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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 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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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21 조회7,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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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의 병사들이 소년을 취조하는 동안 다른 병사들은 동굴 속을 수색했다. 큰 바위들이 뒤엉켜진 곳에 미로와 같은 동굴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전등을 비추며 이리저리 수색하는 병사들의 신경이 칼날처럼 곤두섰다. 동굴 속에서 이따금씩 총성이 울렸다. 총소리가 끝난 직후의 고요함은 불안감과 아울러 궁금증과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윽고! 동굴 속에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박격포, 기관총, 총류탄, 소총 등 두 트럭분의 양이었다. 중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무기량이기 때문에 주위에 반드시 베트콩들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중대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전과를 보고했다. 후방에 있는 대대장과 연대장의 기뻐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쩌렁쩌렁 울렸다. 헬리콥터를 보내 노획품을 나르기 시작했다. 밀림 속이라 헬리콥터가 내려앉을 수는 없고, 그 대신 20m 정도의 나무 위에서 뒤뚱거리며 정지한 채 나무 틈사이로 커다란 망을 내렸다. 병사들이 이 망에다 노획한 무기를 잔득 채워주면 헬기는 이 망을 두레박 올리듯이 감아 올려 헬기 밑에 매달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1967년 추석날 마을전투 끝에 불탄 마을을 수색하며- 가운데 - 소위시절

엄청난 전과에 흥분한 지휘관들은 병사의 갈증 같은 것에는 미처 착안하지 못하고 무기만 날랐다. 지휘관들에게 이런 전과는 금광에서 발견한 금맥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중대장 또한 갑자기 쏟아진 노다지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대대장님, 헬기에 물 좀 보내 주십시오.”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무기를 실어가려고 날아오는 헬기 망에 물통을 넣어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밤이 깊었다. 갈증에 시달린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소변을 레이션 깡통에 받아 커피를 타 마시는 병사들 수가 늘어났다.  정글 속에서의 어둠은 글자 그대로 칠흑이었다. 햇볕이 내려쬐는 한낮에도 정글 속은 어두웠다. 베트콩이 바위틈을 기어 나와 우리를 하나씩 공격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을수록 공포가 더해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건 갈증이었다. 어디에서 도랑물이라도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는 병사들에게서 간간이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번병이 마지막 남은 오렌지 한 개를 중대장에게 건넸다. 어둠 속에서 중대장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못 본 체 했다. 그는 피- 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반쪽을 내게 건넸다. 주는 그나 받는 나나 말할 힘조차 없었다. 말없이 받아 한입에 털어 넣긴 했지만 갈증은 오히려 더했다.


날이 새자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긴급 요청을 했다. “대대장님, 목이 탑니다. 오바.”

“오! 고생했다. 즉시 보내주겠다. 물을 받을 수 있는 평지로 즉시 이동하라. 오바.” 정글 속을 한발 한발 옮기는 것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행여, 나무 위에, 바위틈에, 숲 속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따닥……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철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독이 묻은 쇠끝이 숨겨져 있는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까. 침묵의 행군을 계속하면서도 병사들의 눈은 지칠 줄 모르고 반들거렸다. 수통들에 물을 채웠다. 행군 중 휴식시간을 맞이했다. 몇몇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경계를 했다. 나는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 앉았다. 의심의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배낭을 옮겨놓는 순간이었다. “어-어!.” 팔뚝 굵기의 슈퍼 급 지네가 나를 향해 더듬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검푸른 등에 노란 선들이 험하게 그어져 있었다. 굵고 긴 다리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악몽을 꾸듯,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청이 안 터졌다. 도망가려 해도 마치 다리가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김- 병- 장-” 악몽을 꾸면서 소리를 지르듯 간신히 소리를 쳤지만 모기 소리였다. 아마도 내 얼굴은 사색이었을 것이다. 굵은 뼈대에 유난히 무성한 구레나룻을 가지고 있는 김병장은 판단이 빠른 중대의 기둥이었다. 현장에서는 사실상 그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뭡니까? 소대장님” 그는 날랬다.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잽싸게 알아차리더니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철모 띠에 꽂혀있는 모기약을 꺼내 지네에게 쏘았다. 지포라이터 사이즈의 플라스틱 모기약 통을 납작하게 누르자 작은 구멍으로 액체가 힘 있게 분출된 것이다. 독한 약이라 지네가 괴로운 듯 몸을 꼬아댔다. 김병장은 지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이 상병에게 명했다. “그어 대.” 이상병이 성냥을 그어 지네를 향해 던졌다. 휘발성이 강한 모기약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무서웠던 대형 지네가 삽시간에 재가 됐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1년을 거의 다 지낸 김병장과 겨우 하룻밤을 보낸 소위와의 차이였다. 사람에 따라 무서운 것이 다 다르다. 나는 뱀보다 메뚜기를 잡아먹는 사마귀를 몇 배 더 무서워했다. 콩알보다 더 작은 삼각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굵게 생긴 앞다리를 거만하게 들고 있는 모습이 그토록 혐오스러울 수 없었다. 그리고 뱀보다는 다리가 많은 지네를 더 무서워했다.


망망 산해를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다녔다. 계곡에 이르자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다. 바늘구멍만큼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가시나무가 들어찼다. 산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 어쩐지 음산하고 가시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산 속에 스멀스멀 베트콩이 배어있는 것만 같았다.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중대장도 그 산을 통과할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대장님, 포를 쏴서 진로를 개척할까요?” “네가 어떻게 길을 내냐?” “어느 통로로 가시게요?” 새로 온 풋내기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산 정수리의 좌표를 따서 포대에 불러주면서 연막탄을 요청했다. 정글에서는 지도 읽기가 어려웠다. 건너편 고지일거라고 생각해서 연막탄을 쏘아보면 발밑에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올려다 보이는 고지 위에 연막탄이 떨어졌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  6발의 포탄이 동시에 떨어지는 소위 “효력사”를 요청했다. 찢어질듯 작렬하는 소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솜털을 세울 만큼 날카로웠지만, 그것이 우리 쪽 포이기 때문에 마치 체한 가슴이 뚫리듯 시원한 쾌감을 주었다. 포탄이 작렬하는 곳에 베트콩이 있었다면 아마도 고막이 파열되고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이상자가 됐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50m 간격으로 내려오면서 효력사를 요청했다. 드디어 100m 눈앞에까지 내려왔다. 파편이 산 밑에까지 날아왔다. 중대장과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짐짓 중대장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내려 쏠까요?” “됐어, 고만 해.” 그 역시 내색은 안 해도 포탄의 위력에 굴복한 듯 했다.


정글 속에서 밤을 지낼 때는 텐트를 쳤다. 전갈이나 뱀이 접근하지 못하게 독한 모기약을 텐트 주위에 뿌렸다. 얼굴과 손에도 발랐다. 병사가 고무베드에 바람을 불어넣고 그 위에 모포를 깔아주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축축한 땅에 우의와 모포만 깔고 잤다. 밤낮을 이렇게 보내면서 지루한 작전을 계속했다. 한 달 후, 헬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왔다. 누구의 얼굴에나 털이 무성해 있었고, 피로에 지쳐들 있었다. 철수할 때의 기분은 이 세상 최고의 것이었다. 막사라 해야 모래밭에 천막을 치고, 베니어판을 이리저리 얽어매 벽을 만든 것이었지만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낙원처럼 느껴졌다. 작전이 끝나던 날, 중대장은 소대장들을 그의 천막으로 불러 모았다. 얼기 직전까지 ‘시아시’된 캔 맥주를 쌓아놓고 마음껏 마시라며 권했다. 크라운과 OB맥주였다.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몇 번씩 살을 꼬집으면서 이 순간들이 생시인지 꿈인지를 확인했다. 꼬집음의 아픔은 고통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기쁨과 희열이었다. 전축에서는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를 비롯해 박재란, 현미, 정훈희 등 당대 여가수들의 히트곡들이 흘러나왔다. 고국에서는 싫증나던 곡들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음의 마디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국은 온갖 꿈과 희망이 담겨있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살아서 고국에 다시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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