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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의 방송 제3부3편 "5.22 - 5.27 오해와 곡절의 막장극" 타이핑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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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머스 작성일22-05-24 09:06 조회1,0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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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기자의 현대사로서의 5.18 : 제3부 3편 5.22 - 5.27 오해와 곡절의 막장극

https://youtu.be/J6subTtlbJU



 

2022. 5. 18, 이승만TV


 

0:00

[음악]

 

0:15

사실과 자유를 사랑하는 이승만TV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동욱 기자입니다.

오늘도 이동욱 기자의 현대사로서의 5.18, 제3부 5.18 통사, 그 중에서 제3편 5월22일부터 27일까지를 중점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제목은 ‘오해와 곡절의 막장극 5.18 총정리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40

오늘은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9박10일간의 5.18 중에서 절반이상의 나머지 뒷부분을 다루어볼 텐데, 이걸 통해서 우리는 이 사건이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한 군의 작전결과가 어떤 일들을 빚어 놨는지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군사적 재검토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그런 진압작전이란 점도 여러분들께서 유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광주와 전남지역 시민들의 그 당시 공권력을 몰아내고 나서 자신들이 지배했던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었던 4박5일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단락 되었지만 지금까지 소화불량이 되어버린 5.18사건의 실체를 한번 들여다 보겠습니다.

 

1:34

흔히 우리는 5.18하면서 5월18일 아침부터 프레임을 잡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다 라는 거죠. 이미 5월14일부터 광주 시위가 있었고, 또 15일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뭐 그런 시절입니다. 재난의 전문가인 하인리히 박사가 하는 얘기는 거대한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징후가 있다. 사소한 징후들이 여러 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5.18.. 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2:07

먼저 5월14일 광주에서는 이미 광주의 봄이 시작됐죠. 그래서 전남 전역에 12개 대학이 다 모여서 연합집회를 합니다. 약 2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도청 앞에 모여 가지고 대규모 시위를 하면서 피의 투쟁은 강령을 채택합니다. 끝까지 싸우자. 뭐 이런 거죠.

 

2:29

이들의 목적이 김대중 선생님을 대통령으로 만들자. 이런 거 이제 부차적인 문제고, 그 당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생 운동권들은 유신정권, 군사정권에 대한 환멸.. 18년 동안 지속됐으니까 이제는 민주주의로 선거를 하는 그런 정치제도를 만들자. 뭐 이런 욕망에 이제 가득 차 있었던 땝니다.

 

그런데 광주는 이미 그 여덟 달 전인 79년 10월달에 부마사태로 인해서 부산지역의 저항이 실패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남은 재야의 정치 지도자인 그 김대중 씨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 그러면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을 때 틀림없이 광주가 당한다 하는 위기의식 속에서 서울에 있는 학생 운동권들과 연계해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한 거죠.

 

3:26,

그러면서 이미 광주는 시위가 연일 14일, 15일, 16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들, 이런 사진들이 이제 그 당시에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이게 5월16일날 집회를 하고 있는 건데, 광주라는 그 지역.. 당시 인구 73만명의 대한민국의 중소도시 되죠. 그쵸? 대도시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데.. 거기에서 저 정도의 인원이 모였고, 또한 5월14일 가두시위에서는 진압경찰들이 무려 54명이 부상을 당했고, 그 중에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과격한 폭력시위가 계속됐다는 것은 군부가 분명히 주목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부마사태에 투입됐던 그 부대와 어떤 다른 대처를 취해야 했었다. 부산 마산보다는 훨씬 사전 준비가 잘 되 있고, 단결이 잘 되어 있는 학생 운동권들이다 라는 점을 유념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4:30

이게 인제 그 다음날 서울에서 하는 집회죠. 원래는 광주와 서울 양쪽의 사진을 같은 날에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면 집권자 혹은 집권자의 서열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상당히 큰 위협이 될 뻔했는데, 전남대학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15일날 벌려야 할 시위를 14일날 이제 폭발시키는 바람에 이제 어긋났고, 그로 인해서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가 없었죠.

서울은 저 사진을 보면 서울의 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광주의 연합시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5:12

다음 보시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5월17일 밤 5월18일로 넘어갈 때 계엄확대 조치가 발표되지요. 전국계엄으로 가면서부터 계엄사령부는 대통령 직속기구가 되어 버립니다. 내각을 올라타 버렸던 거죠. 자 그런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5월18일 새벽에 7공수 2개대대만 하나는 전남대, 하나는 조선대학 이렇게 해가지고 약 3백명씩 나눠서 배치를 시키는 겁니다.

 

5:45

그러니 그 전에 어마어마한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군부는 초기의 대처를 안이하게 하고 있었던 거죠. 당시 그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2군사령부의 지역인데 거기에 그 전교사의 병력과 그 전교사 산하에 있는 기갑, 보병, 포병, 화학 같은 군사학교의 교육생들, 장교후보생이거나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급할 때 이제 전투병력으로 가용할 수 있는, 계엄 때는 충분히 현지에 투입할 수 있는 또는 경계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병력입니다.

 

6:26

그 다음에 이제 향토사단으로서의 31사단이 현지에 있었습니다 1,264분의 37.. 37이라는 건 장교구요, 그 밑에 있는 건 하사관과 사병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경찰은 1,118분의 87, 약 경찰 1,200여명이 늘 진압에 나서는 겁니다.

 

6:46

그런 상태에서 7공수의 2개대대가 더 투입이 된 거죠. 그러나 이건 어마어마하게 뭉칠 수 있는 군중들 입장에서 봤을 때, 별개 아니고 오히려 더 도전욕을 자극할 수 있는 일 밖에 되지 않았다 하는 생각입니다.

해서 전남대학교 앞에서 5월18일 아침에 학생 운동권들과 또는 이제 학교에 고시공부 하러 왔다가 문 닫히니까 들여 보내주세요 하다가 나중에 이제 화가 나니까 짱돌을 던지고 이렇게 일이 벌어진 거죠.

 

7:21

그날 오후입니다. 이 시각 전까지 저 거리가 망가진 거는 공수부대와 시위대간의 격렬한 시위로 인해서 망가지게 아니구요, 전투경찰과 시위대 간의 격렬한 시위 끝에 저 지경이 되고, 전투경찰들은 이제 두 손 들어 버린 거죠. 진압불가, 군 투입 요청, 그래서 이제 7공수 2개대대가 금남로로 들어가는 그런 장면입니다.

 

7:49

그 다음 보실까요? 7월19일이 되면은 저걸로 안 되니까 이제 다시 11공수 1개여단을 아에 투입을 시킵니다. 저렇게 과격시위를 하면서 거꾸로 시위대가 부상을 입으면 그 부상입은 친구들이 더 화가 나서 뭉쳐지고 그렇게 인제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군중 수의 증가에 비해서 군 투입의 증가는 훨씬 미천했고 반복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8:19

그러면서 7월18일 밤에 농아였던 말을 잘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화가 나는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갈기고 타박사로 인제 죽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오고.. 그 다음날은 노동자인 김안부씨가 또 이제 타박사로 돌아가시죠. 시위상황이 저렇게 인제 상당히 격렬하고 자동차가 불타고 하는 건 뭐 저 당시 늘 있었던 일이고, 7공수나 11공수 마찬가지 모든 공수부대원들이 저 당시에는 부마사태 당시의 진압 노하우.. 무조건 때리면 된다. 뭐 그것만 이제 알고서 그렇게 처음부터 아침부터 강경진압을 한 거죠. 그러다 보니 군중들은 더 늘어나게 돼 버립니다.

 

저 장갑차가 있는 곳이 11공수 여단의 차정환대위가 장갑차의 짚단에 불을 붙여서 던지니까 나와 가지고 이제 총을 쏘다가 그 유탄.. 도비탄에 고등학생이 맞아서 병원에 옮겨간 그 지역이죠.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막 벌어지고 하면은 통제가 점점점 어려워지는 데도 불구하고 최고 상층부는 그래도 이 지역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9:35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과거의 근 20년간 존재했던 중앙정보부.. 정보의 산실인데, 기능 자체가 망가져 버렸거든요. 박정희대통령 시해범의 일당.. 해가지고 전부 이제 숙청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군의 정보기관인 보안사가 개입을 했는데, 군의 그 무딘 감각으로는 학생운동권의 인맥의 그 속까지 침투해 들어가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고, 정말 요구하는 건 무엇이고 하는 것들을 상세히 잘 모르는 거죠.

 

10:12

그러니까 이제 군인들 입장에서는 끼어 맞추는 게.. 뭐요? 불순분자, 간첩, 북한에서 내려온 공작원, 뭐 이런 게 있을 거다 라고 생각을 하고 계속 진압해 들어가는 겁니다. 성난 군중들은 그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자동차 돌진, 자동차 불태우기가 시작이 되는 거죠.

 

10:34

이제는 5월20일경에는 11공수도 안되니까 다시 부마사태의 진압의 영웅 3공수를.. 3공수부대원들은 처음에 광주역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상처투성이로 널부러져 있는 동료 공수부대원들을 보고, 도대체 니희들은 어제 뭐했냐 하곤 한심하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10:57

그러다가 이 3공수도 그 다음부터는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다음날까지 아주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때 이제 이런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마찬가지로 감히 공수부대원에게 돌멩이를 던져서 이렇게 아프게 만들다니 그 분풀이로 더 이제 세게 진압을 하게 되겠죠.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면서 성난 시민들이 대규모 차량시위를 시작하기로 하고, 5월20일 오후의 금남로의 상황입니다. 음 그때 뭐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거죠. 그죠? 저 날 밤에 이제 더 큰 일들이 벌어집니다.

 

11:35

그러면서 이 야간에 차량으로 돌진하기 시작을 하고, 그러다가 공수부대원 정관 철 중사가 신혼이고 임신 9개월 된 아내를 두고는 차량 압사로 운명하고 맙니다.

그러자 이제 공수부대원 전체가 하나가 돼 가지고 시위대 전체를 적으로 이제 삼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전남대에 머물렀던 3공수여단에서 실탄을 지급하기 시작합니다. 저 때는 아직 공식 명령 체계 속에서 자위권 발동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직접 실탄 지시를 명령을 했고, 나중에는 이제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서 38구경 권총을 꺼내 가지고 리볼버 권총을 꺼내서 공중으로 세 발을 쐈다 라는 뭐 주장도 있고, 못 봤다는 사람도 있고, 뭐 여러가지 설왕설래를 하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고, 실제는 실탄을 분배하기 시작을 하면서 그 실탄 분배된 탄을 전해주러 가면서부터 이제 차량에서 M60을 사격하고 M16을 사격하면서 가기 시작합니다.

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짱돌도 날라오고, 비도 내리고, 더군다나 차량이 박아버리고 하니까 공포에 질린 군인들은 자위권 차원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제 심리적 요인이 되어 버리는 거죠.

 

12:57

그리고 나서 그때까지 계속 이제 군의 작전은 시위대 해산 및 진압이었는데 그죠? 5월21일 날이 되면 도저히 안 되니까 공수부대는 안되겠고, 다른 군복을 입은 평범한 군복을 입은 20사단.. 약 5천명을 내려 보냈죠.

 

13:15

그러나 20사단이 도착해서 공수부대와 교체를 해야 되는데 교체가 안됐어요. 아침에 교체할려고 출발했던 20사단이 통합병원 앞 길목에서 오히려 시민군들에게 시위대들에게 가로 막혀 가지고, 싸우지 않고선 돌파할 수 없는 겁니다. 결국 부대로 돌아가죠. 왜? 싸우면 희생이 더 크니까 피차간에.. 그래 돌아갔습니다.

도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3공수여단, 11공수여단, 7공수 2개대대 오늘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시위대들의 압박이 점점점 더 심해지는 겁니다.

 

13:52

저 날 시위대는 아침에 리어커 시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규합을 했고 저 리어커 시신이 방아쇠가 돼 가지고 자발적으로 무기고를 탈취하기 위한 시민들의 시도가 시작됩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계엄군이었던 공수부대원들이 우리 지역민들을 죽인다. 고로 진짜 시민의 자위권이죠. 우리끼리 지켜야 되겠다. 무기가 필요하다. 뭐 이런 생각이었죠.

저 지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아주 감동적인 연설도 하고 뭐 선동을 굉장히 잘 했던 그 전옥주 씨가 저 날 어떤 그 요구조건을 제시하느냐 하면 ‘구속자 전원 석방, 계엄군은 12시까지 광주 시내에서 일단 물러나 달라’, 뭐 이런 요구 조건을 제시해요. 그때 이제 장형태 도지사가 해주겠다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특히나 계엄인데 군이 모든 의사결정을 갖고 하는데 군부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도 시민들의 요구에 군이 물러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던 시대잖아요. 버틴 거죠.

점점점 늦춰지니까 사람들이 그때는 아시아자동차에서 트럭을 몰고 나오고, 군용트럭도 끌구 나오고, 장갑차도 끌고 나오고 점점점점 이제 무장 수준이 높아지는 겁니다.

 

15:19

이미 저때 11시부터 이제 경찰서 혹은 경찰서 옆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가 이제 털려 나가기 시작을 하고.. 그러면서 이제 저런 식으로 점점점 밀도가 높게 계엄군들을 압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불과 거리는 한 50m에서 길어야 100미터.. 100m가 안 됐을 겁니다. 아주 지근거리에서 가까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수많은 차량들 끌고 나오기 시작하고 차량 위에서 시위도 합니다. 그 후에 공수부대원들이 처음으로 사격을 합니다. 처음에는 하늘로 또 그냥 어떤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렇게 조준하지 않고 정말 공포 같은 그런 사격을 하죠. 이게 1차 사격이었고..

그 이후에 한 10분에서 15분 간격으로 이제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가지고 아주 좀 악용하는 분들은 공수부대원들이 일부러 광주시민들을 다 몰살시키기 위해서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조준사격을 했다 라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16:23

시위진압 교범에도 어쩔 수 없이 총을 사용해야 될 경우 조준사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엉뚱한 사람 맞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디를 조준하냐? 하반신을 조준해라. 생명을 지키는 선에서 뭐 사격을 해라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실제로는 하반신보다 상반신 맞은 시신들이 많거든요. 저 날 더 도청 앞에서만 34분이 돌아가시고, 부상자는 거기에 한 5배 정도 더 많이 나오죠.

 

16:53

그런 비극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왜 공수부대는 엎드려쏴, 앉아쏴, 쪼그려쏴를 조준사격을 했냐 나쁜 놈들.. 아닙니다. 조준사격을 해야 엉뚱한 사람이 안 다칩니다.

그런 면에서 좀 우리 이해가 필요하고 당연히 저런 상황이 되면 저격병을 운용하죠. 실제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까 저격병이 있었고, 그 저격병에 의해서 저격 당해 죽은 사람이 있었고..

 

17:17

그래서 조사과정에 인터뷰 했던 분을 찾아서 증언 청취를 하다 보니까 이 분도 아주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 온 거죠. 저 현장에 투입됐던 모든 계엄군들은 조사를 해보면 다 피해잡니다.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적 상황에서 다 피해잡니다.

근데, 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단 한번도 제대로 들여다 보고 보살펴 주지 않았다 하는 그런 점들이 있어요. 자기가 쏜 총에, 또는 동료가 쏜 총에 누군가가 앞에서 죽었다는 사실.. 그것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괴롭혀서 알코올 중독으로 빠지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어떤 분들은 결국 자살하기도 하고, 그런 사연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 사건일수록 우리 국민들 모두가 진영 논리를 떠나서 아 힘들었겠구나 는 이해하는 심정으로 양쪽을 바라 봤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가보겠습니다.

 

18:18

그 21일 기무사에서 보관한 사진첩에서 제가 주로 사진을 구했습니다. 이쪽에서는 카피라이터에 대한 부분들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이 사진을 보시면 저 아래 헬기에서 환자 수송하는 장면은 마치 월남전 장면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저 상황이 그런 상황이 된 거죠.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은 월남전 장터에 투입된 사람과 거의 비슷한 전장 심리를 겪었던 겁니다.

 

18:50

오른쪽 하단에 보면은 화물 트럭을 타고 시가지를 누비는 시위대라는 제목의 그 트럭이 나오지 않습니까? 저런 모습으로 무기고를 털러 다녔습니다. 왜 무기고를 털러 다녔을까요? 우리도 무장을 해야 공수부대가 갈기는 총에 대응하고 우리를 지킬 수 있다. 하는 이제 생존 본능으로 일어난 거죠.

그런데 저 모든 것을 어떤 정치적 음모로 이제 내란 목적으로 내란 목적범.. ㅎㅎ 이렇게 해가지고 몰아 버린 거에요. 그런데 군부가 그렇게 권력을 잡아놓고 저들을 다 조사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한 명도 못 찾았잖아요. 북한에서 사주를 받았다든지, 또는 간첩이 들어와서 뭐 했다든지 한 명도 못 찾았잖아요. 없는 거예요.

 

19:41

이제 무기피탈은 저런 식으로 갑니다. 왜 무기 피탈을 제일 먼저 보냐 하면은, 시간상으로도 5월21일 아침부터 시작해서 트럭을 타고 화순으로, 나주로, 함평으로 인접 도시로 막 나가요. 나갈 때 저런 트럭을 타고 나갑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그 지역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막 이제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광주가 난리 났다. 사람 많이 죽는다. 우리도 싸워야 된다.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냐?

뭐 그 당시에 예비군 무기고는 파출소 옆에 벽돌을 쌓아 가지고 한 쪽 지붕 얹고 맹꽁이 자물쇠 하나.. 이게 다였거든요. 거기 가서 문을 부수고 또는 트럭을 후진시켜 가지고 무기고를 뿌러트려 해가지고 주로 이제 카빈과 M1그리고 뭐 옛날 구형 LMG 경기관총 이런 것들을 실탄과 함께 대거 반출한 거죠.

처음 반출한 사람이 광주로 다시 돌아왔을 때가 5월21일 오후 4시경이 됩니다. 그래서 인제 무상으로 무기를 나누어 주죠.

 

20:50

이 자료는 육군에서 그 당시에 계엄사에서 조사한 자료입니다. 이 가운데 있는 중점이 이제 광주가 되겠고 양쪽으로 여러 네모 칸이 있고 한 게 각 지역에서 무기피탈한 상황들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나오는 숫자는 저희가 새로 조사해 보니까 숫자가 작아요 저긴.. 새로 조사해보니까 더 많이 털렸다 하는 것들을 알 수 있고 이런 모습으로 각 지역을 돌아 다니면서 무기고를 털었다. 이거는 이제 그 무기 피탈에 대한 조사기관들이 서로 달라 가지고 그렇게 이제 종합을 해본 겁니다.

 

21:27

이 쪽에 보니까 경찰기록이 종합적으로 53개소라고 이제 나와 있고, 또 오른쪽에도 보면 육군본부 예비군 무기탄약 안전관리 저 자료 속에서 그 당시에 무기고 피탈수 보니까 53개소 나와요. 동원참모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비군 무기고니까 그렇죠.

그런데 85년 안기부나 또는 서울지검이 재조사했을 때 보면 오히려 숫자가 작아요. 이제 작은 건 당연히 이제 사실이 아니겠죠. 그죠? 그래서 피탈 무기고는 총 53개소입니다.

최초 20일 오전 11시경에 나주의 금성 파출소에서 제일 먼저 털려 나가고 최종은 23일 오전 7시30분 영암 시종 파출소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맨날 누군가가 얘기했듯이 어떻게 일반인이 4시간만에 무기고 38개를.. 이거 죄다 거짓말이에요.

 

22:22

그래 일반인이라는 프레임.. 거기다가 이제 정확한 듯이 하는 38개의 무기고..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검증해보지 않으면 우리 이제 속게 되는 거죠. 이래서 무기가 피탈됨으로 해서 쌍방이 무장하지 않습니까?

 

22:39

그래서 계엄군은 철수하면서 외곽봉쇄를 하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이제 5.18은 광주 뿐 아니고 광주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공간에서 비극이 벌어집니다. 공간이 분화되는 거죠. 이거 한번 보시겠습니다.

 

22:58

도로 차단 및 외곽 봉쇄작전이 5월22일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연쇄 참극이 벌어집니다. 그 군과 접촉했던 봉쇄하고 있던 지점.. 검문소가 만들어졌던 지점들.. 이런 부분들, 군인과 맞닿았던 민간인 지역에서 참극이 참 많이 벌어집니다.

 

23:18

자 이 연쇄참극은 여러 군데에서 벌어지는 데요. 그 다음에 이제 무장시위대는 처음에 총을 갖고 와서 5월22일부터 제일 먼저 한 것이 자기 동네 지키기, 그 다음에 지역 자체 경비대 해서 도청 앞에서 자체 경비대를 만들어가지고, 일종의 이제 군대를 만든다고 생각을 한 거죠.

 

23:42

그리고 차량을 다 탈취해 가지고 기동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으니까 이걸로 이제 치안을 유지하자 하면서 기동순찰대를 만듭니다. 어느 지역에 계엄군이 나타났다 하면은 5분대기조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출동할 수 있는 타격대가 만들어지고, 그러다가 맨 마지막 25일 이후가 되면 이제 사람들이 비로소 점점점 패배의식에 빠져요.

처음에는 이제 계엄군 물러나고 나니까 아 드디어 우리가 원하던 일을 해냈다. 이제 승리감에 빠졌다가 점점점 지날수록 우리가 과연 이 무기 가지고 저 계엄군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안되죠. 싸우다 죽는다는 것도 알죠.

 

24:27

그러니까 이제 점점점 서글퍼지다가 26일 되면 지도부가 이제 완전히 운동권으로 다시 바뀝니다. 최초의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늘 이런 운동을 했던 민주화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뭐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이 예비검속으로 다 도망갔다가 보니까 불이 확 번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자기들이 다시 들어와서 이제 저 내부에서 어떤 일을 남보다 잘 하느냐 면은 사람들을 뽑아서 조직한다든지 또는 어떤 노선을 두고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공박하는 그런 경험들이 많으니까. 이제 이 사람들이 나중에 이른바 헤게모니를 잡아버리는 거에요.

처음에 한 게 없다가 나중에 자기들이 헤게모니를 잡고 난 뒤에 이 사람들이 뭘 했냐? 사람들을 선동했다기 보다는 가라고 합니다. 이제 거의 마지막이니까.. 특히 아이들은 가라. 청소년들.. 총에 대해서 호기심이 참 많찮습니까? 남자들이.. 근데 그때 총기를 마음껏 만져보고 뭐 심지어 수류탄 그 안전핀 고리를 덜렁덜렁 여기 어디 단추 같은데 달고 다니기도.. 위험천만한 일도 벌어졌고, 오발사고도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 사람들이 무기회수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음 90%를 회수하고 대신 자기들은 갖고 있어요. 그럼으로 해서 저 광주라는 공간은 기존에 있었던 권력, 공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권력자가 되요. 특권이 된 거죠.

 

26:00

그러나 이들로 인해서 그렇게 불미스러운 비극적인 이런 일은 오히려 없었던 이 점도 나중에야 그 참목해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마지막쯤 갈 때는 떠날 사람은 다 떠나라 하고 꺼꾸로 이제 당부를 하죠. 그래서 최후의 남은 사람들이 200명이 안됩니다.

 

26:19

그리고 이른바 그 항쟁파라고 했는데, 요소 요소에서 벌어진 전투결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까 이건 항쟁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투항이죠. 또 다른 항복이죠.

그냥 총만 들고 있다가 그냥 손을 들어 버리고 저 총 자체가 영점이 만들어지지 맞춰지지 않은 총이에요. 전부.. 기껏해야 실탄을 장전하는 방법,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나간다. 안전장치는 어떻게 사용한다. 이거 이상 가르쳐준 게 없어. 그러니 영점이 안 맞으니까 조준할수록 안 맞는 거죠. 그죠?

 

종국에는 시민군의 총에 피격되서 죽은 군인은 최대가 6명입니다. 그 중에 2 명이 지금 또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이냐 아니냐 논란이 있지만 시민군에 의해서 총으로 맞아서 돌아가신 분은 6 분, 오히려 계엄군 대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으로 죽은 분들이 더 많죠. 12명..

 

27:22

어쨌든 그런 기동 타격대까지 그 무장 시위대의 역할이 저렇게 나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제 민간인들로서 사태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이게 이제 빈 공간, 진공상태의 사회에서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지만 사회 곳곳에서 있었던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이죠. 그분들이 이제 나서 가지고 험한 일들을 손수 해가면서 질서를 잡아갑니다.

제일 먼저 이제 학생수습위원회가 생기거든요. 주로 인제 이 젊은 사람들.. 학생 운동권들에 의해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고, 더군다나 저게 햇수로는 1980년 5.18 이지만 여전히 70 년대잖습니까?

 

28:06

70년대 대한민국 사회는 대학생이 꽤나 권위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조차도 서로 간에 시비가 붙으면 저기 대학생한테 한번 물어보자 이런 식으로 이제 권위를 인정하던 시대였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앞장 서서 나와서 현실을 바로 잡아 보자 해서 거리 청소도 시작하고, 장례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28:33

김영삼의 그 정당에서 비례대표를 받아 가지고 국회의원을 했던 김종배씨도 저 당시에 조선대 학생으로써 저 수습대책위에 자발적으로 가 가지고 가장 험한 시신의 염 또 입관하는 이 장례진행 다 도맡아서 합니다.

거의 한 68구정도가 저 날부터 이제 도청옆 상무관 체육관이거든요. 거기에 이제 있는 거죠. 태극기를 덮고..

 

29:05

또 보면은 이제 외곽에서 아까 제가 앞에 말씀드렸지만 도로차단의 외곽 봉쇄작전을 하면서 그 지역에서 곳곳에서 이제 시체는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뭐 그 당시에 냉동고가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거기다가 안치시키는 거에요. 그런 험한 일들을 해 가면서 수습위원회의 방향을 올곧게 잡고 있죠.

그럴 때 이제 일반인들도 와서 수습대책위를 형성합니다. 자 이제 어른들이 오는 거죠. 진짜 권위체.. 어떤 분들이냐 하면은 대주교 또는 목사, 유지, 신망있는 변호사 뭐 이런 분들이 이제 나와 가지고 다시 이제 수습위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29:50

그러다가 24일부터 이른바 진짜 운동권들, 들불야학 팀들 이런 사람들이 이 광주 내부에서 다시 숨어있다 나와 가지고 이대로 가면 안된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학생수습대책위나 일반수습 대책위는 야 이거 이제 무기가 너무 많이 돌아다니니 위험하다 회수해서 반납하고 계엄군한테 이거 다 가져가라. 그러고 이런 상황을 원상 복구하자. 뭐 무조건 이런 식으로만 얘기했어요.

 

30:20

그런데 이런 정치 투쟁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운동권이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장례수습위원장을 했던 김종배씨도 반대하죠. 그냥 무기 주면 안 된다.

우리의 요구 조건과 바꿔야 된다. 그래 가지고 25일날은 수습한 무기 중에 몇 천정을 차에 싣고 계엄사에 갔다가 그 계엄사에서 훈방될 만한 사람들을 다 데리고 교환을 한 거죠. 34명 정도의 학생들을 데리고 이제 나오긴 하지만 그 이외에는 계엄사에서 이 분들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31:00

그러다 보니까 5월25일을 지나면서 머리띠 매는 거예요. 그래서 이른바 온건파라고 이제 표현이 되는 그런 사람들 다 나가라. 여기는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가 죽겠다. 나가라 하면서 이제 민주투쟁위원회를 만듭니다.

저 분들이 저거를 만들므로 해서 비로서 이제 5.18의 이 모든 과정의 화룡점정처럼 그래서 5.18 자체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31:35

만약에 그냥 순순히 다 주고 갔더라면 이 분들에 대한 기록은 무엇으로 남았을까요? 단순한 폭도, 내란 목적의 뭐 정보나 나왔을까요? 역사의 정체성을 남기 위해선 때로는 희생을 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도 전 생각을 해 보게 되요.

 

그때 그 전남대 출신의 윤상원 씨가 대변인을 하면서 24, 25, 26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 그리고 외신기자들에게 이야기를 하죠.

우리가 뭘 추구하는 지.. 그런 노력들이 분명히 자신은 죽을 줄 알고, 그리고 그 길을 걸어 갔는데, 그로 인해서 5.18이 결국 이제 역사의 어느 정도 제대로 평가 받는 쪽으로 남은 거에요.

만일 그 노력을 안 했더라면 또는 정말 그 성급하거나 조급한 그래서 북한이 그 당시 한참 이제 떠들고 있는 뭐 그런 걸 내걸었다 하면 저 지역 전체가 나중에는 정말 역사에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에 빠질 수도 있겠죠. 그죠?

 

32:37

시청자 여러분들이 만약에 저 시대의 저 공간에서 그 윤상원이나 그 들불야학이나 그 전남대 학생의 입장이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선택했을까? 어떻게 했겠어요. 저 시간과 공간이 딱 협소하게 정해져 있는데 할 거냐 말 거냐 뭐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몰려 가지 않았을까?

 

저는 옛날에는 굉장히 좀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피 흘리게 만든 아주 무모한 학생운동이었다 라고 비판적으로 봤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보면 이런 희생을 통해서 아주 거대한 물결들이 가서 나중에 이게 후세들에게 문명의 진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 이런 시각을 가면서 그 다음 볼까요?

 

33:27

그 연쇄 참극을 잠시 좀 살펴보겠습니다. 충정작전을 준비합니다. 24일부터 26일까지.. 그리고 27일날 공수부대는 충정작전으로서 광주시가지를 이제 다시 탈환작전하는 거죠. 27일 새벽 1시반부터 시작이 돼서 새벽 6시 되면 이제 작전종료가 됩니다. 뭐 그래도 저 정도로 해서 이제 끝난 겁니다.

 

33:54

그러니까 도로 차단 및 외곽 봉쇄작전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런 겁니다. 여기서 이 퍼렇게 보면 아시겠지만 광주 화순간 도로의 주남마을 사건도 있고 비아 인터체인지 사건, 광주교도소부근 사건, 화정동 사건, 송암동 사건, 이게 다 외곽 철수해 가지고 경계를 하면서 또 생긴 사건입니다. 예컨대 이겁니다.

우리가 이제 저번 시간에 봤듯이 광주에서 그 당시에 11공수, 7공수 또 이제 3공수도 있었는데, 철수 외곽도로 봉쇄할 때 통합병원 쪽에 20사단이 있었죠. 그죠? 시민군들도 총을 들고 몰고 와서 바리케이트를 칩니다.

계엄군 니넨 여기 오지마 하면서 바리케이트를 치죠.

 

34:39

3공수여단은 전남대 머물러 있다가 21일 오후에 광주교도소로 또 5시반까지 이동합니다. 그리고 저기서 그날 저녁부터 지나가던 차량에 대한 발포를 해가지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죠.

근데 딱히 공수부대를 비난도 못하는 게요.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고속도로를 따라서 이렇게 구보하고 있을 때, 이미 무장시위대들이 형성이 됐고, 이들이 차량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가면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사격을 해요. 공수부대원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면서 도랑으로 구덩이 밑으로 몸을 날린 거죠. 가면서 또 뛰어가다가 뒤에서 차 온다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려요. 이 짓을 몇 번씩 하다가 광주교도소 가니까 이제는 이미 외곽차단이 다 돼 있는데 지나가는 차는 전부다 적이다 라고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참 많은 비극들이 벌어지죠.

 

35:43

11공수와 7공수는 산을 넘고 또는 차량들은 길을 따라서 화순쪽으로 빠지는 길목에 주남마을이 있습니다. 그쪽을 향해서 가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계엄군과 시민군 간에 총격전을 해요.

그러다가 그 총에 한명은 사망하고, 또 한 명은 운전을 하다가 운전이 잘못돼 가지고 그래서 압사해 죽고 또 한 명은 행불이 됐다가 26일쯤 되서 시신이 발견되고 그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36:19

그때 이제 교도소에서 24일까지 주둔하면서 민간인은 10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부상은 전부다 이제 총상이죠.

그 다음에 비아 인터체인지에서 기갑학교병력이 매복을 서고 있다가 그 경계근 무를 서고 있다가 31사단에서 차량을 타고 이렇게 접근해 가고 있는 있으니까 정지신호를 못 본 모양이에요.

그 31사단 차량이 계속 진행을 하니까 시민군이다 라고 해서 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3명이 죽어요. 그런데 그 자료를 보니까 공수부대원 복장과 방위병 복장이 비슷해서 오인한 그런 문장들이 있어요.

그 당시에 이제 그 공수부대원들의 개구리복.. 방위병도 좀 비슷했죠. 예비군도 비슷했고 뭐 하여간 사람들이 다 오인을 하면서 무조건 총을 쏘고 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37:19

그리고 또 통합병원 차단작전도 있습니다. 민간인 8명이 사망하고 이게 민간인이 왜 죽었냐면요. 20사단 60, 61, 62연대 요기 요 지역에서 여기 통합병원을 들어오는 길목을 확보를 해야 군인들의 부상자도 병원에서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이 통로를 확보해야 되겠다 해서 탱크를, 전차를 몰고 한 돌고개라고 하는 지점까지 갑니다.

가 가지고.. 가는 동안에 이쪽에서 이미 이제 무장한 시위대들이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들과 교전을 하면서 정작 총을 든 무장 시위대를 사살한 거는 얼마 안 되고요. 총을 뭐 여기저기 쏘니까 이 쪽에 있던 민가에 지역에서 유탄에 맞아서 죽은 분들이 참 많아요. 또 부상당한 분들도 많고..

그리고는 이제 지원동 주남마을로 가는 11공수여단하고, 7공수 2개 대대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38:22

빨리 말씀 좀 드려보겠습니다. 3공수여단 광주교도소 인근은 아까 인제 말씀드린대로 이렇게 해가지고 민간인이 10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죠. 이때쯤 안타까운 일들 중의 하나는 예컨대 이제 김성수 일가, 채소 장사를 하는 이 분들이 트럭을 몰고 가다가 돌아가라 그래가지고 차를 돌렸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군인이 뒤에서 갈겨버린 거에요.

그래가지고 이 부부고요. 다섯 살짜리 딸이었습니다. 김내향.. 총알이 세분 다 맞아 갖고 관통했고, 김내향 양은 하반신 마비로 이제 평소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부인은 김춘아 씨는 부상후 후유증으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김성수씨 역시 복부에 총상을 입고 뭐 이런 이제 비극들이 막 벌어지는 거예요. 차량에 총을 내밀고 사격을 하면서 교도소쪽으로 막 돌진해오는 경우들이 몇 번 있었거든요.

 

39:20

그러니 군인들 입장에서는 참 딱하죠. 그죠?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20사단 통합병원 의 건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무장시위대에 의해 비극이 벌어지죠. 그 당시에 사진을 보니까 무장시위대의 버스.. 이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유리 다 깨져 있고 일단은 뭐 아무데나 빨리빨리 태워 갖고 가자.

근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냐면 질서가 깨지고 공권력이 사라지고 나니까 정상적으로 다니던 교통편이 하나도 없어졌어요. 그러면 같은 목적으로 예컨대 광주에서 화순경찰서 털러 가자. 좋다 가자 하고 올라타는 사람들 사이에 이 차 화순 가요? 화순 갑니다.

그러면 이제 화순에 집으로 가든지, 누굴 만나러 가든지, 화순에 무슨 개인 용무로 가든지 하는 사람도 저 차에 탄다 말이에요. 응 저 차는 어떤 차가 되냐

군인들 입장에서는 전부가 적이에요. 그러다가 집중사격을 당하게 돼 버립니다. 무장시위대가 저 총을 들고 나타나는 순간 그 무장 시위대 주변에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삶을 살던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습니다. 안타깝습니다.

 

40:33

또 하나는 이제 지원동 주남마을 사건입니다. 오른쪽에서 이렇게 내.. 11공수와 7공수 2개 대대가 내려.. 요 밑에 인제 주남마을이 있는데, 그래 이제 광주에서부터 화순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너머가 너릿재 터널이 되구요.

여기서 이제 최소한 2대 이상의 버스가 아까처럼 집중사격을 당하고 거기서 살아남았지만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돼서 마치 안락사처럼 2명은 총으로 죽여서 뭐 매장하고 나중에 그게 발견되고 이런 일들.. 그 주남마을사건에서 몇 명이 그 버스에 몇 명이 탔냐? 생존자가 얘기하죠. 한 18명인 것 같다.

 

41:19

근데 실제로 그 버스에서 나중에 이제 밖으로 군인들이 다 이제 시신을 끄집어냈을텐데 그 시신들이 가매장 됐거나 개울창에 이제 처박혀 있거나 했다가 며칠 뒤에 상황이 다 끝나고 나서 광주시민들이 가서 봤을 때 시신이 뭐 11구 밖에 없더라. 나머지 7구 어디 갔냐? 안 그래도 이제 행불자 신고가 오니까? 그 안에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찾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답답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확인된 것만 지금 11명이고, 총상 부상자는 14명이나 된다. 아무런 그 상관 없던 농사짓던 사람.. 그리고 이제 총알이 날라오는 거죠.

 

42:03

그 다음에 이 이것도 이제 군이 제대로 좀 검토하고, 성찰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야 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참 유명한 사건입니다.

7공수, 11공수 송암동 오인사격.. 이게 지금 이 지역이 송암동이구요. 아까 주남마을로 접근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24일 오전이 되면은 공수부대는 전부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제 철수해서 최후의 진압작전에 투입되는 준비를 하기 위한 그런 명령을 받아요.

그러면 기존에 주둔하고 있던 지역은 누가 대신 하냐? 20사단의 병력이 훨씬 많으니까 20사단이 들어가서 임무 교대를 하고 공수부대는 그 자리에서 다시 나오는 이런 겁니다.

 

42:52

그래서 이날 오전에 54대의 장갑차, 트럭이 쭉 가 가지고 20사단은 병력을 태우고 광주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고 이날 오후에 이 차량이 그대로 나오면서 여기에 이제 11공수, 7공수 병력들이 탑승하고 나오죠.

나오는데 이제 중간중간에 숨어 있던 시위대, 무장시위대가 총을 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그 총에 대해서 응사를 할 거 아니에요. 응사를 하다 보니까 거의 이 고슴도치처럼 사방팔방으로 이제 사격을 하면서 간 거예요.

가다 보니까 14살 방광범 군이 저수지 앞에서 야 군인 간다 하면서 뛰어 오다가 맞아서 절명을 해버리고, 마찬가지로 10살짜리 전제수 군도 집 앞에서 놀다가 군인 아저씨 뭐 손들고 하다가 총에 맞아 절명하죠. 두부관통상인데 이런 비극들이 막 벌어지면서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43:52

그래가지고 효덕국민학교 앞에서는 교감 선생님이 또 총에 맞고.. 이때 이제 그 전교사 산하의 보병학교 교도대, 이 교도대는 특히나 그 무반동총 대전차 로켓이죠. 그걸 가르키는 교관들이었어요. 그들이 여기서 매복을 서고 있었는데 11공수여단이 여기 나오는 요 한.. 요 정도.. 왔을 무렵이겠죠. 그죠?

 

44:18

여기 보시면은 최준수 일행이 타고온 트럭이 있습니다. 이들이 무장시위대입니다. 이들이 이제 차를 세워놓고 주위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묻고 있다가 여기에서 나오는 걸 보고 이들이 이쪽으로 숨죠. 여기 있던 교도대들은 이 무장시위대를 보고 뒤에 오는 장갑차를 시위대로 오인을 해요.

그래서 이 11공수, 7공수가 타고 있던 장갑차와 트럭들을 향해서 사정거리 내로 들어올 때 가차없이 발포를 해 가지고 많이 죽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8명, 박연옥씨, 권근립씨 이제 나중에 돌아가시는 거고, 군인은 9명, 부상은 38 명 특히 이 맨 앞에 선두에 있던 장갑차를 선탑하고 있었던 조창구 중령.. 대대장이죠. 그죠? 팔 한쪽이 날라가 버립니다. 그래 부상이 되죠.

 

45:14

근데, 이제 박연옥씨나 권근립, 임병철, 김승후 이런 분들에 대한 군에게 사연을 설명해주고, 군기 교육을 시킬 때도 이런 사건들을 반드시 군이 다시 봐야 되고, 연구자료로 삼아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뭐냐 하면 당시의 오인사격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피해를 봤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첫 사격 후 그 다음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공수부대원들이 결국 이 진지를 점령하면서부터 알게 됩니다.

 

45:47

아 이거 우리 편이었구나. 그러고 나니까 화는 나잖아요. 화는 나는데 분명히 어디에 시민군들이 있을 거다 하고 찾다가 이 친구들도 찾죠. 여기에 있는.. 권근립씨는 여기서 살고 있었어요. 24살 먹은.. 근데 이제 비슷한 사람 권근립, 민병철, 김승후 세 사람을 다 끌고 와서 그래서 그냥 즉결처분해 버렸어.. 이 분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 가운데 박연옥 씨는 총성이 울리고 난리가 나니까 요기 큰 하수구가 있어서 무서워서 숨었어요. 근데 이 분도 그 자리에서 총으로 또 돌아가시게 해버렸어요.

 

46:28

자 이런 일들을 군에서는 덮지 말고 제대로 좀 열어 주고 왜 이런 실수가 벌어졌는지 그런 점에서 하는 교육이 좀 필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지금까지 한번도 5.18과 관련한 작전에 대해서 재검토한 적이 없다는 그런 아쉬운 점.. 뭐 그런 거..

 

당시 이제 이게 그 사진입니다. 총탄에 피격돼 가지고 뭐 작살난.. 뒤에 아무런 방호벽도 없는 그런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혼비백산하는 거죠. 그죠? 이게 시위대가 끌고 다닌 장갑차라고 기무사 당시 보안사죠. 보안사에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는데 제가 알고 있기로 시민군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끌고 다닌 적이 없어요.

그 이것과 관련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확인해봐도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제가 볼 때 이것은 계엄군이 몰고 다닌 장갑차입니다. 앞부분이 날라건 거는요, 아마 그 로켓포에 맞아서 날라간 것 같고..

요 위에 보면 이렇게 보이는 것들 이 게 뭐냐면 모래주머니 입니다. 계엄군들은 그 당시에 라면 박스에다가도 흙을 담아 가지고 트럭에 놓고 일종의 방호벽을 쌓았거든요. 그 장갑차 위에서도 저런 모래주머니 쌓아서 선탑자들의 신변을 보호할려고 했었거든요.

 

47:49

여러분 지금까지 보수진영은 이 5.18에 대한 인식을 주로 사태의 발단에 해당하는 18일부터 21일까지에만 주목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함에 따라서 21일 이후 27일까지 5박6일간의 사건은 부수적인 피해 정도로 간주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북한과의 연계설 또는 김대중 씨가 주도한 내란모의설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요. 그 당시 군은 분명한 전투상황으로 인식하고 상대를 전부 표적으로 간주했던 반면에, 지역주민들은 전투적 무장 시위대서부터 단순 가담자, 나아가 전혀 무심한 사람들까지 뒤범벅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입관시켜서 매장해야 되는 관이 부족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 그 관을 사기 위해서 무장 시위대가 몰고 다니는 버스에 올라 탄 사람들은 전투 상황에 돌입한 공수부대원들에게 전혀 구별되지 않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비극이 날 수 밖에 없죠.

 

49:02

이렇다 할 훈련도 받지 못한 무장 시위대원들은 외곽봉쇄로 차단, 그걸 하고 있는 매복한 군인들에게 그냥 겁도 없이 총 몇 방 쏘다가 오히려 엄청나게 많은 집중사격을 받게 되죠. 그러면서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게 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정말 애꿎은 희생자들이 늘어났죠.

 

49:27

외곽 봉쇄에서 도청탈환 직전까지 그 5박6일간의 사건 발생 공간이 광주시내에서 외곽으로 분화 분리되면서 오히려 사상자는 더 증가해 버렸어요.

18일부터 21일 저녁까지는 68명이 사망했는데, 그후 27일 사건 종료 때까지 사망자는 총 99명이나 되는 겁니다. 사망자가 거의 절반이 더 늘은 거죠. 그죠?

예. 이 기간중의 500여명의 시위대는.. 무장시위댑니다.

무장력으로 인한 계엄군의 사망자는 겨우 여섯 명인데 비해서, 계엄군의 사격으로 시위대를 포함한 민간인 사망자는 그보다 15배나 많은 99명이나 된다는 이런 점을 우리는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장 시위대는 총을 휴대했다는 것에 불과했고 실지는 아주 낡은 카빈총에 불구하고 영점조차 안 잡혀서 조준할수록 안 맞는 명중률이 저조한 무기라는거 이들은 죽은 시민의 시체들을 보고 공수부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무장을 한 게 가장 큰 것 같아요.

뭐 아직 뭐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나 뭐 이런 걸 깊이 받아들이고 살았던 분들도 아니고, 하여간 내란의 수단으로서 무장한 것이 아니었으면 사후조사 결과로도 확인했습니다.

 

50:49

그 당시 보안사가 광주 시위와 관련한 연행 구금자 수가 2,599 명, 전국적으로는 별도로 2,677명 그 합치면 거의 한 5천명이 넘지요. 일단 연행 구금한 뒤에 하나씩 하나 다 조사했죠. 조사하면서 보면 북한과 연계된 사람도 없고.. 그죠? 내란 목적으로 뭐가 제대로 했던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못 본 거죠. 그러면 누가 이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야 되는데 그 사과를 아무도 안 하고 지금까지 온 거 아닌가?

 

51:26

그러니깐 이 갈등이 점점점 커지는 겁니다. 언젠가는 이런 부분은 제대로 된 사과를 하면서 우리 국민 전체가 아 우리가 그때 서로가 잘못 생각해서 이런 일을 겪었구나 라는 그런 반성이 좀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당시의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한 채 계엄군과 전투를 시도함에 따라서 전장 심리에 움직였던 계엄군들은 시위대를 훈련받은 북한의 공작원들로 간주 하면서 오해와 곡절의 막장극이 펼쳐진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정보의 실패가 눈먼 작전을 펼치게 했고요. 이것이 성난 군중을 더 자극하면서 군중의 숫자를 불리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52:14

그에 비례해서 피해자의 수도 아주 늘어나 버렸습니다. 광주외곽 주요 봉쇄지점 7개 지역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대부분이 외진 곳이어서 사체 처리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아까처럼 18명이 버스에 탑승했었습니다 하는데 시신을 찾아 보면 11구 밖에 없다. 뭐 이런 경우죠. 그죠?

대부분은 가매장되었다가 발굴되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암매장으로 여겨질 만큼 찾기 어려운 곳에 방치되었다가 참혹하게 부패된 모습으로 발견된 유해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89년도에도 발견되거든요.

근데 이게 그 당시 시신이 아니냐? 그 지금 사인을 조사해보면 총상이 나오고, 그 총탄 사입구나 뭐 이런 걸 확인해 보면은 군에서 사용하는 총탄이고, 여러가지의 프로파일링 등을 해보면 아 이게 80년 당시에 그 비극의 공간에서 돌아가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죠.

 

53:19

이러한 사실들은 계엄군이 사태를 종결한 이후에 불연속적으로 드러나면서 사태 종결과는 아주 무관하게 지역주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더 깊게 뿌리를 내려지게 한 원인 중의 하나로 보이는 겁니다.

당시 군부의 사후 처리 과정은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5.18 끝나고 진압작전 끝나고 나서부터 한동안 그랬죠. 그죠?

 

광주 폭도 또는 불순분자, 간첩, 북한군과 뭐 연계된 사람들, 공작원들이 많은 곳, 이렇게 이런 식으로 저런 피해자들을 대하고 홀대하고 그럴수록 이제 이 분들의 분노와 증오는 더 깊어지는 거고, 그러면서 체계화 되겠죠.

5.18이라는 이 아픈 상처를 우리가 제대로 보면서 반성하고, 서로 보듬어 줄 수 있을 때 저 상처는 우리 공동체를 더 결속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54:19

저희 위원회에서 인제 어 며칠 전에 화해와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을 했었습니다. 그때 이제 그 계엄군 중에 한 분이 오셔 가지고 겪었던 트라우마를 고백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힘들었다. 그 감정이 이제 북받쳐 가지고 울면서 얘기하시거든요. 미안하다고.. 했을 때, 광주에서 오신 여성분이 내 당신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5.18이 되면 저 망월동을 가기도 싫고 보기도 싫다. 우리는 피해자지만 당신은 가해자로서 짊어지는 짐은 더 무거울 거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죠. 이런 이런 치유의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말씀드리지만 이 5.18은 정치적 재난입니다. 그 재난사건이라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권력, 행정력, 기타 모든 역량을 다 퍼부어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을 재난이라고 하거든요.

 

55:21

근데, 518은 그 당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우리만 그러냐? 다른 나라들 어떻게 사는가 하고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도낀개낀이에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전통적인 국가들은 대부분 근대화를 할 때 군부의 힘을 얻지 않으면 불가능했습니다. 2차세계대전이라는 그 4~5년의 기간 동안 가장 근대화된 사람들은 누구냐? 군인이었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군부의 힘을 빌어서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키는데 뼈대로 삼은 거죠. 문제는 많은 나라들이 군정에서 민정으로 멋들어지게 이양을 하고 싶지만 흠 거의 다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좀 끊임없이 내전으로 가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행히 그 때의 그 아픔을 딛고 87년에 6.29선언 하면서 새로운 제6공화국의 헌법을 만들고 오늘날까지 온 겁니다. 옛날 같으면 60년대 같으면 선거 때마다 정치 깡패들이 동원되어 가지고 폭력으로 대응했죠. 이제 그런 거 없잖아요. 쭉 우리 그 지금 그 만큼 성장해 가는 겁니다. 어떤 시행착오를 통해서 냐? 바로 5.18을 통해서..

 

56:41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해하고 결속할 수 있는 현대사의 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왜 그렇지 못했나? 그것은 5.18 통사를 넘어서 5.18 이후에 오늘날까지 온 정치과정을 요약해서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비로소 왜 민주화운동으로 특히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유공자 특혜라고 지금 계속에서 떠들고 있는 한 그 무리들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지? 그리고 5.18유공자들만큼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초월해서 스스로 다 공개하고 있다는 사실, 그런 부분들을 다음 시간 또 그 다음 시간을 거쳐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감사합니다.

 

57:41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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