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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따라 춤춰온 5.18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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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6-17 18:34 조회19,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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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따라 춤춰온 5.18 역사


 

노론이 쓴 조선사와 소론이 쓴 조선사가 다르듯이 5.18에 대한 역사평가는 1980년대 달랐고 1990년대 달랐다. 정권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역사가 뒤바뀐 것이다. 1980년 대법원은 김대중을 내란음모의 수괴라고 판단했다.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한 후 5월 22일을 기해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을 선언하는 한편 김대중을 추종하는 불순한 자들이 김대중의 사주와 자금을 받아 가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옹립하기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반정부 무장폭동이 바로 5.18이라고 판결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1990년대에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은 5.18사람들의 주장 뿐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염군정서가 확산되고, 민주화세력이 사회를 장악함에 따라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예전의 충신이 역적이 되고 예전의 역적이 충신이 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5.18세력들은 광주시위가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한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공수부대를 사적으로 이용하고, 공수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마시게 하여 노인 아이 부녀자 할 것 없이 한손에는 대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살인마처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며 이에 더해 무장헬기가 시민들을 마구 학살했고, 화염방사기로 시민들을 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방법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2,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학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은 정호용이고, 최종 지휘자는 전두환인데 전두환은 미국의 사주를 받았거나 배후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과 전두환과 정호용이 다 함께 광주학살의 주범이라는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 등에서도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계엄군이 먼저 50여명의 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석영은 5.18의 원전으로 불리는 ‘광주 5.18민중항쟁의 기록’에서 공수대원들이 첫날부터 환각제를 마시고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손에는 곤봉을 잡고 닥치는 대로 호박 찌르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고 했다.


하지만 1995년 7월 18일에 내놓은 검찰수사결과는 정반대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1개 대대(공수부대에서는 1개 중대가 12명뿐임)가 전남대에 주둔하였고, 그 40%가 호남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다. 250여명의 학생들이 정문에 몰려들자 대대장이 나와서 계엄령이 선포됐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학생들이 가방에서 돌멩이를 꺼내 일제히 던졌고, 이 기습적인 공격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7명의 병사들이 얼굴 등을 맞아 피를 흘렸다. 화가 난 공수부대 요원들이 쫓아가자 이들은 시내로 몰려가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을 지르고 경찰을 인질로 잡는 등 조직적인 전투행위를 시작했다. 거짓된 주장들만 세상에 퍼지고 진실이 담긴 검찰보고서는 2004년 말까지 창고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갇혀 있었던 객관적 진실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5.18관련사건 수사결과’를 내놓았으며 시민사망자는 2,000여명이 아니라 166명뿐인데 이 중 12명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은 신원불상자였다고 밝혔고, 헬기에 의한 기총사격은 없었고, 화염방사기도 사용된 바 없으며, 정동년 등이 그토록 주장하는 대량 암매장 사건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고 못을 박았다. 


1985년 9월 16일자 미 헤리티지 재단 아시아 연구센터가 발행한“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SOUTH KOREA'S KWANGJU INCIDENT-REVISITED)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보면 미 헤리티지 연구소는 한국 정부의 편도 아니요 광주시민들의 편도 아닌 객관적 위치에서 조사를 했고, 이 조사 내용의 맥은 수사기록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다. “극심한 격돌로 부상자들이 속출했지만 초기의 격돌 2일간의 사망자는 2사람뿐이었다. 폭력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지역감정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중앙정권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전라도를 차별하고 경상도에만 혜택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격돌이 발생한 것은 김대중을 체포하는 등 계엄확대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조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요 첫날부터 뜬소문이 돌았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다. 첫날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지만 이날 소문은 40명이 죽었다고 했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해괴한 소문에는 군인들에게 밥을 며칠 간 굶기고 마약을 투여하여 군인을 흥분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민들은 이 뜬 소문을 믿고 시위에 동참했다..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사한 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했다. 공중정찰에 의한 사진뿐만 아니라 광주시내에 있는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함으로써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그리고 5월 27일 시민들이 잠든 새벽 1시에 계엄군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병력을 소부대단위로 편성하고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5.18의 실질적인 대표이자 상징적 존재인 정동년은 2005년까지도 학살된 시체가 2,000명이 훨씬 넘는다고 언론들을 통해 주장했다. 신원미상자가 12명이나 되는 마당에 여기에 더해 2,000여명의 시체가 암매장 되었다면 그 암매장된 인구들은 어느 나라 인구들이라는 말인가? 


              5.18은 전라도의 한풀이였다는 5.18당사자들의 증언들


5.18의 바이블 황석영 저‘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라도에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제투쟁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 . 박정희 독재기간 내내 이루어진 매판정책 추진과 불균등개발로 인하여 호남푸대접이라는 광범한 대중적 불만의식이 만연했다. . . 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법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 고장에서도 인물이 하나 나와야 한다는 민중적 열망이 간절하였던 차에 전남의 대중적 영웅인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에서 좌절당하고 고난을 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 (증44, 19쪽 7줄-20쪽 하단). 5.18이 광주의 한풀이요 김대중을 구속한데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5.18이 전라도의 한풀이였다는 말은 김성용 신부도 했고, 북한도 했다. 김성용은 5.18을 강경화로 선회케 한 현장 지도자이며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성용은 광주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강경시위를 부추겼다. “그동안 우리 전라도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느냐, 모든 근원은 토지에서 나오는데 농촌을 얼마나 혹사했느냐 전라도는 농토가 대부분인데 농업정책에 실패하여 고생이 많았다. 이번 광주사태는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광주시민의 울분의 표현이다. 다 같이 노력하여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켜라.”(검찰수사기록)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나아가는 남조선인문들의 투쟁”(1982,조국통일사)에는 이런 글이 있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인민들은 원래 오래 전부터 억압자들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 온 력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봉건통치배들의 야합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여 감오농민전쟁의 봉화를 추켜들었으며.. 이승만 통치 때에는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려수, 순천 군인폭동의 불길을 지펴 올려 민족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증31, 602쪽 하3중-603쪽 5줄)


북한의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1985, 조선노동당출판사)에는 이런 글이 있다. “예로부터 광주 인민들은 압제자를 반대하는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싸웠고, . .부패 무능한 봉건왕조를 반대하여 궐기하였던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1946년의 화순탄광 로동자들의 폭동, 1948년의 려수, 순천 군인폭동에 이르기까지 . .”(증38, 21쪽 하5줄-22쪽 2줄)


김성용 신부, 황석영 그리고 북한 책들이 한결같이 일깨워 주듯이 전라도에는 타도에 대한 반감과 중앙정부에 대한 한이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다. 필자 역시 광주에 장기간 있으면서 전라도 사람들이 타도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감정적 앙금들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하게 되었다. 흔히들 한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만 한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386주사파들에게도 한이 있다. 그들의 한 역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증오한다. 한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정권이라는 의식이 골수에 사무쳐 있는 것이다. 이들은 민족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믿고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파괴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골몰한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사는 사람들을 지옥으로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김일성의 전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한, 국가에 대한 한, 타도에 대한 한의 정체라 할 것이다. 5.18역시 한과 분노의 폭발이며, 한과 분노의 폭발은 특히 경상도에 대한 전라도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이 촉발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 폭발이 과연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냐?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자료들은 뒤집지 않고 판단만 뒤집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역사바로세우기 판검사들은 1980년에 조사된 수사 자료들에 기록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뒤집지 못했다. 단지 판단만을 뒤집었을 뿐이다. 같은 사실들을 놓고 1980년의 대법원 판단이 다르고 1997년의 대법원 판단이 다른 것이다. 5.18측은 계엄당국이 광주가 미워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광주에 보냈고, 광주에 가장 많은 공수부대를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광주에는 2개 대대만 보냈다. 1개 대대는 전남대, 1개 대대는 조선대에 파견된 것이다.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제7공수여단으로 전북 금마에 주둔하는 부대로 전라도 출신이 40%나 된다. 이 때 대부분의 공수부대는 서울에 있었다. 고대에는 4개 대대가 파견됐고, 동국대에는 3개 대대, 성대에는 2개 대대가 파견됐다. 이를 놓고 5.18사람들은 전두환이 특별히 광주를 겨냥하여 광주에만 유독 많은 공수부대를 내려 보냈고, 공수부대원들은 모두 경상도 군인만 추려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5.18측의 주장은 대부분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억지 주장들이었다. 5.18 측은 계엄군이 먼저 광주사람들을 빨갱이로 취급하고 ‘빨갱이  청소 차원’에서 광주에 공수부대를 풀어놓자마자 환각제를 마시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바로세우기 검찰은 환각제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고 했고 공격 역시 시위학생들이 먼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이‘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계엄군’에 돌을 던져 7명의 공수대원의 얼굴 등에서 피를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5.18측은 5월 21일 오후 1시의 도청 앞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고, 이것이 첫 발포였으며, 이는 전두환의 발포명령에 의해 야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발포는 5월 19일 오후부터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살아남기 위해 시작됐으며 5월 21일의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포였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시위대개 장갑차를 연속해서 돌진시킬 때 계엄군이 살아남기 위해 발포를 한 것이었다. 또한 도청 앞에서는 대량학살도 없었다. 이날 발생한 사망자 61명중 61%에 해당하는 37명이 도청과는 거리가 먼 곳들에서 사망했고, 도청 앞에서 사망한 33명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 이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총기불상은 무기고에서 나온 수많은 종류의 무기들인 것이다. 도청 앞 상황을 경험한 당시의 공수부대 대대장들은 끝까지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검찰 보고서에 나타난 자료들을 보거나 미 헤리티지 보고서를 보면 이들 대대장들의 증언에 신뢰가 가는 것이다. 


사실자료에 관한 한 검찰은 5.18측의 주장들을 대부분 다 근거 없는 허위주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116명 중 36명만이 M-16 총상이고,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라는 사실도 수사기록에 있고, 5월 21일, 낯 12시로부터 오후 4시까지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가 동시에 털렸다는 사실도 검찰보고서에서 발견되었고, 6회에 걸쳐 좌익수 170여명과 2,700여명의 수용자가 있는 광주교도소를 장갑차와 각종 화기들을 가지고 공격한 사실도 검찰 보고서에 그대로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역사바로세우기 판사들은 참으로 황당한 판결들을 내렸다. 법률논쟁에서 검사들은 줄곧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증거와 법률에 의해 판단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접근방법’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판사들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과 헌법에 의해 판결하지 않고 자연법 즉 사회여론에 의해 판결했다는 기막힌 판결문을 썼다. 5.18 시위대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났기 때문에 준헌법기관이며, 이런 준헌법기관을 무력으로 탄압한 것은 내란이라는 판결문도 썼다.

 

2010.6.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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