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 -- 박정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System Club 시스템클럽

자유게시판 목록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 -- 박정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람가세 작성일15-03-29 19:06 조회4,520회 댓글2건

본문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 -- 박정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 한일협정 체결 당시 박정희의 대 일본 언행은 친일 행위가 아니라 국익을 챙기기 위한 허허실실 작전으로서 실사구시형 애국의 전형이었다.
- 박정희 정부의 평화선 포기와 한일협정은 영웅 박정희의 영도적 결단의 소산이었다.


극일(克日), 한국이 일본을 이긴다는 말이다. 참 좋은 말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일본을 이겨야 할 많은 이유를 갖춘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북괴에 대적하는 한미일 삼각공조도 기왕이면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이 일본을 능가하는 극일의 상태에서 하면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극일을 위한 모든 핵심 수단들과 필수 기반이 박정희 시대인 6,70년대에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도 인정하는 한국인들도 지금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심한 일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그런 <실질적 극일>의 행보가 1990년대에 민주팔이 정권이 들어선 후 퇴보해 버렸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역시 한심한 일이다.

포항제철을 필두로 한 중화학공업과 제반 과학기술, KIST, 이를 바탕으로 한 국방산업과 국방력, 이 모든 것은 극일을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며 이는 바로 박정희 시대에 이룩된 것들이며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에 힘입은 결과이다.

박정희는 지난 수천년 간 이 한반도에는 전혀 없던 새로운 산업과 경제를 창조한 것이며 이야 말로 극일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박정희의 공로는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며 한반도에는 전혀 없던 경제를 창조했다고 말해야 그 공로에 근접하는 표현인 것이다.

[참고] 경제 개발의 공로는? 박정희 80, 국민 20
http://cafe.daum.net/great6070/bWD5/6

그런데 그렇게 극일을 위해 꼭 필요한 <실질적인> 일들을 해 낸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선동되는 국민들이 많은 게 작금 한국의 현실이니 그런 배은망덕한 짓들은 반드시 규탄받아야 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연재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관련 부분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기사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 박정희가 일본에 가서 한 언행들과 그 후에 빚어진 일본 인사들의 언행들을 두고 박정희가 마치 친일 행위자인 것처럼 묘사하고 1965년의 한일협정을 굴욕, 저자세, 졸속, 미숙성의 결과라고 말하는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기에 필자가 여기서 반론하는 것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은 굴욕, 저자세, 졸속, 미숙성의 결과가 아니라 영웅 박정희의 국익에 대한 철저한 손익 계산과 난세 전략(일본에 대한 허허실실 작전)에 의해 영도적으로 추진된 것이라고 필자는 반론하는 것이다. 해당 프레시안 기사의 제목과 전문 링크는 아래와 같다.

[링크]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소", 고개 숙인 박정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0552

그리고 반론을 위하여 먼저 해당 프레시안 기사의 내용 중 사실관계 부분들을 일부 요약하여 인용한다. 아래 1, 2, 3, 4, 5는 위에 링크한 프레시안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1. 박정희는 1961년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 들렀는데 그때 일본 외무성에 특별히 요청해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일본인 교장과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 일본인 교장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2. 박정희는 일본 도착 다음 날인 1961년 11월 12일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같은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이야기해서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이 놀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 박정희는 자신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일본식 교육이 가장 좋다"며 자꾸 일본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3. 박정희는 1961년 11월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일본 측 인사들 사이에선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4. 일본의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가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과는 서로 부자지간을 자인할 정도로 친한 사이",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당시 박정희와 박정희 정부는 '오노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잘못된 발언이다' 와 같은 일체의 항의나 언급도 하지 않았다.

5. 그리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후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주최한 연회에서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일본어로 "한국과 일본은 형제국" "일본은 형뻘이니 동생을 잘 돌봐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일본 관방 장관은 "이 씨가 일한 양국을 형제라고 했지만 사토 수상과 이 씨를 비교하면 부자지간 같은 나이 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용 끝)

그리고 프레시안 기사는 이상의 내용들을 근거로 박정희가 왜 그런 언행들을 했는지에 대한 까닭은 아예 살펴 보려 하지도 않은 채 박정희의 표면적인 언행들만을 근거로 그들이 미리 설정한 '박정희는 친일파'라는 결론에 따라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소", 고개 숙인 박정희> 라는 폄하조의 제목을 달아 박정희를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즉, 프레시안 기사는 박정희의 표면적인 언행들만을 근거로 한 인터뷰를 실어 박정희는 골수까지 친일파요 일본군국주의 찬양자이며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박정희에 대한 비난은 애국을 입으로만 하는 자들의 탁상공론식 헛소리거나 불순분자들의 교묘한 음해에 지나지 않는다.

일례로 구한말에는 애국자가 없었나? 선비가 없었나? 구한말에는 국가의 자존심과 안위를 걱정하고 말하는 애국자와 선비들이 없어서 나라가 망했나? 요는 국가의 자존심과 안위를 걱정하는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는 경제와 국방력이라는 <실질적인> 수단이 있어야 국가국민의 <실질적인> 생존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고 경제와 국방을 위해서는 돈과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돈과 과학기술이 없으면 국가의 자존심과 안전도 지킬 수 없으니 무엇보다 그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런 기본 원칙에 철저히 충실했던 애국자이자 영도자가 바로 박정희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애국을 입으로만 하는 자들이 백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박정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들은 박정희와는 애국의 DNA 자체가 다르거나 아니면 어떤 불순한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박정희를 음해하는 자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위에 나열한 언행들, 즉 일본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행을 하거나 일본 정객들의 '부자지간' 발언 등에 항의하지 않고 침묵한 이유는 바로 부국강병에 필요한 돈과 기술력을 일본에게서 얻기 위함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기술력을 겨냥한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박정희 자신의 민족주의 성향을 숨기고 일본으로부터 실익을 취하는 허허실실 작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 일본 관계에서 돈보다는 기술력을 겨냥했다는 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증명된다. 한국 경제 개발의 전 과정에서 일본의 기술력이 <보통 이상으로> 이전되고 이식된 것이니 이는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박정희의 대 일본 전략(허허실실 작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박정희는 한일협정을 단순한 한일간의 관계 개선이 아니라 한국이 일본의 장점과 기술력을 대거 배우고 흡수하는 계기로 만들려는 것이었고 바로 이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은 이승만, 장면 정부의 한일회담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가 5.16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한일회담을 개시한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일본통으로서 일본의 장점과 기술력을 잘 아는 박정희는 5.16 혁명의 성공 즉시 한일회담 개시를 지시한 것이다.

또 다시 망국의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이겨야 할 대상인 일본에게서 배우고 흡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였다.


▶ 한일협정(한 ·일 기본조약)의 금전적 내용

여기서 잠시 박정희 정부가 1965년에 체결한 한일협정(한 ·일 기본조약)의 금전적 내용을 간단히 짚어 보고 넘어 가자. 금전적 내용이라 함은 일제 침략기에 대한 한국의 대일청구권과 한일간의 경제협력이 종합적으로 타결된 것의 내용을 말하며 그 주요 내용을 두산백과에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재산청구권에 대해 일본이 무상(無償)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에 지불하고, 경제협력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 7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며,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두산백과)

그리고 무상으로 받은 3억 달러는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에 비하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나라는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던 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에게서 청구자금을 받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 정부들 중에서 오직 한국의 박정희 정부만이 그 청구 자금을 국가 대도약의 발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 실질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쌓은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말한 대로 애국을 입으로만 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력 도입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글 전반에서 말하고 있다. 한일협정이 허허실실이라는 박정희의 대일 전략 틀 안에서, 박정희가 마련한 분위기(일본 정치인들을 안심시키는 분위기) 안에서 체결된 것이기에 이후 한국은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보통 이상으로> 빼내어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일청구권, 배상금, 돈, 이런 말에만 경도되면 1965년 한일협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반드시 박정희의 허허실실 전략과 과학기술력 도입이란 것에도 주목해야만 하는 것이다.


▶ 한일협정 - 급한 건 한국이었지 일본이 아니었다.

프레시안 기사는 당시 한국의 6.25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경제가 크게 부흥해 있었던 일본이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경제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일본으로서는 이웃 나라인 한국에 진출하는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5년 10월 한국생산성본부와 일본경제조사협회가 '한일 경제 협력의 방향과 그 배경'이라는 공동 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걸 보면 핵심은 '후진 한국'과 일본은 수직적인 국제 분업 관계를 설정하고, 한국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노동 집약적 산업과 사양 산업을 한국에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공업, 중소기업을 한국에 많이 이전하고 기술 지도도 해주겠다는 것도 들어 있다. 어쨌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자본 진출을 포함해 경제 진출에서 어떤 구도를 갖고 있었는가, 또 얼마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굳이 그런 한일관계의 개선이 없더라도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나라였다. 당시 일본은 내수경제의 비중이 수출보다 훨씬 큰 나라였고 일본의 대외 무역에서도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게다가 인용문에 언급된 공동 조사 보고서는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된 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박정희 정부가 조성한 한일협정 타결의 분위기에 힘입은 면이 크지 한일협정에 대한 일본의 간절함의 결과가 아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물론 당시 한일협정 체결을 바라긴 했지만 그처럼 간절한 입장은 아니었고 하면 좋긴 하지만 안해도 그만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달랐다. 국가 부흥에 필요한 돈과 물자와 과학기술력이 거의 전무했던 한국이 그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들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에 있었기에 일본보다는 한국이 한일협정을 해야 할 필요가 더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다시 일제침략기와 같은 비참한 시기를 겪지 않으려면 일본의 협조가 꼭 필요한 아이러니의 시기였다.

물론 미국도 있었지만 거리가 훨씬 먼 미국으로부터 상시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에 필요한 대규모의 물자와 기술인력들을 수송하는 데에는 비용이 훨씬 크게 들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를 간파한 박정희가 5.16 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작업에 나섰고 그 결과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승만이나 장면 정부가 만약 한일협정을 체결했다면 그들은 상기한 한국의 더 아쉬운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과의 자존심 싸움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들이 체결한 한일협정은 단순히 한일 간의 관계 개선과 교류 재개의 차원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고, 따라서 박정희가 한 것처럼 일본의 과학기술력과 산업물자를 대규모로 흡수하는 차원에는 절대로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며 결국 바로 위 인용 글에 나타난 일본의 의도대로 한일간에는 수직적인 국제 분업 관계만 이룩되어 한국은 영원히 일본의 주변이자 하청으로만 머무는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는 어떻게 일본의 과학기술력과 물자를 대규모로 흡수할 수 있었는가? 그 것은 박정희가 당시 일본보다 더 아쉬운 한국의 처지를 잘 알고 표면적으로 일본 정치인들의 비위를 맞춰 주고 안심시키는 제스쳐를 취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일본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행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바로 이 장면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애국을 입으로만 하는 자들이며 그런 그들이 여태까지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비난해 온 것이다.

당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과학기술력을 크게 이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만약 박정희 정부가 뻣뻣한 자세로 민족주의를 그대로 드러내며 일본을 상대했다면 일본의 정치인들과 기업들이 과연 <보통 이상의> 기술 이전을 해 주었겠는가 말이다. 당시 국력이 거의전무했던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빼내려면 그들에게 숙이는 듯한 자세를 취해야 함이 국제 정글에서의 필수 전략이 아니던가.

즉, 1960년대 당시 박정희의 일본에 숙이는 듯한 언행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일본의 과학기술력과 물자를 보통 이상으로, 대규모로 빼내어 한국에 흡수하려면 일단 일본의 정치인들을 안심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우호적이라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겨야만 할 상대, 극일(克日)해야만 할 상대인 일본을 상대로 그들의 힘의 원천인 과학기술력을 빼내어 흡수하려면 그들을 일단 안심시켜야만 하는 게 당연한 전략이지 않은가. 박정희의 언행은 바로 그런 당연한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 여기서 간단한 논리학을 펼쳐 보자.

1. 일본은 한국이 철강, 국방산업 등과 같은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갖는 걸 가장 싫어했다.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일본이 실질적으로 싫어하는 게 바로 그런 것들이다.
2. 그런데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후 단 15년 동안에 그러한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한반도에 장착시켰다. 그 기술의 원천은 대부분 일본에게서 빼내어 흡수한 것이다.
3. 그러면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해 낸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 한일협정 체결 전 일본을 찬양하는 듯한 박정희의 언행은 친일 행위인가 애국을 위한 전략이었던가?

상식이 있는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답은 자명하지 않은가. 한입협정 체결 전 박정희의 대 일본 언행은 바로 실질을 중시하는 박정희의 <허허실실> 애국 전략이었다고 판정해야 정상적인 한국인인 것이다.


▶ 일본을 등쳐먹은 박정희 -- 일본은 왜 한국에 보통 이상의 기술이전을 해 주었는가?

물론 1960년대 당시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바랬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의 산업화를 도와주게끔 분위기를 조성한 건 사실이지만 문제는 도움의 수준이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정도까지 되기를 바란 것이지 중화학공업화를 필두로 한 강대국형 경제 건설은 바란 적이 없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애초에 미국과 일본이 염두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여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빼내어 흡수했으니 이는 거의 일본을 등쳐먹는 수준이었고 그 결과 결국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한국에 장착시켰다는 게 요점이고 이제 이런 주제에 관하여 학자들의 정식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포항제철의 건립도 박정희의 그런 전략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일본은 원래 농업 발전 등 다른 용도로 규정되어 있던 대일청구자금의 중화학공업 전용을 반대했는데 박태준이 이를 극복하고 결국 그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에 전용하게끔 일본 정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게 가능했던 것은 바로 박정희의 일본 정부 안심시키기 전략이 한일관계의 기저에 깔려 있었고 더불어 만주군관학교 연고자들 등 박정희의 일본내 인맥들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즉, 포항제철 건립의 실무적인 것들은 박태준이 수행했지만 이는 박정희가 미리 전략적으로 조성해 놓은 일본내 분위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국의 과학기술력의 중요한 부분들을 장차 경쟁국 내지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한국에 아무런 이유없이 이전시켜 줄 리는 없었고 이는 어떤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성사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분위기란 바로 한국 정부가 일본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한국의 실권자인 박정희가 일본을 배우려 하고 찬양하는 듯한 언행도 한다, 이런 류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정치인과 언론들이 바로 그런 박정희의 전략에 넘어가 경계심을 대폭 풀어 버린 것이다.

즉, 6,70년대 내내 일본이 설마 하면서도 그들의 기술력을 <보통 이상>으로 한국에 이전시켜 준 것은 바로 박정희의 일본 안심시키기 전략(허허실실 작전)과 일본내 인맥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며 이는 이승만이나 장면 정부는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오로지 실질에 투철한 실사구시형 인물인 박정희만이 국내의 반일 여론을 무시해 가면서 해낼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포항제철 건설 등은 장면 정부와 그 후계 정치 세력들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당시 한국이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흡수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미국에만 의존하거나 자체적으로만 과학기술을 배양했다면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따라서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누가 진짜 애국자인가? 한국에 극일을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내어 장착시킨 박정희가 진짜 애국자인가 아니면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장면 정부와 그 후계 정치세력들이 진짜 애국자인가? 당연히 박정희가 진짜 애국자이다. 애국은 실질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상식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사진에 나타난 박정희의 언행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 사진은 1961년 박정희가 일본 방문시 만찬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일본인 교장이었던 나구모를 만난 장면을 일본의 TV가 다큐로 방영한 걸 캡쳐한 것인데 민주팔이 등이 사진에 악의적인 낙서질을 해 놓았기에 원본을 구한 후에 이 글에 첨부하기로 한다.

지금까지는 그 사진이 주로 민주팔이들과 불순분자들에 의해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용도로 된 적이 많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 사진은 바로 조국인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기술력을 <대거> 빼내오기 위해 박정희가 일본의 정치인들을 안심시키는 전략(허허실실 작전)을 수행하는 장면으로 이해해야 맞는 것이다.

박정희가 1961년 11월 일본에 가서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난 자리에서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일본 정치인들을 안심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일본 측 인사들 사이에서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하는 건 박정희의 그런 전략이 처음부터 성공했다는 걸 의미한다.


▶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 박정희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지 말과 자존심만 앞세우다가는 나라가 또 다시 망하게 되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6,70년대의 세계와 동북아시아 상황도 정글이었다. 한반도가 요행히도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이기기는 했지만 스스로 힘을 갖추지 않는 이상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국제정세에 따라 언제 또 다시 외세의 침략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바로 가까이로는 북괴에 의해 적화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들(과학기술력, 각종 산업 물자 등)은 바로 일본에 있었다.

정글과도 같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실질적이고 가용한 수단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이겨야 할 대상인 일본에 있다는 걸 박정희는 간파했다. 그럼 박정희는 어떻게 움직여여만 했겠는가? 당시 그가 만약 자신의 민족주의를 그대로 드러내며 일본에 대해 뻣뻣한 자세로 일관했다면 일본 정치인과 언론의 경계심을 키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한국은 절대로 일본에게서 <보통 이상의> 과학기술력을 이전받지 못했을 것이며 그저 한국을 일본의 주변 하청기지 수준으로 만들 정도로만 이전받는 데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정글에서는 약자가 강자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강자가 약자를 경계하지 않게끔 안심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 당시 박정희의 대 일본 언행은 바로 그런 전략적 차원의 것이었던 것이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의 이야기를 보자. 한신은 한 때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는 상황에 처했지만 누구도 한신을 겁쟁이나 비겁자로 부르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


▶ 일본 정치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까지도 숨겨야 했던 박정희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으로 있을때 조선의 독립을 위한 모종의 첩보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로 보이며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별도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래에 기존의 글들을 몇 개 링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참고]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http://cafe.daum.net/great6070/cHdG/2

[참고]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며 부른 독립군가
http://cafe.daum.net/great6070/cHdG/1

여기서 포인트는 왜 박정희는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고 그 이유는 독자 여러분들이 이제 짐작하는 바와 같다. 바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게 자신의 명예는 드높일지 모르나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기술력과 산업물자들을 일본에게서 빼내오는 데에는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가 박정희>라는 이미지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랬다면 일본 사회에는 아마 박정희 정부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크게 형성되어 과학기술력과 산업물자 반출에도 큰 제한을 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책으로 쓴 저자의 증언을 보면 박정희가 처음에는 그런 책의 출판에 대해 긍정하고 인터뷰에도 응했다가 웬일인지 나중에는 책의 출판에 대해 크게 화내는 모양새를 냈다고 하는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갈등을 한 것이다. 조국의 부국강병을 최우선으로 한 박정희가 막상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이 적힌 책이 출판될 경우 벌어질 파장, 즉 자신의 대 일본 전략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잠시 갈등을 하다가 이내 결정을 한 것이다. 조국의 실질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기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사실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당시 박정희가 지닌 권력과 지위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없던 이야기라 할지라도 적당히 아름답게 꾸며내어 책으로 출판하여 퍼뜨릴 수 있었는데 그는 책이 출판되는 막판에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하고 그 결과 해당 책은 큰 빛을 보지 못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박정희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책의 출판에 대해 화를 내야 할 이유는 단 하나, 그 책에 나타난 <독립운동가 박정희>의 이미지가 일본의 정치인들을 경계시켜 일본의 과학기술력과 산업물자들을 한국으로 반출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해당 책의 출판에대해 화를 내어 그 책의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조국의 실질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마저 숨겼던 박정희. 이런 인물이 바로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인 것이다. 그러나 애국을 입으로만 하는 자들은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박정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당시 박정희의 언행은 한국내의 정치적인 입지에는 손해되는 일

그리고 또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박정희가 했다는 이런 발언은 어떻게든 새어 나가게 되어 있고 그러면 한국내 여론이 악화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손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박정희는 왜 그런 발언을 했겠는가? 그런 발언을 안하고 반일 발언으로 일관하는 게 당시 한국내의 여론에 부합하여 정권 안정에 도움이 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언에 대해 한국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음에도 박정희 정부는 일체의 변명이나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야 말로 그런 발언들이 애국의 차원에서 일본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적인 것이었다는 걸 말해 준다. 전략적으로 한 발언에 대해 일일이 변명하거나 해명하는 건 그 전략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인 일본의 오해와 경계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에 박정희 정부는 국내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변명이나 해명도 하지 않은 것이다.


▶ 박정희가 이승만의 평화선을 포기한 이유 -- 영도적 결단

민주팔이들과 불순분자들은 또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평화선을 포기한 것을 크게 문제삼는데 이 역시 졸자들이 대붕의 큰 뜻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나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평화선은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인데 우선 그 개요에 대해 위키백과에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경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1952년 2월 8일 이승만 정부는 동선을 설정한 주목적은 한·일 양국간의 평화유지에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를 "평화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화선의 설정목적은 해양분할이 국제적 경향이 됨에 따라 정당방위책으로 해안 어족(魚族)의 보호와 생물자원의 육성을 기하고, 특히 발달한 일본 어업활동으로부터 영세적인 한국어민을 보호하려는 데 있었으며, 국제관계상 합법적인 조치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인용 끝)

이승만, 장면 정부가 진행한 한일회담에서도 일본은 이 평화선 철폐를 계속 요구해 왔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부가 평화선을 포기한 것은 어차피 당시 한국이 평화선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한일 간의 관계 개선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그 게 아니라 하더라도 박정희에게 이 평화선 포기는 일본 정치인들을 안심시키고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빼내오는 것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중요한 카드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박정희는 당시 평화선을 끝까지 지키기보다는 그 것을 포기하고 대신 조국의 산업화와 부국강병에 반드시 필요한 일본의 과학기술을 빼내어 흡수하는 게 훨씬 중요하고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평화선을 포기한 것이다. 이승만이 설정한 평화선은 박정희의 대 일본 협상카드로 그 용도가 바뀌었고 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부국강병 기초를 닦은 역사적인 용도변경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정책이나 물건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역사적인 용도가 따로 생기는 경우도 있으니 이승만이 애국적으로 설정한 평화선은 그 용도가 변경되어 박정희 정부가 수행한 한일협정의 대 일본 카드 중 하나로 큰 역할을 한 것이니 참으로 절묘한 역사의 안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인들은 알아야 한다. 경제와 국방이 있어야 평화선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한국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뭐냐 하면 1960년대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과 국방력으로는 평화선을 끝까지 지키는 게 불가능했고 당시 한국보다 경제와 무력이 앞선 북괴에 의해 적화통일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다. 남한이 적화되면 미국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 평화선은 물론이요 독도에 대해서도 100프로 일본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이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나중에 따로 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아마 박정희도 그런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경제와 국방력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이 평화선을 끝까지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니 무엇보다도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통한 국방력 강화가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엄연한 조선의 영토였던 대마도도 경제와 국방력이 없으니까 일본에 빼앗긴 거 아니었나. 그래서 여기서 필자는 박정희가 그 때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말을 대신하여 말해 본다.

"국민 여러분, 경제와 국방이 있어야만 평화선도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경제와 국방 건설을 위해 평화선을 포기해야만 할 상황입니다. 경제와 국방 건설을 위한 과학기술, 산업물자 등 주요 수단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있고 한국은 이를 얻어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이러한 평화선 포기의 진짜 이유에 대해 국민들에게 설명해서는 안되고 그냥 침묵하는 게 최선인 시기였다. 단순히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당시 한국인들 중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흡수하기 위한 부국강병 차원의 전략 때문"이라고 그 진짜 이유를 말해 버리면 일본의 정치인들이 당장 경계심을 가지게 됨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화선 포기 등의 이유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니, 당시 박정희 정부가 국민들에게 평화선 포기와 한일협정에 대해 제대로 된 상황설명을 안해 준 걸 잘못이요 졸속이라고 지적하는 프레시안 기사의 인터뷰 내용은 대붕의 큰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미 5.16 혁명 전부터 평화선 포기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린 듯 하다. 무릇 박정희 같은 혁명가는 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중요한 제반 정책 구상을 해 놓기 마련이며 예컨대 박정희는 5.16 혁명 전부터 이미 평화선 포기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린 듯 하고 이는 프레시안 기사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말하고 있는데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예컨대 평화선 포기 이야기가 정권 초기부터 나온다고 돼 있다. 5.16쿠데타가 나고 불과 얼마 안 됐을 때인 1961년 7월 초 동남아 지역 친선 사절단장으로 최덕신 중장이 출국했다. 그런데 7월 22일, 이 사람은 대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 정부가 '평화선 철폐를 고려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 사람은 10월에 외무부 장관이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외무부 장관 쪽으로 간다는 걸 생각할 수 있던 사람인데, 이런 발언을 한 것도 참 문제다."

이렇게 프레시안 기사의 인터뷰는 저러한 최덕신의 행보에 대해 어떤 문제아의 문제 발언이라고 지적하지만 이는 세상 모르는 자들의 입방아에 지나지 않는다. 최덕신의 행보는 상대인 일본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어 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이미 내린 박정희의 의중이 정확하게 담긴 것이었고 이는 최덕신이 그 해 10월에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증명해 준다. (외무부 장관은 일본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자리다.) 즉, 박정희의 평화선 포기는 사전에 철저한 손익 계산을 거쳐 박정희가 미리 <영도적인 결정>을 해 놓은 것이고 이를 최덕신 등이 언행으로 옮긴 것이다.

참고로 1965년 한일협정의 결과로 한국이 평화선을 포기하고 새로 일본과 맺은 어업에 관한 협정의 주요 내용을 위키백과에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서 12해리까지는 자국의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2. 한국의 관할 수역 밖의 주변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고, 이 수역에서는 주요 어업의 어선규모·어로기(漁撈期)·최고 출어 어선수·집어등(集魚燈)의 광도(光度)·총어획 기준량 등이 규제된다.
3. 공동규제수역 외연(外延)인 동경 132˚ 서쪽으로부터 북위 30˚ 이북에 공동자원조사수역을 설치한다.
4. 한·일어업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어업자원의 과학적인 조사, 규제조치의 권고를 한다.
5. 한국측은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일본측은 대일본수산회의 두 나라 민간단체로 한·일 민간어업협의회를 설치하여 조업질서의 유지와 사고처리에 관한 결정과 실무처리를 담당한다.

이 어업협정은 1998년 1월에 일본 정부에 의해 일방 파기 통보되었으며 양국은 이후 새로운 교섭을 통해 신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에 타결시켰다. (인용 끝)

참고로 1998년 9월은 김대중 정권 때인데 왜 그 때 갑자기 일본 정부가 기존의 어업협정을 일방 파기했는지에 대한 기가 찬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검색을 통해 알아보기 바란다.


▶ 박정희의 마지노선은 독도 -- 독도를 지켜낸 빅정희 -- 평화선은 내주었지만 독도는 지켰다.

민주팔이들과 불순분자들은 박정희가 독도를 일본에 넘겨 주었다고 온갖 음해와 모략을 자행해 왔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는 독도를 지켜냈고 오히려 김대중과 같은 민주팔이 정권들이 독도를 일본에 넘겨주다시피한 게 역사적 진실이다.

어떤 주권국가에게 평화선과 같은 해상의 분계선과 독도와 같은 육상 영토는 그 의미와 우선순위가 확연히 다르다, 해상의 분계선은 어디까지나 반영구적인 육상의 영토에 기반하여 그 것을 기점으로 어떤 거리를 설정하여 선포하는 것이고 이는 인접 국가간의 협상에 따라 수시로 변동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비록 평화선은 일본에 내주었지만 독도만큼은 마지노선으로 여겨 확실하게 지켜낸 것이다. 이승만의 평화선은 그 동쪽 경계선이 독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독도를 지켜내면 평화선과 같은 해상 분계선은 언제든지 나라의 힘이 커지면 되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독도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은 아래 인용으로 대신한다.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습니다. 1965. 5.17,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東素河)

그리고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으로 ‘독도사수’ 운동을 벌여온 호사카 유지(사진. ほさかゆうじ) 세종대 교수가 2011년 6월에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일협정’ 관련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과 의견을 동년 7월의 라이트뉴스(http://rightnews.kr) 기사에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한일협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의 의제에서 제외하라'고 도쿄에 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면서 '본건은 한국 정부의 안정과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므로 만약에 한국 측이 수락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일회담을 중지해도 좋다'고 말했다."

"한국 (박정희) 정부의 이런 단호한 방침에 일본 정부가 양보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겠다는 안을 거두어들였고, 독도 명칭을 교환공문에서 삭제했으며, 한국 측이 제시한 구속력이 없는 ‘조정’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최종안이 마련되었다."

"내 발표문의 취지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만큼은 처리를 잘했고 이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사실상 독도를 포기했다는 것"

"1965년도의 환경 속에서 박정희는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를 포기하게 만든 게 사실"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실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이른 바 <독도 밀약>이란 것은 민주팔이들과 불순분자들의 허위날조임을 아래 인용에서 알 수 있다.

"정부가 26일 전면 공개한 3만 5354쪽의 한일협정 문서는 지난 40년간 줄기차게 제기돼 온 ‘굴욕외교’ 시비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독도를 팔아 6억달러를 챙겼다'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 전권을 행사했고, 밀약이 있다'는 무수한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햇볕 아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들도 '한일협정이 굴욕외교라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서울신문, 2005-08-27)

"일본 정부는 한일 양국간 독도 영유권 주장을 놓고 상대국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하는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을 부인했습니다. 일본은 각의에서 이같은 주장을 제기한 한국 잡지의 보도에 대해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이 없다는 공식 견해를 채택했습니다. 또 영유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외교노력을 하는 입장에서 이에 반하는 약속을 양국간에 비밀리에 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MBN뉴스, 2007-03-30)

참고로 박정희가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승만의 평화선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되짚어 봐야 한다. 이승만이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평화선이라는 것이 1960년대의 한일회담에서 중요한 선결카드로 미리 설정되어 있었기에 박정희 정부는 이를 희생양이자 카드로 활용하여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 대해 "평화선을 내주었는데 독도까지 달라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 라는 식의 논리와 명분을 구성하거나 인지한 상태에서 회담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평화선은 당시 어차피 지킬 수 없었던 상황)

국제 간의 협상에서는 카드라는 게 중요하다. 어느 일방이 중요한 카드 하나를 양보했는데 그 위에다가 또 다른 중요한 하나를 양보하라고 말하는 건 명분을 잃는 일이 되기 쉬운 게 국제 간의 협상이고 1960년대에 평화선과 독도를 둘러 싼 한국과 일본 간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으며 평화선을 양보받은 일본은 비록 독도까지 내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런 요구를 끝까지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평화선은 <한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한일협정을 타결하고 독도까지 지켜내는 일>의 밑거름으로 그 역사적인 용도가 변경된 것이다. 이야 말로 역사의 안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체결한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는 독도가 분명히 한국의 배타적인 수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본은 갑자기 1998년 1월에 이 내용을 파기해 버렸으며 이를 계기로 김대중 정권이 일본과 새로 체결한 신어업협정에는 독도가 배타적인 수역이 아닌 일본과의 중간수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게 국민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는 김대중 정권이 어떤 이유로 독도를 일본에 반 쯤 팔아먹은 것이라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 왜 일본은 갑자기 1998년 1월에 기존의 어업협정을 파기해 버렸을까? 말한 대로 이에 관한 기가 찬 이야기들이 애국 국민들 사이에 회자되어 오고 있으며 그 것은 바로 김대중에 관한 이야기다.


▶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을 앞당긴 것이다. 장면 정부라면 크게 늦어졌을 것.

상기한 대로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은 박정희의 대 일본 전략(허허실실 작전)의 기조 위에서 체결된 것이라 대한민국의 도약에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과학기술력과 산업물자들이 박정희가 수립한 전략의 기조에 따라 <보통 이상>으로 한국에 유입되어 경제의 저변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중요한 한일협정 체결은 장면 정부였다면 국민의 반일 감정에 밀려 눈치만 보며 질질 끌다가 1960년대 내에는 체결하지 못할 게 뻔했다. 가장 큰 <평화선> 문제가 걸려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국민들의 대 일본 감정과 정서를 장면 정부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평화선 포기를 비난하는 프레시안 기사의 인터뷰가 장면 정부였다면 한일협정을 더 빨리 체결할 수 있었을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모순이다. 말한 대로 장면 정부가 평화선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일회담은 14년만에 타결된 것이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에서 9년간이나 협상했지만 타결되지 않은 건 바로 국민의 대일 감정과 정서가 큰 요인이었는데 이승만이나 장면이나 모두 그런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정부가 아니었으니 설사 5.16 혁명 없이 장면 정부가 계속 한일회담을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타결이 불가능한 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본 건 바로 박정희가 국익에 해로운 국민의 다듬어지지 않은 반일 감정과 정서를 강력하게 억누르고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한일협정 체결이 늦어졌다면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그 의미가 크게 줄어들고 만다.

돈이란 것은 비록 적더라도 적절하고 필요한 때에, 제 때에 있으면 그 효용이 높아지는데 비해 아무리 큰 돈이라도 그 시기를 놓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경우가 많고 당시 한국의 대일청구금액이 바로

댓글목록

새역사창조님의 댓글

새역사창조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빨갱이소탕님의 댓글

빨갱이소탕 작성일

긴 자료 감동적으로 잘 보았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영도자 박정희
그를 누가 쿠데타 장본인으로 지목하는가
혁명가요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
박정희!!!

자유게시판 목록

Total 34,888건 10 페이지
자유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34618 종북 쇼를 멈추게 한 거룩한 분노 댓글(2) 몽블랑 2014-12-12 4581 59
34617 무슨 일이 터질까, 누가 다칠까.... 경기병 2014-12-07 4580 29
34616 문재인 빨갱이는 절대로 안된다 댓글(6) 박달재 2015-02-10 4562 29
34615 올 해, 오늘 첫 마수걸이! ^ )^ 댓글(6) inf247661 2016-01-01 4550 47
34614 [역사전쟁] 김정일, 재일교포 10대 무용수에게 마음을… 기재 2015-09-27 4549 53
34613 김진-논설위원의 논리적 파괴력에 갈채. 댓글(2) 湖島 2014-12-08 4545 42
34612 배나TV에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대해 언급함 조고아제 2015-11-28 4543 46
34611 어버이연합도 새누리당 지지를 접었습니다 댓글(4) 만세반석 2014-12-06 4542 15
34610 어리석은 관객과 교활한 연출가 댓글(1) 몽블랑 2014-12-05 4540 16
34609 조응천 전 비서관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댓글(2) melakong 2014-12-12 4526 48
열람중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 -- 박정희의 위대함을 보여… 댓글(2) 유람가세 2015-03-29 4521 22
34607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김용희의 출생지는 댓글(3) 이재진 2014-12-11 4519 32
34606 반역 정치사제 부산교구 조욱종 신부 퇴출운동을 시작합니… 댓글(1) 김찬수 2015-09-25 4517 49
34605   댓글(1) 북진 2014-12-07 4514 24
34604 안정권대표, 10년묵은 체증을 뚫어주다 댓글(11) 현우 2019-01-07 4512 133
34603 통진당 해산을 대하는 국민의 입장! 댓글(1) 청만 2014-12-17 4509 29
34602 노숙자담요님! 광수 오류 발견됨! 댓글(5) 소어리 2015-07-28 4502 25
34601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댓글(5) 발해의꿈 2014-12-09 4498 13
34600 여기 요즘 박근혜를 두고 서로 치고 받고하는 것을 보고… 댓글(3) 만세반석 2014-12-03 4496 55
34599 네 목아지나 개작두로 쳐 삐랏! 댓글(3) 海眼 2014-12-18 4490 69
34598 황선과 신은미는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댓글(1) 청원 2014-12-06 4482 20
34597 멘붕... 기상천외한 대통령의 동문서답 댓글(2) 경기병 2014-12-08 4481 69
34596 쥑여버려서, 完全 滅種시켜야! ,,. 댓글(1) inf247661 2015-01-25 4480 12
34595 '公務員 勞組'롬들을 强制 解散시킴이 火急타!! ,,.… 댓글(1) inf247661 2014-12-15 4478 20
34594 "땅굴전쟁과 예방책" : 한성주 장군 운선 2014-12-20 4475 31
34593 칠푼이 김영삼이가 남긴 불후의 명언 한 마디 댓글(2) 경기병 2015-01-19 4474 25
34592 박근혜와 김정은 대화 댓글(2) 만세반석 2015-01-20 4462 29
34591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좋았던 것들, 모두 부활시켜야 댓글(1) 야기분조타 2017-12-31 4457 17
34590 요사이 지진의 수상한점 댓글(1) 좌익도륙 2014-12-12 4456 33
34589 북한에서 중요하게 보는 도시는 역시 절라광주 ! 댓글(4) Long 2015-10-27 4449 40
게시물 검색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대표자 : 지만원 | Tel : 02-595-2563 | Fax : 02-595-2594
E-mail : j-m-y8282@hanmail.net / jmw327@gmail.com
Copyright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All rights reserved.  [ 관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