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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역대 폭도사령관들 - 1대 김달삼(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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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4-07-10 21:50 조회5,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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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인민해방군(폭도) 사령관 계보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이광후 사무처장

 

이글은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발간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2014. 6. 30 발행) 2집에 수록된 것이다.

 

1. 1대 사령관 김달삼

2. 2대 사령관 이덕구

3. 3대 사령관 김의봉

4. 4대 사령관 고승옥

5. 5대 사령관 허영삼

6. 6대 사령관 김성규

 

 

1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 1924~1950, 본명 이승진․李承晉, 대정 면 영락리)

 

“바로 저 앞집이 김달삼의 생가요 부친과는 면식이 좀 있어서 1944년 가을 달삼이가 결혼할 때 여기 내려와서 식을 올렸소. 내가 그 피로연에 참석했던 것이 1944년 가을이 분명하니까. ‘잠들지 않는 남도’ 등의 글에서 김달삼이 일본 학도병이라는 애기는 사실 무근이지. 일본학도병으로 있었다면 대동아전쟁 말기에 결혼한다고 고향에 보내줄 리가 있겠는가? 내가 17~18년 전에 일본에서 글로 이 점을 밝힌 적도 있지만, 그는 아마 1925년이나 1926년생일 거요.

 

김달삼과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이종우)의 말을 빌면 김달삼과는 후꾸지야마에 있는 경도 성동중학교 동기동창생으로 달삼이는 머리좋고 항상 품에다 단도를 품고 다니며 일본놈들의 오야붕 역할을 했다고 해. 이종우가 1944년 3월에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하던 해 4월에 달삼이는 일본 중앙대학 예과로 진학했다고 말을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결혼 후 대구로 가서 10월인민항쟁 후인 46년 말 11월 경에 모슬포로 돌아왔을 거야. 그때 그의 부친이 부탁하여 대정중학교 교사로 내가 다리를 놔줬는 데, 그 학교에는 불과 3~4개월 있으나마나 했을 거로구만. 달삼이가 대구 10월 인민항쟁 과정에서 일어난 대구대학교 시체사건(주; 대구대학교 의과학생들이 시체를 끌고 가두데모를 전개했다 함)의 주모자로 일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니까. 1946년 12월에 남로당이 결성되면서, 나는 대정면책으로 있었고, 달삼이는 대정면 조직부에 있었지. ”

- '이제사 말햄수다’ 189~190쪽-

 

“• 본명 이승진. 일본중앙대학 전문부 중퇴. 학병 출신. 장인이 강문석임. 머리가 좋고 항상 품에 단도를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으며 보스 기질이 있었다. 식구들은 대구에서 포목장사를 하여 재산을 모음. 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 때 대구에서 활동하다 제주로 들어옴. 이때 잠시 고향 대 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 대정면당 조직부장(47년 초), 제주도당 선전부장(47년 말), 제주도당 군 사부 책임(48년)

• 1948년 8월 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에 참석차 월북, 부인은 일본을 거쳐 월북하고 그후 부모와 형도 월북

• 6‧25 때 자신의 유격대(766)와 함께 삼척지구로 남하한 후, 자신의 부 대가 섬멸 당할 때 전사했다고 알려짐

- ‘이제사 말햄수다’ 237쪽 -

 

“분단시대의 정치가. 제주 4․3사건 때 군사부(軍事部) 책임자. 인공(人共) 빨치산 사령관. 가명으로 김달삼, 혹은 이상길(李相吉)이라고 썼으며 본명은 이승진(李承晉). 본관은 고부(古阜)이며 대정읍 영락(永樂)리 978번지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 강점기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항일운동을 할 때 쓰던 가명이다. 이 가명을 사위에게 쓰도록 하면서 제주에 가서 공산 혁명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강문석은 박헌영(朴憲泳) 직계 항일운동가로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이며 박헌영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썼다.

 

김달삼은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大邱)로 이주, 이는 작은 아버지 이용근이 대구에서 상업을 하며 비교적 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구심상소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없어 아버지를 따라 도일(渡日), 오사카(대판) 이쿠노구(生野區)에 살면서 교토(경도, 京都)의 성봉(성봉, 聖峰)중학교를 거쳐 토오쿄에 있는 중앙(中央)대학 1학년을 수료하였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큰 딸 강영애(姜英愛)와 결혼, 강영애는 대정읍 인성(仁城)리 1661번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나와 오사카시 이쿠노쿠 저사야(猪飼野)란 곳에 살고 있을 때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강영애를 두고 귀국, 대구로 돌아와 화물 운송 사업을 하던 부친 집에 살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 등과 같이 당(黨) 중앙위 선전부장인 장인 강문석과 비밀리에 연계되고 있었다.

 

이 때 남로당에 입당하여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된 상태였다. 1946년 강문석의 소개로 공산당 경북 대표 장적우(張赤宇: 경북 칠곡),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경북 대구), 동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경북 영일), 농민동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등을 알게 되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재복은 1948년 제주 4․3사건 때 군사부원 이중업(李重業)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같이 제주에 잠입,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1946년 이재복의 휘하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대구 10․1 폭동에 적극 가담하여 이재복의 신임을 받았다. 이때 그는 고용준(高龍俊), 박일환(朴馹煥) 등과 함께 대정읍 하모(下摹)리에 내려와 부두 하역업을 하던 숙부 이창근의 집에 거처를 잡아 아버지는 화물차 1대를 구입, 운영하고 김달삼은 새로 개설된 대정(大靜)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임하면서 막스․레닌주의와 유물사관을 가르쳤다.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1947년 3․1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남로당이 완전 장악한다는 계획 하에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동년 4월 28일(* 김익렬 기고에서는 4월 30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2대대장 오일균(吳一均)의 주선으로 대정면의 오지 구억(九億)국민학교에서 연대장 김익렬(金益烈)과 평화회담을 벌였으나 결렬되었고 후일 월북했다.

 

동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 이때 제주에서 참가한 자 중에서 강규찬(姜圭贊)과 고진희(高眞姬)부부,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등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김달삼은 ‘제주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았다. 제1기 대의원들은 동년 9월 2일 평양에 모여 인공(人共) 창건을 위한 이른바 ‘조선최고인민위원회의 제1차 회의’를 개최, 김달삼은 이때 김일성(金日成), 허헌(許憲) 등과 함께 49명으로 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9월 9일 인공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월북한 그 뒤 김달삼의 행적은 여러 갈래의 설(說)이 전해진다. 강동(江東)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 교육을 받은 뒤 인민유격대 태백산지구 총수(總帥)가 되어 남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러시아에서 한국에 온 강동정치학원 원장이었던 박병율(朴秉律 )도 “강동정치학원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李鉉相),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육시켰다.”고 말했다.

 

김달삼이 남하한 것은 1949년 8월 초로 알려졌다. 직책은 인민유격대 제3병단(태백산지구)사령관,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영덕(盈德), 안동(安東)지경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김달삼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군경 자료로는 1950년 3,4월에 태백산지구에서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찰 자료로는 “ 1950년 4월 28일 경찰부대에 의해 강원도에서 사살”된 것으로, 군(軍) 자료는 “ 1950년 3월초 국군 22연대에 의해 경북 영덕 북방지역에서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효수(梟首)된 김달삼의 사진을 보고 그 얼굴이 김달삼이 아니라는 증언도 나왔다. “사령관 김달삼과 부사령관 남도부(南道富) 등 10명만이 1950년 4월3일 월북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제7유격대 사령관으로 남하한 뒤 태백산지구 제1군단 부사령관으로 유격대를 지휘, 1950년 3월1일 울진(蔚珍)군 평해면의 백암산(白岩山)전투에서 월북을 시도하던 중 3월 21일 오후 2시경 정선(旌善)군 군북면 고창곡 북쪽 1km 지점에서 국군 제336부대에 의해 20시간 교전 끝에 사살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직접 협상을 벌였던 김익렬 장군은 그의 유고에서 “태백산의 공비(共匪)들이 김달삼을 살해하여 투항하였다는 경우도 있었고 김달삼부대를 포위, 섬멸시키고 김달삼의 사체를 찾아냈다는 경우 등등 10여회에 걸쳐 ‘사체 소동’이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8회에 걸쳐 사체 확인을 했지만 “결과는 공명심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이 꾸며낸 조작극이었으며 끝내 김달삼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혀 더욱 의문을 증폭시켰다.”

- ‘20세기 제주 인명사전’ 102~103쪽 -

 

김달삼(金達三); 본명은 이승진, 대정읍 영락리 출신, 일본 복지산(福知山)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종군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았다. 남로당의 거물이자 그의 장인인 강문석(姜文錫, 대정읍 보성 출신)의 영향을 많이 입었다. 그 뒤 남로당 제주지부당 총책으로 있으면서 48년 4월 봉기 이후 군사부장을 맡았다. 48년 8월 해주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 뒤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하고 제7유격대 사령으로 월남하여 태백산 지구에서 1군단 부사령으로 유격대를 지휘했다. 50년 3월 1일 울진군 평해면 백암산에서 월북하려고 북상했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고창곡 북쪽 1km 지점 반론산 부근을 거쳐 올라가다 국방군 336부대와 20시간의 교전을 벌였다. 그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66쪽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26~30쪽, 57~7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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