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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떼 같은 상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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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43 조회6,0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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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기초군사 훈련은 일명 짐승훈련(beast training)이라 불렸다. 이 훈련은 일과시간의 훈련과 일과 전후의 훈련으로 구분됐다.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일과시간에는 기본 동작과 제식훈련, 소총 분해결합, 총검술, 사격훈련, 포복 같은 기본기를 반복해서 훈련받았다. 이는 점잖고 마음씨 좋은(?) 대위급 선배 장교들이 맡았다. 그들 중에는 육사 12기 박희도 대위님도 계셨다. 일과시간 이전이란 오전 6시부터 8시까지이고, 일과시간 이후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를 말했다. 이들 시간들은 벌떼 같은 상급생들 즉 육사 19기생들이 맡아 주관했다. 일과시간이 천국이라면, 일과 전후의 시간은 지옥이었다. 이들 4학년 선배들은 임무에 따라 구대장 생도, 중대장 생도, 대대장 생도로 구분되고, 대대장 생도에겐 4명의 참모가 포진돼 있었다. 가장 높은 직책은 대대장이며, 대대장 생도의 양쪽 팔뚝에는 노란 V자가 5개 겹쳐져 있었다. 중대장 생도는 4개, 구대장 생도는 3개였다. 1명의 대대장 생도 아래 2명의 중대장 생도가 편성돼 있었고, 각 중대장 생도 밑에 4명씩의 구대장 생도가 편성돼 있었다. 25명 단위로 묶여진 풋내기들은 사실상 구대장 생도에 매어져 있었다. 200명 1개 학년이 8개의 구대로 나눠진 것이다.


풋내기들은 헐렁한 작업복 속에 파묻히고, 무거운 철모에 짓눌려 코흘리개 같이 보였지만, 이들 선배들은 날씬한 몸매에 칼날 같이 주름 잡힌 작업복을 입고, 헌병 모자처럼 반짝이는 플라스틱 파이버모를 쓰고 있어서, 여간 날렵하고 멋있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특히 가장 높은 대대장 생도는 누구라도 선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귀공자의 표상이었다. 매 집합 때마다 4명의 구대장 생도는 그들의 중대장 생도에게 우렁찬 구령으로 보고를 했고, 2명의 중대장 생도는 대대장 생도에게 최종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대대장 생도는 훈시를 하고,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육사의 문을 두드린 귀관들! 오늘도 조국을 지키는 훌륭한 간성이 되기 위한 수업을 쌓느라 수고가 많다 …… 귀관들은 사회에서 길러진 나태함과 썩은 정신을 청산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연마해야 한다 …… 우리는 안이한 불의의 길을 배척하고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는 명예로운 사관이 되기 위해 오늘도 심신을 단련해야 하는 것이다…….”


자세, 걸음걸이, 군대언어, 군대예절, 군인행동 등을 일일이 교정해주는 상급생은 구대장 생도였다. 구대장 생도의 구령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집합 1분전!” “집합 5초전!” “집합!”


후닥닥거리는 소리, 가파른 숨소리, 팔딱거리는 새가슴, 반들거리는 눈동자, 집합은 언제나 이랬다. 모든 집합은 선착순으로 시작됐다. 동작 빠른 녀석들로부터 구대장 생도 앞에 늘어섰다. 앞에서부터 5명을 제외하고는 통상 100∼300m 거리에 떨어진 어떤 목표물을 돌아와야 했다. 6등 이하는 다시 뛰어야 했다. 체면이 있는 녀석들은 죽기 살기로 뛰는 모습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것이 거만한 것으로 비쳐지면 구대장 생도로부터 엄청난 특별교육을 받았다. 개인적인 기합인 것이다. 구타는 금지됐고, 완전군장을 메고 구보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선착순을 여러 번 치르다 보면 한 겨울에도 몸이 젖었다. 턱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숨이 올려 받혔다.


지내놓고 보니, 이런 선착순은 동작을 민첩하게 하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되었겠지만, 불건전한 경쟁의식을 길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관찰한 것이지만 사관학교 출신들 중에는 과도한 경쟁의식으로 인해 기회주의와 출세지상주의에 젖은 인물들이 꽤 많았다. 경쟁의식으로부터는 위인도 탄생할 수 없고, 위대한 작품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가슴을 황폐화시키고 편협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악습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청운의 꿈이란 4성 장군이 되는 것으로 이해됐고, 이는 출세지상주의로 연결됐다고 생각한다.    


1⋅2학년 여름 훈련에는 화롯불 같이 뜨거운 진흙 위를 뒹구는 훈련이 많이 들어 있었다. 갈증으로 인해 입술이 타들어 갈 무렵이면 애타게 기다리던 10분간 휴식이 선포됐다. 사병들이 고무로 만든 물주머니를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검은 고무로 만들어진 물 자루는 언제나 한 개였다. 서로가 먼저 마시기 위해 선착순으로 달렸다. 누가 봐도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여러 개를 걸어 주었다면 아마도 다소간의 신사도가 몸에 밸 수 있었을 것이다. 물주머니가 하나냐 여러 개냐, 이 작은 선택이 생도들의 정신과 매너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신사도를 길러 주려면 신사도를 기를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정교하게 만들어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들로부터 가장 많은 간섭을 받는 것은 차려 자세였다. 쉬운 것 같지만 매우 어려웠다. 양 무릎을 꼭 붙이고, 어깨를 펴고, 턱을 당기고, 눈은 15도 위를 응시하는 자세다. 하라는 대로 해보지만 누구나 다 모양 나는 차려 자세를 취하지는 못했다. 15도 위를 보라고 하니까 눈알을 하얗게 뒤집는 녀석도 있었다. 가슴을 내밀라고 하니까 가슴만 내밀고 궁둥이를 뒤로 잡아 빼는 녀석도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녀석이 이럴 때는 참다못해 웃음을 터트렸고, 웃으면 웃는다고 넓적한 손바닥으로 가슴패기를 후려 맞았다. 다리가 휘어서 양 무릎이 붙지 않는 녀석은 무릎을 붙이려고 바들바들 떨며 구슬 같은 땀을 흘렸다.


호기심이 많은 녀석들은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눈알을 자주 굴렸다. 옆의 동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복장 검사를 받을 때 바지의 단추 선과 상의의 단추 선이 일치하고 있는지, 거기에 허리띠의 버클 선이 일직선으로 일치하는지도 궁금했다. 궁금한 게 많은 녀석일수록 눈동자를 많이 굴렸고 눈동자를 많이 굴릴수록 웃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귀관, 웃∼어?”


두툼한 손바닥으로 어깻죽지를 한 대 얻어맞으면 웃음은 오간데 없고 금세 주눅 든 강아지가 돼버렸다. 그 모습을 훔쳐본 또 다른 녀석들은 당장은 긴장하지만 선배의 눈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마자 킥킥거렸다. 키가 작은 녀석과 큰 녀석이 마주보고 서 있으면 큰 녀석이 손해를 보았다. 작은 녀석이 15도 상공을 보면 그 눈길은 큰 녀석의 얼굴에 꽂혔다.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큰 녀석이 무의식중에 작은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키 큰 녀석의 어깻죽지에는 뜨거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알것습니다.”, “한당께?”, “화장실에 갔으면 참말로 쓰겄습니다.”


지금은 귀에 익은 사투리들이 당시에는 그렇게도 낯설고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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