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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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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6 14:48 조회6,0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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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4년 6월에 생전 처음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방학 없이 1년 반 만에 마치는 경영학 석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미군의 군사원조 중에서 끊이지 않고 가장 오래 지속됐던 것은 교육원조였다. 나는 한국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한 게 아니라 미국 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간 것이다. 미 해군 대학원은 미 육해⋅공⋅군 장교를 위한 학교였지만, 학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연합군 육⋅해⋅공군 장교들도 일부 수용했다. 그 대신 교육비는 이웃 스탠포드나 버클리와 같은 명문 대학에 비해 약 3배 정도 비쌌다. 심지어는 교수와 1대 1로 공부하는 제도도 있었다. 나도 1:1식의 교육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다. 민간 대학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족학교였다.


내가 입학했을 때 한국군의 육⋅해⋅공군 장교는 11명이었고, 그 중 육군이 6명이었다. 높게는 8년, 낮게는 2년 선배들 틈에 끼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4점 만점에 3.65 학점 이상을 받으면 명예롭게 학교 게시판에 부착되는 ‘Dean's List’에 올랐다. 내 이름도 거의 빠짐없이 올랐다. 이에 대해 선배들은 내가 한국 장교단의 명예를 올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못 마땅해했다. “경영학 과정은 쉬운 과정이야. 우리 시스템 공학과정에서 낙제된 장교들이 가는 데가 바로 경영학과야”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컴퓨터과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기상학과, 원자물리학과, 수학과, 시스템공학과, 경영학과들이 있었다. 이들 과에 등록된 학생들은 다른 과에서 제공하는 과목들을 선택하여 학문의 인프라를 넓게 쌓았다. 나는 화가 나서 시스템공학과에서 제공하는 stochastic modeling이라는 확률수학 과목을 택하여 선배들과 경쟁했다. 선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심산이었다.


박사과정, 같은 학교에서 선배들은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후배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대해 속상해 하는 2년 선배가 있었다. “지소령은 한국 장교들은 안중에도 없고 교수들만 상대한다.”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 “박사 자격시험에서 떨어질 거다” 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들을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뛰면서도 예수를 생각했다. 예수같이 훌륭한 성인도 남에게 조롱 받고, 모함 받고, 가시면류관까지 썼는데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그런 비아냥거림에 속상해 하는가.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후배가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그는 내게 1년 이상 엄청난 괴로움을 주었다.


나는 40대의 대부분을 국책 연구소에서 보냈다. 1980년대 초에 내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육사를 나온 3인의 호남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경제, 경영, 정치 분야 박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육사 출신 현역장교들이었다. 그 연구소에는 많은 육사 출신들이 있었지만 이들 3인에게 ‘육사 선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브리핑까지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내가 연구소에 부임하자 3총사는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다. 자기대령 시절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가 내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까지 벌인 적이 있었다.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 터이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양 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냥 발령만 받아 오셨습니다. 이 연구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연구소장 자리는 아무나 와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연구소를 나가야 한다면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3총사 세력만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소장님께서는 3총사를 싸고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부터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을까! 만만히 보였던 나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은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지박사가 삼총사 수장 아무개 박사와 붙었대.” “연구소장하고도 붙었대” 소문이 퍼진 것만큼 그들의 체신도 떨어졌다. 그 후부터 연구소장과 3총사가 한편이 되어 틈만 있으면 나를 왕따 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남들은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나만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얽긴 일을 풀 사람은 임자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없어. 다행이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가서 풀어 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이야” 아! 저렇게 연로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야 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이 엄청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목포 출신인 윤성민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호소했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장관님은 노기를 숨기며 말씀하셨다. “이런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불미스러운 일을 가지고 장관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님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님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들으니, 국방장관님은 장관보좌관을 불러들여 화를 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국방장관은 3총사 모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연구소장을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총사들은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해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을 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 내내 매일같이 국방장관실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 7시부터 국방장관실 문 앞에 꿇어 앉아 장관의 출근을 기다려 용서를 빌은 것이다. 3총사가 해체되고 난 후부터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했고 좋아했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 10년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는 일종의 핵폭탄이었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에 대해 나는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했다. 군 전체가 뒤집히듯 요란했다.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먹고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불과 3개월 후, 그 10년 선배인 황관영 당시 기획관리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중간에 비서관들이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배참으로 던진 이 한마디가 저주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87년 봄, 내가 정처 없이 미국으로 떠난 지 불과 2년이 지나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연구소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율곡 사업은 1974년부터 태동됐다. 1985년과 1986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율곡 사업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경질적일 만큼 관심을 보였다. 1986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의 모든 율곡사업 성과를 낱낱이 재평가하라는 명령을 이기백 장관에게 내렸고, 결국 그 어마어마한 과제는 모두가 회피했다. 그러한 명령은 지금까지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내렸고, 율곡사업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와 나의 연구원들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초미의 관심을 가졌던 사업은 공군의 방공 자동화 사업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 7월1일까지 공군은 그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방공 자동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만 완료되면 대한민국 상공을 나는 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렇게 구매된 방공 자동화 장비는 1985년 7월1일부터 가동됐다.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세 번씩이나 날아왔다.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했고, IL-28기가 이리 지역 상공을 40분이나 헤매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MIG-21기도 날아왔다. 참새까지도 잡겠다던 방공 자동화 시스템은 어찌된 일인지 이 세 대의 항공기 중에서 단 한 대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 사업은 당시 국방비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 미증유의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나는 8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다. 그 컴퓨터 로직을 가지고 공중 표적을 포착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2억5천만 달러의 사업이 불과 25달러 가치도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자동화 장비는 없는 편이 백번 낫기 때문이었다. 유지비와 정비비가 엄청나고 인력은 이중으로 늘어났지만 그것을 믿다간 공중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 자동화사업을 담당했던 오파상을 접촉하여 휴즈사 책임자 3명을 연구원으로 불렀다. 책임자는 대머리가 벗어지고 뚱뚱했다. 그는 내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위엄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제공한 시스템에 하자가 있으며, 이는 대통령에까지 보고가 돼서 대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대해 그는 거만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입니다. 휴즈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즈사가 할 수 없는 일은 어느 회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공군으로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었다. 결국 공군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휴즈사에 코치를 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렇게 기 싸움을 했다. "당신은 통계학에서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를 아느냐? 에러를 걸러내는 Thresh-hold(문지방:기준)를 몇 %롷 잡았는지 알려 달라" 통계학에서는 잡상(Noise)을  실체로, 실체를 잡상으로 오인하는 에러가 있다. 기준(문지방)을 높이면 실상을 잡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문지방을 낮추면 잡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전자를 Type-I 에러라 부르고, 후자를 Type-II 에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런 기본도 몰랐고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에 약점을 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세계 최고가 아니다. 방공자동화는 휴즈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 게 아니냐" 이에 책임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A/S 의무기간 1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나의 동창생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나는 지금 즉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이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도 모르면서 엉터리 시스템을 한국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 그제야 휴즈사 일행이 확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굳게 약속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그들은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는 달리 공군은 방공자동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군은 시스템의 주인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앞으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부터 공군을 더욱 멸시했다. 장비는 분명히 잘못돼 있고, 휴즈사는 이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공군은 그들의 면책을 위해 애국을 던지고 해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구소 건물의 내 방은 일요일 도 없이 밤 1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했다. 내가 맡은 과제만을 수행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여유 있게 생활을 엔조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들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장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몰두했다. 수구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의례 그럴 수 있다 쳤지만, 공군의 이런 자세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합참 작전본부에 설치된 조사팀은 이틀간의 공개토론 끝에 현장으로 나갔다. 토의가 진전될수록 공군은 눈에 뜨이게 내 이론에 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사팀에 있던 장군들이 갑자기 눈초리가 달라지면서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토의는 그만하고 현장으로 나가자며 서둘렀다. 처음엔 그렇게 사명감으로 분칠을 하며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다더니! 공군의 로비가 막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 후 수경사령관까지 했고 김영삼 시대에 하나회로 숙청이 됐다. 첫날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로 갔고, 다음 날에는 대구 팔공산 레이더 기자로 갔다. 나만 쏙 빼놓고 간 것이다. 내가 오산으로 갔지만 공군 헌병중령이 정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야말로 막가는 세상이었다. 후에 연구소 동료의 말을 들었더니 결과는 이러했다. 4대의 헬리콥터를 서쪽으로 띄워 놓고 자동화 장비가 이것을 어떻게 잡아내는지를 관찰했다 한다. 자동화 장비의 화면에 무엇이 나타났을까. 실제로 서쪽에 떠 있는 4대의 헬리콥터는 잡히지 않고, 떠 있지도 않은 비행체 84대가 동쪽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 졌다 했다. 4대의 진짜 비행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84대의 허상만 보여주는 기막힌 장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주한 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 약화보다는 책임추궁을 더 무서워해서 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비들이 많이 지출됐다. 예를 들면 호크라는 방공포는 이동 장비다. 전쟁이 나면 진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작전 개념이 정립돼 있고, 모든 장비가 이동 체제로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300억원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장비가 붙박이식으로 설치됐다. 이동식 유도탄에 붙박이식 통신 장비를 건설하는 것은 코미디였다. 미국의 4C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지만 이는 모두가 겉만 흉내 낸 불량품이었다. 공군은 이 회사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해야 했다. 그러나 공군은 이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공군 참모 총장을 선두로 수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섰다. 이 문제가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자 처음엔 하나회 국방 차관과 하나회 합참 작전 차장이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호언하며 나섰다.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공중 앞에서 다짐해 줄 때는 그들의 온 몸이 사명감이라는 금물로 화려하게 도금돼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던 기무사 간부들이 갑자기 나를 보안 위규자라고 위협하면서 시말서를 쓰라 했다. 우군의 약점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장관과 차관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가 군에서 나가 주기를 바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군을 나와 도미했다. 내가 떠나자 공군과 합동 참모 본부는 대통령에게 ‘방공 자동화사업 이상 없음’이라 보고했다 한다.


1987년2월28자로 나는 예편을 했다. 내가 예편원서를 내자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차관의 입이 벌어졌다고 했다. 연구소에 있는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온 장군 급 민간간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니 스미스라는 여성 보스였다. 그녀는 비용분석 기법에 대한 토의에서 내 발표를 들은 후 나를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내가 연구소를 나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는 한국에 있는 미군 대령을 나에게 보냈다. “지박사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고 싶다”며 미국으로 오라 했다. 미국으로 가자 그녀는 즉각 20만 달러의 과제비를 만들어 내가 다니던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으로 내려 보냈고, 해군대학원은 내게 교수직을 부여했다.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방위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제 수행과정 중 나는 펜타곤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한마디로 주위를 휘어잡는 여장부였다. 펜타곤에 있는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고방식에 접할 수 있었고, 수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내 일생의 전화위복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어려움을 극복시켜준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분은 “지금부터 나는 네 누나야” 하던 천사였고, 그 다음에는 공식석상에서 딱 한 번 만난 이후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미국으로 불러준 바니 스미스라는 미 국방성 여걸이었다. 1987년 4월, 나는 또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홀트양자회에서 어린 입양아 3명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여러 장 주었다.


남들이라면 평탄하게 살았을 인생을 나는 참으로 어렵고도 거칠게 살았다. 만일 절대자께서 내게 어린 시절로 되돌려 줄 테니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느냐고 제의하신다면 나는 즉석에서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꾼 나에 만족한다. 그 만족감을 얻으려면 나는 내가 지나왔던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 걷기에는 그 길은 너무나 험했고, 불확실했고, 아팠다. 


1990년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처녀작을 냈고 이어서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경영학 책을 냈다. 이로 인해 나는 한 10년 동안 군사평론가, 경영학 초빙강연, 기업체 경영진단, 기고 등 바쁘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대북정책이 도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역사를 좌익사관으로 바꾸고 학생들에게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가르치고 국가생존에 절대적 존재인 한미안보시스템마저 파괴하는 등 반-국가행위를 자행하는데 위기를 느껴 이들의 국가파괴 행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계몽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이로 인해 나의 적이 돼 버린 좌익들은 나에게 ‘극우’와 ‘수구꼴통’이라는 딱지를 붙여 확산시켰고, 멋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수구 꼴통인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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