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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월 19일을 샘플로 한 3개 자료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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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5-31 19:15 조회17,1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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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5월 19일을 샘플로 한 3개 자료의 비교

5월 19일 상황을 기술한 자료가 여러 개 있다. 수시기록과 항성영의 책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과 북한 조선로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이 세 가지만 가지고 비교해 본다. 매우 길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 5.18과 북한이 한편이라는 생각이 실감있게 접근해 올 것이다.  

                             <1. 검찰기록에 나타난 상황일지>          

                               5월 19일의 상황개요

31사단장 정웅은 이날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 3개 대대를 즉각 시내로 출동시켰다. 오전 8시, 전라남도 지사가 시민들에게 냉정을 찾자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한다는 휴교명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극렬 쪽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 낫, 곡괭이, 도끼, 휘발유통 등 폭력의 무기도 다양해졌지만 경유를 길에 붓고 불을 지른다거나 차량과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의 행태에도 온갖 지혜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5월 19일부터의 광주시위는 그냥 시위가 아니라 폭력 백화점이었다. 3-4명, 7-8명 단위로 쪼개진 공수대원들은 수백-수천 명에 둘러 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날부터 공수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전세는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압도됐다.    

유언비어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시위대는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계엄군이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해 빈사상태에 이르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 무기들이 피탈됐다. 다급한 상황에 몰리게 된 계엄군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했고, 발포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모란봉의 꽃으로 불인 전옥주라는 여인 등 몇 명의 여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애끓는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방송을 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전날보다 더 다양하고 자극적이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모두 찢어내고 구두 발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광주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 18일에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에 현혹된 시민들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쪼개져서 수많은 길목들을 가로 막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대와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고 인격적 모독을 해도 눈망울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들을 던지면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고, 피를 본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돌을 던진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타격하는 등 광주시위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와 민간복을 입은 젊은이들 사이의 무자비한 폭력 싸움으로 변질됐다.    

                                     5월19일의 상세상황

5월 19일은 월요일,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00:50분에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의 61대대 잔여병력, 62대대, 63대대가 도착즉시 31사 96연대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02:10분에 조선대로 이동했다. 06:30분, 11공수여단장(최웅)은 7공수의 35대대를 작전배속 받아 자체 소속의 61대대와 함께 광주 동구권 지역을 담당케 하기로 했다. 그리고 7공수의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전환됐다. 여기까지를 보면 7공수여단장 신우식 장군의 휘하에 있던 2개 대대(33,35) 중, 제33대대는 96연대에 작전배속 된 상태였고, 제35대대는 11여단장에게 작전배속 된 상태에 있었다. 이로써 신우식 장군은 자기가 양성해 오던 부대를 다른 작전 부대장들에게 모두 시집을 보내고 그 자신은 지휘권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자기 부하들이 시위 진압에서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하라”는 당부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최웅 11여단장은 자기 예하부대 3개 대대 중에서 2개 대대(62,63)는 31사 96연대에 내주고, 나머지 61대대와 7공수의 35대대를 가지고 광주의 동부지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전남도청 및 남부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고, 광주 서부 및 북부 지역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31사단 병력 중 광주 시위진압에 가용했던 병력은 96연대 하나뿐이었다. 결국 정웅 31사단장은 자체가 보유한 96연대와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2개 대대 모두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아침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정웅 31사단장은 그날 아침에 광주에 도착한 11공수여단 3개 대대에 ‘광주시내로 출동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8시, 전라남도 도지사는 시민들에게 공공질서를 지키고 냉정을 찾아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나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등 고등학교 학생 6천여 명은 등교를 하자마자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시위를 벌리는 상황이 벌어짐으로서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령을 내렸다. 08: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호남지역은 김대중을 우상화하는 지역이다.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광주소요 뒤에는 배후조종세력이 있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을 날조 유포시키고 있다. 전단지를 공중에 살포, 선무작전을 실시하라”

09:30분,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전날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과 유언비어들에 자극된 학생 및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에 속속 모이기 시작했고, 상가는 문을 닫고, 관공서, 기업체, 학교 모두가 정상업무를 포기했다. 이중 대동고,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공수부대 철수, 전두환 퇴진을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했다. 금남로는 교통이 차단됐고, 전남도청 앞에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11공수의 61대대는 조선대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09:00시부터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의 시위예상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열을 지어 늘어서서 시위대의 집결을 차단하고 있었고, 11공수의 62 및 63대대는 10:00시부터 장갑차를 선도로 차량 30대에 부대원을 태워 시내를 돌면서 위력시위를 했다. 위력시위라는 것은 무장한 계엄군을 차량에 태우고 헤드라이트를 밝히면서 대로를 질주함으로써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위력시위만 보여도 시위를 저지시키는 효과를 냈지만 광주에서만은 사정이 달랐다. 10:00시, 학생 시위대 등 200여명이, 충장로 파출소를 경계하고 있던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를 향해 돌과 염병을 던졌고, 이 때 일반 시민 60여명이 각목,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학생시위에 가담했다. 오전 10시부터 대학생들은 3,000여명 단위로 늘어났다. 행동도 전날보다 훨씬 과격해져,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계엄군과 경찰을 공격했다.

10:30분,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0여 명이, 충장로 일대에도 또 다른 2,000여 명이 화염병, 돌, 각목, 보도블록을 던지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위력시위를 벌이고 있던 62 및 63대대가 급거 금남로로 달려가 61대대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4천명에 대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금남로 사거리, 광주은행본점, 관광호텔, 수미다방, 충장로 1가, 충금지하상가 등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도청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진압군은 다방, 여관, 민가 등에까지 쫓아가 극렬 공격자들을 검거하여 시민과 구별을 짓는다는 방법으로 옷을 벗겨 연행했다. 가톨릭대 앞의 3,000명 중 200여명을, 관광호텔 앞에서는 107명을 체포, 동부 및 서부 경찰서에 인계했다. 이 광경을 외신기자 5-6명이 취재했다.

전남도청 주변에서 시위하던 극렬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 건물로 들어가자 부대원들은 학생은 물론 학생들을 보호하던 직원들까지 도로에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때렸다. 건너편 무등고시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 고함을 치자 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구타하고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오전 11시경에는 4천여 명의 학생들이 금남로에 모여 경상도 출신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죽이려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투척하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경찰관을 폭행하였으며 차량 10여대를 빼앗아 불을 질렀다. 정웅 사단장의 지시로 시위진압을 위해, 금남로에 출동했던 7공수여단 35대대 병력 280명(30/250)은 갑자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병사를 향해 굴리는 등 격렬한 공격을 가해오자 35대대 병력은 시위진압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자체 방어에만 급급해 했다.

충장로 파출소에 출동한 11공수여단 61대대 1지역대 10여 명도 오전 11시경에 200여명의 시위대로부터 투석과 화염병의 공격을 받아 대원 중 최상규 하사의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 등 6명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1지대장으로부터 긴급 구조요청을 받은 안부웅 61 대대장은 거점을 경비하던 61대대 병력에게 거점경비를 포기하고 안전한 인근 건물 안에 피신하라고 지시를 한 후에 11공수여단 본부에 구조를 요청했다. 안부웅 대대장의 구조 요청을 받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은 당시 광주 시내에서 무력시위 중이던 62대대와 63대대를 금남로에 긴급 출동시켰다. 62대대와 63대대가 충장로에 출동하였을 때 3-4,000명의 시위대가 61대대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도로에는 5-6대의 차량이 불타고 있었다. 62대대와 63대대가 증원 출동하자 시위대는 물러났다. 61, 62, 63대대는 충장로에 집결하여 경계임무에 임하다가 시위군중이 해산하여 소강상태를 이루자 14시경 숙영지인 조선대로 복귀하여 병사들에게 식사를 시키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날 오후 광주 일원에는 갑자기 악성 유언비어들이 난무하면서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흥분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3:30분, 공수부대원들이 조선대로 철수하여 점심을 하는 사이 학생 및 시민 4-5,000명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기름이 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케 했고, 도로변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를 부수어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수대원을 위협하고 돌을 던지는 등 전문적이고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무섭게 불어나고 행동이 점점 더 격렬해지자 정웅 사단장과 최웅 11공수 여단장은 병력을 중대 또는 지대 단위의 소규모 단위로 분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대대단위로 집단 운용할 것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61대대는 공용터미널, 62대대는 한일은행, 63대대는 광주고교, 35대대는 광주소방서를 거점으로 하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조치했다.    

윤흥정 사령관의 계엄군 증파 요청을 받은 계엄사령부는 5월 19일 14시경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80호로 특전사 3공수여단에 대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14:00시,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지사, 교육감, 검사장, 광주시장, 중앙정보부 분실장, 지방노동청장, 우체국장, 31사단장, 11공수여단장 등이 참석한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까지 동요한다며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고 석방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정웅 사단장과 최웅 여단장에게 가혹한 방법을 자제할 것과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진종채 2군사령관이 현지 작전지도 차 광주를 방문했다가 17:00경에 복귀했다. 이후 광주 작전에서 2군 사령관 진종채가 보여준 열의는 참으로 돋보였다.

광주시내의 시위가 격화되자 정웅 31사단장은 14시 40분경 11공수여단 61, 62, 63 대대와 7공수여단 33, 35 대대 전 병력에 대하여 도청과 금남로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11공수여단 3개 대대 와 7공수여단 2개 대대는 15시 40분경 출동을 개시하여 11공수여단은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앞 광장에서 금남로 쪽으로 진출하면서 시위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이 금남로 한일은행 앞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는 각목, 쇠파이프, 농기구 등을 손에 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인근 공사장에서 경유를 가져와 노상에 붓고 불을 지른 후 경남과 부산의 번호판이 붙은 일반 차량을 불길 속에 밀어 넣어 바리케이드처럼 도로를 차단해 놓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계엄군은 계속 선무방송을 통하여 해산을 종용했지만 시위대의 태도는 5월 18일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극렬하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었던 무기는 최루탄뿐이었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돌,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공격하는 공격자가 됐고, 규모가 시위대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했던 공수부대원들은 몇 개씩의 최루탄으로 시간을 버는 힘겨운 방어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극렬 시위자 7명이 체포되었다. 계림동 계림극장 앞에 출동한 7공수여단 33대대의 사정은 더욱 험악했다.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33대대 병력 330명은 계림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5,000여명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아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부득이 시위진압을 포기한 채 도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4:30분, 한일은행 1,000여명, 관광호텔 앞 2,000여 명, 가톨릭센터에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를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CBS 건물을 향해 돌을 던지며 거기에 있던 승용차 10대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계엄군 2명이 중상과 경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시민이여 학생이어 나오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15:15분, 시위대는 가톨릭센터에 도착하여 가톨릭센터 7층, 기독교방송을 경계하기 위해 배치된 31사 96연대 소속 9명을 공수부대 요원이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센터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말소화기를 뿜어대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7층으로 올라가 경계병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지고 일부는 차고에 있는 승용차 4대를 불태웠다. 검찰 보고서에는 난폭한 폭도들에 의해 7층 건물 계단에 갇혀버린 31사 96연대 소속 병력 9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탈출했는지에 대한 조사가 없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있는 필자는 오직 소대장의 위협사격에 의해서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대장은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정당방위를 위한 첫 번째 발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안전을 위해 검찰 수사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내용들만을 취급할 것이다. 수명의 청년들이 시체 1구를 싣고 시위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학생과 시민이 더 이상 희생되기 전에 계엄군과 싸우자”고 선동했다. 이에 시민들이 흥분하여 부녀자까지 가담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갑자기 1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한일은행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관광호텔 쪽으로 이동하여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휘발유통에 방화를 하여 경찰을 공격하고, CBS 사옥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했다.

오후 3:30분, 가톨릭 센터 앞에 모인 3,000여명의 군중이 계엄군을 포위하고 폭행을 가했다. 계엄군 1명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M-16 소총도 피탈되었다. 과격한 청년들이 경유를 가져와 길에다 붓고 불을 지른 후, 승용차 8대를 불길 속에 밀어 넣어 계엄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쳤다. 악성 유언비어에  격분한 시민들이 경남 및 부산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에 불을 지르고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을 공격했다. 역전파출소, 도문동파출소, 양동파출소, 일동파출소 등이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고, 17,000여명의 시위군중은 광주은행, 중앙여고, 광주역, 공용터미널, 도청 등 시가지에서 밤 11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 3천여 명은 승용차 8대를 탈취하여 방화를 하고 MBC 사옥에 난입한 후 MBC 방송국 경비병을 습격하며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했다. 그리고 역전 파출소, 도문동 파출소, 양동 파출소, 일동 파출소 등이 극렬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 방화됐다. 이 상황에 당황한 정웅 사단장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무기가 탈취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다가 핀잔을 들었다. “당신이 현장 지휘관인데 멀리 있는 내게 어찌 하오리까 하면 낸 들 무슨 수가 있겠소.” 참으로 한심한 지휘관이었다.

15:27분, 문화방송국 앞에 집결한 3,000여 명은 문화방송이 광주상황을 자세히 보도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 사장이 직접 운영한다는 전자제품점(문화상사)을 불태웠다. 15:55분, 예비 병력으로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 33대대가 착검한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광주역-공용터미널-광주공원 등을 돌며 무력시위를 했다. 이 때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그중 9명을 체포하여 18:30분에 다시 전남대로 복귀했다. 16:00시, 중앙여고 앞에서는 학생 박찬숙 등 600여명이, 대동고 앞에서는 고3학생 등 1,000여명이, 광주일고 앞에서도 고교생 2,000여 명이 시내진출을 기도하다가 군과 경찰에 밀려 분산됐지만 분산되기 직전까지 이들은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16:15분, 광주터미널에서 학생 1,000여 명이 몰려 가드레일과 공중전화기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이 때 광주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됐다.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성난 공수대원 300여명이 돌을 던지다 쫓겨 간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고, 체포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17:00시, 공수부대에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제보가 들어왔다.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돌아가던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공격을 가하자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을 잃고 보도 턱을 받고 정지했다. 시위대는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붙은 짚단을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다급해지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문을 열고 나와 M-16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 때 19세의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19)이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진압군에 의한 첫 번째 발포였다. 여기에서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교의 발포는 그를 죽이기 위해 장갑차 속으로 불붙은 짚단을 집어넣으려 했던 살인적 공격행위에 대한 순간적인 정당방위였다.

이제까지 세상에 무수히 유포되고 있는 5.18자료들에는 19일 오후 5시 불붙은 짚단을 피하기 위한 발포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5월 20일과 21일에 있었던 10여 차례의 자위적 발포 사실들도 들어 있지 않다. 오직 5월 21일 오후 1시에 전남도청에서 발생했던 소규모의 집단 발포만을 문제 삼아 왔다. 하지만 5월 21일 13:00시 도청 앞 발포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발포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진 발포인지를 이해한다면 5월 21일 13;00시의  발포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쪽의 말만 들어온 사람들은 5월 21일의 집단발포에는 반드시 발포명령자가 있으며, 그 발포명령자가 바로 전두환이라고 믿고 있다.

17:30분,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여 명이 집결하자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앞세워 해산시켰고, 공용터미널에 1,000여 명, 금남로에 2,000여 명이 집결했지만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됐다. 이 때 1,000여 매의 유인물이 살포되어 시민을 자극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밭으로 만든다.
경상도 차를 보면 불을 질러라.

17시 30분경에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1,000여명의 시위 군중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포위하고 투석과 폭행을 하여 장갑차에 타고 있던 병사가 겁에 질려 도망을 갔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M-16 소총 및 장갑차가 피탈 되었다. 5월 19일에 벌써 3정의 M-16소총이 피탈당한 것이다. 19:45분, 시위대는 유동에 세워진 석탄절 봉축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고, 중흥동 광주터미널 부근 청과물 시장에서 경남번호판을 단 화물차 1대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시켰고, 이어서 북구청에 돌을 던지고, 누문파출소, 역전파출소, 임동파출소, 양동파출소를 공격한 후 방화했다. 21:00시, 시위대가 역전파출소를 다시 점령하고, KBS 광주방송국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이 때 33대대가 광주역에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경찰과 함께 북구청 주변에 위치한 빌딩, 여관, 다방, 주택가를 뒤져 방화용의자 13명을 검거했다. 23:00시, 경찰과 96연대가 누문파출소와 양동파출소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 때 서방주유소 근방에 있던 시위대 2,000여 명이 군-경의 저지로 해산하면서 주유소 휘발유 9,500리터를 탈취해 갔다. 이날 밤 35대대와 61대대는 공용터미널에서 숙영했고, 61대대는 이튿날 새벽 05:20분에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19일 오후 내내 지속된 시위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11시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용해갔다.

계엄사는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같은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수천수만의 시위대가 순식간에 운집하는 상황 하에서 10명 이상의 시위대가 모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는 참으로 어이없는 탁상 지시였다.

5월 19일 시위진압 과정에서 시위대 김안부(36)가 전두부 열상으로 사망했고, 24명의 군경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의 학생 및 시민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 시내가 다소간의 평온을 되찾자 11공수여단 3개 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 집결하여 철야 경비에 임하였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숙영지인 전남대로 복귀하였다. 5월 19일에 갑자기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양상은 1,800명에 불과한 5개 공수대대의 주먹과 진압봉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산되었고, 계엄군은 시위진압은커녕 자체방어에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2.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5월 19일 요약 발췌>

5월 19일 월요일, 시위는 학생시위에서 민중봉기로 발전하였다. 시민들의 추측은 구구했다. “김대중이를 잡아 죽이고 광주시민들도 모두 때려잡으려나봐” “공수부대가 경상도 병력이라든데” “전라도 사람은 몰살을 시켜도 좋다면서?” 골목마다 곳곳에서 거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어제의 충격을 되살리면서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번져나가고 사람들은 모두 분노에 공감하기 시작하였다.  . .

오전 10시가 되자 금남로에 빽빽이 모여든 군중은 3,000-4,000으로 불어났다. . . 이 사람들 틈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자유업에 종사하는 소상인들, 가게 종업원들, 주변주민들, 부녀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 .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적극적으로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고 . .군중은 차츰 격렬해지고 있었다.  . .

시위대 가운데 섞여 있던 청년들은‘애국가’ ‘정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등의 노래 불렀고 . .오전부터 시내의 녹두서점을 비롯해 곳곳의 주택가에서 화염병이 제작되고 있었다. . .투입된 공수부대의 진압은 시위군중의 불안감을 넘어서 잔인성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며칠 굶겨놓은 맹수가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것처럼 시위군중을 덮쳤다. . .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으로 때리고 휘두르고 찌르면서 시위대의 중심부로 파고든 공수부대는 그들의 위장군복마저 벌겋게 물들였다. . .공수부대는 아무 집에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곤봉으로 난타질 하고는 길바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붙잡힌 사람이 자신은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왜 이러느냐는 식으로 항의라도 할라치면 그에게는 즉시 허벅지나 옆구리에 대검을 쑤셔버렸다. 공수부대원은 3-4명이 1조가 되어 주변건물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 .

여자라도 몇몇 붙들려 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발기고는 아랫배나 유방을 구두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카락을 휘어감아 머리를 담벽에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찍었다. 손에 피해자의 피가 묻으면 웃으며 그 몸에다 쓱 닦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육을 즐기다가 군용차량이 오면 걸레처럼 희생자들을 던져 버렸다. .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령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 .

12시쯤에는 금남로 1가에 있는 무등고시학원에  공수부대 1개 소대가 난입하여 50여명의 수강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서 내몰며 곤봉으로 패고 군화발로 짓뭉겼다. . . 수창초등학교 앞에서는 시위군중 속에서 집힌 청년을 발가벗기고 전봇대에다 거꾸로 매달라 놓고는 공수대원 여럿이서 곤봉으로 나타질을 했다.  . .

택시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것이 발견되면 부상자들을 다시 끌어내려 곤봉으로 난타하고 운전사까지 사정없이 난타했다 . . 오후부터는 대중의 싸움이 질적인 변화를 보아면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 . 비조직적인 수동적 저항으로 인해 피해만 당하던 수세국면이 공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 .

이제부터의 싸움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 . 오전에는 시위대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40대 이상의 중년층과  부녀자들도 많이 기어 있었다.  . .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치열한데 한 청년이 카돌릭 센터 차고에서 승용차 4대를 끌어다가 의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군과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시동을 건채 밀어붙였다. 그중 1대는 CBS 취재 차량이었다. . .

곧 이어서 금남로 2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는 두 개의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두 개의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드럼통이 나왔는데 . . 오후 3시쯤 군경들은 진압할 힘과 화기가 바닥이 났는지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로 제자리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 .3시 30분 경에 점심과 휴식을 취한 공수부대가  도창 앞과 광남로 4거리를 포위하고 군중을 압축해 들어왔다. 캘리버 50 기관포를 거총한 장갑차가 시위군중이 가려 죽건 말건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며 미친 듯이 돌격하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들을 무치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안에서 인질로 잡은 공수대원을 지키던 청년들은 불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수십 구의 시체가 거리로 내던져졌다.  . .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 .

공수대원 한명이 무리에서 떨어져 공주천을 따라 양림교 쪽으로 도주했는데 분노에 치가 떨린 사민들이 그를 끝가지 쫓아갔다. 공수대원은 다급한 김에 광주천으로 뛰어내렸다. 바짝 뒤쫓던 시민들이 던진 돌에 정통으로 뒷통수를 맞은 공수대원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수한 돌멩이들이 그를 향해 내려 꽃혔다. . .

양동시장 부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위대를 뒤쫓아 오던 공수대원 2명이 복개상가 2층으로 올라갔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이 뒤쫓아 올라가 그들을 짓이겨 버렸다. .양동시장 입구에서는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의 과일 그릇이 진로를 방해한다며 아주머니의 아랫배를 군화발로 내질렀다. 노인들도 후려갈겼다. “너희놈들 때문에 다 잡은 놈들을 놓쳤다!”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 때 쫓기던 청년들이 돌아섰다. 살기가 등등했다. 기세에 눌린 7-8명은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중 뒤쳐진 한명을 둘러싸 공수대원을 양동다리 아래로 밀어버렸고, 쫓기던 청년 4명이 뒤쫓아 내려가 돌로 그자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 .문화방송국은 다음 날 완전히 불타버릴 때가지 세 차례의 시민 공격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이 최초의 공격이었다.

시위대는 문화방송 차고에서 MBC 취재차 2대와 또 다른 승용차 3대를 끌어내 불을 질렀다. 그리고 MBC 방송국 사장이 직영하는 MBC 바로 옆의 전자제품 상점인 문화상사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 대 연락을 받은 공수대가 진격해 와서 또 다시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타격하는 학살이 벌어졌다.  . .오

후부터 시민들은 광남로 충장로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고 싸움은 차츰 그 지역적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오후 4시 반경에는  동구 학동과 남관주 역전 등의 외곡도로 부근으로 확산됐다. . . 이날 여러 차례 증강된 군병력과 목포-여수 지역을 제외한 도내 8개 경찰서에서 경찰 1,800여명이 차출, 증원되었으나 겨우 간선도로와 외곽으로 연결되는 국도만을 확보했을 뿐이었다.

오후에는 고등학교에서도 교내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전남도교육위원회는 전 고등학교 37개교에 휴교조치를 내렸다. 오후 4시 30분, 공용터미널 위쪽의 4거리에서 중년의 아주머니(전옥주 가정주부)가 확성기로 외치고 있었다.  . .공용터미널 지하도 속으로 쫓겨갔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도 속에서 요리가 되어 숨져갔다. . .

또한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서진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방해야 하지 않겠는냐”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량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기사가 살해당했다.  . .

오후 5시 10분, 계림동 광주고교 앞 도로에서 충돌이 또 발생했다. 시민들은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사이 중앙로에서 장갑차를 기다렸다. 눈 역할을 하는 장갑차의 감시경을 깨버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돌을 던졌다. 감시경이 깨지자 장갑차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 때 동아일보 기자가 이를 취재하자 장갑차 안에 포위되어 있던 공수부대 대위가 기자에게 군병력을 이리로 보내달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부탁을 받은 취재기자가 군중사이로 지날 때 시민들은 취재차량에 발길질을 하고 욕설을 퍼붓고 돌을 전졌다.  . .한 사람이 볏 짚단을 가져와 불을 질러 장갑차를 폭파시켜버리자고 하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져 놓았다. 별로 효과가 없음을 알아차린 시민들은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그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으나 뚜껑이 열리지 않아 그대로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안에 있던 공수대원이 뚜껑을 열고 M16을 내밀었다. 뜨거운 듯이 팔을 휘젓고 공중에 두 발을 쏘더니 이내 저준사격을 했다. . .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천여명의 시위대가 경상남도 번호를 달고 있던 8톤트럭 한 대를 불질러버렸다. 군중들은 경상도 출신 공수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에 치를 떨고 있었다. 군중들은 죽여 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가가 만류해 살려주었다. . . 유인물 투사회보는 시민 대중들 가운데 행동의 통일을 호소하고,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며, 지하에 투쟁지도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3. 북한의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에 기록된 5월 19일>

5월19일 시내중심부인 금남로1가로부터 류동 까지의 거리에서는 치렬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는<<공정대>>31련대 놈들과 폭동군중이 맞붙어 육박전을 벌렸다. 폭동군중은 <<공정대>>놈들이 달려오면 골목골목으로 피하며 놈들을 분산시켰고 그러다가는 백여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따라온 놈들을 때려눕혔다.

금남로에서 있은 일이다. 수천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앞 세우고 달려드는 한 개 중대가량의 <<공정대>>놈들을 둘러싸고 돌벼락을 안기며 싸웠다. 놈들이 군중들에게 닥치는대로 사격을 가하였으나 성난 군중의 기세는 꺾을 수 없었다. 드디어 군중은 놈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장갑차를 빼앗아냈다.

로획한 장갑차우로 중학교학생이 뛰어올라 깃발을 휘저으며 <<계엄군을 타도하자!>>고 웨쳤다.  포위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몇놈의 <<공정대>>원이 그 학생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소년의 이마와 복부에서 피가 흘렸다. 그래도 소년은 깃발만은 놓지 않고 무슨 말을 웨치려 하였다. 그러다가 자기가 말을 할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흐르는 피를 손에 받아 머리높이 쳐들고는 천천히 모로 쓰러졌다. 그 모습은 꼭 <<원쑤를 갚아달라!>>는 것 같았다.

<<공정대>>의 총에 맞아죽고 총검에 찔러죽는데 격노하여 일어나 사람들이 광주시민들이다.  하기에 소년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더 끓어번졌다. 모두가 <<악귀들아, 아이를 살려내라!>>고 울부짖으면서 쓰러진 소년을 안고 적진으로 육박하였고 좌우충돌하면서 놈들을 짓뭉갰다.

성난군중들은 로획한 장갑차와 최루가스차를 앞세우고 <<공정대>>놈들을 들이 쳤고 착취와 압박의 소굴이 괴뢰 관공서들과 어용기관들을 기습파괴하였다. 노호한 파도와 같이 군중의 물결은 괴뢰도청으로 밀려갔으며 련이어<<인문파출소>>,<<역전파출소>>, <<량동파출소>>들을 점거하였으며 <<림동파출소>>는 놈들의 발악이 심하여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싸움은 <<계엄군통신지휘부>>가 있는 <<카톨릭센터>>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공정대>>의 만행에 격노한 시민들은 <<카톨릭센터>>차고에서 끌어온 4대의 승용차에 불을 달아 놈들의 저지선 안으로 몰아넣었다. 불길이 휩싸인 자동차들이 달려오는데 혼비백산한놈들은 그것을 막을 엄두도 못내고 황황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틈을 타서 군중들이 일시에 와 - 하고 놈들의 지휘부로 쳐들어갔다.

미처 꽁무니를 빼지 못한 <<공정대>>원 세놈이 5층집 옥상으로 해서 빠지려다 한놈은 제풀에 떨어져죽고 나머지 두놈은 총을 버리고 꿇어앉아 폭동군중들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붙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먹이를 만난 승냥이 무리와도 같이 살기등등하여 날뛰던 놈들이 물에 빠진 쥐새끼 모양으로 꾀죄죄해가지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빌붙는 그 꼴은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뒤이어 폭동군중은 <<동아일보>>광주지국으로 밀려갔다. 광주시민들의 항거는 포악무도한 <<공정대>>놈들의 잔인한 폭압에 대한 응당한 보복이였다.  그러나<<동아일보>>는 현지취재자의 보도라고 하면서 <<리성을 잃은 폭도의 란동>>이니,<<계엄군의 인내성있는자제>>니, <<부상당한 폭도를 계엄군들이 군병원으로 후송>>이니 뭐니 하고 시민들을 모독하고 괴뢰도당을 비로하는 엉터리 기사로 지면을 메꾸고 있었다.

시민들은 여러번<<현실을 그대로 보도하라>>, <<그렇게 못하겠으면 보도하지 말라>>고 항의를 들이댔다.  그러나<<동아일보>>는 광주시민들의 이 정당한 항의를 무시한채 계속 <<공정대>>의 만행을 미화분식하고 시민들을 비방중상하는 보도만을 날렸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군중들은 <<공정대>>의 <<통신지휘부>>를 타고앉은 그 기세로<<동아일보>>광주지국으로 쳐들어가 지금까지 참아오던 원한을 담아 복수의 불길을 지펴올렸다. 삼단같은 불길이 당국에 아첨하던 아가리에 쓸어들어<<동아일보>>광주지국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옳은 보도를 하지 않은 <<문화방송국>>과 <<방송공사>>를 불태워버렸고 기독교방송국도 점거하였다. 그리고는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어용방송의 정체를 폭로하고 <<공정대>>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밝히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이날도 비는 계속 내렸다. 모두가 뼈속까지 젖어들 정도로 비에 흠뻑 젖었지만 폭동군중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저녁9시경부터 전두환일당은 2개 대대의 증원무력을 공수하여 광주에 투입하고 보다 본격적으로 살인만행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증강된1,500여명의 <<공정대>>는 금남로 한복판에서 우악스러운 구령소리에 맞추어 살벌한 진압시범동작을 펼쳐놓고 시민들을 위협하였다. 그리고는 종전과 달리 수십명씩 무리를 지어다니며 살육만행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이 수십명씩 떼를 지어 다니게 된것 처음 5-6명씩 한조가 되어 학살만행을 펼칠때 입었던 일련의 손실을 방지하자는 데서 그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광란에 위압을 당할 시민들이 아니였다. 광주시민들은 <<공정대>>놈들이 기승을 부릴수록 저마다 철판과 각목, 도끼와 낫, 식칼을 들고 금남로로, 충장로로, 개봉로로 모여들었다.

죽을지언정 끝까지 싸우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그들을 투쟁의 광장으로, 복수의 한길로 불러냈던 것이다. <<공정대>>가 수십명씩 몰려다니는데 따라 시민들은 그에 대처한 새로운 투쟁방법들을 찾아 내여 놈들과 대항하였다. 광주시내의 운전수들과 열혈청년들이 목숨을 내대고 이 피어린 싸움의 앞장에 섰다.

광주시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되는데 분격한 운전수 들은 무등경기장에 모여 <<놈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는데 우리가 앞장서자.>>고 결의하고 버스, 택시들도 시위군중을 감싸고 다녔으며 <<공정대>>놈들이 달려들면 자동차를 마구 내몰아 놈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금남로 남쪽에 자리잡은 <<관광호텔>>앞에서였다. 100여명의 <<공정대>>놈들이 시위군중을 탄압하려고 달려들때 20대의 청년 8명이 운전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공정대>>놈들을 향하여 맞받아나갔다.  버스가 가증스러운 놈들을 막 깔아뭉개려는 순간 놈들의 집중사격으로 운전수가 쓰러졌다. 버스는 길옆에 서있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앞머리가 부서진채 멈춰서고 말았다. 이때 수십명의 <<공정대>>놈들이 달려들었다. 8명의 청년들은 버스를 등에 지고 서서 각목을 휘두르며 <<공정대>>놈들을 막아나섰다. 1대10이상으로 맞선 격투, 그것도 전문적으로 살인 기술만을 익혀온 짐승같은 놈들과의 싸움이였다. 승부가 뻔한 처절한 싸움이 십여분나마 계속되였다.

청년들은 달려드는 놈들을 마지막 힘을 다해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총검에 찔리워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은 누구 하나 손을 들고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이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군중들이 놈들의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왁 - 밀려나갔다.

한편 금남로의 다른 한끝인 괴뢰 로동청 앞에서는 청년들이 삼단같은 불길에 휩싸인 버스를<<공정대>>놈들이 있는곳으로 밀어넣는가 하면 10여대의 버스를 동시에 내몰아 놈들을 혼비백산케 하였다. 그리고 놈들에게서 탈취한 최루가스차와 장갑차를 타고 <<공정대>>의 저지선을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중앙로에서는 200여대의 버스가 시위군중의 앞장에서 놈들의 저지선을 돌파하였고 <<카톨릭쎈터>>앞에서는 200여대의 택시와 20여대의 버스, 3대의 화물자동차가 폭동군중에게 돌을 날라주었다. 그런가 하면 15대의 버스와 50대의 각종 자동차들이 야밤에 일시에 조명등을 켜서 놈들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봉기군중을 전진시켰다.

그 모양은 신통히도 <<돌격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질주하는 용감한 땅크서렬을 방불>>케 하였다. 폭동군중은 사면팔방에서 놈들을 압축하면서 파쑈통치의 지방아성인 괴뢰도청으로 밀려들었다. 이날 폭동군중은 <<도청>>차고와 괴뢰세무서, 8개의괴뢰경찰파출소, 3개의 신문사와 방송국, 우체국, 은행등을 파괴하거나 불태워버렸고 놈들의 자동차 50여대를 파괴소각하여버렸다.

폭동군중의 드센 공격에 질겁한 괴뢰경찰국장놈은 졸개들에게<<도경찰국은 무너졌다. 이제부터는 각자가 피신하라.>>고 비명을 지르고 뒤담을 넘어 먼저 도망치였다. <<국장>>놈이 도망하자 지금까지 눈치만 보아오던 괴뢰경찰놈들은 저마다 총을 줴버리고 뿔뿔이 도주하였다.

5월19일 오후 8시경이였다. 동명로와 산수3차로 사이에서는 500여명의 군중과 <<경찰기동중대>>사이에 일대 접전일 시작되였다. <<기동경찰대>>는 군중이 밀집된곳을 따라다니며 최루탄을 쏴대며 마구 탄압하였고 군중들은 그에 맞서서 투석전을 벌렸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두시간나마 격전을 벌리던 군중들은 드디어 <<기동경찰대>>를 포위하고 마구 짓조겨됐다.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군중의 기세에 눌리운<<기동경찰대>>는 골목골목으로 빠져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놈들이 도망친다! 붙잡아라!>>하고 다급히 소리지르며 골목길들을 봉쇄하였다. 끝내 27명의<<기동경찰대>>놈들이 봉기군중에게 붙잡혔다. 바로 이때 포위된 <<기동경찰대>>를 빼내려고 <<공정대>>놈들이 밀려왔다. 놈들은 군중들앞에 밀려와 일렬로 진을 치고는 일제히 사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는 가운데 <<공정대>>장교한놈이 뭐라고 소리치며 공포를 쏘았다. 삽시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장교놈은 <<해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격하겠다>>고 을러메며<<공정대>>놈들을 향하여 <<사격준비!>>하고 구령을 쳤다. 자칫하면 또 한차례의 피바다가 펼쳐질 위기일발의 직전이였다. 긴장한 침묵이 흐르는속에 <<가만!>>하고 소리치며 봉기군중을 헤치고 나서는 한 청년이 있었다.

전남대학교 외국어대학 2학년생인 리동훈이였다. 동훈은 <<공정대>>장교놈에게 다가가 <<당신들은 지금 자기의 형제들에게 총을 겨누고있다. 당신들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속이 편할것 같은가, 할 말이 있으면 총을 내리우라.>>고 침착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지금 (기동경찰대원) 27명을 억류하였다. 당신들이 총을 쏘면 바로 그 총알에 그들도 맞아죽을 것이다. 당신들이 요구하는대로 억류된 (기동경찰대)원들을 내놓겠다. 그러되 체포해간 우리 동료들을 그만큼 석방하라. 그러면 그 가증스러운 최루가스차도 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동훈의 말을 듣던 장교놈은 <<네가 대표인가? 그렇다면 이야기 좀 해보자.>>하고는 옆에 서있는 놈에게 고개짓을 하였다. 순간 <<공정대>>놈들이 동훈을 덮치였다. 이때 군중들이 <<저놈들이 사람을 잡는다>>고 고함을 지르며 왁 하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놈들은 달려드는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란사하였다.

수십명의 군중이 일시에 쓰러졌다. 그 다음부터 놈들은 군중들을 총검으로, 총탁으로 찌르고 치며 미친듯이 돌아쳤다. 동명로는 삽시에 군중들의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당한것이다. 누군가가 군중들속에서 <<총! 총!>>하고 피타게 절규 하였다.  총!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잡혀가는 동훈을 빼앗아내지 못했고 수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면 심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여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이 집단적으로 희생을 당한 실례는 너무도 많았다.

총!  총이 없기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생존권마저 지켜내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을 당하고 있는 것이였다. 봉기군중은 무장한 적은 무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피로써 체험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갚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 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2010.5.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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