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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광주 에 대해서 아시는 분 설명 좀 해주세요
rice**** 조회수 25,016 작성일2009.12.04

제가 알기로 남한의 대학가에 북한의 공작원들이 총학생회와 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대대적(다수의간첩)으로 침투한 것이 1970년대말 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첩들은 대학생들에게 북한에서 조작한 역사를 가르쳤는데 대표적인 역사조작의 하나가 일본을 가장싫어하셨던 이승만대통령이 마치 친일이나 한것처럼 거짓 역사를 조작하여 쇠뇌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듯이 1980년도에는 5.18 광주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518광주 폭동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전두환이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데 ,

1990년대 중반에 있었던 5.18재판에서 전두환은 무죄를 선고받고, 518 광주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은 미재의 사건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도 80년대에 이 광주사건은 전두환이 일으켰다는 조작된 이야기들을 대학생 형들로 부터 전해듣고 전두환씨를 오해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대학생 형들의 잘못된 정보만 들어서 잘못알고 함부로 판단했던 제가 광주사건에 대해서 무죄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89년경 온누리교회에서 조총련 출신 간첩이 대학생 대표들을 포섭해서 쇠뇌시키다가 남쪽으로 전향

한 사람의 간증을 듣고 운동권 대학생들의 편향된 시각의 원인을 알게 되기도 하였었습니다.

 

저도 탈북자들을 많이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그들이 이미 북한에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518광주 폭동은

북한 군인들의 조직적인 개입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최근 탈북자들 수십명이 증언한 북한 군인들이 광주폭동사태를 일으켰다는 증언집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질문 1.

이 책[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이 책 내용 좀 가려쳐 주시면 감사합니다.

 

질문 2.

그리고 이 책[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은 어디가면 살 수 있는지도 가르켜 주세요^^

 

질문 3.

1980년 5.18 한달전쯤에 강원도 사북 탄광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폭동을 또 일으켰다는 데 이것과 518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아시는 분 답변 부탁 드립니다.

 

 

(화려한 휴가가 아니라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다.)

(5.18민주화가 아니라 5.18무장공비 폭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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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북한이 기획-실천했다는 데 대한 증언들

1)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돼서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다.(35쪽 5-8줄)

2) 당 기관에서 말하는데 의하면 북한군 특수부대들과 전문 공작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광주봉기를 비롯해서 주요 항쟁시위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35쪽 11-13줄)

3) 5.18 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TV에서는 매일과 같이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6쪽 9-12줄)

4)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갔다가 온 친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하게 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36쪽 하 3-6쪽)

5) 테레비에서 보았다. 친구 한명이 텔레비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
(37쪽 7-9줄)

6)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정했다고 하였다.(37쪽 하 4-5줄)

7)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에게서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38쪽, 9-10줄)

8) 대학을 마치고 3대혁명소조 기간에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가서 싸우고 온 사람한테서 들었다.
같이 나갔다가 죽은 사람을 불태워서 흔적을 없애 버렸다고 말하였다.(38쪽 하 5-7줄)

9) 광주봉기를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하였고, 북한사람들은, 더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 텔레비를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39쪽 1-6줄)

10)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51쪽, 8-11줄)

11)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52쪽 8-14줄)

12)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56쪽 10-13줄)

13)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59쪽 4-10줄)

14) (내 내연의 남편인 공화국 영웅은)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76쪽 하7줄-79쪽 10줄)

15)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80쪽 하5줄-81쪽 14줄)


16)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87쪽 하2줄-88쪽 8줄)

17) 남한에 와서 확인해본데 의하면 이런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에서도 미그19 - 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166쪽 하2줄-167쪽 8줄)

18) 나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196쪽 하7-1줄)

19)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 . 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중대의
구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인민항쟁에 어떻게 되어서 북한에 있을 사람들이 나가서 참가하고 있는지
참으로 희한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부대에서 한가마 밥을 먹던 사람이 광주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성근이네 중대 사람들은
그때부터 광주사건이 남쪽에서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특수부대사람들이
나가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204쪽 하8줄-205쪽 하7줄)

20)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문제가
생각 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서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
(208쪽 하4줄-209쪽 하6줄)

21)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습니다.  .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었습니다.(221쪽 10줄-222쪽 5줄)

22)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무장폭동을 전후로 북한의 민간사회에서는 별의별 이상하고 흉한 소문들이
다 나돌았습니다. 남조선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전사들이 다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등
누구네 집 아들은 광주에 갔다가 죽었는데 당원증만 집으로 보내어 왔고
또 뉘 집 친척의 아들은 남조선에서 죽은 시체는 못 가져 오고 손목 하나만 잘려서 들어왔다는 식으로
참으로 광주사건과 관련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이 항간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223쪽 9-19줄)

23) 조직부 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231쪽 1-13줄)

24) 군단조직부지도원이 우리에게 들려준데 의하면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북한전투원”은 자기들은 북한의 명령에 따라서 처음에 광주시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의 시위만 지켜볼
뿐 며칠 동안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나서서 과격하게 이끌어 가면 단번에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광주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235쪽 2-11줄)

25) 머리가 긴 사람들 여러 명이 괴뢰군 복장에 소총을 들고 군인 한 명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무참하게 두들겨 패서 실신하게 만드는(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음) 장면이 나올 때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머리가 긴 부분은 정규부대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군인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군인을 때려죽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299쪽 9-15줄)

26)‘대내지휘관에 한함’이라는 등급 표제를 달아서 총정치국에서 지휘관용으로 내려 보내는
강연 자료에는 광주사건과 관련된 김일성, 김정일의 발언들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광주사건은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 좋은 기회였는데 남조선 인민들한테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리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공작조들의
배후교란 작전이 기술적으로 부족하고 크게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광주사건이 남조선의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 기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300쪽 하5줄-301쪽 4줄)

27) 창고장(공화국영웅)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 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 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319쪽 7-15줄)

28) 땅굴은 시멘트로 구축해서 영구화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규모는 탱크(북한말로 땅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 정도는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되어
전라북도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344쪽 하1줄-345쪽 10줄)

29)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375쪽 9-13줄)

30)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 원들이
남조선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교란작전으로 주요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396쪽 하1줄-397쪽 12줄)

31) 신변상문제를 우려하는 본인의 거절로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특수부대출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위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자극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국가전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광주학살을 대한민국 국군 쪽으로 돌리고
김정일을 감싸주고 있는 친북좌파 애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비꼬았다.(421쪽 14-21줄)
2009.11.18.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200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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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박사님의 맺음말

민주화의 상징 중의 한 사람인 문익환이 김일성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공개돼 있다. 그의 초상이 '민족통일상 수상자'라는 글자와 함께 북한 기념우표에 그려져있다. 5.18의 주역 서경원이 간첩혐의로 10년형을 거의 다 살았다. 5월 18일 오후 4시에 경찰관 15명을 인질로 잡았다는 윤기권(19)이 그 공로로 2억원을 받고 폭동 12년 후인 1991년에 월북했다. 간첩말고는 데려갈 사람이 없다. 김대중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공개된 간첩이었다(김대중이 사형판결을 받은 이유는 대한민국 전복을 목표로 대남적화 사업에 종사하는 북한의 하수조직인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수괴라는 점 때문이었다.  2004년 서울 고등법원은 김 前대통령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 관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韓民統 결성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인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그후 김대중은 상고를 포기한다. 결국 한민통의 수괴라는 점은 지금도 뒤집혀지지 않은 것이다). 이래도 5.18에 붉은 색깔이 보이지 않는가? 어디까지 보여줘야 붉은 빛을 보았다 하겠는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탈북자들이 5.18의 진실에 대해 그리고 김대중 문익환 등 북의 앞잡이들에 대해 진실을 증언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5.18단체들은 이번 증언집을 놓고 “허위사실”들이라고 주장할 논리와 사실적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18 단체측은 지금부터라도 공수부대를 인간 이하의 살인집단인 것으로 오해한 데 대해 사과를 하고, 북한의 야욕을 경계하는 데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북한이 광주인들 모르게 와서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인간 이하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구체적으로 증언해주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북한의 만행을 감춰주고 감싸주면서 그래도 공수부대가 어디까지나 광주의 원수라고 우기는 행위는 애국행위도 아니거니와 5.18의 명예를 스스로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북에서 온 사람들이 처녀의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낸 행위들이 북한 특수군이 와서 저지른 행위라고 이실직고 하는 마당에 5.18단체들은 어째서 이에 분노하지 않는지 참으로 불가사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군 침투설을 부정하는 근거

다른 한편으로 광주에 북한군이 없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가장 큰 논거가, 북한군이 광주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계엄령이 선포되어서 해상과 육상이 계엄군에 의해 차단됐으니 어떻게 북한군이 들어왔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이 수차례 간첩들에게 침투당한 역사를 떠올리면 도저히 그런말 못한다.

 

6.25 직전까지 군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했다. 그런데도 6.25 초기 작전은 간첩이 지휘했다. 군이 가장 긴장해 있었던 박정희 시대를 보자.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가 북한 특수군인들을 무려 31명이나 이끌고 청와대 앞까지 왔는데도 군은 이를 잡지 못하고 문 앞에서 겨우 잡았다. 이를 계기로 군은 더욱 감시를 철저하게 했는데도 9개월 후인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무려 130명의 북한 특수군인들이 울진-삼척으로 들어와 이승복을 비롯 23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김영삼 시대인 1996년 9월 18일, 상어급 북한 잠수함이 강릉 해변에 좌초하여 밤을 새웠는데도 군은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택시기사가 발견했다. 그 사이 26명의 북한 특수군인들은 산으로 도망을 갔고, 군은 51일간의 작전을 통해 치르지 않아도 됐을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김대중 시절인 1998년 7월 12일, 북한 잠수정이 꽁치를 잡는 어망에 걸려 있는 것을 군은 발견하지 못하고, 어부가 발견한 사실도 있었다.

 

2009년 10월 1일에는 북한 탈북자들 11명이 어선을 타고 동해안으로 오면서 빨리 구조해주기를 바랬는데도 군은 캄캄하게 몰랐다. 10월 27일에는 민간인이 휴전선 3중 철책선을 끊고 월북했는데도 북한에서 방송이 나오는 순간까지 모르고 있었다(전남 벌교 주민 강동림 사건 http://blog.naver.com/szasddse/10072817102). 이처럼 북한특수군인들이나 간첩들이 들락거려도 파악조차 못하는것이 한국의 안보현실인 것이다. 5.18광주에 북의 특수부대가 왔다면 어찌 군이나 정보 당국이 모를 수 있었겠는가? 이런 의문들을 가지는데, 당시의 군과 정보당국들은 이를 철저히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간첩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한국의 사례.

 

1967년 간첩들이 목포로 달려가 김대중 당선에 올인했는데도 당국은 캄캄 몰라
첫째, 김대중은 1967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67년 6월4일 오후 2시, 김대중이 44세 되던 해에 그는 목포역전 광장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이에 대해 거물간첩 출신의 김용규는 그의 자전 소설 “소리없는 전쟁”의 72쪽에서 간첩들로 이루어진 통혁당이 1967년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공화당과의 싸움에서 통혁당 조직원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역전, 터미널, 시장터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목포가 죽느냐 사느냐 사활이 걸려있는 선거다. 목포시를 살리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공화당을 낙선시켜야 한다(낙선운동의 시조)’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72쪽).  

통혁당 간첩들이 목포 선거에서 김대중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지원했지만 당국은 철저히 몰랐던 것이다. 목포 선거를 직접 지휘했던 간첩 김용규가 자백 폭로하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지금은 탈북자들이 수십명 단위로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왔다고 공개 증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래는 거물간첩 김용규의 책 '소리 없는 전쟁'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들이다.  

*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다.
*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 4.19를 북한에세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 5.18을 북에서는 [5.18민중항쟁]으로 부른다
*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 전라도는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남한에는 간첩들이 들끓고 있다. 당국이 잡은 것은 수천분의 1, 수만분의 1일 것이다. 남한의 봉기, 소요들은 이들 간첩들과 자생 빨치산들 그리고 북한의 전문가들이 내려와 지휘했다는 것이 김용규 선생의 증언이다.  

1975년 간첩들이 서빙고에 지하실 차려놓고 광고주들 불러다 협박해 광고해약을 시켜놓고 이를 중정에 뒤집어 씌웠어도 당국은 몰라
둘째,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1975년에 발생한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가 중앙정보부의 소행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김용규 선생은 그의 책 소리 없는 전쟁에서 자기를 포함한 간첩들이 대범하게 저지른 사태였다고 털어놓았다. 동아일보광고해약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형성되어 여러 해 동안 조사를 했지만 국정원은 국정원이 한 게 아니라고만 계속 말할 뿐, 그것은 간첩들의 소행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정보기관의 한계인 것이다.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에 대한 김용규 선생의 글 요지는 이렇다.

"동아일보광고해약사태는 남조선혁명에서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지하당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차명타를 안길 수 있었다. 서빙고 아지트를 이용하여 남산 정보부를 사칭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와 광고대행업자 수십명을 데려다 고문하고 협박하여 동아일보에 예약된 광고 모두를 취소시켰다. ‘당신 동아일보에 내고 있는 광고, 해약하라는 신호 받았소 못 받았소?’, 이렇게 중앙정보부를 사칭하여 음해공작을 벌이는 사이에 1975년 새해가 밝아왔다. 수십 명의 광고주들이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동아일보광고해약사태는 결국 남산 정보부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지하당의 음해-모략 작전은 일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광고해약사태는 동아방송에도 확대됐다”(398-406쪽) 
  
간첩들이 통혁당을 만들어 합법을 가장하여 김대중을 목포에서 당선시켰고, 간첩들이 감히 서빙고에서 지하실을 차려놓고 중앙정보부를 사칭하여 광고주들을 불러 협박하는 일들을 벌이고 그 누명을 중앙정보부에 씌웠어도 정보당국은 이를 까맣게 모른 것이다. 아마도 정보 당국들은 김용규의 증언이 있는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이 두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자신들의 무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지만원

 

애국자 지만원 박사를 바로 알자!!

나는 40대의 대부분을 국책 연구소에서 보냈다. 1980년대 초에 내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육사를 나온 3인의 호남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경제, 경영, 정치 분야 박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육사 출신 현역장교들이었다. 그 연구소에는 많은 육사 출신들이 있었지만 이들 3인에게 ‘육사 선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브리핑까지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내가 연구소에 부임하자 3총사는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다. 자기대령 시절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가 내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까지 벌인 적이 있었다.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 터이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양 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냥 발령만 받아 오셨습니다. 이 연구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연구소장 자리는 아무나 와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연구소를 나가야 한다면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3총사 세력만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소장님께서는 3총사를 싸고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부터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을까! 만만히 보였던 나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은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지박사가 삼총사 수장 아무개 박사와 붙었대.” “연구소장하고도 붙었대” 소문이 퍼진 것만큼 그들의 체신도 떨어졌다. 그 후부터 연구소장과 3총사가 한편이 되어 틈만 있으면 나를 왕따 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남들은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나만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얽긴 일을 풀 사람은 임자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없어. 다행이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가서 풀어 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이야” 아! 저렇게 연로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야 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이 엄청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목포 출신인 윤성민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호소했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장관님은 노기를 숨기며 말씀하셨다. “이런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불미스러운 일을 가지고 장관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님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님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들으니, 국방장관님은 장관보좌관을 불러들여 화를 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국방장관은 3총사 모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연구소장을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총사들은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해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을 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 내내 매일같이 국방장관실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 7시부터 국방장관실 문 앞에 꿇어 앉아 장관의 출근을 기다려 용서를 빌은 것이다. 3총사가 해체되고 난 후부터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했고 좋아했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 10년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는 일종의 핵폭탄이었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에 대해 나는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했다. 군 전체가 뒤집히듯 요란했다.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먹고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불과 3개월 후, 그 10년 선배인 황관영 당시 기획관리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중간에 비서관들이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배참으로 던진 이 한마디가 저주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87년 봄, 내가 정처 없이 미국으로 떠난 지 불과 2년이 지나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연구소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율곡 사업은 1974년부터 태동됐다. 1985년과 1986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율곡 사업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경질적일 만큼 관심을 보였다. 1986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의 모든 율곡사업 성과를 낱낱이 재평가하라는 명령을 이기백 장관에게 내렸고, 결국 그 어마어마한 과제는 모두가 회피했다. 그러한 명령은 지금까지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내렸고, 율곡사업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와 나의 연구원들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초미의 관심을 가졌던 사업은 공군의 방공 자동화 사업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 7월1일까지 공군은 그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방공 자동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만 완료되면 대한민국 상공을 나는 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렇게 구매된 방공 자동화 장비는 1985년 7월1일부터 가동됐다.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세 번씩이나 날아왔다.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했고, IL-28기가 이리 지역 상공을 40분이나 헤매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MIG-21기도 날아왔다. 참새까지도 잡겠다던 방공 자동화 시스템은 어찌된 일인지 이 세 대의 항공기 중에서 단 한 대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 사업은 당시 국방비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 미증유의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나는 8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다. 그 컴퓨터 로직을 가지고 공중 표적을 포착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2억5천만 달러의 사업이 불과 25달러 가치도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자동화 장비는 없는 편이 백번 낫기 때문이었다. 유지비와 정비비가 엄청나고 인력은 이중으로 늘어났지만 그것을 믿다간 공중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 자동화사업을 담당했던 오파상을 접촉하여 휴즈사 책임자 3명을 연구원으로 불렀다. 책임자는 대머리가 벗어지고 뚱뚱했다. 그는 내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위엄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제공한 시스템에 하자가 있으며, 이는 대통령에까지 보고가 돼서 대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대해 그는 거만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입니다. 휴즈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즈사가 할 수 없는 일은 어느 회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공군으로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었다. 결국 공군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휴즈사에 코치를 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렇게 기 싸움을 했다. "당신은 통계학에서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를 아느냐? 에러를 걸러내는 Thresh-hold(문지방:기준)를 몇 %를 잡았는지 알려 달라" 통계학에서는 잡상(Noise)을  실체로, 실체를 잡상으로 오인하는 에러가 있다. 기준(문지방)을 높이면 실상을 잡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문지방을 낮추면 잡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전자를 Type-I 에러라 부르고, 후자를 Type-II 에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런 기본도 몰랐고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에 약점을 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세계 최고가 아니다. 방공자동화는 휴즈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 게 아니냐" 이에 책임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A/S 의무기간 1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나의 동창생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나는 지금 즉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이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도 모르면서 엉터리 시스템을 한국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 그제야 휴즈사 일행이 확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굳게 약속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그들은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는 달리 공군은 방공자동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군은 시스템의 주인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앞으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부터 공군을 더욱 멸시했다. 장비는 분명히 잘못돼 있고, 휴즈사는 이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공군은 그들의 면책을 위해 애국을 던지고 해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구소 건물의 내 방은 일요일 도 없이 밤 1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했다. 내가 맡은 과제만을 수행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여유 있게 생활을 엔조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들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장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몰두했다. 수구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의례 그럴 수 있다 쳤지만, 공군의 이런 자세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합참 작전본부에 설치된 조사팀은 이틀간의 공개토론 끝에 현장으로 나갔다. 토의가 진전될수록 공군은 눈에 뜨이게 내 이론에 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사팀에 있던 장군들이 갑자기 눈초리가 달라지면서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토의는 그만하고 현장으로 나가자며 서둘렀다. 처음엔 그렇게 사명감으로 분칠을 하며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다더니! 공군의 로비가 막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 후 수경사령관까지 했고 김영삼 시대에 하나회로 숙청이 됐다. 첫날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로 갔고, 다음 날에는 대구 팔공산 레이더 기자로 갔다. 나만 쏙 빼놓고 간 것이다. 내가 오산으로 갔지만 공군 헌병중령이 정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야말로 막가는 세상이었다. 후에 연구소 동료의 말을 들었더니 결과는 이러했다. 4대의 헬리콥터를 서쪽으로 띄워 놓고 자동화 장비가 이것을 어떻게 잡아내는지를 관찰했다 한다. 자동화 장비의 화면에 무엇이 나타났을까. 실제로 서쪽에 떠 있는 4대의 헬리콥터는 잡히지 않고, 떠 있지도 않은 비행체 84대가 동쪽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 졌다 했다. 4대의 진짜 비행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84대의 허상만 보여주는 기막힌 장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주한 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 약화보다는 책임추궁을 더 무서워해서 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비들이 많이 지출됐다. 예를 들면 호크라는 방공포는 이동 장비다. 전쟁이 나면 진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작전 개념이 정립돼 있고, 모든 장비가 이동 체제로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300억원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장비가 붙박이식으로 설치됐다. 이동식 유도탄에 붙박이식 통신 장비를 건설하는 것은 코미디였다. 미국의 4C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지만 이는 모두가 겉만 흉내 낸 불량품이었다. 공군은 이 회사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해야 했다. 그러나 공군은 이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공군 참모 총장을 선두로 수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섰다. 이 문제가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자 처음엔 하나회 국방 차관과 하나회 합참 작전 차장이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호언하며 나섰다.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공중 앞에서 다짐해 줄 때는 그들의 온 몸이 사명감이라는 금물로 화려하게 도금돼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던 기무사 간부들이 갑자기 나를 보안 위규자라고 위협하면서 시말서를 쓰라 했다. 우군의 약점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장관과 차관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가 군에서 나가 주기를 바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군을 나와 도미했다. 내가 떠나자 공군과 합동 참모 본부는 대통령에게 ‘방공 자동화사업 이상 없음’이라 보고했다 한다.

1987년2월28자로 나는 예편을 했다. 내가 예편원서를 내자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차관의 입이 벌어졌다고 했다. 연구소에 있는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온 장군 급 민간간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니 스미스라는 여성 보스였다. 그녀는 비용분석 기법에 대한 토의에서 내 발표를 들은 후 나를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내가 연구소를 나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는 한국에 있는 미군 대령을 나에게 보냈다. “지박사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고 싶다”며 미국으로 오라 했다. 미국으로 가자 그녀는 즉각 20만 달러의 과제비를 만들어 내가 다니던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으로 내려 보냈고, 해군대학원은 내게 교수직을 부여했다.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방위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제 수행과정 중 나는 펜타곤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한마디로 주위를 휘어잡는 여장부였다. 펜타곤에 있는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고방식에 접할 수 있었고, 수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내 일생의 전화위복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어려움을 극복시켜준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분은 “지금부터 나는 네 누나야” 하던 천사였고, 그 다음에는 공식석상에서 딱 한 번 만난 이후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미국으로 불러준 바니 스미스라는 미 국방성 여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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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190821    작성자 : 역사학도    작성일 : 2007/08/03     조회 : 6    찬성/반대 : 1/0    점수 : 3  


김대중이 5월 19일까지 직선제 개헌안 취소하라 협박  
  

☞ 김대중 비서실장 출신이 밝히는 김대중의 실체



71년부터 87년까지 김대중의 경호담당 비서로 있다가 그에게서 실망을 느끼고 결별한후 김대중의 비도덕성과 표리부동함을 비판한 (동교동 24시)란 책을 낸 함윤식씨가 90년대 중반에 모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 내용.


☞ 80년 5월 11일 정읍에서 선동 연설

- 김대중씨는 80년 5월 11일 전북 정음에서 열린 동학제에 참석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날의 연설 내용과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는 것은 없으나 대략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 주장을 건의 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 이며.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 이라고 하는 등 선동적이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그날 시간관계상 현지 인사들과 따로 회합한 사실은 없으나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이 귀경하는 김대중씨의 차량행렬 따라 시위와 구호를 외치는 등 분위기는 한껏 고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5 · 18 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

- 80년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정동년씨에게 광주사태를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거사 자금으로 5백만원을 주었다고 했는데

김대중씨는 그 후 이 사실을 부인하고 88년 13대 국회 개원 직후 대표 연설에서 정동년씨와는 처음부터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미국 갔다와서 처음 만났다고 하여 그와의 관련설을 전면 부인 했는데요.

그러나 당시 군 검찰관으로 재판에 관여했던 정기용 변호사는 88년 11월의 국회 청문회에서 김씨가 체포된 후 모든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선생이라 부르며 정선생, 날 살려만 줘요. 난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정선생의 은혜는 꼭 갚겠소 하며 통사정을 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는 저도 후문으로만 들었습니다. 80년 재판은 김대중씨와 다른 피고인들이 분리되어 받았기 때문에 저도 김대중씨의 재판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18 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녀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 자금이 전달 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 명이 5.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등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 김대중 과격노선 군 개입 불러

-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5백만원을 줬다고 해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80년 당시 김상현, 조연하씨 등 측근 참모들과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강경 일변도로 나가면 군부가 개입 할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게 좋겠다고 했으나 김대중씨는 이를 일축해 버리고 장외 투쟁으로만 치달았습니다.

김대중씨는 80년 3월 26일의 YMCA 연설을 시작으로 하여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 선동적인 연설로 일관하여 집회가 끝나고 나면 데모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 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김씨 측에서 동원한 청중들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들은 연설도중 군데군데에서 옳소와 박수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잡고 청중들을 흥분 시켰습니다.

특히 YWCA 집회에서 김대중씨는 미국 대통령 토마스제퍼슨이 한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인용하여 과격하고 선동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연설내용은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책자로 출간 되기도 했습니다.분명한 것은 5 ·18 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 18 이 일어 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씨 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전두환씨도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밝혔지만 저는 그때 김대중씨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 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 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 전복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 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 5월 19일까지 시한부 선전포고

- 5월 12일에는 북악파크호텔에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회의까지 마친 후,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게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을 요구하고, 5월 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 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등 공공연히 선전포고까지 한 걸로 되어 있는데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생데모의 절정을 이루었던 5월 15일의 서울역앞 집회 때 동교동은 크게 고무되어 있었고 김대중씨의 비서들은 모두 다 서울역으로 달려 나가 동교동에는 단 1명의 비서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현장의 상황은 속속 동교동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동교동에는 저만 남아 쉴새없이 걸려오는 이들의 전화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 88년에 서울대 교수로 있던 노재봉씨가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 이라고 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과연 노씨가 말한 김대중씨의 노련한 기술 이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습니까.

<글쎄 저도 노재봉씨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김대중씨가 근본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자 라기보다는 민중혁명에 의한 집권을 지향하는 그의 정치노선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김대중씨는 그 때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군부타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의 과격한 정치노선은 80년 3월  26일 YWCA 에서 행한 연설 전문을 기록한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 책자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 고정간첩과도 만난 김대중

- 김대중씨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한 사실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본인도 스스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김대중씨의 사상적 성향을 판단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사실 그때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않아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어렴풋이 생각해 보면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 말로는 자신은 해방후 呂運亨씨 산하의 건국 준비위원회에 가입 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 했는데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길만이 애국하는 길이라 믿고 뛰어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2년만에 탈퇴했다고 했습니다.

정계입문을 좌익단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김씨의 정치 행적에서 사상적으로 냄새가 좀 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모 중진 화가로 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김대중씨는 67년 6 ·8 선거 때 임자도에서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던 정태묵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진 화가는 현재도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은 원래 정태묵의 동생 정태일과 절친한 친구여서 선거기간 중에 정태묵의 집에서 머문적이 있는데 그 때 그 집에서 김대중씨가 정태묵과 두어 차례 만나는걸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

정태묵과 김대중씨는 목포상고 선후배 관계 였습니다. 물론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자금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만났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 후 정태묵은 임자도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는 고정간첩 임이 드러나 체포되어 처형 당했는데 북한을 10여 차례나 왕래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2005/06/28(23:41)  

http://cafe.empas.com/518/bbs/b3/read.html?asn=35¬ice=0&pno=2&oby=2&odir=0&fd=0&bt=16&ac=50&rurl=list.html%3Fpno%3D2%26oby%3D2%26odir%3D0%26ac%3D50%26fd%3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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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당시 시위구호는 "직선제 개헌 반대" 혹은 줄여서 "개헌 반대"였다.

아래 사진은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 반대 과격시위 선동하여 취소된 개헌공청회 관련 기사



김대중 일당의 5월 19일까지 시한부 선전포고 만기일 5월 19일 신현확 총리 내각 사퇴.  "최규하 물러가라" 시위구호 압박에 최규하 대통령도 곧 하야를 단안할 것이라는 뉴스도 함께.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http://blog.daum.net/sionvoice/10753520

광주사태 당시 광주 31사 한동석 중위의 이어지는 댓글 증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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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지만원  


Subject  
   제3의 4.19 광주반란의 배후는 김대중


  

       장기표, '슨상님 화염병으로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드릴테니 대통령 하십시오'

1980.3.26일, YWCA 강연회에 나가 김대중은 이렇게 강연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러건이 아니라 진실이다”

5.18 수사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980.4.10일 20:00경, 북악파크호텔 501호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국민연합 10여명의 간부들이 북악파크호텔에 모여 대권경쟁에서 김대중이 이기는 방법을 논의했다. 신민당에 들어가면 지지기반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민주화운동’을 돌파구로 독자적인 장외투쟁으로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민주화운동’의 구호는 ‘계엄령해제’ ‘개헌포기’ ‘유신잔당포기’ ‘정치일정단축’ ‘구속자석방’ ‘학원자유’ ‘언론자유’ 등이었다.”

“먼저 학생시위를 유도하고, 분위기를 띄워 학생시위를 학교 밖으로 확산시켜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여기에 국민연합의 예하조직인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이 호응하여 대대적인 반정부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최규하 정부가 궁지에 몰릴 것이며, 국민연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학생집회부터 대대적으로 선동하기로 했다.”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장기표를 조직국장,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임명하는 등 복학생 3명에 선동임무를 부여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선거일정으로서는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므로 차기를 잡기 위해서는 장외투쟁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5.8일, ‘국민회의’가 민주화촉진선언문을 발표하자 전국총학생회장단이 반정부 폭력시위를 결정했다.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인 조성우는 ‘국민연합’의 중앙상임위원장인 문익환의 지시를 받고,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행동지침을 결의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각 대학은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중앙청을 비롯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한다. 데모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맹이, 화염병을 준비한다.”  

회의가 끝난 후 장기표, 심재권은 국민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5월8일,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폭력시위를 벌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거할 계획이며 이렇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

서울대, 연대, 이대 등 전국 39개교에서 시위를 열었고, 20여개 대학에서 농성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했습니다.  

5.9일, 서울대, 연대, 고대, 경희대, 동국대, 홍익대, 외대, 단국대, 숙대, 인하대 등에서 야간횃불시위가 열렸습니다.

5.10일, 서울 대 단과대학들이 철야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11일까지 농성하기로 했다. 고대, 연대. 한양대, 단국대, 서울산업대에서도 야간농성을 벌였습니다.

5.11일, 고대, 연대, 성대, 외대, 경희대, 단대, 건대, 세종대, 숙대, 이대 등에서 교내시위를 벌였습니다.

5.12.17:00시, 국민회의 지도부,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이 북악파크호텔에서 또 다시 회동하여 투쟁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보고와 지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장기표-심재권: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45명이 5.11.15:00시부터 5.12.09:00시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하여 앞으로 잠정적으로 교내시위만 한다. 휴교령 발동시에는 단호히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령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촉구한다. 학원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와의 대화를 위하여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한다는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이어 5.16. 전국대학학생회장단은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러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키로 하였는데 앞으로 학원시위가 확산될 것이 전망됩니다”

김대중: “ 과도정부의 실권을 잡고 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하여 정권을 계속 잡으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빈독재 민주회복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반민주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본쇄한 다음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펴보라”

장기표: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구상을 미리해 두시기바랍니다”

김대중: “알았다”

                     광주사태의 기폭제 김대중의‘국민회의(민주화회복국민회의)’  

1973년 8월 8일의 일본에서 반국가활동을 벌이던 김대중을 납치해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국제문제로 비화되자 김대중은 검열에 걸리지 않을 단어만 선별하여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였다는 것을 널리 알렸고, 이를 근거로 재야의 유신반대 투쟁이 힘을 얻게 됐습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가 교내 4.19기념탑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중앙정보부 해체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각 대학 학생들은 조직적인 연대 투쟁을 계획하여 이듬해 봄부터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1974년 3월부터 경북대, 서강대, 연대 등에서 구국선언이 이어지고, 1974년 4월 3일 이화여대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 이 발표됐습니다. 이것이 곧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이었습니다.

1974년 11월 27일, 김대중은  야당, 종교계, 재야 문인, 언론인등 각계 대표 71인을 동원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 연대투쟁 기구를 창설했습니다. 이어서 김대중은 재야세력과 학생운동 세력 등 반정부 조직들을 총 망라하여 1979년3월,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또 하나의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여기에 명령을 내리는 조직은 ’국민회의‘였습니다.  

1980년 5월의 학원소요는 순전히 김대중 등이 만든 ‘국민연합’이 배후조종한 폭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반정부 노선을 넘어 최규하 정부를 무너트리고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김대중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소요였습니다.

국민회의’ 지도부의 결정은 곧바로 ‘민주청년협의회’에 명령으로 떨어졌고, 이어서 학생회 회장들이 동원됐습니다. 이들 학생회장들은 1980,5.1일, 대정부투쟁 방안을 의논했고, 이어서 5.9일, 서울대 등 21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단협의체를 구성했습니다. 이 협의체는 ‘국민회의’가 제시한 10개 항의 정치적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11일, 2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또 다시 회동을 갖고 5.12일부터 5.17일까지 모든 학교가 대정부투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돼 있는 상태에서도 도심지에서의 폭력 시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5.15일 서울역에서 학생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덮쳐 죽이는 장면을 본 국민, 언론, 군인들은 계엄을 물계엄이라 비아냥거렸고 계엄당국의 물렁물렁한 대응을 비난했습니다.

5.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은 계엄사령부에 학생소요가 경찰력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으니 계엄군이 출동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14일 및 15일 양일간의 소요가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한 투쟁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음모: 1980.5.22 국가를 전복한다

하지만 5.22일로 계획돼 있는 소요는 국민연합 등 소위 재야정치 당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이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5.17. 11:00시, 국방부에서 각군의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렸습니다. 합참 정보국장이 국내-외 정세를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주영복 장관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의견을 개진하게 했습니다. 군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혼란이 계속되어서는 국가가 망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오후 2:30분까지 장장 3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회의는 극도의 사회혼란과 북괴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강력한 사전 조치만이 해결책이라는 데 만장일치했습니다. 국방장관은 이를 근거로 전국비상계엄 선포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지었습니다.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17일 오후 4시, 신현확 부총리에게 비상계엄 보고했고, 이어서 5시에 대통령 공관을 방문하여 전군주요지휘관회의결과를 보고하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했습니다.

5.17. 오후 7시, 최규하는 신현확 총리를 불러 전국비상계엄확대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에 따라 5.17.21:30분, 임시국무회의가 열렸고, 이어서 23:30분, 최규하 대통령은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지역이 조용해졌습니다. 유독 김대중을 호남 한풀이의 대장군으로 믿는 호남의 수도 광주에서만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5.18은 김대중이 일으킨 것입니다.

                     2006.8.28

 

200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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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수학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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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그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사실여부를 확인하느라고 나름 시간을 보냈는데 제 의견으로는 확실한 사실일 것으로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이었다는 임천용회장의 증언의 신빙성에 대하여 임회장님 가까이 접근하여 임회장님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직접 그의 입으로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모를까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집니다.

  화려한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의 내용을 어느정도 확인하고서 책의 내용이 옳다면 광주사태의 본질이 알려진 것과 달리 정권의 입맛대로 포장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습니다. 역사는 다시쓰여야 할 것입니다. 가장 분노스러운 것은 입으로만 나불대는 일부 역사학자들입니다. 정치바람을 탄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동안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면서 교과서도 제멋대로 왜곡되게 썼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 아부하여 제밥그릇 채우기에 일쑤였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역사학자들은 진실을 밝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필귀정의 원리원칙대로 하려면 역사학자들이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책의 저자인 임천용 회장을 직접 만나서 진실을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역사를 기술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닌 소설이 될 것입니다.

200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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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fm****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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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년12월5일 현재 조선일보내용) 러시아 신문에 화폐개혁때문에 불만인 북한 주민들이 폭동의 경험은 없어서 탈북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어서 북한에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런 사태라면 동독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예측합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탈북하신 분들 가운데 남한을 담당했던 북한분들(침투조일 수도 있음)이 사실여부를 확실하게 밝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질문내용과 답변내용의 확실한 판단의 증거는 그것이 최고일 것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광주분들이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점입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의 내용에 비하면 지만원 박사의 말은 별것도 아닌데 지만원 박사는 광주사태 관련자 일부로부터 고소당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요. 지만원 박사에 비하면 핵폭탄 같은 내용을 쓴 저자 장본인(탈북군인 임천용 회장이라고 함)은 고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주사태 관련자들이 이 책의 내용을 전혀 읽지 않았을리도 없을텐데 말이죠.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발이 법원에 접수되어야 사회적인 공방의 필요성이 부각될 것이고 그러면 태만했던 역사학자들과 증언자들이 나서서 수습을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광주사태 관련 사건 당사자들이 죽기 전에 고소와 고발이 있어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 죽으면 증거는 다 땅에 뭍히고 말기 때문이죠.

 

<사족>

  그리고 위 답변에 보니까 역사학자들이 운운하신 것을 보았는데요. 정말로 이 사실은 역사학자들이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도 생각합니다. 역사학자들 정신차려서 연구해야 하는데 역사학자들이 어용인지 꿀벙어리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마천 같은 분이 나와야 하는데.

200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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