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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만 파월용사들이어, 반역자 김대중을 응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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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8 19:58 조회6,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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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만 파월용사들이어, 반역자 김대중을 응징하자

33만 파월용사, 500만 가족들이어, 국가 반역자를 응징하자


2001. 8. 23일, DJ가 베트남 주석에게“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
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
니라 한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등 용공 세력들의 "아!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
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대통령이 주월한국군을 공산화 민족해방전쟁에 끼어든 반역군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파월장병은 물론 온 국민이 규탄해야 할 천인공노할 "반역"이
다.


<참전용사들의 11개 입장>

1. 파죽지세의 공산화 도미노 파고에서 월남이 무너지면 한국이 무너질 차례였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2. 미국은 6.25로부터 한국을 지키는데 5만의 목숨을 잃었다. 이에 보은하지 않는 것은 인간
의 도리가 아니었다.

3. 참전은 자유수호 및 국제 보은을 위한 공명정대하고 자랑스러운 선택이었다.

4. 공산세력과 싸운 것이 왜 사과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5. 대통령의 사과는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6. 전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얻은 명예를 후임 대통령이 짓밟
는다면 누가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는가.

7. 김대중 대통령은 33만 파월용사와 500만 가족들의 자긍심과 추억을 송두리 채 짓밟았다.
우리는 이제까지 부끄러운 삶을 살았단 말인가.

8.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친 행동이 부끄러운 행동이란 말인가.

9. 비전향 장기수 63명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영웅으로 대접해주면서 국가를 위해 싸운 우
리는 쥐어 박히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10. 고려연방제를 표방하는 "8.15 민족통일대축전’과 노동당창건기념행사에 대대적인 축하
단을 보내고, 사상이 불순한 임동원에게는 지극한 애정을 보이는 대통령이 파월한국군을 죄
인으로 모는 것은 이적-반역 행위다..

11. 전업적 데모 주동자들을 민주화 투사, 국가 유공자로 추켜 올리고 1억원씩의 보상을 해
주면서 국가의 부름에 응해 목숨 바친 "국가 정규군"을 괄시하는 대통령은 이미 한국 대통
령이 아니라 국가 반역자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의 11개 항에서 무엇이 잘못된 항목인지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과 같은 입장을 숙독하고 대통령 김대중과 투쟁해야 한다.


<1. 파병의 당위성>

1954년7월29일 제네바에서 월맹과 프랑스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베트남에서는 호지
명이 조직한 게릴라 즉 베트콩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서있는 월남군간에 비정규전이 점점
더 확산돼 가고 있었다. 소련과 중공은 베트남, 한반도,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적인 공산화 팽창정책을 벌였고, 호지명 역시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GNP는 남한의 1.7배였다. 북한은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노골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1961년7월 중공과 북한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에
는 소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은 인도네시아 방문연설에서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어서 1964년 초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 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
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
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
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
다.

안보만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암담했다.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
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였다. 원조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
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구호물자를 받아먹으면서도 봄에는 나무껍
질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
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대기업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돈을 붓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통
이었다. 오늘의 현상과 꼭 같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
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
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
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
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
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율,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회는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당시 박대통령의 마음은 오직 경
제와 안보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월남전은 기회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1961년11월 중
순 케네디 미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 파월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앞을 내다보는 그의 혜안
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파월 제안을 그가 먼저 한
것이다.

당시는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주한미군을 잡아 두고, 경제 성장을 위한 원조를
늘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파병하는 길밖에 없었다. 한국은 미국과 월남 정부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파병 요청을 받았다. 미국은 6.25때 피를 흘리면서 한국을 구출해 주었는데, 그
미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거부한다는 것은 의리에도 어긋나지
만 어려움을 당할 때 미국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한국군의 파병으로 주한미군은 "인계철선" 역할을 떠맡게 됐다. 미국에 의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 미국이 요구하기도 전에 미국의 바둑판을 읽어주고 훈수를 두며 미국의 힘을 우리
에게 유리하게 이용한 것은 박대통령의 혜안과 능동적인 결단의 결과라고 본다.

<2. 파월이 없었으면 한강의 기적도 자주국방도 없었다>

당시까지 한국은 남에게 기대어 살고 수난을 받아오던 피압박민족이었다. "조센진은 할 수
없어"라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고, 무기력과 자학이 온 사회를 지배했다. 한국군 역시
미군이 주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소위 봉급이 겨우 18달러, 하숙비를 주고 나면 여유가 없
었다.

월남 참전은 국가의 지위를 부끄럽던 "피압박민족"에서 일약 "남을 도울 수 있는 원정력을
갖춘 나라"로 웅비케 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적 혁명을 이룩해
냄으로써 세계가 부러워하는 근면한 나라, 기적을 이룩한 나라로 변신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의 세계적으로 가장 컸던 이슈는 단연 월남전이었고, 월남전의 백미는 단연 한국군의 활약
상이었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대게릴라전법, 대민 심리전, 용맹성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당시 한국 국민은 멸시했던 런던타임스 지는 66년 5
월29일 자에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 미군이 한국군의 전술을 채택했더라면 벌써 승
리로 끝냈을 것"이라는 극찬을 했다.

지금은 IMF가 돈줄을 쥐고 있지만 당시에는 서방 11개국 금융클럽이 쥐고 있었다. 불과 10
억 달러 외자도입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그들이 1966년 가을 서울을 찾았다. "월남전
을 보니까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더라"며 대한국경제협력단을 만들어 67'-71'년간에 27
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해외에 나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주월한국군의 선풍적
인 인기로 인해 한국인들은 폭발적으로 미국, 호주, 남미, 유럽, 동남아 등지에 진출하게 됐
다. 1963년 가을에 박대통령은 "경제를 자력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기적일 뿐"이라고 고민했
다. 그러나 파병 이후 그런 고민은 말끔히 없어졌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몇 년만의 변화
를 보자.

1960-1963년간 원조는 연평균 1억8,000만 달러였다. 1964년에는 1억 2,400만 달러로 축소 됐
다. 1967년부터는 완전 중단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이 암울하기만 했다.
이렇게 축소와 중단으로 내달리던 원조액은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 이뤄진 1966년도부터
1971년 5개년간 연평균 5억500만 달러로 증가됐다. 월남전이 끝나기도 전에 한국경제는 연
평균 12%의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1972년부터 8개년간 제1차 율곡사업이 추진됐다. GNP의 6%를 국방비로 쓴다는 원칙 하에
세운 8년간의 율곡 예산은 15억3,0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경제 성장으로 인
해 81년도에 결산을 해보니, 8년간의 실 집행사업비는 60억3,000만 달러였다. 미국 교수들은
한강의 기적을 당대 최고의 모범사례로 꼽았다.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
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973년도에
는 10억2,120 달러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얻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
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
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
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1997년에는 남한이 12.8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
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
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
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
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
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
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9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
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
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졌
다.

당시 한국군의 실정을 보자. 한국군 유지비의 70%가 군원으로 충당 됐다. 군간부들은 한편
으로는 박봉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루한 군사문화에 숨 막혀 했다. 소위의 국내 봉
급은 겨우 5,350월, 소득세 등을 제하고 나면 실수령액이 4,596원이었다. 환율은 1달러 당
255원이었다. 불과 18불이었다.

고급장교들은 시각이 좁아 공연히 부하 간부들을 괴롭혔고, 비전 없는 군 생활에 하급장교
들의 불만은 포화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장교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회
가 생겼다. 파병해서 죽고 사는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당시 소위의 전투수당은 152달러였지만 32달러는 정부가 가져가고 120달러만 주었다. 그래
도 국내봉급까지 합치면 월수입은 7.6배로 향상됐다. 파월 장병들의 사회적 인기는 대단했
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
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며 북받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
렸고, 연예인, 주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행진하는 파월 장병들에게 꽃다발을 걸어 주었
다. 종로 통의 거리와 빌딩 속 창가에는 환송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최고의 인기였다.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대한 뉴스의 앞머리는 거의가 다 파월 장병의 업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감격은 파월 장병의 가슴에 가장 아름답고 신났던 추억으로 살아 숨쉬
고 있다. 파월로 인한 가시적인 성과는 엄청나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은 군의 현대
적 사고 방식과 행정현대화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훈련하고, 국제 매너에 익숙해지게
됨으로 써 군사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됐다. 이는 해외 유학보다 더 큰 기회였다.

한국군은 실전경험 특히 북한의 최고 위협이 되고 있는 비정규전 능력을 쌓게 되었고, 초
현대무기에 대한 개념을 터득했으며, 연합작전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오랜 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피압박민족에 배어있던 무기력함과 자조적 열등감을 극
복하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이 있게 된 것
이다.

월남전을 계기로 한.미 안보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1961-65년, 5년간의 군사원
조 총액은 8억1,500만 달러였다. 하지만 1968-72, 5년간에는 22억8,700만 달러로 껑충 뛰 었
다. 신예구축함 2대, M-16소총 국산화 지원, 유도무기 지원, 각종 방위산업 기술 이전, 파월
군 전체의 신무기 무장, 3개 향토사단의 정규 사단화, 17개 육군사단 및 1개 해병사 단의 장
비 현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무기 및 방위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원동
력이 되었다.

1964년까지도 구호물자를 배급받던 신세에서 불과 4-5년만에 우리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게
됐고, 웅크리던 자세를 탈피해 해외진출에도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으며, 불과 8년 만
에 우리의 돈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그 외에도 외교 역량
의 증대 및 한미 안보 관계의 강화는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엄청난 도약을 가져다주었
다. 막연히 돕겠다던 느슨한 협력관계가 "인계철선"과 "핵우산"이라는 구체적인 협력관계로
전환됐다.

<3. 파월 한국군에 대한 국민적 평가>

육군3사관학교부설 충성대 연구소는 1999년에 1,000명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69.1%가 파병된 한국군을 좋게 평가했고, 좋지 않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8%
로 나타났다.

파병이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85.8%가 기여했다고 대답했고, 불과 4.8%만이 저
해됐다고 답했다. 88.1%가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고 답했고, 2.4%만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도 연령에 따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
에서는 89.0%가, 40-50대에서는 94.6%가, 20-30대에서는 60.7%가,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
한 것으로 평가했다.

위 연구소가 265명의 참전 용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다시 참전하라면 하겠느냐는 질문에
장교의 81.2%, 하사관의 83.3%, 병사의 59,7%가 재 참전 의사를 밝혔다. 파월 장병의 모습
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69.1%, 파병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76.4%였다.

베트남 참전은 조국근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파월 한국군의 성과에 대한 결산서가 제공된 적이 없다. 이는 국가발전의 최고 수훈자들인
파월 장병들의 노고를 묻어버리는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파월 한국군을 학살집단이요 용병으로 매도하는 집단이 있다. 33
세의 여성 특파원 구수정씨를 중심으로 모인 희한한 집단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국가 소용
사태에 관련돼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21, 동국대 강정구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등이 구수정 여인을 추종하면서 베
트남 양민 학살론을 창조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을 격하시키고, 32만 파월 장병
및 500만 파월 가족의 명예는 물론 한국군 전체의 위상과 명예를 격하시키는 음모다.

1999년 9월2일자 한겨레21 273호가 주월 한국군을 20세기의 광기와 야만 그리고 용병으로
정의했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
군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호주군, 뉴질랜드군, 대만군, 필리핀군, 태국군, 영국군을 반
역군으로 정의했다. 정확히 공산주의 로선이다.

구수정이라는 여성 통신원이 이끄는 폭로 기사는 1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젖먹이까지 죽
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2000년3월2일 한겨레 297호에 "베트콩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다는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학살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수
준에서 대거 이뤄졌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농부, 농민, 임산부, 수님, 아내, 어린 자식
등 무장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량 학살됐다.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불러보아 음식을 나눠줘 안심을 시킨 뒤, 집단사실
을 자행하는 것이었으며, 교전 중에 사실된 것이 아니라 작전과는 무관한 마을이 통채로
학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계의 깡패국가인 미국의 오만이 원천적으로 양민학살
을 잉태했던 것 같다".

이어서 한국군의 양민학살 유형을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강
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아이들의 머리 깨트리기, 목자르기, 사지절단후 불에 던지기, 돌
아가며 강간한 후 죽이기,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 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기, 마을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로 질식하기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월남 주민에게 한국군 따이한은 친절과 구원의 따뜻한 손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런데 28년이 지난 이 시기에, 베트남 사람들도 들추려 하지 않는 주제, 국익에 역행하는
주제를 왜 하필 이들 세력이 제기하고 나서는가?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면 수많은 미해결의 문제들 중에서 왜 하필 파월장병이어야
하며, 그렇다 해도 왜 하필 이 시기이어야 하는가? 주한미군, 박정희 대통령, 한국군을 증
오하고 격하시키면서 모종의 작전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오 이러한 붉은 집단의
괴수가 김대중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


200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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