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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과 북한군이 사이 좋게 공유한 수류탄에 대한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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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청년투사 작성일12-02-13 08:44 조회5,74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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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님의 5.18 관련 자료 입니다


한 탈북자는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북한군이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일개 조가 광주에서 철수할 때 부상자를 자폭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 적이 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이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한다 (전 러시아 벌목공 2009, 302).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북한군이 수류탄을 소지하는 것은 시민군이 수튜탄을 소지하였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면 정말로 시민군이 수튜탄을 소지하고 있었는가? 그렇다고 모든 시민군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예를 들어, 한일남은 22일 광주공원 시민군도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10-11시경 광주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시민들이 M1, 카빈, 수류탄, 권총, 쌍안경 등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무기가 길바닥에 쌓여 있었는데 나는 카빈총을 집었다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놔두었다. 2백 개 정도의 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원다리를 건너 한일은행 앞으로 오니까 사거리에 개머리판이 없는 총이 하나 나뒹굴고 있길래 하수구에 던져 버렸다 (한일남 1989).

 

화순 시민군 문관은 지원동 시민군도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꼬박 4일간을 지원동 숭의실고 앞의 어느 사진관 옥상에서 3백20여 명의 시민군과 매일 밤 경계를 섰다.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낮에는 마음대로 따로따로 돌아다니다가도 밤에는 언제나 그 정도의 숫자가 그 옥상으로 돌아왔다. 항시 같은 사람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밤 자연스럽게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근무를 섰다. 우리들 중 일부는 수류탄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나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신 15발짜리와 30발짜리 실탄 30클립 정도를 각자 가지고 있었다 (문관 1989).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

 

그 중에는 외국 기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군들은 외국 기자 한 명을 붙잡고 카메라를 빼앗았다. 시민군들은 외국 기자의 카메라에 자신들이 찍히면 잡혀가기 때문이라고 윽박질렀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시민군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만류하여 외국 기자의 카메라를 건네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한전 부근으로 갔다. 지프차를 탄 젊은 청년이 수류탄 2개를 손에 들고 권총을 찬 채 죽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말했다. "수류탄 한 개만 주시오" "줄 수 없소 함께 타고 갑시다. 거기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군인들이 있소 나는 기어이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겠소" 그 사람은 3명의 젊은 청년들과 차를 몰고 달렸다. 그 곳에서 빠져 나와 지나가는 차를 타고 공원 부근 친구 집으로 가서 잠을 잤다 (최인영 1989).

 

시민군은 수류탄을 소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류탄 투척 훈련까지 받았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라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한 장면이 나온다. 시민군 대장이 도청 안에서 시민군에 군사교육을 시킬 때 수튜탄과 같은 원리라는 M18 연막탄 안전핀을 제거하는 연습을 하는 동안 인봉의 손에 들린 연막탄이 터지면서 연기가 실내에 가득하자 시민군이 기겁하며 모두 엎드리는 장면을 시청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 간사 임영희는 자기와 같은 여성 시민군도 깡통 수류탄으로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았었다고증언한다: “양동시장 부근 시위때 윤상원선배에게서 깡통수류탄의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임영희1991, 222).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장이었던 박효선은 광대 단원들로 구성된 시민군 선전조가 수류탄을 품고서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단원들은 시위에 동참했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품고서 밤을 새워 지하유인물을 밀었고 날이 새면 자전거나 군용지프를 타고 정보에 갈증난 시민들 틈바구니를 누비고 다녔다” (박시종 외 1990, 47-48).

 

고등학생 시민군 이지형은 시민군이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있었던 사실을 증언한다:

 

22일 아침 9시경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여 노동청으로 왔는데 우리 동네 사는 나보다 2년 선배인 박근수 형님이 노동청 앞 사거리 광장에서 무기를 나눠주는 틈 속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도 총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총을 한 번도 쏘아보지 않아서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 형은 카빈 하나를 들고 있었고 20여 명 청년들은 카빈총과 수류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탄광에서 사용하는 TNT가 3, 4박스가 있어 서로 나눴다 (이지형 1988).

 

22일에도 시민군 다이너마이트에 대한 시민들의 공포는 여전했다. “무기를 반환하던 날 오전 9시경에 도청으로 나갔더니 도청 지하실에 TNT를 갔다 놓았는데 잘못하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지형 1988).

 

그런데 광주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시민군 다이너마이트였기에 시민 보호를 위해 뇌관을분리시켜야 했던 것인데, 그 8톤이 넘는 폭파물 뇌관이 분리되어 시민들이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오히려 벌벌 떨었음을 고입 재수생 시민군 조철응은 이렇게 증언한다:

 

계엄군이 27일 0시를 기해 시내로 진압한다는 말이 있어서 우리는 26일 오후에 공단 입구 사거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도청으로 들어가니 도청 안은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흥분해 있었다. 도청 안에는 많은 화약이 있었는데 그것을 계엄군 첩자가 들어와 뇌관을 다 없애버렸다는 소문이 퍼져 더욱 불안해 했다.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였다 (조철응 1989).

 

다이너마이트는 도청 시민군 지휘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북한간첩 손성모가 기거하고 있던 학동 증심사 일대에서도 사용되었다.  시민군 김길식은 5월 23일 학동 시민군에 다이터마이트가 분배되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오후에 광주공원에서 카빈 소총 1정과 실탄을 배급받고 차량(시내버스)에 탑승하여 주월동 사거리 쪽과 지원동과 산수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박수도 치면서 밥을 올려주는 등 환호가 대단했다.

금요일(5월 23일)은 학동 두꺼비사진관 맞은편의 숭의실고 건물로 올라가서 3층에서 경비를 섰다. 외곽으로 빠져나간 계엄군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인원은 맞은편 두꺼비사진관 쪽에 8명, 숭의실고에 7명쯤(정확하지는 않지만)으로 약 15명이었다. 가지고 있던 무기로는 다이너마이트 두 묶음, 수류탄 2개, 총기 10여 정이 있었다 (김길식 1988).

 

시민군 박정열은 24일 시민군 보초병들에게 다이너마이트가 지급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한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으며 플 래카드에 `민중들이여 봉기하자!'고 빨간 글씨로 써서 차에 달고 다녔다.

   저녁에는 도청에서 총을 받기 위해서 주민등록증을 확인받았다. 도청에 있는 상황실장이 총기류 소지를 규제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M1 한 자루와 실탄 8발을 받았으며,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친구 김광호와 함께 노동청 맞은편에 있는 향군 회관에서 보초를 섰다. 밤을 새운 후 도청에 총을 반납하였다 (박정열 1988).

 

북한도서 『광주의 분노』는 금남교, 송정교, 철교들을 유사시에 일제히 끊어버릴 목적으로 폭약과 뇌관들로 폭발장치를 해 놓았던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특별경계부대≫는 무등산과 화순방향의 야산지대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광주에서 다른 시, 군들로 통하는 모든 길에 바리케트를 쌓아놓고 ≪계엄군≫의 진입을 막아나섰다.

≪민주투쟁위원회≫는 ≪전남북계엄분소≫의 소굴이 있는 송정리로 통하는 금남교, 송정교, 철교들을 유사시에 일제히 끊어버릴 목적으로 거기에 ≪화순광업소≫에서 날라온 폭약과 뢰관들로 폭발장치를 하여놓았다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103).

 

 

__________________

 

 

ⓒ 이 글은 새 5·18 연구도서 『5·18 기록물이 밝힌 광주사태의 진실』 "제8장 민주화운동에 대한 도덕성의 잣대"에 실릴 글들 중 일부입니다.


즉 이걸로 보아 시민군은 정규군 버금가는 수준이 였음을 증명 합니다
북괴군이 개입 했다는 명확한 또다른 자료 입니다

댓글목록

초보자님의 댓글

초보자 작성일

수고하십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만약 무기고에서 공식적으로 수류탄을 탈취 당하지 않았다는 공식기록이 있어야 위의 내용이 설득력이 있겠네요.

시사논객님의 댓글

시사논객 작성일

초보자님, 님의 질문을 보아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북한군이 수류탄을 소지하는 것은 시민군이 수튜탄을 소지하였을 때만 가능하다"를 거꾸로 이해하신 듯합니다. 분명 북한군은 수류탄을 전라도에서 현지 조달하였기에 무기고에서 공식적으로 수류탄을 탈취 당하였다는 공식기록이 있을 때 위의 내용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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