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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치산녹화(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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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3:38 조회6,4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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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치산녹화(촌장)
박정희 대통령과 치산 녹화(촌장)

미국의 한 하원 의원이 지난 1997년 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 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탄성을 내뱉은 이유는 더욱 주목을 끌었다.
얼핏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들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남북한 간에 천양지차인 산림녹화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띤 반면 남한은 녹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남북한 사정은 정반대였다.
한국의 산이 오늘의 북한처럼 벌거벗은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게 된 것은
불과 20년 안팎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1984년 임업 통계 요람’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 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 중 8그루 이상이 박대통령 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 사업
성공 국가로 꼽고 있다.

산림 녹화에 대한 박대통령의 의지는 1964년 12월에 서독 방문을 마치고
산림 관계자들에게 한 오기 서린 말 속에 배어 있다.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는 유럽에 안 간다.”
경제 개발 자금을 얻기 위해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서독 방문에게서
기대 이하의 차관을 약속받은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는 이후 다시는 유럽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경제 고문으로 서독 방문 때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씨는 “박대통령은 서독의 정돈된 농촌과
푸른 산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집권 초의 박대통령은 산림 녹화 의욕에 비해 경험이 못 미쳤던 듯하다.
녹화 촉진 임시조치법(1963년 2월부터 1964년 12월까지의 한시법)을 마련하여
공무원, 학생, 병역 미필자들을 나무심기 사방 사업에 투입하는 등
강력한 산림 보호 시책을 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농산물 증산을 위해
개간 촉진법(1962년 2월)을 시행, 산지 야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산림녹화에 아이디어가 많았던 대통령--

어쩌면 이 시기에 박대통령의 머리는 수출과 산업화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산림녹화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모른다.

박대통령이 산림 녹화에 다소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1973년 1월 16일 손수익(한국경제사회연구원 회장)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던진 ‘당부의 말씀’에서 어렴풋이 확인된다.

“고속도로, 공업화, 새마을 운동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치산 녹화가 잘 안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 녹화를 이룩해 봐.”

손 청장은 5년 8개월간 재임하면서 집무실 입구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고 써붙여 놓고 제1차 치산 녹화 10년 계획(1973-82년)을 진두 지휘,
예정보다 4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손씨가 1996년 9월에 산림청이 주관한 ’치산 녹화 현지 순례‘에서 밝힌
회고담이다. “1975년 박 대통령의 경기, 경북 연두 순시 때
수원에서 대구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했습니다.

가시는 동안 경부고속도로 양편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150분 동안 무려 50건, 3분마다 한 건꼴로 지시했습니다.
받아 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지요.”

임도(산불 진화나 병충해 방지 작업 등을 위해 만든 산길)을 횡으로
내도록 한 이른바 ‘추풍령식 조림’도 “큰비가 올 때 한꺼번에 흘러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볼 때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다“는
박정희의 아이디어였다.

1977년부터 11월 첫째 토요일이 육림 일로 지정된 것 역시
그 해 식목일에 박정희가 ”가을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반드시 확인하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박대통령의 산림 보호 열성은 수천 년 이어온 한우들의 식성까지 바꿔놓았다.
농림장관과 초대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김보현 씨의 증언이다.

“1972년 여름 경제 동향 보고 회의 때 박 대통령께서 ‘소에게 끓인
여물을 먹이느라 땔감이 많이 들어가니 생풀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합디다.

실험 결과 끓여 주는 것보다 영양가가 높게 나왔어요.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에게 생풀 먹이기 운동을 벌였지요.”
1973년부터 벌어진 농가 아궁이 개량 사업,
1975년부터 나무와 수자원 보호를 위해 취해진 낙엽 채취 금지령도
그의 지시였다. 연탄 사용을 장려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을 지낸 김의원씨는 “무연탄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탄광에서 인근 철도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우선적으로 닦았다”고 회고했다.

조립사업과 함께 진행된 사방 사업은 당시 산림녹화의 핵심 사업이었다.
영일 지구 사방 사업은 박정희 시대 가장 특기할 만한 국토 개조 사업이다.

1971년 9월 17일 우수 새마을 시찰자 이곳을 지나면 박대통령이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곳”이라며
완전 복구를 지시함에 따라

1973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1977년까지 총 공사비 38억 2,800만 원,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돼 황폐지 4,538ha를 녹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소요된 묘목만 2,400만 그루, 돌과 뗏장은 각 230만 개에 달했다.
일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주위를 사로잡았던 박대통령의 특징은
여기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당시 경북 도청 산림국장을 지낸 박상현 씨의 증언을 들어 보자.
“1975년 4월 17일 그날은 폭풍우가 엄청나게 몰아쳤어요.
그런데 박대통령께서 해병대 지프를 가져오게 해 현지로 가자는 거에요.
영일 군청에서 브리핑 장소까지 헬기로 2-3분이면 되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지요.

폭 3m 미만의 비포장 도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동안 김수학
경북지사는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피멍이 들고 난리인데도
굳이 현장을 보시겠다니........”

--대통령의 ‘산불 담화문’--

박대통령은 곡강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주변 플라타너스 10여 그루가
2-3m 높이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했다.
전봇대를 세우면서 전깃줄에 닿을 위험이 있다며 잘라 버린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김 지사에게 “저거 누가 잘랐어?
20년-30년 걸려야 저런 나무 하나를 키워 내는데 그래 3만원짜리
전봇대 때문에 그걸 잘라냈단 말이야.
당장 조치해 보고하시오” 라는 불호령이 떨어 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열정이 아니었던들 일제가 1907년부터 50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화전 정리 사업도 산림 녹화에 한몫 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년 계획으로 펼쳐진 이 사업은
공비 소탕 작전 하듯 군용 헬기까지 동원, 강원 경북 충북 등 깊은
산간 지방에 흩어져 있던 30여만 가구를 정리했다.

당시 강원도 철원, 화천군 산림과장을 지낸 김금철씨는
“화전 부락에 들어 갔다가 술 취한 화전민이 낫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전남 승주, 경북 상주 등지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르자
1978년 4월 ‘산불 예방에 관한 대통령 특별 담화문. "산불을 낸 사람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처벌하도록 하는 동시에 산불이 발생한 지역의
군수 등 각급 행정 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이며…….’ 라고

발표한 것 역시 산림 녹화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 애족에 집념어린 지도력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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