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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대구폭동사건(제주4.3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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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1-07 21:24 조회3,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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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10·1 대구폭동사건제1부 소련의 대남공작과 남한 공산당의 뿌리
지만원 박사  |  j-m-y82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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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07  13: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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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대구폭동에 대한남한의 기록들이 시원치 않다. ‘영남일보가 1947년에 간행한’<경북총감>에 대구폭동 역사가 수록돼 있지만, 이 내용은 대구사태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네이버 백과가 균형감 있게 정리 해 놓았다. 2011년 6월 20일 평강교회의 원로목사 박윤식(85)이 지은 “제주 4·3폭동”의 22~30쪽에는 대구폭동 현장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박윤식 목사는 당시를 살아온 산 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박윤식 목사의 대구폭동사 정리

대구역전 금정운수 노조 사무실 2층에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과 노평(조선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 사무실이 나란히 있었다. 사무실 주위에는 수천의 노동자들이 반미구호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었다. 10월 1일 오후 6시, 시위가 소강상태를 보이자 경찰은 경계 인원을 150명 정도로 줄여 다소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2층 노평 사무실에서 경찰의 약점을 노리고 있던 시위대 지휘부가 갑자기 “경찰 저놈들 죽여라”하는 고함을 지르며 돌을 던졌다. 돌에 맞은 경찰이 놀란 나머지 2층을 향해 총을 쏘았고 이 총소리에 놀라 시위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이 혼비백산 도망 하느라 아수라장이 됐다. 이에 노동자들은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며 소문을 퍼트렸고, 이 소문은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경찰 총에 맞아 죽은 노동자는 연탄공장 공원인 황말용 한 사람뿐이었다. 

좌익들의 시위에는 언제나 시체가 등장한다. 시체는 국민감정에 불을 지피는 데 최고의 소재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들은 좌익들의 시체장사 수법에 대해 경계하고 냉정해야 할 것이며, 국민감정을 부추기는 방송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구폭동에서도 여지 없이 시체작전이 등장했다.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과 대학생 최무학을 포함한 5명의 학생들이 시체장사에 투입됐다. 병원에서 콜레라로 죽은 시체 4구에 하얀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맞아 죽은 시체들” 이라며 거짓소문을 퍼트려 시민들을 선동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사범학교 학생 300명과 다른 학생 15명이 합세하여 오전 10시, 대구경찰서에 도착했다. 학생대표들은 이성욱 서장과 담판을 한다며 서장실로 갔고, 경계 중이던 50명의 경찰은 시위대에 포위되었다.

공산당 대구도당 책임자 장석우가 경찰청장에게 압박을 가했다. “경찰이 먼저 무장을 해제하면 군중을 책임지고 해산 시키겠다” 공산당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이성욱 서장은 이 말을 곧이듣고 바보 같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1946년 10월 2일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무장이 해제되자 시위대는 일제히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유리창을 부수고 유치장을 파괴하여 100여 명의 죄수들을 석방시킨 후 경찰서를 장악했다. 이처럼 좌파들이 벌이는 전문 시위대와 협상을 하게 되면 반드시 당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하는 사람처럼 미련한 바보는 없다. 

인민보안대장 나윤출은 시위대를 100명씩 나누어 조를 짜서 시내로 보내 경찰가족 집을 습격하게 했다. 이로써 대구는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면서 좌익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폭동은 경북-경남-전남지역으로 확산됐다. 경북 22개 군청과 경찰서가 5만여 폭도들에 점령되었다. 폭도들은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들 몇 개만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칠곡 경찰서장 윤상탕은 황점암 일행에 의해 죽창과 낫으로 난자 당했다. 화원 지서장 김현태와 경관 정남수, 현무기, 윤삼문이 현장에서 사살됐다. 달성경찰서 경관 6명이 사살됐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7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소실됐다. 왜관경찰서 서장 장석환, 과장 4명을 기둥에 묶어 놓은 후, 경찰서장은 혀를 잘라 죽이고, 4명은 도끼로 찍어 죽였다. 영천경찰서에 1만 군중 중 일부가 도끼, 낫, 죽창을 들고 들어가 15명의 경관들을 살해했고, 그 외 많은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으며, 경찰서가 전소됐다. 공공기관 및 주택 100여 채가 소실됐다. 영천군수 이태수를 잡아 거꾸로 매달아 죽창과 낫으로 난도질하고 군청에 불을 질렀다. 공무원 15명이 사망하고 가옥 200여 호가 불탔다. 이처럼 좌익들은 일본군의 잔인성을 능가했다.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243쪽에는 대구 폭동이 “10월 1일에 시작되어 11월 11일까지 41일 동안 경상북도 18개 군과 남한 전역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갖은 난동과 만행을 저질렀다”는 표현이 있다. 대구폭동으로 인한 피해는 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행불 30명, 건물파괴 776동이었으며 시위 혐의자는 7,400여 명이었다. 결국 대구폭동은 경찰 4,500명, 김두한이 이끄는 우익청년 3,000명, 대전 제2연대의 1개 중대, 미 제2연대가 총출동하여 겨우 진압했다. 이때부터 이루어진 밤낮 없는 수색에 시위가담자들은 북으로 탈출하거나 야산대가 되어 태백산과 오대산로 들어가 훗날의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인원들이 피난처로 대구 제6연대에 입대 했다. 당시의 국경(국방경비대)는 좌익청년들의 좋은 피난처였다. 미군정청은 국방경비대의 신병을 모집할 때, 신상조사나 사상검증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무수한 좌익청년들이 피난 목적으로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의 배후에는 박헌영(1900)과 이재복(1903)이 있었다. 이재복은 안동 사람으로 평양신학교와 교토신학대학을 졸업한 목사였지만 남로당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군사총책이 되었다. 또한 대구폭동은 박정희가 공산당에 가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0월 폭동은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시절에 발생했고, 바로 그 때 그가 가장 존경했다는 셋째형 박상희가 남로당 간부로 경찰 총에 맞아 숨졌다. 이재복은 제6연대장 최남근을 포섭했고, 최남근이 8연대장이었던 시절에 박정희는 그의 부하 중대장이었다. 이재복은 박상희 가족을 극진히 돌봐 주었고, 이에 박정희는 남로당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박정희가 8연대 중대장이었던 시절, 박정희는 남로당 골수분자인 강창성 대위의 관리대상이 됐다. 박정희가 술을 좋아하니까 강창성은 매일 같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박정희를 불러냈고 친분이 쌓이면서 자연 그들의 동조자가 되어 버렸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후 대대적인 숙군작업이 시작되면서 군 당국은 이재복의 비서인 김영식으로부터 군내의 좌익세포 명단을 입수하게 되었고, 그 명단에 박정희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재복은 즉시 총살을 당했고, 박정희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200여명의 세포명단을 제시하면서 구사일생으로 구명되었다. 

네이버가 정리한 대구폭동

아래는 네이버백과가 정리한 내용이다. 

당시 미군정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념 때문인지,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왔다. 공산분자들은 이러한 미군정의 관용성을 자기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였으며, 갖가지 파괴활동과 파업 등을 유발하면서 사회교란을 일삼았다. 때문에 사회는 항상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좌우익의 투쟁으로 소란스러웠다. 

이에 미군정은 더 이상 공산당의 활동을 방치할 수 없었으므로 공산당을 불법화하였다. 그리고 지하에서 암약하는 공산당의 불법 활동을 근절하기 위하여 1946년 9월 7일 박헌영·이강국·이주하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이를 눈치 챈 박헌영과 이강국은 북으로 도주했고, 이주하는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반발로 여러 가지 파업과 폭력사건 등을 유발하려고 책동하여 9월 24일 전국 규모의 철도파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각계 각층에는 공산당 프락치가 많이 침투해 있었으므로 공산당의 파업조종은 비교적 용이하였다. 이 철도파업은 서울의 용산철도국 기관구 내에 본거지를 둔 공산분자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식량난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의 철도파업은 서민생활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공산당은 이와 같은 사회불안을 더욱 조장하고, 철도 파업을 다른 분야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배후 조종과 선동을 격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에서는 좌익단체의 하나인 대구노동평의회가 주동이 되어 철도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을 일으키려고, ‘남조선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내걸고 각 직장의 파업을 조종·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찰은 그 단체가 불법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동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파업조종자의 색출과 파업의 금지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졌으며, 이 사태가 대구의 10·1 폭동사건을 유발한 직접적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 

대구폭동사건은 대구노동평의회측과 경찰의 충돌이 폭력사태로 발전되면서 격화되었다. 10월 1일 오후에 수천 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 금정로에 있는 노동평의회 본부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이 불법시위자들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며 제지하였다. 이 날의 데모는 밤늦게 진압되었지만, 군중은 2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고, 경찰관이나 고급관리 및 사회 주요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완전히 폭도화 하였다. 폭도의 일부는 이웃 달성으로 달려가 그 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사르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으로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되었고, 달성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국은 2일 오후 늦게 대구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근 각지의 경찰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미군부대의 응원을 받아 데모 진압과 치안 회복을 서둘렀다. 이 폭동의 완전 진압은 다음날 3일 충청남북도의 경찰병력 700여 명이 증파 됨으로써 가능하였다.

당국은 대구에서 발생한 이 폭동사건으로 희생된 자가 사망자 20명, 중상자 50명, 행방불명자 30명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간인이나 경찰관 측 사망자가 각각 4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는 몇 백 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폭동혐의로 검거된 자는 5,000여 명에 달하였다. 대구폭동사건을 계기로 삼남지방(三南地方)은 거의 무법천지로 변하였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그리고 제주도에서까지 연쇄적으로 크고 작은 소요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한 여파는 서울·경기 지방까지 파급되어 산발적인 소요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개성·연백·홍성 등지에서도 소요사건이 일어났으며, 1946년 10월 22일에는 미군정청·서울역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 등을 습격할 계획이 있었음이 21일 밤 좌익단체 요원인 민청원(民靑員) 18명을 검거함으로써 밝혀졌다. 이 소요사건들은 모두 공산당의 지령과 공작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단순한 시위나 파업 등의 온건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발생한 살상·방화·습격 등은 대구의 10·1 폭동사건의 연장이며 재판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소요의 피해는 대구폭동사건의 영향을 직접 많이 받은 경상도 일원이 가장 심하여, 경찰관서·면사무소 등이 불타고 습격된 일이 비일비재하며 공무원들의 인적 피해도 많았다. 대구에 인접한 영천에서는 경찰서와 군청이 모두 불에 탔으며, 경찰관이 습격을 받는 등 소요의 양상이 대구사건과 방불하였다. 이 사건은 그 여파가 거의 전국에 미쳤고, 1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당국은 이를 계기로 공산분자의 색출과 검거에 박차를 가하여 폭동사건 주모자들의 다수를 월북 직전에 체포하여 극형 에 처하였다. 

북한이 정리한 대구폭동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의 74~83쪽에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라는 중간 제목이 있다. 이를 아래에 요약한다.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1일 사태는 인민들의 봉기가 남조선 전역에로 확대되는 전인민적 항쟁의 시초였다. 대구에서는 9월 25일부터 40여개 공장 기업소 로동자들이 총파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10월 1일에는 1,000여명의 시민들이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내노라 하고 부르짖으며 쌀 투쟁에 나섰다. 대구시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자리 잡고 있는 대구역전 광장은 10월 1일 저녁때부터 수천 명의 파업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 실업자들, 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놈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쏜다 하고 덤벼들었을 때 애어린 한 제사공장 녀성로동자가 앞가슴을 헤치며 ‘이놈들아 쏘아 보아라’고 맞받아 나섰다. 경찰놈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고 영웅적인 제사공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군중들 속에서 뛰어나온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 ‘살인 경찰을 처단하라’ 외쳤을 때 놈들은 그의 가슴에도 총탄을 박았다. 또 한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저 야수들을 잡아라’ 호소 하였을 때 그도 총탄에 쓰러졌다. 연이어 6명의 영웅적인 인민의 아들딸들이 고귀한 선혈로 광장을 물들이며 쓰러졌다. 이 참경 앞에서 대구시민들의 분노는 극한점에 이르게 되었다.(필자주 : 6구의 시체가 생겼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거짓 시나리오) 

10월 2일 아침 ‘살인경찰을 처단하라’ ‘감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라’ 외치며 파업로동자 대열이 파업단 본부 앞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을 비롯한 대학, 전문, 중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구시의 중심부를 뒤덮었다. 관공서, 금융기관, 회사들은 문을 닫고 상인들은 영업을 거두었다. 전날 희생된 동무들의 영구를 앞세우고 수만 군중들은 시내를 누비며 시위하였다.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13,000명의 군중의 기세에 질겁한 반동경찰은 서장놈 이하 군중 앞에 전면 투항하고 무장을 바쳤다. 감방의 애국자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기세충천한 봉기군중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북조선에서와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라!’ ‘쏘미공동위원회를 속개하라!’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대구시는 완전히 인민들 손에 장악되었다. 로동자와 학생들이 치안을 담당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외부와의 일체 전신, 전화 연락은 끊어졌다. 대구 인민봉기는 민주화 통일을 지향하고 인민정권 수립을 요구하는 높은 정치적 목적을 내세운 애국적 항쟁이었다. 

봉기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제는 야수적 탄압을 강행하여 나섰다. 미제 침략군은 10월 2일 오후 6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어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야수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봉기의 불길은 경상남북도의 대다수 시, 군을 휩쓸었는데 10.2-5일 사이에 달성, 성주, 칠곡, 영천, 의성, 고령, 경산, 군위, 예천을 비롯한 경상북도 19개 군을 휩쓸었고 뒤이어 10월 10일 까지는 부산, 마산, 통영, 창녕 등 경상남도 18개 군을 휩쓸었다. 

군중들은 쇠망치, 괭이, 도끼, 날창, 참대, 장총 등을 가지고 괴뢰경찰서, 지서, 군청, 면사무소, 신한공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본부 등을 들이쳐서 경찰관과 테러분자, 악질관리, 지주들을 처단한 것은 남조선 인민들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이런 항쟁은 강원도의 강릉, 삼척, 광주, 연백, 개풍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말부터 11월 중순에 이르는 기간에는 전남지방에서 항쟁이 세차게 벌어졌다. 광주화순탄공노동자들의 10월 30일 폭동에 이어 목포, 부안, 광주, 광산, 나주, 함평, 담양, 보성, 해남, 영광, 장성, 장흥, 영암, 광양 등 15개 시군으로 확대되었다.” 11월 중순까지 약 2개월 간이나 계속된 10월민중항쟁은 73개 시, 군을 휩쓸었다. 10월 항쟁은 8.15 이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진행한 가장 대규모적인 남조선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이었다. 10월 민중항쟁에 참여한 남조선 인민 수는 2,273,438명이었다.(필자주 : 도별 인원수가 이 책 81쪽에 도표로 작성되어 있으나 생략함) 

항쟁대오가 가는 곳에는 불멸의 혁명송가‘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김일성장군 만세의 위대한 구호가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미제는 1만여명의 노동자와 1만2천여 명의 농민을 위시하여 10월 항쟁에서 무려 25,000여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15,000여명을 검거 투옥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애국적 인민들을 산채로 손발을 잘라 죽이기도 하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항쟁기간 적통치기관이 파괴되고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어 행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인민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미제의 앞잡이인 악질경찰과 반동분자들이 인민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이는 남조선인민 투쟁의 역사적인 쾌거였다.

네이버 백과가 정리한 내용과 북한이 정리한 내용은 대동소이 하지만 북한 책이 훨씬 더 자세하고 현실감 있게 정리돼 있다. 단지 북한 책의 목표는 경찰의 잔인성에 대한 남한좌익 독자들의 흥분을 자아내고, 미군정을 모함하기 위해 쓰인 관계로 양념과도 같은 허위사실들이 상당수 들어 있을 뿐이다. 대구폭동은 9월 총파업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10월 1일 대구에서 지펴진 폭동은 그 후 2개월 가까이 경상남북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남도, 충청도, 서울 등 전국적인 반미폭동으로 발전했다. 소련이 남로당을 통해 300만 엔이라는 자금을 지원해주고 투쟁방법을 알려주고 배후 조종한 피비린내 나는 반미폭동이요 대남공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7년 2월 초 남로당 중앙당이 전국 조직에 보낸 “3.1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에 나타나 있듯이 제주4·3사건은 9월 전국총파업과 10월 대구 발 전국폭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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