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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원세개, 袁世凱
요약 테이블
출생 1859년
사망 1916년

청나라 말기의 대군벌.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입국해 내정에 관여했으며,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을 창설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혁명동맹회를 이끄는 쑨원과의 약조에 따라 선통제를 폐위시킴으로써 청 왕조를 멸망시킨 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황제가 되려고 한 야심가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는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을 창설하고 사병화함으로써 훗날 중국 군벌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국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조선에 주재하면서 내정에 간섭했고, 귀국한 후에는 중국 군대를 신식화했다. 총독, 내각총리대신, 후작까지 오르며 요직을 차지하는 동안 그는 음모와 배신을 거듭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결국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와 연합하여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러나 이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고 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고립되었다.

위안스카이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허난 성(河南省, 하남성) 샹청(項城)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위안스카이는 어린 시절 학문에는 뜻이 없어 1876년과 1879년 향시에서 거듭 낙방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경군통령 우장칭(吳長慶)의 휘하에서 군사적 재능을 펴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장 처음 주어진 기회는 1882년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이었다. 상관이던 우장칭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자 위안스카이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임오군란에 직접 참여하여 반란을 진압했으며,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했고, 이로써 ‘동지’라는 직책에 올랐다. 여기에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을 구출하는 등의 활약을 하며 이듬해 이홍장으로부터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었다. 이른바 청나라의 대조선 정책을 도맡은 것이다. 그는 자신을 조선 총독이라 생각하고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다. 또한 조선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왕보다 상석에 앉고, 궁궐 내에서 말과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청나라를 견제하려던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음모까지 꾸미는 등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조선에서 책략을 거듭하던 그가 귀국한 것은 1894년 6월 21일,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위험한 기류가 흐르자 일본의 청나라 침공에 중간 전투지가 될 조선에서 재빨리 피신한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을 친 그에게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청 정부가 새롭게 군대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안스카이는 휘하에 있던 북양군을 서양식 군대로 육성했다. 북양군은 원래 이홍장이 자신의 안휘 부대를 현대화하여 북양군과 북양함대로 재조직한 것인데, 이홍장 사후 위안스카이가 맡으면서 더욱 현대적으로 성장시켰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은 이후 군벌로 성장해 중국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사이 위안스카이는 1898년 무술변법에서 개혁파를 배반하여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고,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면서 열강의 신임까지 얻었다. 또한 1901년에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이 되었다. 이렇게 그의 위세가 높아지자 이홍장은 청나라 귀족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았고, 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고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이 되면서 그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위안스카이는 다시 군사적 전권을 장악했다. 난징(南京,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와 청 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던 그는 청 정부를 배신하고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와 연합하여 선통제를 스스로 퇴위하게 했다. 이후 그는 쑨원을 대신하여 중화민국 임시 총통 자리에 오르고 수도를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옮겼다.

쑹자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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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는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913년 3월에는 국민당 임시 대리인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했다. 이로 인해 혁명이 일어났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제압하고 1913년 10월 정식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했다.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확립한 그는 이듬해 5월 중화민국임시약법까지 폐지하고 봉건적 의미의 대총통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황제 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고,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을 끌어들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같은 해인 1915년 1월 급기야 일본은 위안스카이에게 중국 내의 이권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대중국 21개조 요구안을 제시한다. 이 요구안은 모두 5호 21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호. 산둥 지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이익을 일본 정부에 넘겨준다.
제2호.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에 대해 일본이 우선권을 가진다.
제3호. 중국은 일본과 한야평공사를 설립하며, 광산 채굴에 있어 일본의 허가를 받는다.
제4호. 중국 연해의 도서와 항만은 타국에게 양도할 수 없다.
제5호. 중국 군사와 재정 부분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중국 경찰과 군대에도 일본인을 고용하고 일본이 무기를 공급한다.

21개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중국 내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으나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로써 막대한 권리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중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일본과 위안스카이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그는 같은 해 12월 11일 참정원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의 등극을 감행했고, 이듬해 1월에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한다고 선언했다.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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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와 같은 행보는 중국 국민은 물론 지지 세력이었던 북양 군벌까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서구 열강 역시 지원을 중단했다. 국내외적으로 고립된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3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6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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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숙 집필자 소개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펼쳐보기

홍정숙 집필자 소개

출판기획자이자 역사 전문작가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동·서양 고전 및 역사 인물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출처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홍문숙, 홍정숙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시대의 시작인 주 왕조가 세워진 이후부터 2011년 현재까지 중국사의 전환점을 만든 10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통해 3천 년간의 중국 역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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