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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 - 신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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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유 작성일12-01-08 02:45 조회1,6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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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 - 신동혁

 
 블로그>푸르게 푸르게 | 푸른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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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뱅크 미니 e-book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 -신동혁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출생자의 최초 탈출기록

* 수용소에서 태어난 어린 정치범들은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다가 자기의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 -신동혁(북한 정치범관리소 완전통제구역 출생자)

 

* 1965년경 14호 관리소가 생겨났는데, 그 때 관리소 수감 대상자를 찾는 과정에 아버지 형제 중 첫째와 둘째가 월남했다는 과거 일을 들추어내어 관리소에 수감시킨 것 같다. 아마 수감자들의 70% 정도는 본인들이 왜 관리소로 잡혀왔는지 이유를 잘 모를 것이다. 관리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형제들은 사람이 아니다. 신분증을 회수 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도 모자라 아버지 형제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떼어 내어 갈라놓아서 누가 어디로 갔는지,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완전통제구역 수용소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동혁

 

* 일하다가 아버지나 가족과 마주칠 수도 있지만 서로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척 할 수 없다. 규율 자체가 그러므로 그냥 서로 모르는 척 지나친다. 관리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다들 평범한 일로 받아들인다. 나는 부모의 애틋한 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단지 저 분이 우리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생각만 들 뿐 찾아가고 싶거나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관리소에 있는 사람의 80% 정도는 부모에 대해서 나처럼 느낄 것이다. -신동혁

 

* 나는 한국에 들어온 후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난 신인근이 아닌 신동혁으로 살고 있다. 완전통제구역의 신인근이 아닌 한국의 신동혁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인근으로서의 삶은 이미 내 몸 깊게 들어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몸은 관리소를 탈출하였으나 마음은 관리소의 정치범들과 함께 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 까지… -신동혁

 

* 나는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나 자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관리소 사람들은 ‘개천 14호 관리소’라 부른다. 나와 함께 있었던 관리소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태어났거나 오래전에 관리소에 들어왔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곳에서 관리소의 규정을 지키고 살다가 생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런 곳을 이곳 바깥 사람들은 ‘완전통제구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린 그저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살아왔기 때문에 완전통제구역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갖고 있었다. 관리소에서는 가끔 죄를 짓고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관리소에서 형이 해제되어 나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누구도 이곳에서 나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매를 맞는 것이 두렵고 배가 고파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남은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공개처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곤 하였다. -신동혁
* 관리소에서는 작업반장, 총반장처럼 개개인에 대한 불만만 있을 뿐, 관리소 규정이나 체제에 대한 불만은 없다. 관리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야 뭔가 변화가 일어나지 자체적으로는 절대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관리소내에서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켜서 저항의식이나 불만 등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신동혁

 

* 관리소는 특별히 요일별 차이가 없고, 토요일, 일요일과 같은 휴일도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리소에도 휴일은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쉰다. 보통 매월 초 1일에 쉬는데, 2월 1일 쉬고, 3월 1일 쉬는 식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날이나, 설날에도 쉰다. 우리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누구라는 것도 모르고 설날도 모르지만 보위원들이 쉬어야 하기 때문에 휴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휴일이라고 하여 일을 안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작업반 정리를 하거나 산에 화목(나무)하러 간다. 즉 휴일에는 보통 때 일하는 것보다 덜 세게(힘들게)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신동혁

 

* 노동강도는 세고 옥수수 쌀(옥수수 가루)은 많지 않아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나 공장에 다닐 때도 쥐가 있다고 하면 무서워 달아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쥐에게로 쏠린다. 우리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일은 쥐를 잡아서 구워 먹는 것이다. 쥐를 불에 살짝 구워서 껍질을 벗겨내고, 내장을 파낸 다음 소금을 뿌려서 바삭하게 굽는다. 그렇게 바삭 익힌 다음 쥐 머리도 남기지 않고 뼈까지 다 씹어 먹는다. 농촌지원을 나가면 쥐를 많이 잡을 수 있어서 일주일 내내 쥐를 잡아먹은 적도 있다. 쥐가 보이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도 못 먹은 적도 있다. 화장실에도 쥐가 많은데, 화장실에 있는 쥐를 잡아먹기도 한다. 쥐가 관리소에서 많이 걸리는 영양 장애로 생기는 “삐라그라(펠라그라)”에 좋다고 한다. 오히려 뱀보다 쥐가 영양가가 많다. -신동혁

 

* 관리소에서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데, 관리소내 병원에 가면 보통 식염수로 상처 부위를 씻어내고 일주일에 한 번 치료를 받으러 오라고만 한다. 이때도 작업반장이 승인해 주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손가락을 잘렸을 때 병원에 갔는데, 마취는 하지 않았지만 상처부위를 기워주고 치료도 받았다. -신동혁

 

* 관리소 내에는 안경 끼는 사람이 없는데, 북한 사회에서 안경을 꼈다하더라도 관리소 내부에서는 절대 안경을 낄 수 없다. 머리 모양도 관리소 내에 규정이 있는데 여자들은 보통 단발머리에 하얀 수건을 써야 한다. 관리소에는 공장과 농장, 학교, 그리고 작은 병원을 제외하고는 안경점, 미장원, 가게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신동혁

 

* 관리소 사람들은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바로 5시에 출근한다. 일하러 가면 6시 정도 된다. 학생들은 그보다 늦게 8시에 등교한다. 저녁 7시 이후에는 길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 수용소에는 집집마다 시계가 있는 게 아니라서 시계가 있는 집에 가서 시간을 물어본다. 그리고 관리소에서 아침 7시, 정오(12시)에 싸이렌을 울려 시간을 알려준다. 각 마을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 있어 새벽 4시부터 종을 치기 시작해서 매 30분마다 종을 친다. 그래서 관리소 사람들은 종소리로 시간을 알 수 있다. -신동혁

 

* 관리소에는 모두가 외우고 지켜야 하는 관리소 법과 규정이라는 것이 있다.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은 관리소 모든 수용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리소 생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첫째, 도주할 수 없다. 둘째, 셋 이상 모여 있을 수 없다. 셋째, 도둑질을 할 수 없다. 넷째, 보위지도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다섯째, 외부인을 보거나 수상한 자를 보았을 시 즉각 신고해야 한다. 여섯째,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이상한 행동 발견시 즉각 신고해야 한다. 일곱째,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는 넘쳐 수행해야 한다. 여덟째, 작업 외에 개인적으로 남녀간에 접촉할 수 없다. 아홉째, 자신의 과오를 깊이 있게 뉘우쳐야 한다. 열째, 관리소의 법과 규정을 어겼을 경우 즉시 총살한다. -신동혁

* 관리소 안에서의 결혼 생활은 그 안에서의 죄수 입장에서 보면 평생소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권리와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보위지도원이라는 단 한사람의 지시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결혼 아닌 결혼이다. 관리소 안에서는 결혼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소나 말보다도 더 혹독하게 일을 시키고 있다. 관리소 내 사람들에게 최고의 행복은 결혼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결혼을 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일에도 서슴지 않고 뛰어든다. 그래서 그들은 일로써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관리소의 여자들도 전세계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지만, 담당 보위지도원을 표창 결혼 지시를 거절했다가 영원히 결혼 기회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싫어도 싫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보위원이 처녀를 건드려서 임신을 하거나 남녀가 눈이 맞은 경우 그 즉시 모두 사라진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신동혁

 

* 관리소 안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높고 낮음이 없고, 오직 너 아니면 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첫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각종 작업 현장으로 동원되어 나가고 어르신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 일의 강도는 성한(건강한) 사람이나 아이나 늙은이나 차이가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를 못한다고 하여 매를 맞으며, 지금 이 시각에도 관리소 안에서는 일에 시달리다 지쳐서 쓰러지고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0세도 안된 아이들이 어두운 탄광 지하 갱으로 들어가 탄차를 밀고 다녀야 한다. 이들은 이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다. 그들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그들의 머릿속에는 올바른 의식은 사라지고 자신들은 관리소 정치범의 한 일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처지는 저기 머나먼 아프리카 나라의 어린이들보다도 더 구차하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유엔이나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손길이 쏠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각종 약품과 의료 기구가 지원 되고 있다. 그러나 수용소의 어린 정치범들은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다가 자기의 인생을 속절없이 마감해야 한다. -신동혁

 

* 식단은 식은 밥이나 옥수수 죽에 묽은 염장 배추국으로 일 년 내내 바뀌지 않는다. 고기나 생선은 먹어본 적 없다. 평소 개구리나 뱀을 잡아 먹어서 영양분을 보충하기도 한다. 관리소 사람들은 많이 못 먹는데도 일을 잘하고 힘이 세다. 평상시 일을 많이 하니까 단련이 되어 채소만 먹어도 힘을 잘 쓴다. 이렇게 못 먹어도 특별히 병이 나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소똥에 섞여있는 강냉이도 골라 먹어봤지만 특별히 몸에 이상 없었다. 관리소 사람들은 체형이 말랐지만 일을 많이 해서 물렁살 없이 살이 단단하다. 관리소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몸이 허약하지는 않고, 얼굴색은 햇빛을 많이 봐서 까무잡잡한 편이다. 관리소는 산으로 둘러싸여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서 먹는 것 때문에 특별히 병이 나지는 않는다. 예방접종은 인민학교에서 한번 맞은 적이 있는데, 천연두 접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 이후에는 맞은 적이 없다. 우리는 목욕을 잘 하지 않았다. 깨끗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작업을 하다보면 목욕을 안해도 빗물에 저절로 목욕이 되어 깨끗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당장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몸 관리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신동혁

 

* 인민학교는 1학년에서 5학년까지 5년 과정이고, 고등중학교는 6년 과정이다. 전체 11학년을 공부하게 된다. 모든 학년을 마치고 졸업은 17세에 하게 된다. 고등중학교 과정에서 학생들은 수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선생님을 많이 둘 필요가 없어서 한 학년에 한 명만 담임 선생을 배치한다. 고등중학교 담임 선생은 가르치는 수업은 없고, 작업을 나가고 들어올 때 인솔하게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담임 선생님은 보위부원이기 때문에 다른 보위원들과 똑같이 권총을 찬 채 제복차림으로 수업을 하고 작업지시와 몸수색(소지품 검사)를 한다. -신동혁

 

* 인민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 수학, 체육 세 과목이 전부이다. 수용소 내 학교의 수업시간은 일반 인민학교보다 길지만, 김일성과 관련된 것이나 당 혁명, 북한 역사, 그리고 북한의 지리와 과학, 음악, 미술 등에 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신년사도 외우지 않았고, 정치적인 학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과서도 선생님만 가지고 있고 학생들은 교과서 없이 빈 노트와 연필만 가지고 학교에 다닌다. 국어는 글을 쓸 수 있는 정도만 가르친다. 관리소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하나도 없다. 수학은 선생님이 문제를 내주고 그것을 풀어오라고 숙제를 내기도 한다. 수학 시간에는 더하기(덧셈)와 덜기(뺄셈)만을 배웠을 뿐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곱셈이 필요하면 구구단을 외운 적이 없기 때문에 더하기를 그 수만큼 반복해서 답을 내고 있다. 체육시간에는 공을 가지고 하는 활동은 없고, 달리기나 철봉 매달리는 것만 한다. -신동혁

* 1989년 6월경, 내가 인민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수업시작 전에 선생님이 몸수색(소지품 검사)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한 반이던 8세 정도 되는 여자아이 주머니에서 밀 이삭 5개가 나왔다. 담임 선생은 그 아이를 무릎 꿇어앉히고는 지시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계속해서 때렸다. 그 아이는 끝내 기절하였는데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나도 그 아이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 날 저녁 끝내 죽었다고 한다. 원래 몸이 허약한 아이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여자 아이는 참 곱게 생겼었다. 이렇게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어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현실인 것이다. -신동혁

 

* 보위원 자녀들은 우리 죄수 아이들을 지주나 종파 또는 혁명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위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갖은 행패를 부린다. 1992년 3월 우리 학급 30명 정도가 역전으로 수집탄(땅바닥에 흘린 탄을 모으는 것)을 나갔다가 보위원 마을을 지나가다 20명 가량의 보위원 자녀들의 돌탕(돌팔매)을 맞은 적이 있다. 순간 길바닥은 30명 아이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우리들 중에 머리가 안 터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의 옷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학급장 홍주현과 문성심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우리가 한참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는 아무 소리 없이 일을 시작하라고 야단만 쳤다. 우리는 보위원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치범인 조상들의 배에서 태어난 죄수이기에 보위원들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는 길이다. 그 후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보위원 자녀들이 나타난다 싶으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곤 했으며 달아나다 붙잡혀서 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들은 잘못하였다고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때리는 쪽이 지쳐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가 그들의 등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보위원 자녀들은 우리를 때리는 것으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신동혁

 

* 중학교 때는 수업은 없어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그때그때 제기되는 일을 할뿐 공장이나 농장 작업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배치 받게 되면 공장이나 탄광, 또는 농장에 있는 숙소를 배정받아서 본격적인 수용소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다. 고등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자식이 인민학교에서 고등중학교로 진학할 때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슬퍼하는 일은 없다. 어머니는 낮에 힘들게 일하므로 자녀에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최대한 빨리 자려고 할 뿐이다. -신동혁

 

* 학교 생활기간에도 일정 기간은 일터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하는 노력동원을 하게 된다. 일 년에 석 달은 노력 동원을 나간다. 농촌지원도 아이들로서는 가장 힘든 노동 중의 하나이다. 봄철 옥수수모 옮겨심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촌지원이 시작된다. 그때는 하루에 정해진 양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과제를 끝마친 조에 자신의 밥 절반 이상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루 과제를 수행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학생들이 노력동원을 나가면 학년별로 일하는 강도나 종류에 차이가 거의 없다. 고등중학교 1학년이든, 6학년이든 똑같은 강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 관리소에서는 일을 하면 힘이 들었고 일을 하지 않으면 배가 고팠다. 똥을 누면 배가 고프다고 똥도 잘 누지 않았다. 또한 물을 마시면 소화가 금방 된다고 하여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 변비에 걸리면 서로 파주기도 한다. 이와 벼룩이 많아 옷에는 이가 기어 다녔다. -신동혁

 

* 수용소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일을 똑같이 하면서도 여자들이 매를 더 많이 맞는다. 그 이유는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배정된 작업량을 남자는 수행하지만 여자는 힘에 부친 관계로 다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신동혁

 

* 중학교 1학년이던 1993년 6월 중순경에 우리 학급은 갱지원(탄광에 도움이 되고자 노동지원 나가는 것)을 나갔었다. 그때 우리는 갱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했는데, 우리 나이 12세 때의 일이다. 내가 조장이었는데, 우리는 어린 나이에 어른들도 하기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야만 했다. 막장을 떠나서 광차를 밀고 나오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한 조에서 두 톤짜리 광차 네 대를 밀어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20리 되는 거리를 하루에 네 광차를 밀고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면 갱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조 12세 여자아이 문성심이 발을 잘못 짚으면서 탄차 바퀴에 깔리어 엄지발가락이 절단된 사고도 있었다. -신동혁

 


* 1998년 고등중학교 시절 약 1년간 대동강 내 중형발전소 건설에 동원되어 나갔다. 발전소 댐 건설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었다. 깊고 넓은 대동강 물을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막아야 했기 때문에 한 달에 7~8명이 죽어나갔다. 보통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는데, 아침 8시~저녁 8시, 저녁 8시~다음 날 아침 8시 2교대로 나누어 작업을 계속하였다. 작업 환경이 열악하여 사망한 경우가 많았는데, 인부들이 죽어 나가도 수용소에는 보충할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댐건설을 하는데 시멘트, 모래, 돌멩이를 나르는 차만 있었을 뿐 다른 장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동혁

 

* 건설 현장에서 누가 죽는다고 해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나의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보위원들의 지시에 따라 다시금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1998년 7월 중순경,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내려 상류에서 큰 물이 덮쳐 수 백 명의 인부들이 쓸려 내려가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듯 발전소 건설 현장은 매일 매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심판장과 같았다. 관리소 안에 있는 5~6만 명이 넘는 수용자들이 이런 속에서 운명을 내맡긴 채 하루하루 생활해가고 있다. -신동혁

 

* 대동강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아서 꼼짝없이 찬 강물에 들어가 건설에 필요한 돌을 주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밥을 굶지 않기 위해 오들오들 떨며 바지에 오줌을 싸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철근을 나를 때에는 맨손이 철근에 얼어붙어 고생하였다. 아파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보위 지도원은 철근에 혀를 내밀어 얼어붙게 하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있다가 겨우 철근과 떨어지면 혓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신동혁

 

* 하루하루 일하는 게 힘들고 무서웠다. 하루 일을 힘들게 마쳤을 때 마음이 조금 놓였다가도 몇 시간 후에는 다음날 할 일이 무서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하는 도중에 어디서 사고가 났다고 하면 손에 맥이 풀리고 힘이 빠져 일하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댐 건설현장으로 나갈 때는 정말 도살장으로 나가는 심정이었다. 결국 사람의 힘으로, 온전히 우리 수용생들의 피땀으로 대동강 물길을 막았다. -신동혁

 

* 나는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는 바람에 14호 관리소 지하 비밀감옥으로 끌려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손과 발이 묶인 채 불고문을 당하였고, 그 상처는 영원히 내몸의 일부로 남아있다. -신동혁

 

*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 된 이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매도 더 많이 맞고, 일도 더 많이 하게 되어 무척 힘들었다. 친구들도 나를 좋게 보지 않고, 놀리기도 하고 이유 없이 때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소변이 마렵고, 대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반역질을 하다가 처형된 놈들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을 나와 작업을 한 그 두 달 여 간에 나는 눈을 빤히 뜨고 15번 정도 바지에다 오줌을 싸야했다. 만약 몰래 바지를 벗고 오줌을 싸다가 누가 고발이라도 하여 들키면 나는 더한 모욕과 고초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동혁

 

* 1996년 9월 어느 날, 숙모와 사촌누나가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경비대의 눈에 들킨 것이다. 누나의 나이는 열일곱 살 정도였으며 대단히 곱게 생겼었다. 그런데 경비대 두 놈들이 반항하는 숙모를 묶고 눈을 가리고 누나에게 달려들어 성폭행을 가하는 것이다. 끝내 누나는 알몸으로 성폭행을 당한 채 기절하였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때 숙모는 정신이 돌아서 그 다음날 새벽 길바닥에 앉아 경비대 새끼들이 내 딸을 죽였다며 통곡을 하다가 어디론가 잡혀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 대가 완전히 끊길지도 몰랐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 전체 5~6만 명의 수용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일이었다. -신동혁

 

* 학생들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치 받은 곳으로 가는데, 그때 그들은 나이 17세에 키는 140cm를 조금 넘는다. 키가 작은 그들은 갱에 들어가서도 자기가 속한 작업반에서 어른들이 하는 일만큼 따라 해야 한다. 일을 못하면 어린 여자 아이들도 매를 맞아야 한다. 여자 아이들도 어른들이나 메고 다닐 법한 통나무들을 힘겹게 메고 나른다. 그들에게 뭔가 특별한 힘이 나와서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작업반장이 사정없이 때리기 때문에 매 맞는 것이 무서워서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하는 것이다. -신동혁

 

* 2003년 나는 돈사에서 일하다가 피복공장으로 옮겨가 재봉기 수리사로 일하면서 내가 담당하고 있던 50여대의 재봉기가 고장이 나면 그것을 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피복공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쉬고, 그 외 휴일은 없었다. 피복공장에는 2,000 여명의 여성 수용자들이 2교대로 근무하였고 재봉기는 24시간 쉬지 않고 늘 돌아가야 했다. 재봉기가 고장이 나서 부르기도 했지만 재봉공이 일을 하다 손가락이 바늘에 찔려 손가락을 빼달라고 수리공을 부르기도 했다. 가끔 바늘이 손가락 안에서 부러지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손가락이 썩기 때문에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 손가락이 없어도 재봉일은 가능한데 손가락이 세 개가 없는데도 일하는 여자를 본 적도 있다. -신동혁

 

* 2004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재봉기 받침대를 등에 지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손에 힘이 빠지면서 떨어뜨려 받침대가 부서져 버렸다. 재봉기 받침대는 매우 귀한 것이다. 작업반장은 이 사실을 알고 내 뺨을 몇 대 때리고 말았으나, 이 일이 총작업반장에게 보고되어 보위지도원까지 알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는 담당 보위지도원 사무실에 불려가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 첫째 마디가 잘려나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재봉틀을 떨어뜨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이루어졌다. 가운데 손가락은 그렇게 순식간에 잘라져 나갔다. -신동혁

 

* 만약 수용소 안에서 공식적인 허가 없이 임신을 하거나 수용생들끼리 성관계를 한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보위지도원의 아이를 가졌든, 죄수들끼리 부화가 나서 아이를 가졌든 임신한 여자는 모두 잡아간다. 보위지도원은 곱게 생긴 여자 아이들을 마음대로 갖고 논다. 그래도 그 누구도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다. 수용자들은 평생을 관리소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디 신고할 때나 하소연할 때도 없을뿐더러 하소연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신동혁

 

* 수용소 정치범들의 운명은 보위원의 손아귀에서 결정된다. 보위지도원들은 오직 자신의 생각대로 우리를 다스린다. 보위원 기분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날 처벌을 받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종일 공포에 떤다. 내가 한국에 와서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속담을 들었다. 이 속담은 어찌 보면 관리소 수용자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신동혁

 

* 어느 날 담당 보위원이 나를 찾아서 가봤더니, 나에게 어머니와 형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 자기가 시키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보고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스파이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보위지도원에게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군복 천쪼각을 훔쳐 자기 바지의 엉치(엉덩이)를 깊고 있는 우리 호실 강철민 동무를 고자질했다. 그런데 그날 밤 사상 투쟁회의에 피범벅이 된 강철민과 그의 재봉공 여자 친구가 쇠사슬에 묶여 꿇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 볼 수 없었다. 나 때문에, 하찮은 천 조각 하나 때문에 그들이 이런 험한 꼴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당시 나는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한 것이다. -신동혁

 

* 내 의식을 일깨워주고 함께 탈출을 시도한 평양 태권도 전당 기술 과장 출신 박용철을 처음 만난 곳은 피복공장이었다. 내가 그의 견습을 담당했기 때문에 우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평양에서 고위직이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한번 바깥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다. 이러던 찰라 서로 마음이 맞아서 탈출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관리소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고 나서 그 사람 말을 들으니 마음이 동하고 끌리었다. 만약 나에게 어머니와 형의 공개처형과 그 이후 관리소 생활에서 고초가 없었다면, 나는 태권도 기술 과장의 말을 그대로 상부에 고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인간적으로 끌렸기 때문에 비밀을 보장해 주고 싶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고발해봤자 밥 한 끼 더 먹고 집에 한번 가는 것이 포상의 전부인데, 괜히 그 말을 해서 이 분과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신동혁

 

* 나도 신고를 해보기도 하고 신고를 당해 보기도 했는데, 신고를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신고당한 사람의 밥 세 숟가락 정도를 더 뺏어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외에 특별한 신고 포상은 없다. 대신 신고나 스파이 노릇을 얼마만큼 잘하느냐는 앞으로의 결혼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남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사소한 결함이라도 들추어내고 하면서 정치범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로 인해 수용자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말과 행동을 주의하면서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한다. 이렇게 해야만 수용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동혁

*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2005년 1월 1일과 2일은 휴일이었지만, 우리 작업반에서 사람을 뽑아 1월 2일에 시멘트 공장 뒷산으로 화목(벌목한 나무나 죽은 나무를 잘라 끌고 내려오는 일)하러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철조망 옆에서 일을 하며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다 해가 질 무렵 순찰대가 지나간 후 우리는 정신없이 전기 철조망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앞서가던 기술과장이 그만 철조망 전기에 살이 붙어 처져 있었다. 나는 순간 그의 등 뒤를 타고 겨우 전기에 붙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도 정강이에 전기가 붙어 타버려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철조망에 걸린 기술과장을 도울 방법도 없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달려 내려갔다. 탈출하는 나를 보고 누가 쫓아왔는지도 모르겠고 기술과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신동혁

 

* 나는 수용소 탈출 후 이것 저것 훔쳐먹고 도적질한 쌀을 팔아 난 생 처음 돈이란 걸 보았다. 사람들은 쌀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기 때문에 쌀을 파는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나는 잘못하다가 잡히면 나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관보다는 돼지우리를 전전해 가며 잠을 청했다. 나는 탈출 후 여기저기 한달을 체류하다 화차를 타고 겨우 국경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전에서 8개월 전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 나온 어떤 사람에게 경비대에 잡히지만 않으면 중국으로 넘어가서 사는 것도 괜찮으며 겨울이라 두만강 폭이 좁아지는 지금 겨울밤이 넘어가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월경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한 동안 근심에 잠겼다. 그러나 나는 내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였다. -신동혁

 

* 나는 공민증(남한의 주민등록증)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보안원이나 경비대의 검문에 걸리면 내 운명은 다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공민증을 구경도 못하였다. 첫 번째 검문소를 통과할 때 초병이 나를 세웠다. 국방색 옷과 국방색 털모자를 쓴 나는 제대 군인 흉내를 내고 거짓말을 하면서 담배 두 갑을 건네 주고 무사히 빠져 나왔다. 두 번째 검문소에서는 담배 한 갑과 과자 한 봉지, 세 번째 검문소에서는 과자 한 봉지와 돈 400원, 네 번째 검문소에서는 담배 두 갑하고 과자 한 봉지를 사주고 무사히 빠져 나왔다. 마지막 초소 보초병에게는 두부 순대와 사탕 한 봉지, 담배를 사 주고는 큰 아부지가 사는 조선족 마을에 잠시 건너갔다 오믄 한턱 내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17세의 경비병은 안전한 숲길을 알려주며 저녁 7시 교대 근무시간까지 갔다오라고 했다. 2005년 1월 2일 개천관리소 탈출 이후 북창, 맹산, 금야, 함흥, 길주, 청진, 고무산, 무산, 대흥단으로 도보와 차, 그리고 기차로 이동하여 2005년 2월 2일 탈출 후 한 달 만에 드디어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신동혁

 

* 가까스로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국 땅에서 내가 넘어온 두만강을 바라보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당시 내 마음은 이상했다. 내가 정말 중국 땅을 밟았는지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처형장에서 본 형의 모습, 그리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국땅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내가 다시 두만강을 넘어 조국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신동혁

 

* 2006년 2월 27일 나는 여기저기 떠돌다 상해로 내려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 도착하여 한국 분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그 식당에서 마침 한국에서 오신 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분은 일자리를 구하는 나에게 한국에 가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돈이 없어 지금은 갈 수 없다고 하자 나를 따라오라며 택시에 태우더니 영사관으로 데리고 갔다. 만약 영사관 문 앞에서 누가 나의 뒷덜미를 잡으면 무조건 뿌리치고 도망가라고 하였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나도 산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정문에는 경찰이 있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 분은 나를 옆구리에 끼고 웃으라고 하며 정문에서 중국말로 친구와 같이 들어간다고 하자 문이 열렸다. 정문을 들어서자 그 분은 이제 마음을 놓아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한국 영사관에 들어 왔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영사관으로 들어와 그 후 6개월 뒤 한국으로 왔다. -신동혁

* 내가 한국에 발을 들여 놓고 또 한국 사회에서 첫 생활을 시작하면서 중국에서도 보지 못한 더 놀라운 현실에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선 한국 사람들의 질서정연한 의식상태, 너무너무 많은 차들, 아침 출근 시간에 사람들이 뛰어 다니다시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놀라웠다. 북한 관리소에서는 여자들이 아무리 맞아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여자 총리가 나오고 게다가 여자 대통령까지 나오려고 한다니…. 한번은 서울 길거리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고 남녀 대학생 수백 명이 정부종합 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는데도 그 누구도 제재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같은 땅 덩어리 두 체제 하에서 살아본 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인간의 의식을 깨우쳐 주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이 한국 땅에 온 것이 어떤 때는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신동혁

 

* 아버지는 아마 나로 인하여 처형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작업반장과 총반장은 물론 그때 같이 산에 있던 사람들과 나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가 나를 먼저 탈출시키고 전기에 붙어 돌아가신 박용철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직도 지난 관리소에서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때는 자다가도 꿈에서 이전에 죽은 친구들과 내게 일을 가르쳐주던 선배들이 나타나곤 한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일을 정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고 세계가 나서서 한 나라에서 나서 자랐어도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그들을, 북한의 인권을, 세계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김정일을 심판대에 세우고 그들을 구출하여야 한다. -신동혁

 

* 신동혁은 자신의 개인적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관리소에 남아 있는 동료와 앞으로도 계속해서 태어나 수용소의 노예로 살아갈 이성과 비판적 인식이 마비된 자신의 후임자들을 구출하는데 헌신하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국제사회와 한국정부, 그리고 시민사회의 무관심, 특히 탈북자 사회의 무관심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 신동혁은 그곳에 남아 있는 수용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단 하루라도 바깥 세상을 접하게 하고픈 욕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북한의 인권개선은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이들에 대한 생명과 삶의 조건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와 호소를 외면하면서 민족과 인권을 논의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로 여겨진다. -윤여상(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명언뱅크 미니 e-book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 -신동혁


출처 http://minibooks.cafe24.com/mw-builder/bbs/board.php?bo_table=B01&wr_id=63

댓글목록

초보자님의 댓글

초보자 작성일

김정은은
이 정치범 수용소가 제일 처치 곤란일 겁니다.
히틀러처럼 모두 처형하기도 힘들것이고 통일이되고나면
세습정권의 최대 치부가 될테니까요.

만약 전쟁을 시도 하려한다면 제일먼저 이들을 집단 처형 할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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