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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다랑쉬의 비밀(5)- 세화리 폭도 대습격(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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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4-06-18 00:57 조회4,70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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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의 비밀

 

1. 다랑쉬의 날조
2. 다랑쉬 유해
3. 다랑쉬의 진실
4. 다랑쉬의 폭도들
5. 세화리 폭도 대습격
6. 허위의 굿판들
7. 진술조서 - 함만실. 오지봉.
8. 진술조서 - 채정옥. 김병수.
9. 4.3사건 관련 유골처리 동향 제주경찰청 보고서

 

 

5. 세화리 폭도 대습격

 

다랑쉬 사건에 관련이 있었던 네 사람의 증언에는 다랑쉬 진압이 있었던 날짜가 불일치한다. 채정옥은 12월 18일로 기억하고, 함만실과 김병수는 12월 4일로 주장한다. 오지봉은 세화리에 폭도가 습격이 든 날이나 다랑쉬 사건의 날짜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랑쉬 사건의 날짜에는 18일설과 4일설, 두 가지가 존재하고 있다. 제민일보와 4.3진상보고서는 12월 18일을 주장한다. 그러나 다랑쉬 사건이 18일에 발생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채정옥의 증언과, 일부 다랑쉬 유족들이 음력 11월 18일(양력 12월 18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전날인 음력 11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증언뿐이다. 그러나 다랑쉬 진압에 참가했던 함만실과 김병수는 12월 3일 세화리 폭도 대습격이 있었고, 그 뒷날 대대적으로 벌어진 합동작전에서 다랑쉬 사건이 발생했다고 증언한다.

 

18일설과 4일설 중에 어느 날짜가 맞는 것일까. 다랑쉬 사건은 4일설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12월 4일은 다랑쉬 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함만실, 김병수,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날짜이다. 함만실과 김병수의 증언은 폭도들의 세화리 습격이나, 뒷날 출동 상황에서부터 다랑쉬 사건이 벌어지던 진압 상황까지, 세부적인 면까지 자세하게 진술되고 있다. 다랑쉬 사건은 폭도 습격 바로 다음 날이었기에 토벌 출동의 당사자였던 그들로서는 착각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에 비해 채정옥의 날짜 기억은 불분명한 상황에 의존하고 있다. 그가 18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남로당 구좌면당에 몸담고 있던 12월 17일 날, 정보원으로부터 다음날인 18일에 제주 전 지역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있을 거라는 정보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18일 밤 밖으로 나왔을 때 사방이 연기로 휩싸여 있는 것으로 보아 토벌 작전이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정옥이 다랑쉬굴에 도착했을 때, 굴 입구는 돌로 메워져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압에 참가했던 함만실은 진압이 끝나고 다랑쉬굴을 떠날 때 굴 입구는 폐쇄하지 않고 떠났다고 증언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채정옥의 다랑쉬굴 진입은 다랑쉬 사건이 벌어졌던 당일 날이 아니라 며칠 후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다랑쉬 유족들의 제삿날도 음력 18일과 양력 18일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채정옥의 진술은 ‘기억은 아득하나’라는 조건부로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여 진술하고 있고, 반면에 함만실과 김병수의 증언은 생생할 정도로 자세하게 진술되고 있다. 그리고 제주경찰청 다랑쉬 관련 동향보고 문건에도 다랑쉬 사건 발생일을 12월 4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제민일보는 서울에 가 본 사람보다 안 가본 사람의 진술에 의거하여 다랑쉬 사건을 12월 18일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제민일보와 4.3진상조사보고서는 두 개의 날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왜 4일보다 18일을 선택했을까. 이런 선택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다랑쉬 군(軍)‧경(警)‧민(民) 합동 진압작전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랑쉬 사건이 벌어지기 전 날 밤, 폭도들이 대대적으로 세화리를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12월 3일 벌어졌던 ‘세화리 대습격 사건’이었다. 이 습격으로 세화리 주민 50여명 가량이 피살되었고, 가옥 150채 가량이 불에 탔다.

 

12월 3일 밤 9시 경, 폭도들은 세화리 합전동과 전항동, 그리고 중간 지점 등 세 군데로 분산 협공하여 세화리를 덮쳤다. 폭도들은 미리 세화리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시간을 맞춰 총을 쏘고 ‘왓샤’ 구호를 외치며 동시다발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날 폭도들은 진압대의 지원을 막고 우익인사들을 살해하기 위해 평대리, 하도리, 종달리 등 인근마을도 함께 습격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폭도들은 세화지서를 포위하여 경찰관들을 가둬놓고는 우익인사들의 집을 습격했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세화리를 유린했다.

 

‘남로당 놈들이 사람 죽이는 놈 따로 있고, 식량 털어가는 놈 따로 있고, 의복 가져가는 놈 따로 있었다’는 증언할 정도로 폭도들은 일사분란 했다. 집에다 마구 불 질렀고 보이는 대로 사람을 살해했다. 소, 말, 돼지는 물론 쌀과 옷가지를 마구 약탈했다. 폭도들은 철수하면서도 길목의 집집마다에다 불을 질렀고 약탈한 물건을 마차에 실었다. 세화리 대습격에는 이덕구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여 무장폭도 90여명과 비무장 폭도 20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 습격으로 세화리 일주도로변에 있는 가옥은 전부 불에 탔고, 세화초등학교와 공회당, 마을 향사도 불에 탔다. 이전에도 소대 단위로 폭도들이 세화리를 습격한 것은 종종 있었지만,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총공격은 처음이었다. 폭도들이 세화리를 총공격한 것은 세화리가 우익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폭도들은 세화리를 습격하여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동계 식량 비축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을 점령하다시피 했던 폭도들은 새벽 2시까지 마을을 유린한 후 물러났다.

 

 

제민일보가 다랑쉬 사건을 12월 18일로 확정했던 것은 다랑쉬 사건과 세화리 대습격과의 연관 관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여 진다. 다랑쉬 사건이 12월 4일에 발생했다면 다랑쉬 사건의 원인은 12월 3일의 세화리 대습격 때문임은 명약관화해진다. 그렇게 되면 다랑쉬의 유해들이 ‘주민’이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게 되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악랄한 만행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제민일보는 폭도들의 세화리 대습격을 조금이라도 은폐하기 위해 다랑쉬 사건 발생일을 세화리 대습격과는 날짜가 조금이라도 먼 18일을 선택한 것이다. 제주4.3을 좌편향으로 이끌었던 제민일보의 DNA가 죄였다.

 

제민일보는 김익렬과 김달삼의 협상 날짜를 날조하기도 했다. 며칠 후의 ‘오라리 사건’과 협상 사건을 묶어 협상파기의 책임을 경찰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 남로당 폭도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군경에게 학살의 책임을 씌우기 위한 책이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였다. 다랑쉬 사건의 날짜 선택도 이런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랑쉬굴에 시신 수습 명령을 내렸던 정권수는 남로당 구좌면당의 총책이자 제주인민해방군 3지구당의 전투부대 책임자로, 구좌면 인민위원장 문도배의 조카 사위였다. 정권수는 구좌면 상도리 출신으로 1954년 2월 구좌면 비자림 일대에서 진압대와 교전 중 사살되기까지 구좌면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의 무장폭도들을 이끌었다.. 1949년 1월 13일에는 남로당 구좌면투쟁위원회에서 작성한 ‘면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선전삐라가 제주도 일원에 살포되었다. 삐라에는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백방으로 원조하는 쏘련군’ ‘원쑤들을 쳐부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수상은 멀지 않은 장래에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 단정을 타도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 등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비바람

댓글목록

전야113님의 댓글

전야113 작성일

이덕구:
세화리 대습격
이덕구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여
무장폭도 90여명과 비무장 폭도 20여 명이 동원되었다-

한림화씨의
3부작 - 한라산의 노을- 주인공이지요 !
그래서 잘 기억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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