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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연대 작전(1948. 7. 23-12. 29) (제주4.3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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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2-08 13:38 조회3,8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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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9연대 작전(1948. 7. 23-12. 29)제5부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발악과 군경의 토벌작전
지만원 박사  |  j-m-y82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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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9  13: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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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연대 속에 숨어 있던 남로당 빨갱이 오일균, 문상길, 김창봉을 위시하여 많은 남로당 하사관들이 처단되자 국방경비대사령부(이형근 사령관)는 제11연대의 연대본부 및 1개 대대를 토벌작전 2개월 만에 다시 수원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그 대신 9연대를 재편성하여 1948년 7월 24일부로 연대장에 송요찬 중령을, 부연대장에 서종철 대위를 보임했다. 이제 9연대는 제주도 색깔만으로 이루어진 연대가 아니라 부산출신 1개 대대(5연대)와 대구출신 1개 대대(6연대) 그리고 제주 출신 1개 대대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주도 출신 국방경비대는 빨갱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5연대 소속의 1개 대대는 제주읍에, 6연대 소속의 1개 대대는 성산포에, 9연대 출신 1개 대대는 모슬포에 주둔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경무부에서는 제주도에 증원됐던 경찰병력 2,000여 명을 7월 18일을 기해 원대복귀시켰다. 경무부와 국경이 동시에 이와 같이 느슨한 방향으로 조치를 취한 것은 당시 제주도 사태가 소강국면에 들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강상태의 기간에 남로당에는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8월 21-25일에 해주에서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남조선에서 선출된 1,080명의 대표자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제주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각 시군별로 7-8명의 대표자를 뽑는 ‘지하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에서는 김달삼을 포함하여 제주도 대표자들 5명이 8월 2일, 북촌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거쳐 해주로 잠입했다.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김주탁(화북리)이 함께 간 것이다. 실제 해주에 모인 남조선 대표자들은 1,002명이었고, 이 중에서 360명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 격)으로 선출됐으며, 이 중 제주 출신이 6명,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등이었다. 

김달삼은 해주연설로 극찬을 받았다. 김달삼의 해주 연설문에는 4·3 사건의 본질이 녹아있다. 이 연설문은 6·25 전쟁에서 UN 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문서로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RG242, 북한노획문서19, 제주도]로 분류돼 있었던 것인데 후에 대한민국이 복사해 온 것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에 펴낸 ‘4·3 사건 토벌작전사’에 부록#4로 수록돼 있다. 분량은 A4지 8매에 해당한다. 

이 연설은 박헌영에 대한 적극적 지지인사로 시작됐다. “박헌영 선생이 남조선인민대표자를 뽑는 선거에 대한 보고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감동했다”는 찬사로 시작된 것이다. 이어서 제주도 인민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을 보고하겠다고 했다. 이때 김달삼은 24세, 박헌영은 48세 였다.

“30만 제주도 전인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깃발 아래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똘똘 뭉쳐 미제를 몰아내고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등이 이끄는 반동들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찰이 얼마나 잔인하게 주민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몇 개의 예를 들었지만 이는 늘 그렇듯이 공산당들의 모략이요 과장이었다. 이러한 과장과 모략은 5·18 광주폭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4·3 인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미 제국주의의 직접 지휘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야만적 테러와 학살 그리고 파괴.약탈속에서 신음하여 오던 제주도 인민들에게, 미국인들과 그 주구들이 조국의 분단을 공고화하고 남조선을 완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 했습니다, 인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어찌 폭발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단호히 일어서자고 부르짖으면서 제주도 인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총궐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도 4·3 인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이며 이것이 제주도 인민군 즉 ‘산사람’ 들이 생기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국과 이승만, 김성수, 이범석 등이 이끄는 주구들이북조선 깃발 아래 뭉치지 않고, 남조선을 분리하여 북조선과는 별도의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애국적인 제주도 인민들이 이에 반대하여 자주통일을 열망하자 미군정이 제주도 주민들을 무자비하고 무차별하게 학살했고, 이에 항거하여 제주도 인민들 전체가 똘똘 뭉쳐 통일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드디어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 즉 ‘산사람’ 들은 총궐기했습니다. 이날 인민의 일부이며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경관 10명과 11명의 테러단 서청원 그리고 악질반동 등 10명이 인민군의 애국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경관 100여 명, 반동 400여 명이 숙청되었습니다.”

1949년 6월 7일, 이덕구가 경찰에 의해 사살됐을 때 그의 직속 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로부터 나온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12개 지서로 되어 있지만 해주 연설에서는 20개 지서로 부풀려져 있고, ‘전과’도 부풀려 있었다. 그리고 애국 청년 혼자서 10명에 이르는 경관들을 거뜬히 해치웠다는 등 무용담들도 몇 개나 나열했다. 전투 전과를 부풀리는 것은 비단 좌익들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국군에게도 일상화돼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사람들이 쓴 전사를 전부는 믿지 않는다. 필자가 소위로부터 44개월간 참전했던 월남전 역사도 중요한 대목에서 많이 왜곡돼 있다. 따라서 인생이 여물기도 전인 23세에 빨갱이 사상이 주입된 김달삼이 아버지 같은 박헌영에게 충성을 과장하기 위해 뻥튀기한 전과는 그리 놀랄 일도 이상해 할 일도 아니다.

“리종유, 김태옥 김봉희 등의 동무들이 적의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동무들을 믿고 나는 안심하고 죽는다. 인민공화국 만세!’ 모두가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소년소녀들은 담배를 말아서 인민군에 보급하여, 또 수기 신호를 해서 적의 부락 침입을 사전에 발견하여 알려주었고, 전투가 끝난 뒤 달려가서 적의 유기품들을 주워서 산에 보내고, 위문문을 써서 산으로 보내 인민군의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부인들은 자진하여 산에 가서 인민군의 밥을 지어 주며 쌀, 부식, 신발 등을 산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여맹이 보내주는 위문품과 위문문은 산사람들의 유일한 오락이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모두가 자위대로써… 이상과 같이 전제주도인민들의 적극적인 참가로써 전개된 제주도 투쟁은 드디어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를 완전히 실패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승리를 가져오도록 하였겠습니까?”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탈린 대원수 만세!”

좌파들은 4·3 사건이 육지의 남로당과도 연결돼 있지 않았고, 소련과의 연결은 아예 없었으며, 오직 미제와 그 주구들과 청년단원들이 유독 제주도 주민을 업수이 여기고 탄압하였기에 자위수단으로 항거한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제주도 주민 전체가 미제를 몰아내고 김일성 체제로 통일하고 싶어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이 다른 미제와 이승만의 주구들이 제주도 인민들의 한결같은 염원들을 탄압하는데서 일어선 ‘통일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손성모, 그는 1929년생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 간첩이었으며 비전향장기수로 김대중이 북송시킨 63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할 재판정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김일성주의자로 된 것은 첫째로 김일성 주석님은 일제의 노예로 되었던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고 김정일 장군님은 주석님의 위업의 계승자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의 뜻으로 살기 위해 김일성주의자가 되었다. 둘째로는 남쪽에도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장군님께서 영도하시는 인민의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김일성종합대학 시절과 졸업이후 그분들의 사상과 정치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나에게 무죄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일설에 의하면 손성모는 5·18 광주사건 당시 광주로 오는 북한특수군에게 길을 안내한 자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재판기록의 핵심은 그가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찰들에 대한 요해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빨갱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그들이 간첩이거나 국보법을 위반했거나 관계없이 모두 하나같이 “나는 통일 운동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김달삼의 해주 연설 내용을 보면 독자들은, 제주폭동이 소련과 연결돼 있고, 육지의 공산당 세력과 연결돼 있으며, 제주도만의 독립사건이 아니라 소련이 벌인 남조선 전체에 대한 적화통일 공작의 일환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8월 21-25일 사이에 남로당이 이렇게 움직일 때 남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7월 17일 헌법안을 공포했고, 7월 20일에는 초대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건국 행사를 치르는 등 국가적으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안세훈, 김달삼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제주도를 빠져 나간 후 공비들 역시 정비기간이 필요했고, 토벌을 맡은 9연대 역시 8월 한 달을 정비와 훈련 등으로 보낸 후 9월에 들어서면서 토벌작전을 수행했지만 공비에 대한 정보 없이 토끼몰이 식으로 작전을 하다 보니 성과가 전혀 없었다. 특히 공비 가족들은 물론 동조자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토벌대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이를 공비들에 연락해 주고 있었기에 작전이 성공할 리 없었다. 경험이 부족한 송요찬 연대장은 뒤늦게 깨달았다. “토벌작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비와 주민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는 농사짓는 주민들을 모두 하산시켜 피난민 수용소로 수용한 다음 계몽을 실시했다. 좌익분자들이 전향하면 그들 중 똑똑한 자들을 이용하여 동료 공비들에게 선무공작을 펴게 했다. 귀순한 공비들에게는 적극적인 생계대책과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이런 작전이 주효하여 9연대는 토벌작전에 중점을 두지 않고서도 수천 명의 하산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축소-위축되어 가는 듯했던 공비들은 의외로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10월 1일, 소련혁명 기념일을 기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전도에 걸쳐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날 하루 동안 55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깜짝 놀란 정부는 토벌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10월 11일부로 ‘제주도경비사’를 창설했다. 제주도경비사는 송요찬이 이끄는 9연대에 경찰 및 해군함정을 추가한 일종의 합동군이었고, 사령관에는 5여단 여단장이었던 김상겸 대령을 임명했다. 한편으로는 제주도경비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수에 있는 14연대 예하 1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토벌작전을 전격적으로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제주도로 떠나야 할 시각인 10월 19일 20:00시에 여수 주둔 14연대는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남로당 요원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등이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여수 14연대는 김상겸 대령이 지휘하는 5여단 소속이었다. 따라서 김상겸 대령은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었고, 김백일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리고 송요찬 중령이 제주도 경비사령관이 되었다. 송요찬은 대대별로 지역을 할당해 주고 각 대대의 책임 하에 경비와 토벌임무를 수행케 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 내에 깊이 심어 놓은 남로당 세포조직들이 번번이 작전 정보를 공비에 누설하는 바람에 작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공비들은 여·순반란에 고무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준동했고, 이에 국방경비사령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송요찬은 또 다른 반란부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해군과 합동으로 해안봉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제9연대는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연대장은 은밀히 일부 병력 즉 이근양 중위가 지휘하는 제5중대를 여·순 반란군으로 위장시켜 조천지구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계획했다. 분명히 이 위장된 반란군의 상륙을 환영하고 안내하는 공비들이 있을 것이라는 데 착안을 둔 계략이었다.

그런데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연대 하사관 1명이 공비 측 세포에게 이 극비의 작전계획을 알려주는 것을 우연히 도청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교환수를 체포하고, 동시에 제주 토박이 병사들로 구성된 제1대대 요원들을 모두 긴급 조사하여 세포조직 80명을 일거에 검거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위장된 반란군을 제주도에 상륙시키면 이를 환영하러 나오는 좌익세력이 분명 있을 것이고, 상륙장소에 좌익세력이 나타나면 이를 일망타진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대신 우연하게 엿들은 통신첩보에 의해 8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세포조직을 일망타진한 것이다. 이는 국방경비대에 얼마나 많은 공산 세포들이 암약했는가를 보여주는 살 떨리는 증거인 것이다. 1948년 10월 31일에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었다. 

졸지에 수많은 80명이라는 세포를 잃은 남로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무장공비들은 1948년 11월이 되면서 만행과 습격을 가일층 강화했다. 이에 대한 토벌대의 토벌도 강화됐다. 이를 놓고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과 정부보고서는 똑같이 이렇게 주장했다.

“1948년 11월 중순으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 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글자 그대로 ‘초토화’ 됐다.” 

그러나 1948년 당시의 정부 측 자료들에는 그 반대로 기록돼 있다.

“무장 공비들은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도주했으며, 토벌대를 유인하여 격멸하는 수법으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11월 2일에는 한림에 주둔하고 있던 제2대대 6중대가 공비로부터 습격을 받고 교전하던 중 이들의 유인에 빠져 14명이 전사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연대는 5중대를 출동시켜 공비의 집결지를 습격하여 100여 명을 사살했다. 11월 3일, 경찰토벌대가 중문면 아두운마루에서 공비와 접전하여 3명을 사살하고 8명의 피해를 입었다. 11월 6~7일에는 공비들이 감히 서귀포를 점령하려고 기도했지만 저지당했고, 11월 7일에는 남로당에 침투한 첩보요원의 제보로 남로당 지하조직 일부를 일망타진 했다.”

위와 같이 제주도 공비들의 대담한 공세가 이어지자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제주도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대통령령 제31호). 그런데도 공비들의 만행은 계속됐다. 12월 28일에는 공비 100여 명이 남원면 위미 마을을 습격하여 월동을 위해 마련해 둔 식량과 의류를 약탈한 뒤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 급보를 접한 경찰토벌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76명을 생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이런 것을 놓고 정부보고서와 강준만은 무장대와 제주도 주민은 가만히 있었는데 국가가 일방적으로 주민들과 마을들을 초토화했다고 모함하는 것이다. 공비의 준동이 지속되자 육군본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제주도 토박이 연대인 9연대를 대전으로 이동시키고, 대전에 있던 2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한 것이다. 이렇게 모두를 바꾸지 않고서는 9연대에 잠입해 있는 남로당 세포들을 발본색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9연대에서 한번에 80명이나 되는 세포를 색출해 냈다는 것은 9연대에 더 많은 남로당 세포가 있을 수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했다.

2015.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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