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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승화의 혐의 지우기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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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09 조회8,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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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정승화의 혐의 지우기 행진


김재규를 신문한 이학봉 수사국장은 10월 27일 새벽에 김재규의 자백을 통해 정승화의 행적을 알아냈고, 이런 정승화가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 등과 일체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그리고 예행연습이라도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비상상황을 처리를 하는 것을 수상히 여겼다. 27일 오전 11시, 이학봉은 오희명 수사계장을 대동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가서 정승화를 구속수사 하자고 건의했고, 전두환은 즉석에서 그렇게 하라고 결재를 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을 다시 불렀다. 결재를 번복한 것이다. 국무회의가 정승화에게 이미 대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에는 김재규-정승화 인맥이 상당했고, 여론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전두환은 불구속 상태에서 극비로 은밀하게 내사하라는 지시를 다시 내린 것이다. 이 지시를 해놓고 전두환은 10월 27일 새벽 4시에 정승화 총장을 찾아가 “시해장소가 궁정동 안가 식당이였다 합니다”라는 말을 던져 반응을 살폈다. 이에 정승화는 '김재규의 요청으로 안가에 갔었다'는 사실도 숨겼고, 궁정동에 ‘안가’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며 시치미를 떼었다. 전두환이 돌아가자 정승화는 새벽 5시에 황급히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아가 자신이 김재규의 초청으로 중정 안가에 갔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 처음으로 실토했다.


합수부는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된 다음날인 10월 28일에 수사에 대한 중간발표를 해야만 했다. 발표내용은 정승화에 의해 사전에 조율됐다. 따라서 이 중간발표(“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차 수사결과발표”)에서는 정승화가 관련됐다는 것을 일체 언급하지 않고, 김재규가 범인이었다는 사실, 범행동기, 김재규 및 그 수하들의 범행과정을 약술한 후 합수부가 김재규를 구속하여 죄상을 수사하고 있다는 점까지만 발표했다. 이를 놓고 역사바로세우기에 동원된 검찰과 재판부는“위 발표문에는 정승화의 관련 부분이 없었는데 어째서 후에 정승화 관련 문제를 새로 제기했느냐, 없는 죄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이렇게 주장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1996년 5월 27일, 역사바로세우기 1심 10회 공판에서 이학봉은 이렇게 진술했다.


변호인: 10월28일 당시 합수부에서는 10.26시해사건이 김재규와 정승화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내란행위이고, 그 배후에는 상당한 군부의 동조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지요?

이학봉:

변호인: 동조세력에 의한 또 다른 내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지요?

이학봉:

변호인: 이와 같은 이유로 10.28일 제1차 중간발표에서는 정승화의 행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요?

이학봉: 예   


정승화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고 마당에 2성장군인 전두환이 “정승화가 수상하다”라고 발표하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수사본부는 끈질기게 정승화에게 질문을 했지만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이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수사본부는 차 내에서 병력배치 사항을 주고받은 사실,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벙커에 도착하여 군수뇌를 소집하고 병력을 동원 한 후, 이를 김재규에게 보고하면서 병력배치 장소를 문의한 사실,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을 금지시킨 사실, 수경사령관에게 청와대를 포위케 한 사실, 국무회의 장소를 청와대가 아닌 국방부에서 하도록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건의한 사실 등에 대해 질문했지만 정승화는 이 모든 핵심 사항을 숨겼다. 그리고 '총장의 말을 못 믿는 것이냐' 화를 내며 4일간에 걸쳐 윽박질렀다.  


내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정승화는 10월 28일, 합수부장에게 시해사건 당일의 정황을 설명해 줄 테니 수사관을 총장실로 보내달라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다음 날인 10월 29일 오후 8시부터 12시까지 이학봉 수사1국장, 검찰에서 파견 나온 정경식 검사 그리고 2명의 수사관들이 총장실로 갔다. 거기에서 정승화는“나는 김재규와 교분이 전혀 없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이 아니다.“나는 안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10월 26일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는 진술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정승화는 1977년 12월, 1군사령관으로 발령받자 궁정동 안가의 김재규 사무실에 찾아가 부임인사를 했고, 1979년 4월에도 김재규가 육해공군 총장들을 만찬에 초대했을 때 갔었다. “김재규가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장소는 청와대 경내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진술도 했다.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그날 밤 7시에 김재규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정승화를 찾아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말을 던지고 바로 돌아갔으며, 총소리가 나자마자 맨발에 피 묻은 와이셔츠를 입고 달려왔다. 다중의 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궁궐에 사방으로 널려 있는 그 많은 경호원들이 보는 앞에서 와이셔츠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청와대 경내는 맨발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다닐 수 있는 여염집 마당이 아닌 것이다.“나는 자하문 밖에서 나는 몇 발의 M-16 총소리로 들었다”는 진술도 했다. 이 말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시 시해현장에서 수백 미터나 떨어진 30경비단에서도 총소리를 듣고 병력출동을 준비했었으며, 대통령 경호실에서도 안가로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이 있었다. 불과 50미터 가까이에서 난 40여발의 권총 및 M-16 총소리를 멀리에서 난 가느다란 총 울림으로 들었다고 하면서 그 총소리가 M-16 총소리라고 단정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M-16 총소리는 병사들이 내는 소리이지만 권총소리는 병사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의미가 아주 큰 총소리인 것이다. 성격이 이러하기에 정승화는 그는 M-16소리 밖에 듣지 못했다 한 것이다. 총소리에 대해 정승화는 진술할 때마다 표현이 다 달랐다.


진술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기에 수사관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이리저리 지적하자 그는 화를 내며 당신들이 감히 계엄사령관의 말을 의심하느냐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그는 10월 29일 오후 8시부터 밤 12시까지, 10월 31일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그리고 11월 1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추가로 3차례나 더 불러 구술 내용을 수정시켰다.‘노재현의 지시로 김재규를 체포하였다’는 그 전 내용을 ‘총장 단독으로 결심하여 체포를 지시했다’고 바꾸라 했다. ‘차안에서 20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삭제하라고도 했다.‘10.26 이전에 김재규를 만나 김영삼이 민주당 총재로 당선된 배경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을 삭제하라고 했다. 이는 조사에 협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으로 인식됐다.


 정승화는 10월 29일 오후 8시의 조사를 앞두고, 그날 낮 12시에 1,2,3 군사령관과 1,5,6 군단장을 초청하여 오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다음 자기를 중앙정보부로 유인하려 했지만 역으로 자기가 육군본부로 그를 유인하였으며, 김재규에 대한 체포도 자기가 지시하였다는 말을 했다. 김재규의 내란음모를 저지시킨 사람은 바로 정승화 본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정승화의 이런 행동은 계엄사령관의 지위를 악용하여 자기가 일등공신이었다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그를 향한 수사를 봉쇄하려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에 이학봉 수사1국장은 11월 2일, 또 다시 정승화의 연행조사를 건의했다. 이에 전두환은 노재현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고 연행조사를 넌지시 떠보았다. 하지만 노재현은 “계엄사령관을 지금 조사하면 난리가 나고 시국이 불안해지니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라”며 만류했다. 이 역시 이해가 간다. 당시 사회에는 10.26에, ‘정승화를 포함한 군부’가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번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분위기에 대해서는 정승화도 알고 있었다.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의 88족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재규의 범행에 대한 전모 발표를 국민들이 몹시 기다리고 있는 데다 꾸준히 나의 관련 여부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였다. 나는 속히 전모 발표를 하라고 본부장에게 여러 차례 독촉했다.      


10월 말부터 정승화는 합수부에 김재규내란사건 조사를 빨리 종결하라는 압력을 여러 차례 가했다. 사건을 정승화 자신이 관할하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빨리 송치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정승화는 본연의 임무를 제쳐두고 전-후방 부대를 수시로 방문하여 여러 장군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자신은 대통령 시해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변명했다. 이는 수사의 조기종결을 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힘자랑이자, 확산돼 있는‘총장 연루설’을 불식시키기 위한 행위로 보였다. 벌써부터 정승화는 노재현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주역을 담당하고 있었다.“12.12 사건 정승화는 말 한다”의 103-104쪽을 통해 정승화는 이를 인정했다.


1979년 11월 초, 노재현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다음 대통령으로 최규하가 가장 무난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다. 나는 이에 동의하며, 군은 내가 설득할 테니 장관께서는 국무위원들을 단합시켜 최규하 총리를 잘 설득 하시지요 하고 말했다. 노재현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자기의 눈치를 살피는 듯 하다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최규하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적임자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과도정부는 1년 전후 길어도 2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했다. 다음날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최규하 총리의 동의를 얻었다고 알려왔다.   


위 책의 105-106쪽에도 정승화의 정치개입 사실이 드러나 있다.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일을 며칠 앞 둔 11월15일에 조찬회가 있었다. 조찬회의 주요 논제는 김종필 씨 문제였다. 김종필이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결정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와 노재현 장관은 내가 공화당에 압력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데 합의했다. 나는 공화당 길전식 사무총장과 장경순 정책위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최규하 총리를 대통령으로 밀기로 합의했는데 공화당이 후보를 내면 혼란만 가중되니 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공화당 의원총회는 김종필씨를 후보로 옹립하기로 가결했고, 김종필씨가 이를 수락하지 않는 형식으로 입후보를 포기했다.


위와 같이 수사의 대상인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함께 사실상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정치인들과 내각이 정승화의 눈치를 살필 만큼 세상은 정승화의 것이 되어 갔다. 2성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으로서는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의 이러한 기세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국민적 의혹은 점점 더 고조되고, 수사종결시한(20일)은 가까워 오고, 전두환은 초조했다. 11월 6일, 전두환은 서둘러 12일간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군부 또는 여타 세력의 조직적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1996년 3월 18일, 역사바로세우기 제2차 공판에서 전두환은 이런 말을 했다.


김상희 검사: 11월 6일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형식으로 정승화 총장은 당시에 김재규의 범행에는 관련이 없고, 오히려 적절하게 대처를 했다 이렇게 답변한 사실은 기억이 나십니까.

전두환: 억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박대통령이 시해당한지 며칠 안 됐지 않습니까? 정부는 아주 무력하고 상대적으로 계엄사령관이 국가권력을 거의 다 장악하게 됐습니다. 그 권력 쥔 사람을 합수부에서 아주 은밀히 내사를 하고 있는데 공개석상에서 당신 합수부가 내사하고 있소 이런 소리하다가 모가지 몇 개가 견디겠습니까, 겁나서 그런 소리 못했지요, 그것은 방편입니다.


발표문은 정승화의 심사를 거쳐 작성되었기 때문에 정승화에게 불리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단지 두 가지 사실, 즉 사건 당시 정승화가 김재규의 초청으로 궁정동 안가에 있었으며, 그 후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본에 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승화가 사건 현장 부근에 있다가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국민은 경악했다. 그동안 나돌던 “총장연루설”이 한층 더 증폭됐다. 정승화가 김재규 행위에 묵시적으로 동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비등해 졌고, 정승화의 관련설에 대해 끝까지 조사하지 않는 합수부를 향해 정승화와 야합했다는 식의 여론이 새롭게 일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11월 8일, 김재규가 “3단계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이 계획은 정승화를 사건 현장에 개입시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고, 정승화를 시켜 계엄을 관리시키고, 정승화를 혁명위원장으로 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정승화의 적극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정승화가 B-2벙커에서 취했던 행동은 바로 이 ‘3단계혁명론’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정승화를 구속해야 한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시국은 정승화와 노재현이 한 편이 되어 주도하고 있었다. 울분을 참으며 전두환은 11월 13일, 정승화를 뺀 나머지 8명이 포함된 내란사건에 대해서만, 정승화가 관할하고 있는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김재규 사건이 전두환의 손을 떠나 정승화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로써 합수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바라만 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부터의 재판은 정승화가 관할하게 되었고, 김재규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정승화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정승화는 김재규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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