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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26일짜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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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12-13 13:54 조회3,9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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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국은 6.25직전을 묘사한 아래 노동신문 보도의 시국과 닮았다. 지금 정치판에만에도 여러 명의 성시백이 보이고, 애국진영이라는 진흙탕에도 김구들이 더러 보입니다.  


                1997년 5월 26일짜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
한광덕 장군 제공 

신념과 절개를 목숨 바쳐 지킨, 성시백 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두고 우리가 여기에 전하게 되는 이야기는 반세기전에 있은 일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1946년에 있은 사실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 해 11월 11일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날 호에 <20여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 청년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저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황하던 동포를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정향명은 해방전 독립운동시기에 이국땅에서 부른 성시백동지의 가명이었다. 성시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근 반세기전에 우리 곁을 떠나간 전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92년 12월에 성시백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셨다.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당과 자기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는 이름 없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허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죽하였으면 적들이 <총액 1천만원을 들여서 성시백을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력사는 그 양상을 달리했을 것이다>(남조선 출판물, 해방 20년사)라고 비명을 질렀겠는가? 

그러면 과연 무엇이, 그 어떤 요인이 성시백 동지를 그렇듯 력사적인 인물로 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리고 그의 길지 않은 한 생이 오늘 영생의 언덕 위에서 빛나게 된 그 근저에 놓이게 된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당시는 물론 그 때로부터 반세기가 되여 오도록 력사의 갈피 속에 깊이 묻혀 온 불멸의 이야기, 그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의 내용을 오늘 세상에 전하게 된다. 

                                        인생의 뜻 깊은 새 출발 

1947년 정초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저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38선 장벽을 넘어 성시백동지가 북반부로 들어오는 것은, 한 인간의 재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해방직후의 우리나라에서처럼 그렇게 정세가 복잡하게 얽히고 각이한 정치세력들이 첨예하게 맞선 례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처럼 혼란되고 첨예하게 조성된 정치정세 속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이루어 졌다. 그것은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온 겨레의 열화와도 같이 뜨거운 심정이었다. 

이 민족의 강렬한 지향과 력사의 흐름은, 미제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총칼의 38선 장벽도 가로막지 못했다. 해방직후 남반부의 수많은 인텔리들, 정견을 가진 인사들과 혁명가들, 지어는 <반공>을 일삼던 우익정객들까지도 명예도 재산도 직위도 다 버리고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결연히 북반부 땅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은 전설적 영웅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동지의 위대성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력사의 흐름을 타고 성시백동지가 평양으로 오고 있었다. 

성시백 동지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 뵈옵기 위하여 평양으로 오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간직하고 있은 그는, 조국강토가 두 동강이 나게 될 민족최대의 불행을 타개하실 분은 오직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 뿐이시라는 확신으로부터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하여 이보다 앞서 평양에 와서 수령님을 만나 뵈옵는 영광을 지녔던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 뵈옵게 된 그 날, 성시백 동지는 수령님의 비범한 인간적 풍모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수령님의 위대성을 심장으로 더욱 깊이 체득하게 되었고, 수령님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로 통일 혁명가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20여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반일 투쟁이라는 경력도 있고, 기성의 주의주장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년장자인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한번 만나 뵈옵자 그처럼 극적인 방향전환을 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여기서 성시백 동지가 그 때 자기의 련락원에게 감격에 넘쳐한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하게 된다.  

<나는 해내외에서 스므해가 넘도록 위인을 찾아 헤매며 유명무명의 수많은 정치인들을 만나 보았소. 그러나 김일성장군과 같이 넓은 식견과 도량, 풍부한 인간성을 지니고 계시는 위대한 분은 보지 못했소. 참말로 김일성 장군님의 그 식견이며 온 몸에 넘쳐나는 인간애는 그저 이끌린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온 마음과 넋을 완전히 매혹시키었소. 처음 만나 뵈옵는 사람도 단번에 백년 구면처럼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시는 그 너그러우시고 겸허하시며 소탈하신 인품에 내 마음이 스스로 이끌리시고 홀딱 반하게 되더란 말이요. 나는 그 날 장군님께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소. 나는 이제부터 김일성 장군님의 심복자가 되고 부하가 되겠소>. 

성시백 동지로 말하면 1905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 나,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3,1 인민봉기에도 참가한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열혈 청년시절에 조국 광복의 성전에 한 몸 바칠 각오로 고향을 떠난 그는 한때 <상해림시정부>에 들어가 민족주의자들과 같이<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그 후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산주의 사상을 공명하면서 지하공작도 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적들에게 체포되어 9년간이나 옥중생활도 하였고 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마음속으로부터 흠모하게 되었다. 곡절 많던 인생행로에서 그렇듯 흠모하고 모시고 싶었던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전사로 살며 싸우게 된 성시백 동지의 기쁨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다. 이러한 그가 다시금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 뵈옵고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 해 2월도 다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고 성시백동지를 반갑게 맞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그의 건강부터 따뜻이 물어 주시었다. 그러시고는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었다고 하였는데,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오면서 왜 집에 들러 가족들을 만나보고 오지 않았는가고, 성동지가 고향을 떠난지도 20년이 넘었겠는데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워하겠는가고 심려 깊이 말씀하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날 성시백 동지를 접견하신 자리에서 미제침략자들에 의하여 민족의 자주권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을 뿐 아니라, 파벌 싸움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깨끗한 양심이 마구 팔리우는 험악한 남조선 땅에서 모든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이 조국통일 위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서 깊이 간직해야 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안은 성시백 동지는, 암흑속에 비쳐 온 광명을 본 듯 환희와 격동을 금치 못하면서 수령님께 이렇게 말씀 올렸다. <장군님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싸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 든 것만 같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척 기뻐하는 그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백전로장도 말을 타고 장검을 들어야 이길 수 잇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룡마와 장검만 가지고서는 아니 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에 장검을 들었다 하더라도 지략이 없으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옛 말에도 힘쎈 장수와 지혜를 가진 장수가 겨루어 결국 지혜를 가진 장수가 이겼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략이 없으면 말도 칼도 맥을 못 춥니다. 지략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만 세울 수 있습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뜻 깊은 교시에 접하는 순간 성시백동지는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 진정 위대한 분이시다. 참으로 우리 장군님은 지인용을 겸비하신 걸출한 위인이시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성시백 동지가 들어있는 숙소를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께서는 스스로 통일 혁명가가 되어 통일 성업에 자기의 모든 것, 삶도 죽음도 다 바쳐 갈 불같은 맹세를 다지고 분렬주의자들인 매국자들을 반대하는 준엄하고도 피어린 싸움의 길에 나선 성시백 동지와 따뜻이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그를 대견히 바라보시며, <성동무,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장군님, 이토록 믿어주시니 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장군님! 이 몸이 한 줌의 진토가 된다 해도 저는 장군님의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내겠습니다>. 

전사의 얼굴에 비낀 불변의 의지와 철의 신념을 읽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혀주시고 자애에 넘치시는 눈길로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온정 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성동무가 담배를 좋아한다는데 적구활동을 하느라면 담배 맛이 류달리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뿌리를 하나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계는 내가 쓰던 것인데 기념으로 동무에게 주려고 합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상아 물뿌리와 애용하시던 회중 금시계를 성시백 동지에게 안겨 주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날 그와 헤어지기에 앞서 다시금, <고향의 부모처자들이 기다리고 있겠는데 들어올 때에는 그냥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꼭 만나 보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그 때로부터 며칠 후, 성시백 동지가 남행렬차에 오르려고 하던 때이다. 급히 한 일꾼이 달려 와 고급 양복천과 비단 옷감을 비롯한 각가지 생활필수품들과 특산 식료품들이 들어있는 큰 트렁크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존경하는 김정숙동지께서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성시백 동지가 부모님을 만나게 될 일에 대해서까지 걱정하시며 친히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 순간 성시백 동지는 심장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것을 가까스로 삼키었다.(아, 장군님! 어쩌면 장군님의 그 품은 이다지도 넓고 은혜로우십니까? 참말로 저는 장군님께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다.

해방직후 <림정>계렬의 반일 독립운동자로서 남조선에 귀국한 성시백 동지는 서울 장안에서 여러 상사를 움직이는 부유한 <상인>이 되여 활동하였다. 그는 팔자수염을 기르고 고급 중절모를 썼으며 양단저고리 우에 진세루 조끼를 바쳐 입고 앞섶에는 회중 금시계 줄을 늘이고 다녔다. 외모는 이런 차림새였으나, 그는 언제나 마음 속으로 자기를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로 간주하고 있은 성시백 동지는 준엄한 통일혁명의 첫걸음을 조직을 꾸리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력적인 투쟁과 비상한 노력으로 그는 빠른 시일 안에 우익 및 중간정당, 단체들, 미군정청과 적의 통치수뇌부, 괴뢰경찰과 첩보대, 괴뢰군부, 지어는 괴뢰재외대표부들에게까지 산하조직을 꾸려 놓았다. 이리하여 성시백동지는 적들까지도 후에 비명을 치며<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라고 불렀고 일명 <성시백조직>이라고도 한 지하혁명조직을 미제 식민치하의 남조선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게 하였던 것이다. 성시백 동지는 조직이 꾸려지고 공작 거점들이 도처에 마련되자, 먼저 선전 공작에 힘을 넣었다. 그는 <조선 중앙일보>를 창간한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리용하였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서만 아니라 보란듯이 영어, 중어, 프랑스어로 된 화보<해방조선>과 <조국통신>을 발행하여 국제우편을 통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에 배포함으로써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을 해외에까지 널리 선전하였으며 분렬주의자들의 매국적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성시백 동지는 그 어떤 새로운 공작을 시작할 때나 사업을 전개해 나갈 때마다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인 나에게는 수행 못할 그 어떤 임무란 있을 수 없다 하군 생각하였다. 성시백 동지가 통일전선 공작을 벌리던 시초에 있은 일이었다. 남조선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세력을 쟁취하는 문제는 통일혁명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 나가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 되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은 어떻게 하나 중간세력을 저들 편으로 돌려 세우기 위해 온갖 책동을 다하고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에 대처하여 중간 정당, 단체들을 반미 자주통일을 위한 통일전선 대오에 결속시키기 위한 사업에 모를 박았다. 그는 당시 남조선의 중간 정당, 단체들 가운데서 제일 영향력이 강한 근로 인민당을 비롯한 5개 정당을 포섭하기 위한 데 힘을 돌려 4개 정당을 통일전선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개 정당이 문제였다. 그것은 이 당의 한 상층 인물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다. 형세에 따라 여기에 붙고 저기에 붙는 그를 두고 적지 않은 조직원들이 도저히 돌려 세울 수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성시백 동지는, 어느 날 그 인물을 찾아 가 진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사실 나는 일구이언하며 표리부동하게 행동하는 당신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소. 더구나 나라를 동강내려는 반역의 무리들을 찾아다니는 당신과 같은 사람하고는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댔소. 그러나 오늘은 나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김일성 장군님의 대표>로 당신을 만나러 왔소>. <아니 그러면 항명씨가?,,,> <그렇소, 나는 김일성 장군님의 대표요>

  그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가 다음에는 경탄의 눈길로 성시백 동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날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와 민족 앞에 큰 죄를 지을 번 하였던 자기의 행동을 심각히 반성하고 자기가 반미 구국투쟁에 전심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듯 성시백 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적극적인 통일전선 공작을 벌려 처음에는 5개 정당을 다음에는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들까지 통일전선에 망라시켜 13개 정당협의회까지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10월에 미제는 우리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었으며 11월에는 <유엔림시 조선위원단>이라는 침략도구를 조직하였다. 성시백 동지는 새로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우선 밎 미제의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범죄적 책동을 신문과 출판물들을 통하여 폭로 단죄하는 한편 서울에 기여든 <유엔림시 조선위원단>을 분렬과 혼란으로 빠트려 맥을 추지 못하게 하는데 힘을 넣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신분으로 아세아의 몇개 나라 대표들을 초대하여 능란한 외교수법과 류창한 영어로 그들과의 대화를 생활풍습과 력사로부터 점차 반제정신을 고취하는 방향에로 유도하여 나가면서 그들이 외세에 의하여 분렬된 우리 민족의 불행을 자기들의 불행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우리의 지지자로 나서도록 하게 하였다.

  성시백 동지는 그 외 몇개 나라 대표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어 <유엔림시 조선위원단>안에 우리의 지지자, 동정자 그룹을 형성함으로써 회의 때마다 의견이 대립되고 그 어떤 문건하나도 전원 찬성으로 가결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13개 정당협의회>에서 <유엔림시 조선위원단>문제를 토의 규탄하고 <유엔총회>의 의장앞으로 항의문을 보내어 유엔의 헌장에 맞게 국제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 용의가 있다면 조선 인민의 일치한 요구대로 <유엔림시 조선위원단>을 지체없이 끌어내 가야 한다는 것을 단호히 요구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과 규탄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결과 미제의 <유엔림시 조선위원단>은 밖으로부터 얻어맞고 내부로부터 와해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었으며 미제의 골치거리로 되고 말았다.

위대한 수령께서는 성시백 동지의 이러한 투쟁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높이 평가해 주시면서 성동무가 이번에 큰일을 하였다고, 그는 재간도 있고 무슨 일이든지 결심하면 꼭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거듭 치하해 주시면서 못내 만족해 하시였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선생을 돌려 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성시백 동지와 김구선생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그 사연인즉 <상해림시정부>의 간판을 달고 프랑스 조계지안에 있던 김구선생을 비롯한 <림정>사람들이 프랑스 총영사의 지시에 따라 조계지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성시백 동지가 그들을 구원해준 것이였다. 만약 그 때 조계지 밖으로 나간다면 일제 특무놈들이 그들을 즉시 체포하여 처형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일보의 기자로 있었던 성시백 동지는 이 사실을 알고 프랑스 총영사가 조선망명자들을 자기들의 불행처럼 여기면서 성심성의로 보호해 주고 있다는 글을 써서 신문에 소개하였다. 김구선생은 이때 성시백의 소행을 고맙게 여기었으며 그를 출중한 인물로 까지 보게 되였다. 이런 관계로 하여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찾아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북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 자주력량으로 조국을 통일하기위한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개최할데 대한 제의를 내 놓았는데, 이 거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입니다>. 

김구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 쉬더니, <자네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워할 리야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 간 일을 두고 중상, 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 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 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 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례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였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선견지명의 지략에 탄복하면서 성시백 동지는 즉시 김구선생의 서기에게 김일성 장군의 특사가 곧 찾아간다는 것을 알리고 그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간 다음 성시백동지는 김구선생에게,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러자 김구 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장군님께서?> 그렇게 말하며,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 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 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범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선생의 얼굴이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 주실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기여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92년 12월 어느 날에 이때 있은 일을 회상하면서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때 성시백의 활동이 컸다고 하시며,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신 후, <나는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후 남북련석회의 대목에 성시백의 활동내용을 적어 넣으려고 합니다>라고

                                       혁명가의 신념과 영생의 삶 

성시백동지는 시련과 난관이 시시각각으로 막아나서는 그 준엄한 지하혁명 투쟁의 나날에 <나는 김일성장군의 특사다>라는 이 마음의 기둥을 그 어느 한순간에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풍모에 매혹된 그 열렬하고 깨끗한 충성심, 수령님을 끝없이 따르고 흠모하는 그 남다른 투철한 수령님을 지녔기에 겹겹이 앞을 막는 적들의 준동을 짓부셔 버리고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벌려 나갈 수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남조선 괴뢰<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이러한 분파와 그들간의 싸움을 리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 이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려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연단에서 <외군철회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서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성시백 동지의 <국회>공작에, 적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이렇게 썼다. <,,,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였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 정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색되어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 갔다.> (대한년감 1975).

성시백 동지는 미제의 전쟁 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적군 와해공작과 정보공작도 더욱 과감무쌍하게 벌려 나갔다. 그는 괴뢰 국방부와 각병종사령부, 괴뢰군 사단들은 물론 그 아래 련대, 대대와 헌병대, 사관학교, 륙군정보국등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요소들에 조직선을 늘이고 적군 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전격적으로 벌이었다 

그는 군부계통만이 아니라 괴뢰정부와 괴뢰경찰, 괴뢰정보계통, 지어는 남조선 주둔 미군부대들과 서울주재 미군총사령관이며 장개석의 령사관, 그리고 일본, 홍콩등 해외에 까지 정보조직선을 그물처럼 펼쳐놓고, 적들의 정치, 군사, 경제 정보를 폭넓게 수집하여 보고하였다.

이러한 정보들 가운데는 1949년 8월에 리승만 반역도와 장개석 사이에 있은 진해 비밀회담에서 장개석이 리승만역도의 <북벌>을 적극 지원하기로 한 약속과 1950년 2월 리승만역도를 도꾜로 불러들인 맥아더가 <북침> 전쟁계획을 검토하고 지령을 준 사실 등 적들이 최대 극비로 생명처럼 여긴 군사정보 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남조선 어용 출판물 <특별수사본부>는 성시백 동지가 저들의 최대의 기밀들을 세밀히 알고 있은 데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썼다. <,,, 생각만 해도 엄청난 내용들이다> 책상 우에 놓인 문서들을 훓어가는 <부장검사>의 얼굴색이 점차 창백해지더니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였다. <대한민국>의 심장파도 같은 특급기밀이 성시백의 조직을 통하여 평양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생각되였던 것이다. <국가 원수>끼리 비밀리에 주고 받은 회담의 내용까지도 그의 손에 입수되였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성시백 동지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북침전쟁 도발이 기정사실로 되고 있던 해인 1950년에 들어서면서 유사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갖추어 나갔다. 적들이 북침을 개시하면 우리 인민군대가 즉시 반격으로 남진의 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적구공작에도 힘을 넣었다. 이처럼 적구에서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투쟁을 과감 무쌍하게 벌려 나가던 성시백동지가 1950년 5월 15일 오후 4시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때를 회상하시며 다음과 같은 교시를 하시였다. 

<성시백은 남조선 전체를 쥐고 흔들었는데 박헌영의 패가 밀고하였습니다> 미제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은, 자기 졸개들인 한때 남로당에서 요직까지 있다가 투항 변절한 홍민표 놈과 안영달 놈을 시켜 성시백 동지를 적들에게 밀고하여 체포하게 함으로써 천추를 두고 용서할 수없는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적들은 성시백 동지를 전향시키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악형과 야만적인 고문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들이 대였고 또 참기 어려운 회유와 끈질긴 유혹도 계속하였다. 한 주일 사이에 성시백 동지의 두 다리가 꺾어지고 두 팔목이 부러졌으며 그의 형체는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허지만 성시백 동지의 불굴의 의지와 혁명적 신념을 놈들은 꺾지도 못 하였으며 또 꺾을 수도 없었다.

살아도 죽어도 오직 전설적 영웅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께 충성을 다 하려는 일편단심,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성스러운 통일 혁명의 한 길에 자기의 귀중한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비장한 각오,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일성 장군님의 전사로서의 굳은 절개를 지키려는 성시백 동지의 이 혁명적 신념은 그 무엇으로써도 굽힐 수도 없었고 꺾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파쇼교형리들은 성시백 동지를 체포한지 25일 만인 1950년 6월 9일 륙군형무소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

성시백 동지는 이때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해방직후에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 뵈옵고 수령님께 매혹되어 김일성 장군님의 부하로 싸우겠다고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았다. 여기에 야수적 고문을 들이대던 어느 날 취조 주임놈이 고문을 중지시키고 전향만하면 살 길이 있다고 하자 온 몸에 류혈이 낭자하게 된 성시백 동지가 그 놈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김일성 장군님의 부하이다. 나는 오직 김일성 장군님만을 믿고 사는 사람이다. 나는 김일성 장군님을 위하여, 내 조국과 내 민족을 위하여 광복후 이곳 남조선에 와서 통일을 위해서 싸웠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김일성 장군님의 뜻을 어기고 배신한단 말이냐? 나는 김일성 장군님의 부하로 산것을 제일 큰 자랑으로 생각한다. 그런즉 내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제발 나더러 전향이요, 뭐요 하는 말을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아무리 해야 소득도 없는 것을 고달프게 왜 헛수고를 하는가?>  

한 남조선 출판물은 이렇게 썼다. 

<형무소. 그것도 륙군형무소에 들어온 사람치고 이렇게 태연자약한 사람은 처음이다. 그는 이제 얼마후이면 불귀의 몸이 되리라는 것을 잊은 듯하였다. 성시백의 태도는 너무도 태연하고 침착하였다.,,,, 취조주임은 전향만 한다면 살길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설득하여 보았으나 성시백은 이를 끝내 받아드리지 않았다> 

성시백 동지는 며칠밖에 살수 없는 몸이 되었다. 허지만 신념을 지키는 깨끗한 죽음을 각오한 그는 비판이 아니라 밝은 웃음을 안고 죽음을 맞받아 나갔으며 최후의 순간순간을 혁명적 신념으로 자기의 삶을 더욱 빚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그의 안해가 면회를 왔다. 안해의 등에 업힌 돌이 지난 어린 아들을 보는 성시백 동지에게는 어버이 수령님의 뜨거운 온정이 생각되어 눈굽이 젖어 들었다. 성시백 동지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친히 <자립>이라고 이름까지 지어주신 어린 아들을 애무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두 팔을 올렸으나 쇠고랑 소리만 절렁거리고 부러진 두팔은 미끄러져 나갔다. 성시백 동지는 안해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지금 이놈들은 나더러 전향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는데 김일성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싸워 온 내가 어떻게 전향을 하고서 살겠소. 그렇게 더럽게는 살지 않을테니 그것만은 안심하고 돌아가오>. 성시백 동지의 옥중투쟁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공개된 극히 적은 자료를 통해서도 우리는 한번 먹은 마음 변치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값있게 마무리함으로써 빛나게 최후를 마친 그의 빛나는 삶과 죽음. 혁명적 인생관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동지를 사형장으로 끌어 내였다. 성시백 동지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24시간전이였다. 

력사적인 서울 해방의 기쁜 소식에 뒤이어 성시백 동지의 희생에 대한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으시어 관계 일군에게 확인하시고 다시 확인하시였으나 대답은 매번 같았다. <성시백 동지가 희생되다니,,,> 

그토록 믿고 사랑하시던 전사를 잃으신 크나 큰 비분으로 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시며 창넘어 남쪽하늘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가다니,,, 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끝내 쏟아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시백 동무의 시체를 꼭 찾아내야 하겠다고 명령하시였다. 인민군 지휘관들과 관계부문 일군들이 서대문 형무소와 륙군 형무소, 륙군 특무대와 헌병대의 지하 고문장들이며 그리고 적들이 패주하면서 학살한 수많은 애국자들의 시체더미 속에서도 샅샅이 훓었으나 그의 시체는 없었다. 성시백 동지의 존재를 무서워했던 적들은 그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사의 시체를 끝내 찾지 못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갈리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의 시체라도 가져다 내가 있는 여기 평양 근처에 묻어 주려고 하였는데 시체를 못 찾았단 말입니까. 그가 어떤 동무요,,, 그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앗고 혁명에 커다란 공헌을 한 우리 당의 이름없는 꽃이였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 때로부터 수십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같은 아픔도 가셔질 기나 긴 세월이 지나갔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수한 세월의 공간도 메꾸어 주지 못하는 떠나간 전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으시고 어느 해에는 사람들을 만나 보던중에 성시백이와 같은 재간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시였고, 또 어느 해에는 우리 모두 성시백이와 같이 죽어서도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겠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통일을 위하여 싸우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1992년 12월 27일이였다. 대한 수령님께서는 40여년 전에 곁을 떠난 전사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시여 성시백 동지의 세 아들을 몸 가까이 불러 주시였다. 80 고령의 년노하신 몸인데도 불구하시고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금강산의사당 홀에 까지 나오시여 옛 전사의 아들들을 반가이 맞아 주시고는 <오, 동무들이구먼. 내가 오늘 동무들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이렇게 불 렀소.>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1948년 여름에 평양에 와서 병치료를 받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며 눈물 흘리던 성시백 동지의 모습을 그려 보시며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성시백이 나보다 나이는 우였지만 나에게 아주 충실한 동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날 옛 전사의 세 아들들에게 자신의 존함이 모셔진 금시계를 친히 선물로 안겨 주시고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찍어 주셨다. 

혁명전사에 대한 어버이 수령님의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은 한없이 고결한 혁명적 의리를 지니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가고 있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께서는 통일혁명의 길에서 어버이 수령님께 충직했던 성시백 동무를 잊지 못하시며 그의 유가족들에게 은혜로운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문학예술부문의 일군들을 만나신 자리에서는 성시백동무의 투쟁내용을 취급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였고 평양에 애국렬사릉이 건립되었을 때는 거기에 그의 묘비도 세우게 하시였으며 또 우리 나라에서 <조국통일상>이 처음으로 제정되였을 때에는 그에게 첫 <조국통일상>수상자의 크나 큰 영광을 안겨주시어 그를 조국통일의 선각자들의 대오에 높이 내세워 주시였다.

혁명전사의 자녀들을 한품에 안으시여 그들을 우리 혁명의 참된 계승자로 키우는 것을 혁명적 의리로 더없는 기쁨과 락으로 여기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친히 이름까지 지어주신 혁명렬사의 막내 아들 <자립>이가 만경대 혁명학원을 거쳐 어느 덧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 일하게 되였을 때는 그가 아버지처럼 참된 혁명가가 되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시며 키워 주셨을 뿐 아니라 무거운 직무도 맡겨 주시였다. 그리고 성시백동지 부인의 로년기의 생활을 극진히 보살펴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생일 여든돐 상도 보내 주시였고 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시며, <... 성시백 동무의 안해 민순임의 장례식을 잘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묘지를 딴데 쓰느라고 하지 말고 애국렬사릉에 잇는 성시백 묘에 합장해주어야 합니다>. 라고 뜨겁게 말씀을 하시였다. 

혁명전사는 근 반세기전에 떠나갔지만 전사와 그 유족들에게 대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온정은 이처럼 영원한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이 위대한 사랑의 품이 있음으로써 성시백동지의 한생이 그처럼 빛나는 것이며 우리 인민은 혁명의 보람찬 진군을 다그쳐가는 한길에서 영생의 삶을 누려가고 있는 것이다.

 

 

2014.12.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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