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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아는 것이 참 진보이다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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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10 조회8,0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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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아는 것이 참 진보이다 (역사학도)
여지껏 강정구 류의 좌익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 수령 숭배주의가 진보라고 우겨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본래 진보란 문명의 진보를 말하며 그것은 과학의 진보와 과학적 사고 방식의 정착을 의미한다.  그러면, 언제 조국 근대화가 실현되었는가?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부터였다.  5.16산업혁명은 한국의 과학 혁명이었다.

    남한에서 좌익의 친일 청산 개념은 아주 잘못되어 있다.  좌익은 북한이 친일 청산의 모범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북한의 친일 청산이었던가?  그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군자금을 후원한 애국자들을 도끼로 쳐 죽이고 가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안두희 씨의 부모처럼 일경 감시 몰래 독립군자금을 후원하였던 분들은 누구보다도 조국 해방을 기다렸던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애국자들을 도끼로 쳐 죽인 것이 친일 청산의 모범이라고 주장하는 데서부터 남한 좌익 논리는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좌익이 친일 청산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든 아마 서기를 단기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본래 단기는 조선 총독부 패러다임의 연속이었다.  전 세계가 서기를 사용하는데 한국만 단기를 사용하면 그 혼선은 말할 수 없으며 다른 나라와의 정보 공유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1960년대 초까지 사람들이 단기 연호를 고집하였던 것은 일제 시대에 소화라는 연호를 썼으니 그 전통을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호를 서기로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은 단발령에 대한 반발만큼이나 거센 것이어서 5.16군사혁명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좌익들 중에 그 누구도 다시 상투를 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고종 황제의 단발령은 개화의 상징이었으며,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단발령에 저항한 것은 항일 운동이었다기보다 전통을 무조건 고수하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 전에 또 하나의 근대화의 상징은 철도 건설이었다.  아마 친일 청산파 족속 중에 그 누구도 철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일본이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에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을 개통하기 전까지는 한국인들은 도보 여행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철도 부설 이전의 도보 여행이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낭만적은 아니었다.  홀로 산길을 걷다 보면 언제 호랑이의 습격을 당할지 몰랐었기에 대부분의 한국인은 평생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았었다.  즉, 반만년의 역사 중에 여행이 보편화된 시대는 고작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이 깔아준 철도가 한국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하였다.  본래 한반도에서는 800만명 분 이상의 식량 생산이 불가능하기에 과거 천년간 인구 500만명이 그대로 유지되었었다.  그런데, 만주 철도는 만주에서 식량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케 하여 3천만명을 먹여 살렸으며, 1945년 8월 러시아군이 만주철도를 정복한 후로는 식량이 동이 났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 제국주의에 동전의 양면의 성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래 서구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상은  근대 문명을 전세계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변수가 생긴다.  근대화의 첫 단계는 철도 부설인데, 한 나라에 철도를 부설하는 데는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렸다.  따라서 후진국에 공짜로 철도를 부설해 줄 선진국은 없었다.  그래서 철도를 무료로 깔아주는 대신 철도 운영권 지분을 가져가는 것이 유럽 제국주의의 형태였으며, 대다수의 나라들이 그런 계약을 유럽 선진국들과 맺었었다.  청나라 역시 스스로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나 철도는 꼭 필요하였기에 자진하여 유럽 국가들과 그런 계약을 맺었었다.

    그러면 한국이 어떻게 근대화의 열차를 타게 되었는가?  작년에 일단의 무식한 이들이 한승조 교수 글을 이해하지 못하였었기에 여기 다시 몇자 적어본다.  한승조 교수는 "일본이 1945년에 패전국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을 위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했는데, 좌익은 이것이 친일 발언이라고 하였다.  아니, 그러면 1945년에 일본이 승전국이 되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항일이요, 애국이란 말인가?

    무엇이 한승조 교수의 논지였는가?  참 진보는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외교학자의 눈에 무엇이 정치외교학적 사실이었던가?  그것은 근대 문명은 거저 타국으로 이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한국의 반도체 기술, 자동차 생산 기술을 중국같은 후진국에 거저 넘겨주는 것이 가능할까?  국가와 국가 사이에 그런 일은 없다.  한국인의 민족성이, 한국 여론이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는가.  그런데, 일본은 우리나라에 발전소와 철도와 항만 시설 등의 산업 인프라를 건설한 후에 운영 지분을 조금도 가져가지 못하고 강제 송환당하였기에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되었다.

   사실, 1945년 10월의 미군정은 우리나라 역사를 전혀 몰랐으며,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복이 되었다.  일본 기술과 자본으로 건설된 것들에 대하여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그들의 소유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를 전혀 몰랐던 미군정은 남한의 모든 일본인을 강제 송환시켰으며, 송환될 때 호주머니에 단 한푼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다.  1945년 10월의 미군정의 논리에서 일본인들은 모두 수탈 도둑놈들이었으며, 따라서 도둑놈들은 한 푼도 일본에 가져가면 안되었다.  일본은 패전국이었기에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야 했으며, 한국은 승전국 대우를 받았다.  한승조 교수는 이것이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했는데, 일단의 무식한 좌익들이 이것을 가리켜 친일 발언이라고 공격하였었다.

    1945년 10월 미국은 우리나라와 일본은 동등한 기술 자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였었다.  그런데, 1960년 장면 내각의 무능한 경제 정책을 지켜보던 미국은 그 해에 한국사를 연구하여 한국과 일본은 기술 자원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발견하였다.  그때까지 미국은 한국 한 나라에 유럽 전체에 마샬 플랜으로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지원을 했었는데, 한국인은 국산품을 생산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일본에서 수입해다 쓰고 있었다.  즉, 미국이 원조해 주면 해 줄수록 한국 경제는 일본에 종속되어 가고 있었기에 미국의 무상 원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으므로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니 바로 그 날이 5.16 혁명일이었다.  그날까지 한국에는 단 하나의 수출 기업도 없었으며, 한국 기업은 으례히 수입상들 뿐이었다.  그런데, 5.16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 날 수입상 업주들이 국산품 생산 공장을 짓기로 국가에 서약하였다.  한국의 GNP 90%를 차지하던 미국 원조가 중단되면 한국은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군부로 일어나 산업혁명을 단행케 하였으며, 삼성을 비롯한 수입상 업주들이 5.16군사혁며의 본질은 산업혁명임을 재빨리 알아채고 국산품 생산 공장을 짓기로 서약하였다.  

    그러나, 비록 5.16산업혁명이 일어났어도 처음에는 연필과 백목 등 간단한 필기 도구 공장들밖에 지어지지 않았으며, 가발산업이 최대 수출 업체였다.  그런데, 1966년 한미정상회담 때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은 한미정상회담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지난 12월에도 부산에서 노무현과 부시 대통령간 정상회담이 있었으나 짧게 보도되어 대다수의 국민은 까맣게 모로고 있었다.  그러나, TV가 아주 희귀품이던 40년전에는 달랐다.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자 서울 시민이 미국 대통령 모습을 보기 위해 모두 거리로 몰려나왔으며, 그 환영 인파의 열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정상회담 석상에서 존슨 대통령의 방한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박정희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지어달라고 하였다.  김대중이라면 분명 자가용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선물 희망사항을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 모습에 존슨 대통령은 크게 감동받았으며, 그날의 존슨 대통령의 약속은 미국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간의 약속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이 미국이 단지 첨단 시설로 "한국 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지어주고 운영자금을 대어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과의 "한국 과학기술연구소"(KIST) 프로젝트의 정신은 기술 이전이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들이 바뀌어도 미국은 이 계약을 준행할 의무가 있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 기술을 이전해 오려면 무수한 산업 스파이들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구에서 200년 걸려 발전하는 중화학공업이 어떻게 단 10년만에 한국에서 발전하는 것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기술 이전을 해올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공장부터 짓고나서 필요한 기술을 미국에 요구하면 미국은 무조건 그 요구에 응하여야 했다.

    오늘날 한국이 LCD 모니더 생산에서는 세계 1위인데, 그러한 기술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기술이 없던 나라가 최단기간에 최첨단 기술 보유국으로 성장한 비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술 이전권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오래 장기 집권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우 미국 국민 스스로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집권 자격을 부여하였었다.  민주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왜 그리하였는가?  그것은 좋은 경제 정책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합법적 기술 이전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끝이 났다.  그 이후 한국의 과학 기술은 제자리 걸음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쌓아놓는 기술 몇개만 중국에 추월당하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막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신에는 그만한 당위성이 있었다.  그리고 유신 반대는 실로 무모한 것이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조국 근대화 운동 선구자로서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과학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박정희의 부정은 과학의 부정이다.  박정희의 부정은 포철의 부정이요, 고속도로의 부정이요, 한국 산업혁명과 과학 혁명의 부정이다.  과학의 부정이 진보일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진대, 참 진보를 이해하려면 좌익이 왜곡 색칠하는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를 보아야 한다.



사진 설명: 지방 고등학교들을 순시하시며 과학 교육 현황을 살피시는 박정희 대통령.

언제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고등학교 과학 교육 증진에 관심을 가진 일이 있던가?  

산업혁명과 과학 혁명은 구체적으로 일어난다.  한국 과학 인재의 발굴과 육성은

5.16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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