남도 기타의 도시들로 출발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곳 경찰서와 향토예비군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라주에 진출한 봉기자들은 라주경찰서 관내 5개지서를 점거하고 경기관총을 비롯한 무기와 다량의 실탄을 빼앗았다. 화순, 승주, 호남탄광과 리양경찰지서에서도 . .화순광업소에 몰려간 봉기자들은 향토예비군에 사격을 가하여 물리친 다음 광주사이를 오가면서 무기와 폭약을 실어날랐다. 인민봉기는 라주, 화순, 함평, 완도, 승주, 담양, 령광, 해남, 목포, 장성, 송정, 려수, 순천, 광양, 보성 등 도 안의 많은 시,군으로 확대되어 . .”(증31, 580쪽 하반부). 모두가 검찰 수사기록들과 일치하는 내용들이지만 우리 기록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구체적입니다. “봉기군은 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 .”(증31, 581쪽 하9-10줄).“전라남도 26개 시,군 중에서 17개 시,군이 봉기에 합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19일에는 서울에서 1,000여명 학생들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떨쳐나섰고, 21일에는 전주, 리리에서 투쟁이 벌어져 전라북도에도 항거의 불길이 타번졌다”(증31, 584쪽 8-12줄). 수사기록의 상황자료들에는 전남대부속병원이 시 중심부에 있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후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서열을 편성하였다. 봉기군중은 승용차 4대에 불을 달아 저지선을 향해 밀어보냈으며, 뒤이어 기름이 가득 찬 드럼통을 실은 화물차에 시동을 걸어 저지선쪽으로 나가게 한 다음 솜뭉치에 불을 달아 차에 던졌다”(증31, 582쪽 7-11줄).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이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 목표를 배당해주었다는 뜻입니다. 공격서열을 정했다는 말은 시가지 전투를 기획했다는 뜻입니다.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기획하여 계엄군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기획능력이 없습니다. 북한집단이 내려와 기획하고 상황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8광주에 북한이 운용하는 종합상황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은 월남전(베트남전)에서 44개월간 정글 속에서 작전도 하고 작전상황실에서도 근무를 했습니다. 우리 국군의 상황장교들도 이렇게까지는 치밀하게 상황을 정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5.18에 관련한 군의 작전 상황일지를 보면 치밀하거나 자세하지가 못합니다. 치안본부 자료와 안기부 및 군 자료를 포개서 종합해야 간신히 윤곽만 나옵니다. 이렇게 종합한 것이 증9의 검찰보고서이며, 검찰보고서와 증31 및 증38을 비교해보면 북한자료가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광주시위는 누군가에 의해 통제된 조직적인 작전이었다는 뜻이며 그 누군가는 바로 광주상황을 총정리한 북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피고인의 진단입니다. 


광주에서 북한이 운용하는 종합상황실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발간한 책들, 1982년에 발간한 책과 1985년에 발간된 북한 책에 있는 상황정보들은 그보다 10년 후인 1995년에 종합된 안기부 자료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입니다. 광주 전역에 걸쳐 이곳 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상황들을 북한이 남한보다 더 빨리, 더 자세히, 더 구체적으로 종합정리했다는 것은 광주에 북괴가 운용하는 종합상황실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1980년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17개 시군에 숨겨져 있는 38개 무기고를 동시에 털었던 사건과 맥을 같이 합니다. 북한 고첩들이 장시간에 걸쳐 무기고 위치를 상세히 파악하여 5월 21일 9시에 아시아 자동차에 모인 38개 팀에게 한 개씩의 무기고를 지정해 약도를 주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010.5.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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