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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5:43 조회7,2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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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10월 나는 학위증을 받아가지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기체를 떠나 연결 복도를 통해 공항 건물로 막 들어서는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청년이 내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왜 나를 찾느냐 했더니 중앙정보부에서 아무개 차장님이 모셔오라고 하셔서 나왔다고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나를 국방과학연구소에 데려가셨던 그 11기 선배님이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나가신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짐을 찾아야 할텐데요” “짐은 저희가 다 챙기겠습니다” 두 사람은 김포에서 이문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일체 말이 없었다. 이튿날부터 출근하면서부터 나는 부장이나 차장급에 보고되는 일일정보 보고서를 읽을 수 있었고, 이른바 S-리포트라 불리는 도청자료도 읽었다. 그런 자료들 중에는 맥주 회사 A가 대만에 수출 길을 터놓으면 B사가 뛰어들어 과당경쟁을 유발시켜가지고 수출가를 떨어트려 서로 피를 본다는 내용도 있었고, A정유사가 중동으로부터 싼 가격에 원유수입 계약을 체결해놓으면 B정유사가 또 그 업체에 뛰어들어 수입가격을 올리는 등 그야말로 추한 내용들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여러 차례 정부기관 대표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지만 답답하게도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무역협회에 권한을 주어 어느 한 업체가 뚫은 길에 다른 업체가 뛰어들 수 없게 했으면 좋겠는데 처음 간 사람이 서슬 퍼런 사람들 앞에 끼어들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일단 중앙정보부 요원이 되기 위한 4개월짜리 단기 속성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들여 북한자료, 공작관계, 심리전 등 될수록 많은 분야의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어 견문을 넓혔다. 당시의 중정은 참견하는 범위가 넓었고, 권한이 큰 데 비해 해결책을 이끌어내는 조정능력들에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의 동기생인 그 차장님은 내게 세 가지 안을 내놓고 2개월 안에 선택을 하라고 하셨다. 하나는 청와대 비서로 가는 길, 또 하나는 중앙정보부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길,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국방연구원이라는 연구소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2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을 했다. “저를 연구소로 보내주십시오”            


가장 먼저 손을 댄 부분이 국방비의 72%를 차지하고 있던 운영유지비 관리에 대한 것이었다. 각 부대별 자원배분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는지, 배분된 자원들은 각 부대단위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실태분석과 대안을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는 곧바로 국방부 과장급 이상 군 수뇌부 모두가 모여 있는 국방부 전체회의에서 40분간 발표됐다. 연구소에 간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연구원들은 대회의실 뒤에 있는 영상실에서 슬라이드를 넘기고, 나는 국방장관과 연합사 부사령관, 각군 총장 등 수많은 장군들과 대령들 앞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라 해도 여러 번 읽어 발음을 숙달하지 않으면 소리에 윤기가 없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해 두었었다. 일생에서 처음 해 보는 처녀 발표였다.


“이 자리에 계신 장관님, 각군 총장님, 그리고 참모님들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혹시 전방의 사단이나 비행단이 각기 1년에 얼마의 국방비를 소비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 . 아마 없으실 겁니다. 각 부대에는 가계부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의 물자를 사용했는지, 어디에 무슨 목적으로 사용했는지를 기록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몇 개 부대에 나가서 흩어진 자료를 대략 쓸어 모아 보았습니다. 전방 1개 사단은 대략 연간 300억원 정도의 돈과 물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성이나 대우의 연간 운영예산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관리책임자가 없습니다. 사단장님께 물어봐도 자기는 이 300억원에 대한 관리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자가 부족하면 청구한다, 주면 쓰고 안 주면 그럭저럭 보낸다, 이런 판에 내가 무슨 책임을 지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1사단이 사용하는 비용에 대해서 제1사단장이 책임 없다 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장관님이 책임을 지십니까, 아니면 총장님이 책임을 지십니까? 아니면 모두에게 공동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까? 두 사람 이상에게 공동으로 책임이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국방비의 72%인 운영유지비가 바로 이렇게 무책임 하게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은 한 사람에게만 부과돼야 합니다. 공동의 책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의 예산은 사단장이 단일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단장이 책임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사단별 관리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단별로 관리참모를 가져야 하며, 관리회계 시스템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부대는 경제주체입니다. 부대와 부대 간에는 거래관계가 형성돼야 합니다. 군수부대는 물자를 퍼주는 부자의 부대, 전투부대는 아쉬운 소리 해가며 받아쓰는 동냥의 부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까지 군수부대는 물자를 사서 산타클로스 입장에서 미운 자 고운 자를 가리고,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가려가며 물자를 배급해 왔습니다. 군수물자는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였던 것입니다.”


“경제기획원은 돈에다 색깔을 칠해서 나누어 줍니다. 국방예산 담당관도 이런 식으로 경제기획원에 예산을 신청합니다. 이는 마치 100만원 봉급자에게 한 가지 돈으로 100만원을 주지 않고 노랑색 3만원, 파랑색 5만원, 빨간색 12만원 식으로 색을 칠해서 100만원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색깔이 없는 100만원의 돈을 주면 가정주부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현실에 맞게 창의적으로 예산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만일 100만원 중에서 3만원은 노랑색을 칠해서 쌀 사는 데만 쓰게 하고, 4만원은 파란색을 칠해서 문화비로만 쓰라고 해 보십시오.  쓰다 보니 파란 돈은 남고 노란 돈이 모자랍니다. 바꾸어 달라고 하면 행정이 매우 불편하고 불이익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 정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Colored Money System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제 군수사령부는 물자를 임의대로 사서 하급부대에 일방적으로 배급해 주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사단으로 하여금 돈을 가지고 와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게 하는 백화점이 돼야 합니다. 지금은 군수예산을 군수부대에 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단에 주어야 합니다. 가정주부에게 돈을 주는 것입니다. 군수물자 창고에는 많이 팔려서 모자라는 물자, 적게 팔려서 남아도는 물자가 생기게 됩니다. 남은 물자는 그만큼 다음해에 적게 구입하고, 모자라는 물자는 즉시 더 사다가 놓아야 합니다. 이제 소비자인 사단은 가정주부처럼 쿠폰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물자를 구매해야 합니다. 사단은 소비자, 군수부대는 백화점, 경리는 은행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는 소비부대의 창의력과 능동적인 자원관리 노력에 의해 좌우돼야 합니다. 군수사령부는 물자를 사서 배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정돈해 놓고 사단에서 구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


회의를 주관하는 실무자 대령이 맨 앞에 앉아 있다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홈런”을 쳤다는 식으로 힘 있게 엄지를 올려 보이며 윙크를 해주었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어가는 동안 그 넓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날 오후 연구소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국방부에 난리가 났소, 지박사 홈런이오. 축하하오. 윗분들이 얼마나 지박사와 나를 칭찬하시는지 기분이 너무 좋소. 장관님이 예산개혁을 시작한다 하오, 지박사를 자주 부르실 거요” 며칠 후 윤성민 국방장관은 예산개혁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지휘서신 1호를 하달했다. 그 지휘서신은 내가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지만, 국방장관님은 글자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달했다. 당시까지 국방물자는 공기나 물처럼 반자유재로 취급됐다. 주면 쓰고, 남으면 내다 팔거나 폐기처분해 버렸다. 정교한 광학장비도 함부로 다루었기 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고장 나면 수리 보내면 되지 뭐” 이게 물자와 장비를 대하는 군의 정서였다. 미군이 거저 주는 물자이기 때문에 주인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예산개혁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모든 장비에는 관리 책임자가 지정됐다. 장비에 비용이 발생하면 관리책임자의 비용카드에 비용이 기록되게 함으로써 상도 받고 벌도 받게 했다. 모든 장병에게 비용의식이 강요된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엄청난 의식혁명이었다. 모든 사단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들어갔고, 자원관리참모가 신설됐으며, 부대마다 비용절약 운동이 확산됐다.


그러나 잔치를 벌이면 중간에 한건 잡아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사단단위 자원관리 시스템 역시 내가 주도해야 할 일이었는데, 실무부서 장군들과 대령들이 중간에 나서는 바람에 개혁이 내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 계급씩 올라갔다. 이로 인해 군의 일각에서는 “지만원 때문에 장군 여럿 됐다”는 말이 돌았다. 시스템 설계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런데 실무 대령과 장군들은 내가 거저 해 주겠다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업체에게 개발비를 주었다. 업체가 개발한 프로그램들은 그야말로 엉터리였다. 그들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수많은 자료를 생산해 냄에도 불구하고 막상 경영개선에 필요한 자료는 생산하지 못했다. 업체와 어울려 돈 잔치만 한 것이다. 국방부의 예산개혁 분위기로 인해 1982년부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국방비는 물론 정부 전체의 예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개혁에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전 정부 부서에 영기점 예산제도(Zero Based Management System)를 강요했다.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가 주도하던 것이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5년에 걸쳐 예산 개혁을 주도했다. 예산개혁이 그를 장수 장관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예산관리 근대사에 가장 칭찬받아야 할 의식개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지금까지의 모든 국방장관들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몇 해 전 설치된 ‘국방획득청’ 역시 내가 연구하여 윤성민 장관의 호응을 얻었지만, 중간에 차관 이하 수많은 국방부 국장들과 군수 장군들의 반대로 변질됐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전차사업단’, ‘155밀리포 사업단’ 하는 식으로 한 단계만 발전하는 선에서 마무리돼 버렸다. 육사 지역에 ‘시스템 대학원’을 만드는 방안을 만들어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장관은 너무 좋아했지만 이 역시 당시 김복동 육사교장과 알력관계를 가지고 있던 기획관리실장의 반대로 국방대학원에 체계분석대학원을 세우는 것으로 변질됐다. 이 대학원은 지금까지도 운영돼 오고 있다. 육사에 있는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육사생 만을 위해 존재하기에는 매우 아까운 존재들이었다. 당시 60명 정도의 박사들을 대학원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나는 육사 지역을 선택했지만, 이 역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것으로 종결됐다. 지금도 육사 교수부에 있는 이 아까운 존재들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원수 슐리펜이 전선의 우측을 강화하여 해머(망치)로 사용해야 한다는 소위 슐리펜 계획을 작성했지만, 그 뒤를 이은 몰트케 장군이 그 작전계획을 변경해 가지고 작전을 했다가 실패했다. 여기에서 전쟁사 연구자들은 “슐리펜 계획은 슐리펜이 수행해야 성공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나는 군에서 많은 개혁적 대안을 내놓았지만 기성 수구세력에 밀려 헛수고만 했다. 보좌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지휘관 자신이 유능해야 하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머리는 남으로부터 빌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머리가 비어 있으면 그 머리는 먼저 점령한 사람이 임자가 됩니다. 머리가 나쁘면 선동적인 말은 잘 들어도, 과학적인 내용은 골치 아프다며 멀리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는 좌익이 먼저 점령해 버렸고, 당신 시대로부터 대한민국이 좌익화와 쇠퇴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조달관리제도도 연구했다. 계약제도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확정가 계약’(FFP;Firm Fixed Price Contract)이고, 다른 하나는 ‘원가정산제 계약’(Cost Reimbursement Contract)이다. 전자는 마치 남대문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는 것처럼, 계약 시에 한번 정한 가격을 끝까지 바꾸지 않고 구매하는 계약제도이고, 후자는 계약 시에는 가격을 정하지 않고 있다가 업체가 제조과정에서 합법적으로만 지출한 비용이면 모두를 사후에 정산해 주는 계약제도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익도 업체 몫이요, 손해도 업체의 몫이다. 일단 가격이 확정되면 그 가격에서 얼마를 남기든 그것은 업체의 것이 되기 때문에 업체는 경영개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정가 계약을 해놓고서도 군은 정산을 통해 업체가 남긴 것을 도로 빼앗아 갔다. 이러다 보니 업체는 구태여 경영개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 다. 이는 장기적으로 군과 업체 모두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 결국 업체의 방만한 경영이 유발시킨 낭비는 결국 국민세금으로 전가됐고, 방만하게 경영을 해야 더 많은 이익을 보는 업체는 국제경쟁력을 잃게 됐다. 사후원가정산제는 매우 비효율적인 제도이다. 업체가 유발시킨 방만한 경영결과를 모두 정부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원가정산제는 연구개발 사업과 같이 기술적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사전에 원가를 확정할 수 없을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적용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한국군은 사실상 100% 모두를 사후정산제로 하고 있으니 그 낭비가 얼마이겠는가? 선진국에서라면 지금 한국군이 추진하고 있는 거의 모든 방위산업 물자를 확정가계약으로 계약할 것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조달본부 계약 건수 중의 85% 정도는 확정가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후관리라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어, 사실상 100% 모두가 다 원가정산제로 계약되고 있었다.


‘확정가계약’을 체결하면 단 한명의 구매관이 수백 개의 계약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원가정산제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200여 명의 원가요원들이 윤곽이 뻔한 내용을 가지고 1년 내내 원가정산을 하고 있었다. 원가정산 노력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지만 원가 내용은 오직 업체가 발생시킨 ‘직접비’로 제한돼 있었다. 직접비만 계산하면 간접비와 이윤은 이미 국방부 원가과 요원들이 원시적으로 만들어낸 ‘제비율’이라는 율을 곱해 산출했다. 통상 200% 내외로 책정돼 있었다. 직접원가만 나오면 거기에 2배를 곱해 얹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업체는 조달본부에 가서는 직접비를 높이려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국방부 원가과 요원에 접근해서는 비율을 가급적 높게 받으려고 노력했다. 시스템이 이렇듯 원시적이기 때문에 조립업체 입장에서 보면 같은 부품이라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국산부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엄청난 이익이었다. 국산화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같은 제품을 외국으로부터 1억원에 구매하면 2억원의 간접비와 이윤을 할당받고, 2억원에 구매하면 4억원의 이윤과 간접비를 할당받았다. 비용을 부풀릴수록 이익인 것이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공무원들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웃지 못 할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고낭비는 장부기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고, 감사원 감사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감사관들의 눈도 공무원의 눈만큼 깜깜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고급 시스템 분석가들이 필요한 것이었다. 한명의 유능한 시스템 분석가는 수십조 원의 낭비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공무원이 다 분석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능력이 없는 공무원들은 간단한 일만 처리하게 하고, 시스템 자체가 국고를 절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예산집행은 구매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그 모든 구매행위가 이렇듯 무모한 행정에 의해 집행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실체를 장관에게 보고했고, 장관은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역시 중간 간부들의 억척스런 저항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계약제도가 맑아지면 뒷거래가 없기 때문에 방해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먹이사슬인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조달본부 구매관들이 항공기 부품, 잠수함 부품, 전차 부품, 특수 물자 등 광범위한 품목에 걸쳐 500-600배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1,500배로 구매한 사례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시대에는 국방관리에 대한 개혁작업이 일체 보도된 바 없다. 아마도 지금은 더 악화돼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FMS차관을 사용했다. 연간 2-3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 그 돈을 가져오지 않고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연방은행(Federal reserve Bank)에 자동으로 예치해놓고, 한국군이 구매한 액수만큼 정산을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결산은 순전히 미국 정부에 의존했고, 한국 조달본부는 관심조차 없었다. 미국이 1달러짜리 부품을 1,500달러로 계산하여 정산을 해도 시정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품목도 정비비도 이렇게 바가지를 썼다.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레이더 기지, 방공포 기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력의 공백상태도 파악했다. 묻혀있는 지뢰의 성능도 평가했고, DMZ의 취약성도 평가했고, 문산 통로를 지키는 부대들의 작전계획과 군수계획이 일치하지 않는 점들도 폭로했다. 특검단장 정호근 중장은 나를 한동안 방위산업업체 감사를 위한 자문관으로 활용했다. 특검단 감사관들에게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잘한 일을 잘못한 일로 오해하여 억울하게 처벌을 주거나, 개악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정호근 특검단장은 자기와 함께 동행하면서 감사관들이 관찰한 내용들과 그에 대한 감사관들의 판단이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진해 해군장교 클럽에서 파티를 했을 때였다. 해군 1성 장군이 “지박사는 너무 예리하기만 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없어”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특검단장이 그 해군장군을 불렀다. “자네 지금 무슨 말했어. 어느 놈이든 지박사를 험담하면 내가 가만 두지 않는다. 지박사는 국보다. 그리고 내 동생이다. 자네 벌주로 이 소주 한 병 다 마시게” 그 장군은 글라스로 소주 한 병을 즉석에서 마시는 벌을 받았다.


통상의 연구팀장들은 몇 명의 고급 연구원을 이끌고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팀장들은 통상 자기 팀에서 수행하는 과제를 몇 개의 챕터로 나누고, 각 연구원에게 챕터 제목을 할당해 주며 각자 연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권위주의였던 것이다. 각 장-절을 할당받은 연구원들은 과제 전체의 윤곽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가 맡은 분야만 연구했다. 팀 전체가 그리는 그림이 코끼리인지 말인지 알지 못한 채, 어떤 연구원은 동물의 귀도 그리고, 다리도 그렸다. 그러나 그 귀나 다리가 코끼리의 것인지 말의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분량 채우기에 고심들을 했다. 팀장은 가끔 한 사람씩 불러 챕터별 연구의 진행사항을 체크하지만 그 체크 과정에는 토의가 없다. 팀장은 불만을 표시하고, 팀원은 기분이 상하는 그런 과정일 뿐이었다. 드디어 과제수행 기간이 만료되면 팀장은 연구원들이 제출한 챕터를 모두 합철하고 말았다. 과제는 하나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뚜렷한 맥과 흐름이 없었다. 챕터마다 칼라와 문맥이 다르고 일하는 재미도 없었다. 연구원과 팀장의 능력은 해가 갈수록 퇴화됐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과제를 수행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과제를 토의에 의존했다. 여러 날에 걸쳐 연구원들을 모아놓고 브레인스톰 과정을 통하여 지혜를 짜냈다. 과제의 스펙을 확실하게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제품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제품의 사양서(스펙)를 설계하듯이, 어떻게 생긴 과제결과를 내놓을 것인지에 대한 사양서를 쓰기 위한 과정이었다. 처음엔 막연했다. 각자가 내놓는 아이디어들은 어설프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황당하게 들리는 옆 동료의 말에서 각자는 힌트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2주가 지나서야 모든 연구원들은 과제가 생산해낼 결과 즉 제품에 대해 뚜렷한 개념을 정하게 되었다. 개념이 뚜렷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전됐다. 일은 나누어서 했지만 다른 동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중간 중간의 토의에 모두가 참여했다. 다른 동료가 연구한 내용에 대해 서로가 지혜를 짜내서 보탰다. 나는 수시로 연구원 방에 들려 그들이 혹시 마음에 가지고 있을지 모를 애로를 챙겨주고 연구 궤도를 수정해 줬다. 모두에게 일하는 재미가 있었고 연구원과 팀장의 능력이 날로 향상됐다. 일을 늦게 시작했지만 과제는 가장 먼저 끝내면서 결과에 대해 늘 자신감을 갖게 됐고 칭찬도 받았다. 과제가 끝나는 날이면 나는 나의 팀 15명을 데리고 나가 당시 스탠드바를 통째로 빌려서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노래하게 했다. 


  대령 때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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