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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패망 35주년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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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덴삼촌 작성일10-05-19 14:06 조회6,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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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평화와 번영 구가한 南베트남(越南)

                                             이대용 /  전 주 월남공사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정치이념을 달리하는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공산블럭과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서구블럭의 세력각축에 의하여 분단된 나라는 패전국 독일과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와 베트남이었다.

<武力 流血 통일이냐, 平和 無血 통일이냐>

이 세 나라중 역사와 문화를 비교해 볼 때 독일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여러가지 현저한 차이가 있으나,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꼭 닮은 일란성 쌍둥이 같은 유사성이 있다.
이 세 나라의 분단국가 중, 베트남은 분단 30년 만에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달성했다. 독일은 동독이 내부적으로 스스로 무너지면서 무혈 쿠데타로 공산당 제1서기 호네커가 추방되고 에곤 크렌츠가 집권한 후, 서독에게 무조건 흡수병합의 정책을 관철시켜 분단 45년 만에 평화통일을 달성했다.
이렇듯 정치이념을 달리하는 분단국가가 통일을 이루는 패턴은 무력유혈통일과 평화무혈통일의 두 가지의 패턴중 어느 하나로 이루어 진다.
세개 분단국가 중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65년간 남북 적대관계로, 막강한 무장세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필연적으로 남북통일을 언제인가는 이루게 될 것이며, 이때 무력유혈통일이냐 아니면 평화무혈통일이냐의 택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닮은 두 나라, 한국과 베트남>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중국대륙에 陸續육속된 주변 국가이다. 베트남이 국가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 후 중국세력이 팽창하면 朝貢조공을 바치고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이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유지하면서 현대까지 이어 내려온 것도 두 나라는 유사하다.
고대로부터 두 나라는 漢文한문을 사용했으며, 吏讀이두를 만들어 사용한 것도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한굴을 창제했고 베트남은 자기나라 글을 창제하지 못했다.
1884년 프랑스 식민지가 된후, 베트남에 와 있는 프랑스 카톨릭 신부들이 한문이 어려워서 배우지 않고, 베트남인들의 이름을 프랑스 알파벳으로 표기하다가 프랑스 알파벳으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은 글자 밑에 점을 찍던가, 글자 위에다 특이한 표시를 하여 이를 사용하다가 이것이 점점 개량되어 완전히 베트남어를 표기할 수 있게되자 1919년 이를 베트남국어 문자로 공포한 것이 오늘 베트남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문자이다.
전세계에서 科擧과거제도로 관료를 선발하는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대표적 표본이다. 중국의 주변국에서 민족이 소멸당하지 않고 생존한 약소국이라는 것도 같다.

<이긴 전쟁을 패배케 한미국내 반전운동, 반전여론>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번 성립된 王朝왕조는 그 수명이 우리나라는 약 500년인데 비해 베트남은 약 11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이것은 베트남민족이 우리민족보다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8Å15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지고 양측이 동족상쟁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으로 보인다.
지역감정이 드센 것, 식민지 잔재 청산문제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세력간의 끝없는 分派분파와 이합집산, 그리고 政爭정쟁을 벌이는것 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두 나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것까지 비슷하다.
1965년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남베트남군측의 통제지역은 확장되고 있었다. 이를 통계표로 기록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1972년 말에는 공산군측 통제인구는 약4.5%의 극소수였고, 남베트남정부군측 통제인구수는 90.4%로 압도적이었다. 즉 전세는 공산군측의 결정적 패배로 끝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내에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여론이 거세지고 있었다. 특히 대학생들과 일부 연예인들,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반전활동은 요원의 불길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영화배우 제인 폰다는 북베트남에 가서 철모를 쓰고 북베트남 공산군 사병들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으며, 󰡒우리 미국 공군 조종사들은 직업적 살인자들이에요󰡓하면서 주베트남 미군 철수를 주장하기도 했다.
1968년 5월 10일 미국정부는 북베트남을 상대로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했다.
1969년 1월 15일 남베트남 대표단과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후에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대표단도 파리평화협정에 참가함으로써 4자회담으로 확대되었다. 4년 8개월간 지루하게 끌던 파리평화회담은 1973년 1월 27일 평화협정에 합의하고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4+4+4=12개국 담보의 파리 베트남평화협정 문서>

미국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국제휴전감사위원단을 파견하는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 북베트남공산군 장병 150명의 연락단을 사이공에 있는 국제휴전감시위원단 본부에 파견하여 감시 기능을 도와주게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人質인질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의 키신저는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의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평화협정은 4+4+4=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국제서명문서였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북베트남공산측이 파리평화협정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첫째, 북베트남공산측이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하고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할 때에는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즉각 자동개입하여 北爆북폭을 감행하고, 남베트남군을 공중지원하는 방위공약을 남베트남과 맺었다.
둘째,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을 성실히 이행하는 조건으로 미화 40억달러(20억달러는 미국이 직접 무상원조, 20억달러는 세계은행이 장기저리 차관)의 전후복구 및 경제개발 원조를 북베트남에 제공하는 약속을 했다.
셋째, 주베트남미군 철수때 그들의 첨단무기들을 남베트남군에 이양, 남베트남은 총병력 125만명(정규군 58만명, 지방군 52만명, 전투경찰 15만명)을 유지케 했다. 이는 북베트남공산군 총병력보다 많은 병력이었다. 남베트남공군은 세계 제4위였다.
넷째, 국제휴전감시위원단 본부인원 250명의 본부를 사이공에 두고, 북베트남 하노이에 지부를 설치하고 남Å북베트남 주요도시 및 군사기지에 여러개의 감시조를 두어 감시단 총인원 1,650명이 남Å북 전지역에 걸쳐 평화협정 이행을 감시하도록 했다.

<청맹과니가 된 南베트남 정보기관 티우 대통령 비서관도 공산프락치>

다섯째, 사이공에 체류하는 북베트남공산군 연락단은 일종의 인질이기도 했다. 파리평화협정에 의하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은 앞으로 무력을 사용해서 남북통일을 하는것은 절대로 안되며 우선 제1단계로서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는 평화적 선거에 의하여 통합되고 그후 베트남공화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도 상호협의하에 평화적 선거를 통하여 남북통일을 달성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故고 고딘엠대통령 치하의 제1공화국 대공정보기관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공산프락치들이 남베트남 각계각층에 침투하기가 힘들었고, 또 그전에 이미 침투해 있던 공산프락치들은 많이 검거되어 그 뿌리가 거의 뽑혀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대공전문가들은 쫓겨나고, 그후에도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정보기관 전문가들의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남베트남 대공정보기관은 만신창이가 되어 드디어는 形骸형해만 남게 되었다. 이리하여 1970년대에는 간첩 하나 제대로 못잡는 무능한 부서로 전락해 있었다.
공산핵심정보원들은 민주투사, 또는 성실한 애국자를 가장하고 정부 각계각층 및 사회단체, 특히 종교계에 침투하여 정보수집활동, 선동활동을 교묘히 하고 있었다. 사이공에 있는 군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에서의 비밀회의 내용도 그 다음날이면 침투되어 있는 공산프락치들에 의해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있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 땅굴청사에 보고되었다. 남베트남대공정보기관은 이에 대하여 눈뜬 장님이었다. 심지어 티우대통령의 비서관 흰 반쫑도 공산프락치였다.
깨끗했던 제1공화국이 쓰러지자, 남베트남의 고질적인 4대 惡악(뇌물, 도박, 마약, 매춘)은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와 맞물리면서 전국에 전염병처럼 만연하고 있었다. 특히 뇌물이 극성을 부렸다.
민선 티우대통령의 제2공화국은 청렴결백한 부통령 짠 반 후옹을 앞장세워 부정부패척결위원회를 구성하여 최초에는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었으나 날이 감에 따라 후옹 부통령등 몇몇의 청백리를 제외한 정부고관들은 구호만 외칠뿐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끝나 버리고 말았다. 또 노쇠한 흐옹부통령은 신병때문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부정부패 만연. 체제파괴 세력에 공격 빌미 제공>

남베트남 지배층은 점차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는 등한시 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의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후방사회와 정권과 나라를 위해서 과연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그뿐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반사회의 부정부패가 남베트남군에게도 傳染전염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남베트남 정규군은 58만명이었는데 이중 약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私사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군적에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남베트남에서는 󰡐유령군인󰡑, 󰡐꽃군인󰡑이라고 불렀다.
정부인사들도 제2공화국 초기에는 공정성을 보였지만 곧 私사에 흘러 부적절한 인사관리로 타락해서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친북세력들의 반정부 화살의 빌미를 제공하고 국민 에너지 집결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큰 장애물 역할을 했다.
파리평화협정 체결의 主役주역인 헨리 키신저와 레 둑토에게 1973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여가 발표되었다. 그 1년후인 1974년 10월에는 남베트남에서 油田유전이 발견되어 남베트남은 2백억톤 이상의 매장량을 갖는 산유국이 되었다.
1975년 2월에는 미국이 80억달러의 남베트남 전후복구 및 경제개발 원조를 제공하는 현지조사를 하기 위해 약 50명의 대규모 현지답사단이 남베트남에 입국하여 현지조사에 나섰다. 북베트남에도 수개월 내에 미국 현지답사반이 갈 예정이었다.
헨리 키신저의 평화5개 안전장치에 추가해서 이러한 경사가 겹치다보니 남베트남인들은 평화신기루 환상에 들떠 있었다. 그 누구도 북베트남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평화와 번영의 남베트남 빈곤 속 강성대군의 북베트남>

1975년 9월에는 남베트남의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이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의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의 이전투구를 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은 無備有患무비유환의 徵兆징조를 무수히 가지고 있었으나 들뜬 정부와 국민들은 설마하며 이것들을 看過간과하고 있었다. 즉 남베트남에는 호재의 대박 뉴스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평화, 경제번영의 꿈에 휩싸여 있었고 정치인들은 1975년 9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상대를 어떻게 쓰러뜨리고 자기파 인물이 대권을 잡을 수 있느냐에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리하여 북베트남의 남침 총공세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은 꿈에서조차 모르고 對北放心대북방심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인구 2400만명의 북베트남은 공산우방국들로부터 매년 80만톤 내지는 1백만톤의 식량원조를 받고 있었으나 그래도 매년 약1백만톤의 식량이 부족해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북베트남공산군은 주식뿐 아니라 부식도 많이 모자라서 하루 두끼의 식사에 부식으로는 소금만을 쳐서 먹을때가 많았다. 의류난도 극심하여 북베트남공산군인들은 런닝셔츠가 없어서 맨살에 야전군복 상의를 입었다. 속 팬티도 지급되지 않아 폐품을 잘라서 누더기로 만들어 입었다. 북베트남공산군인들은 군화가 태부족하여 거의 대부분이 부서진 자동차 타이어를 오리고 튜브를 잘라서 샌들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맨발에 신었다.
북베트남 여인들은 남베트남 여인들이 개인당 최소 5~6벌 가지고 있는 그 흔한 아오자이 옷을 한벌도 가지지 못하고 검은 작업복 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북베트남 고관부인들이나 일부 여학생들이 행사용으로 아오자이 한두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북베트남은 이렇게 극심하게 가난했다.
그럼에도 북베트남은 정규군 47만명, 지방군 50만명 그리고 북베트남이 무기탄약을 대주고 있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군 14만명(이중 7만명은 북베트남이 빌려준 병력), 모두 합하여 111만명의 강성대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경제파탄 상황하에서도 북베트남의 대남무력적화통일 전략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평화협정은 미군 쫓아내려는 속임수>

이 전략은 1973년 1월 27일 조인된 파리평화협정 체결과 동시에 포기되어야 할 대남전략이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훗날 1975년 3월 10일 북베트남군의 남침 총공세가 증명하듯이 북베트남의 대남무력적화통일 전략은 파리평화협정 체결전에도 체결 당시에도 체결후에도 실제 속셈은 만고불변이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미군을 베트남에서 쫓아내기 위한 속임수이며, 북베트남공산수뇌들의 속마음은 자나깨나 그져 대남무력적화통일의 목표달성 뿐이었다.
1974년 10월 북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정치국과 중앙당군사위원회 합동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레준 서기장은 북베트남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감행하더라도 닉슨 미국대통령이 사임한 미국은 국내사정 때문에 남베트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북베트남 정치국 회의에서는 북베트남공산군을 북위 17도선 이남의 베트남에 총 투입하여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남침총공세를 현지에서 총지휘하기 위하여 북베트남공산군 육군참모총장 반 띠엔 둥대장은 1975년 2월 5일 하노이를 떠나 2월 6일에는 중부베트남(남베트남) 고원지대의 전략요충지인 반 메뚜트 서쪽 밀림지대에 짐을 풀었다. 그는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서 󰡐뚜민󰡑이라는 익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정보기능이 거덜난 눈이 먼 남베트남 당국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공산군 대병력은 중부베트남 고원지대에서 남침총공세를 감행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국방의지가 허약한 남베트남군은 눈사태 현상을 일으키며 괴멸되면서 敗退패퇴했다.
한편 허를 찔린 티우대통령은 정쟁을 중지하고 국민에너지를 집결하여 적군을 막아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각 정파 인사들은 티우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다. 어차피 미-베트남방위공약에 따라 미군이 개입하여 전세는 역전될 것으로 생각하며, 이 기회에 자기편 인물을 대통령에 취임시키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75년 4월 21일 티우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내놓고 하야하고 불교도들이 추대하는 정 반민 예비역 대장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무력통일 후 소멸된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

1975년 4월 30일 정오. 북베트남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독립궁을 점령했다. 남베트남 정 반민 대통령은 포로가 되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북베트남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남베트남은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북베트남공산군은 남침총공세 51일만에 남베트남적톼통일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주석 웬 후또 산하에 있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베트콩)의 총병력 수는 14만2,100명이며, 남베트남군 및 연합군의 타격을 받아 약7만명의 인원손실을 입었으나 남베트남에서 인원보충이 어려워서 북베트남공산군으로부터 약7만명을 지원 보충받아 14만여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북베트남공산군의 4촌격인 군대였다.
북베트남공산군 육군참모총장 반 띠엔 대장은 사이공 진격시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군은 사이공 부근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북베트남공산군만을 진격시키고 있었다. 북베트남 정치국원 함흥 과 반 띠엔 대장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땅굴에 청사를 두고있는 웬 후또에게 1975년 5월 13일 사이공에 들어오라고 통지를 보냈다.
웬 후또는 5월 13일 그의 각료 12명과 보좌관들 약 40명을 인솔하고 사이공에 들어와서 5월 15일 사이공 독립궁 앞 통녁가(統一街)에서 전승축하 분열행진을 하는 것을 사열대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행진하는 군인은 모두 북베트남공산군 뿐이며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군인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법무장관인 쭝 뉴탄은 반 띠엔 대장에게 물었다. 󰡒우리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군대는 왜 보이지 않소?󰡓 반띠엔 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북군대는 이미 통합되었오󰡓라고 말했다. 쭝 뉴탄은 깜짝 놀라며,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언제 어떻게 통합되었다는 것이오?󰡓하고 물었으나 반 띠엔 대장은 묵묵부답,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로써 군대가 한명도 없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는 이름만이 남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1975년 11월 15일 웬 후또 주석은 북베트남정치국의 지시에 따라, 이름만 남아있던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를 비밀리에 완벽하게 해체했다. 그리고 실각한 각료들은 북베트남 공산측이 보내준 비서 또는 경호원들에 의해서 실질적 감시를 받으며 살아나가야 했다.

<자유 부르짖던 데모 주도정치인Å학생들 체포Å수감돼>

남베트남 패망 직후 북베트남공산측은 군인 및 공무원 전원, 정치인, 종교계, 각 사회단체등의 지도자들, 기업체 임원들을 체포하여 형무소에 투옥했다. 형무소라고 부르지않고 그들은 인간개조교육센터라고 불렀다. 형무소가 모자라서 옛베트남군 막사를 형무소로 사용했다. 자유베트남 치하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며 데모를 주도하던 정치인들과 대학생들의 체포수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감자들의 옥중생활은 비참했다. 언론의 자유는 완전 봉쇄되고 수감자 1인당 한끼의 식사는 돌이 우적거리는, 한국 밥공기로 3분의 2공기 정도이고, 부식으로는 늙은 호박 소금국 반공기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하루 두끼만 주고 한끼는 굶겼다. 일광욕도 금지시켜 298일만에 햇볕을 한번 쬐는 수감자도 있었다. 5년간이나 면회가 금지되고 편지도 금지되어 한번도 가족에게 연락조차 못하는 수감자도 있었다.
총살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수감자들도 있었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어서 시체가 되어 옥문을 나서는 수감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이런 절망의 남베트남을 탈출하기 위해 나선 보트피플의 연인원은 106만명에 달했으며 이중 11만명이 이런저런 일로 해서 남지나해의 물귀신이 되고 살아서 외국 선박에 구조되어 해외로 망명한 인원은 95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인권말살의 12년 세월이 거칠게 흘러간 1986년 12월 소련과 중공의 개방정책이 베트남에도 흘러들어가 제6차 베트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서기장이 경질되면서 종래의 남베트남에 대한 인권말살 암흑정책을 수정하여 개방개혁 정책인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채택하여 정치범 집단수용인 인간개조교육센터를 없애고 남베트남패망후의 인권말살 암흑기를 종식시켰다.

<降將과 勝將의 친화우정의 화합이룬 미 남북전쟁>

북베트남 공산군은 남베트남을 패망시킨 후 가혹한 탄압의 인권유린 및 숙청으로 남베트남을 12년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미국은 19세기의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미연방(미국 북부)측은 남부연합(미국 남부)측을 관용으로 일체의 보복없이 평화적으로 흡수통일 했다. 그 史實사실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12일에 발발하여 4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동원된 북군 총병력수는 약200만명이며, 이중 약 36만명(364,511명)이 전사했다.
남군 총병력수는 약65만명이며, 이중 약 26만명이 전사했다. 남군 총사령관인 명장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은 남부연합 수도였던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가 합락되자 패잔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쫓겨갔다. 그러다가 1865년 4월 8일, 이미 대세는 치명적으로 기울어졌으며, 패배에서 남군이 소생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상황판단을 했다. ,그리고 더이상 쓸데없이 남군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끝에 북군에 항복하기로 결심하고 연락장교단을 북군 총사령관 유리시스 심프선 그랜트 장군에게 보내, 1865년 4월 9일 정오에 애포맥턱스에 있는 맥클린의 집에서 만나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살육전이 치열하게 이어진 4년간의 남북전쟁은 상대방에 대한 원한의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듯 고조되어 있었다. 남군총사령관 리 장군은 󰡐아마도 내일 내가 항복한 후 총살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 장군은 그래서 최후룰 맞을 때 명예로운 군복정장을 하고 태연하게 가려고 최고의 군복을 입고 항복장소로 갔다.
이에 반해 북군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야전에서 전투하면서 신고있던 흙뭍은 군화에다가, 빛바랜 낡은 군복을 입고 리 장군을 맞이했다.
降將항장은 자기 軍刀군도를 허리에서 떼어서 항복받는 적장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다. 리 장군은 자기 군도를 풀어서 그랜트 장군에게 바치려고 하자, 그랜트 장군은 손을 내저으면서 그대로 차고 있으라고 했다. 파격적인 예우였다.
리 장군은 1807년생이며, 그랜트 장군보다 15년 연상이다. 리 장군은 1829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1843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중간성적으로 졸업한 그랜트 장군보다 육사졸업 14년 선배였다. 리 장군은 185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도 지냈다.
그랜트 장군은 겸손히 말했다.
󰡒리 장군님, 멕시코전쟁(1846~ 1848)때, 제가 장군님을 모셨는데 기억이 나십니까?󰡓
의외의 첫마디에 리 장군은 좀 놀라면서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勝將의 아량, 降將의 각오>

이로부터 서로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화는 멕시코전쟁, 웨스트포인트 이야기등으로 꽃을 피우며 남북전쟁 같은 껄끄러운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항복문서에 대한 서명도 동등한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원한은 단숨에 사라지고 우정의 화합으로 일체감을 갖게 됐다.
자기가 처형될 것을 각오하고 적장 그랜트 장군을 찾아간 리 장군은 너무도 의외의 관대한 예우를 받아, 그랜트 장군의 관용에 감격했다. 그리고 그랜트 장군은 위대한 통합을 이루려는 진정한 관용의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랜트 장군은 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리 장군님을 비롯하시어 남군의 모든 장병들은 지금부터 신속히 고향으로 돌아가시어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말을 가지고 있는 장병들은 말을 타고 가십시오. 말이 없는 장병들은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항복한 남군을 포로로 억류하지도 않고, 군용말도 뺏지않고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내친김에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청탁을 했다.
󰡒그랜트 장군님, 지금 남군 장병들은 몇끼를 굶고 있습니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랜트 장군은 즉석에서 부하에게 지시하여 2만5천명분의 식량을 굶주린 남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마음속으로 울며 감격한 것은 리 장군뿐이 아니었다. 4년간 남북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고 적개심에 불타던 11개주 전체 약 800만 백인들의 북군에 대한 적개심이 따뜻한 봄 햇살에 눈이 녹아버리듯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4년후인 1869년 그랜트 장군은 미국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8년간 대통령직에 있었고, 187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미국지페 50달러에 그려진 초상화가 바로 그랜트 대통령이다.

<소금국 먹고 私製 샌들신은 북베트남군 배 불리 먹고 가죽 군화 신은 남베트남군>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그랜트 장군의 큰 관용이 남북전쟁에서 생긴 오래 갈 깊은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는 결정적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정한 승자가 되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 그것도 진정성 어린 배려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과 관용이 뚫지못할 장벽은 없다는 것을 그랜트 장군은 교훈으로 남겨 주었다.
국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국가의 최고 가치다. 인권이건 자유이건 풍요로운 경제이건 그외 모든것이 나라가 적군에게 유린되어 패망당하면 끝이다.
북베트남공산군이 3Å10남침 총공세를 감행했을 때 火力화력과 기동력이 월등히 우세하고 병력도 많았던 남베트남군이 굳건한 精神정신 戰力전력만 가졌다면 북베트남공산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승리할 수 있었으나 사분오열되어 정쟁에 이전투구만 하고있는 정치인들과 사회정의가 상실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는데 대해 식상한 남베트남군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눈사태 현상을 일으키면서 패닉상태에 빠져 패망했다. 정신전력이 아주 허약한 군대에게는 신무기도 고철덩어리와 마찬가지란 교훈을 남기면서 남베트남군은 패망했다.
국토가 좁은 분단국가에서의 단기전에서는 경제적 풍요와 빈곤이 전쟁승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맨발에 사제 샌달을 신고 군복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하고 밥에는 소금이 반찬이고 그것도 하루 두끼밖에 못먹는 거지군대 북베트남공산군이, 배불리 먹고 좋은 군복에 가죽군화를 신고 당당하게 군인 모습을 갖춘 남베트남군을 패망시킨 것이다.
북베트남공산측의 대남무력적화통일 전략은 만고불변이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속이고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군을 남베트남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파리평화협정을 준수하는 것처럼 위장전술을 써서 남베트남측을 방심케 하다가 갑자기 남침기습총공세로 적화통일을 달성했다. 즉, 북베트남공산측은 파리평화협정서를 교묘히 속임수로 이용하다가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휴지통에 버리는 휴지조각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 협정서를 하늘같이 믿고 소중히 여기던 남베트남은 졸지에 멸망했다. 교조적 공산정권과 맺는 국제협정은 그런것이었다. 김정일정권과 맺는 협정도 그런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힘을 동반하지 않은 경제적 번영은 내일 곧 패망 할 수도 있다>

힘을 동반하지 않는 경제번영국은 내일이라도 사멸할 수 있다는 것을 남베트남패망은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국가안보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21세기 국가안보는 쌍방간 또는 다자간 방위협력체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상호방위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대남적화통일전략은 만고불변이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휴전후 오늘날까지 그들은 남침총공세를 다시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미간 방위체제가 견고해서, 보복의 반격에 의해서 김부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정신전력을 강력히 집중시키며 미군과의 혈맹관계를 견고히 하면서 대북 군사력을 압도적 優位우위로 유지하면, 그 억지력 때문에 한반도에서 평화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이미 노쇠하고 병색이 완연한 환자다. 북한 사람들도 서서히 세계정세의 추이를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독일의 평화통일 전야같은 상황이 북한에도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때까지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국민에너지를 국방에 집결시키고, 정신전력을 강화하고, 한-미 혈맹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나가면 베트남패망의 전철을 절대 밟지 않을 것이며 드디어는 평화통일의 영광의 날을 갖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미국 남북전쟁의 故事고사를 참고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깨어있으며 스스로를 돕는 국민을 도와준다.

출처 : 한국논단     모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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