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인들이 구성한 그 어떤 목적의 시위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 > 최근글

본문 바로가기

System Club 시스템클럽

최근글 목록

광주인들이 구성한 그 어떤 목적의 시위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4-12 15:47 조회3,664회 댓글0건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본문

 

      광주인들이 구성한 그 어떤 목적의 시위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최후통첩을 발표하였습니다. “5월 19일까지 계엄을 철폐하고, 최규하-신현확 내각을 해체하고, 전국혁명내각을 구성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확답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 봉기를 단행할 것이라 협박한 것입니다(증5, 30쪽). 이는 당시 김일성이 간첩들에 내린 '전민봉기' 교시와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증11). 당시 무엇을 믿고 감히 이런 선전포고를 했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김대중은 북악파크 호텔에서 4-5월에 걸쳐 4차례씩이나 회동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명부까지 작성해놓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5월 17일 밤중을 기해 김대중 등 24명의 내란음모 세력을 체포하였습니다. 동시에 전국 경찰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운동권 대학생 등 문제가 될 만한 인물들을 일거에 체포하여 이른바 고문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숨도 크게 쉬지 못 할 만큼 얼어붙었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운동권과 학생들은 모두 깊이 숨어 문밖출입조차 삼갔습니다.  

이럴 때 감히 어느 광주인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대규모 시위를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말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렁한 노태우가 좌익 사기꾼들에 놀아났습니다. 1990년 1월, 집권 여당 수가 턱없이 모자라는 것을 노태우는 위기로 인식한 나머지 3당 합당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념적 사기꾼들은 이런 노태우의 입지를 악용하여 존재하지도 않았던 ‘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쟁취해냈습니다. 이런 돌파구가 생기자 이념의 사기꾼들은 5.18 관련법 3개를 만들어놓고 해마다 국민세금을 털어다 자손들에까지 호강을 시키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자라는 학생들에게 왜곡된 5.18역사를 주입시켜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길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2001년은 김대중 시대, 광주공화국이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5.18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5.18기념재단이 마련한 증언록(증9,10)에 그들이 겪은 모든 것들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입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유네스코에도 제출돼 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5.18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참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광주의 모든 운동권들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받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은 운동권 지도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 도망가 깊이 잠적했다. 정동년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5월 17일 자정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지만, 전남지역 운동권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라는 윤한봉 그리고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은 ”항쟁“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다. 평시 운동권에 얼씬거렸던 광주의 지식인들, 교수들, 학생들도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자취를 감추었다. 무산계급인 5.18유공자들은 이런 지식인들을 비겁하다 입을 모았다. 지각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다 시내에 나오지 않았다. 시내에 나온 사람들은 개념 없는 10대 소년들과 양아치 등 사회불만세력들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하고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호기심 등의 이유로 이리 저리 살피면서 도청에 들어왔다가 5월 26일 낮과 밤에 극히 소수의 강경파 건달들에 줄을 잘못 섰던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념 없는 남남들로 구성되었으며 거의가 다 구두공, 화물차운전수 등 20대의 사회불만 계층들이었다. 운동권 아류들은 시위 기간에 어쩌다 녹두서점이라는 운동권 아지트에서 만나 의논을 하다가도 조금만 위험한 징조만 나타나면 각자도생 하자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녔다. 5월 26일부터 극히 소수의 20대 뜨내기들이 가동한 ‘항쟁본부’에는 예비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거의가 다 총기를 잘 다루지 못했다. 이들은 의논을 할 때마다 서로 다투는 오합지졸이었다.” (증9의 윤한봉, 정동년, 증10의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김상집, 위성삼, 서채원 등의 증언) 

이상의 개관적인 시대상황 하에서 5.18 최고의 유공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 내용들은 당시 광주의 실상을 정확히 그리고 거짓 없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증언들은 대한민국 전체지역의 평균 분위기와도 일치합니다. 이 증언들에는 참으로 귀중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5.18의 최고 유공자들은, 5월 18일로부터 5월 21일 까지의 광주폭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5월 22일 이후 텅 비어 있는 전남도청에 별 목적 없이 호기심 등의 이유로 한 사람씩 각자 들어왔던 20대의 뜨내기 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 광주의 운동권을 포함하여 전국의 모든 운동권 인물들은 광주사태 전 기간을 통해 잡혀가 있었거나, 꼭꼭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더해 광주의 모든 대학생들, 교수들, 식자들은 모두 다 “사태기간” 내내 꼭꼭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5.18사건 기간 10일 동안 광주에는 그 어떤 목적의 시위대도 구성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광주폭동의 핵심 상황은 5월 18일부터 21일 저녁까지 4일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4일은 광주의 유지들에 의한 무기회수 및 반납기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2일은 극소수의 20대 막노동꾼들이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을 향해 총 한방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계엄군에 손들고 항복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이렇듯 광주사태 10일은, 600여 연고대생들이 주동했던 살상과 파괴와 충돌로 가득했던 처음의 4일과 전남도청 내에서 600여 연고대생 없이 광주사람들끼리 무기반납 및 항복 여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다 점령된 나중의 6일로 나누어집니다. 연고대생 없는 광주는 광주의 일부 유지들과 무식한 막노동자들이 어우러져 자기들끼리 물고 뜯는 꼴불견의 난장이 쇼 공연장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면 600의 연고대생이 있었던 광주는 어떠했겠습니까? 아래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 동안 600여명의 연고대생들이 벌인 작전내용들입니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4일간 북한특수군이 벌인 작전내용들 

5월 18일(일) 전남대에는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인 금마주둔의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파견돼 있었습니다. 5월 18일(일요일)에는 아침부터 공수대원 20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일렬로 서서 휴교령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9:30분경 대학생으로 보이는 200여명의 시위대가 나타나 공수대원들에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를 걸었고, “안 된다 귀가하라”하자 책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던져, 여러 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한 후, 공수대원들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금남로 번화가로 도망을 갔습니다(증5, 57-58).  

이 순간으로부터 연고대생 600여 명은 거침없이 수십 개의 파출소를 파괴하고 소각하였습니다. 경찰로부터 데모 진압용 페퍼포그 차량을 빼앗아 불태우고, 경찰을 인질로 잡고, 민간 버스를 무차별로 빼앗아 불을 질렀습니다. 공공건물들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어느 지역이든 큰 불이 나면 자연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불을 지르는 것은 역대로 좌익들이 군중을 모으고 흥분시키는 아주 종요한 수단으로 애용해왔습니다. 1946년의 대구 폭동사건에서도 폭도들은 불을 질렀고, 1948년의 제주4.3사건에서도 폭도들은 불을 질렀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기 위해 다각적으로 제조된 유언비어들을 소나기처럼 쏟아냈습니다. 이때의 시각은 오전 10:30분, 금남로에는 “시위대 1,000여명”이 이런 일을 주동했다고 검찰보고서(증5의 59쪽)에 기록돼 있습니다.  

유언비어는 사람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환각제입니다. 특히 영호남 갈등에 휘발유를 붓는 역할을 하는 자극적인 유언비어들은 더욱 파괴적입니다. 이날 광주시를 삽시간에 뒤덮은 수많은 유언비어들은 분명 사전에 준비된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국민 여러분, 학생으로 위장한 200여 명이 전남대 앞에서 벌였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광주의 모든 학생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쥐죽은 듯 숨어 있었던 그 무서운 순간, 혹시라도 경찰이 오해하여 자기를 잡아갈까 꼭꼭 숨어 있었던 그 시각에 어떻게 광주학생들이 200여 명씩이나 집단을 만들어 가지고 감히 그 무섭다는 계엄군을 찾아가 돌을 던지고, 계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남로로 뛰어가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수백 명의 “대학생”들과 합세하여 파출소들을 불태우고, 경찰을 인질로 잡고, 경찰의 시위진압용 차량인 페퍼포그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군중을 모을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한국군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배포 큰 특수집단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증언집들(증9, 10)에 의하면 광주 대학생들은 “항쟁기간 내내” 꼭 꼭 숨어있었습니다. 이들 “대학생”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이 전혀 아닙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에 그렇게 용감무쌍한 대학생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이런 용감한 대학생들이 수백 명씩이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감히 계엄군을 조롱하고, 대학생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경찰병력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사용한 다양한 공격기법들이 선을 보였습니다. 광주에서 천대받던 부나비들에 환각제를 먹이거나 술을 먹인 후 대형차를 몰고 계엄군 집합대열을 향해 고속의 지그재그 궤적을 그리게 하면서 돌진시키는 방법, 대형 트럭의 악세레다를 고정시켜놓고 계엄군을 향해 달리게 하다가 뛰어내리게 하는 방법, 대형 변압기를 폭파시켜 MBC 등 대형건물을 불태우는 방법,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게 하는 방법, 광주의 어수룩한 10대와 20대를 차에 태워 이곳 저곳에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케 하여 사격하게 하는 방법, 광주시민들을 무참한 형태로 살해해놓고 사진을 찍어 유포시키면서 ‘금수만도 못한 계엄군의 소행’이라고 선동하는 등 매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시민들이 공수부대원들에 분노했습니다. 600여명은 대량 군중을 방패와 은폐물로 이용하여 계엄군을 압박하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19일 아침부터 수세에 몰려 그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공포감에 떨며 매타작을 당하면서 실탄을 달라, 철수시켜 달라 지휘관에 절규하였습니다. 특히 광주 신역 앞에 있던 3공수여단 4개 대대는 5월 20일 밤중을 전후하여 몰살될 위기에 처해 있다가 실탄사격과 가스탄(지랄탄) 사격으로 활로를 뚫으면서 가까스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활로를 뚫지 않았다면 제3공수여단은 전멸했을 것입니다.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 김일옥(35대대) 등은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광주의 ‘시민작전’을 수행한다 해도 그렇게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감탄하였습니다. 당시 대대장들은 유능한 간첩들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의심만 했지. 이렇게 600명씩이나 동원되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그 유명한 5월 21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집단발포를 해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날입니다. 1990년대 10년 동안에 걸쳐 “이날 그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 전두환이 내렸을 것이다” 한껏 의혹을 부풀리면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날입니다. 이날 아침 08:00시 정각에 300명으로 구성된 ‘대학생 시위대’가 광주 톨게이트에 매복해 있다가 이동 중인 20사단 사령부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 군의 이동계획은 극비 중 극비입니다. 그런데 이들 300여명은 20사단 차량부대가 08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하였다가 08시 정각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아래 사진들에서 보실 수 있듯이 이들의 손에는 달랑 막대기 하나씩 들려 있었습니다. 막대가 하나씩을 가지고 총을 든 부대를 공격한 것입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십시오. 이들이 막대가 하나씩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광주인들도 아니고 우리 병사들이 취할 수 있는 자세들이 아닙니다. 습격을 받은 20사단 사령부 병사들은 이들의 몸놀림에 혼비백산 흩어졌습니다(증5, 92). 감히 어느 나라 대학생들이 300여명의 세력을 형성하여 감히 극비 중의 극비인 ‘부대이동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매복까지 하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300여명의 학생단은 사단장 지프차 1호차를 포함해 무전기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해가지고 위용을 자랑해 가면서 곧장 군용차량을 생산하는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시아자동자 직원들은 그 어마어마한 지휘용 지프차들과 사단장용 1호차를 보자마자 대세를 짐작하고는 순순히 그들의 요구대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의 열쇠를 내주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300여명의 ‘학생시위대’가 5대의 대형 버스를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합세했습니다(증5의93. 증6의55) 이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듯한 매너로 곧장 달려가서 무기고를 솜씨 있는 방법으로 털었습니다(증6의 55-65, 증4의 35-40). 불과 4시간 만에 전남지역 전역에 위장돼 있던 44개 무기고들로부터 무려 2개 연대 분의 무기를 털었습니다. 갈 때에는 쏜살같이 무기고를 향해 운전하더니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올 때는 여러 차례 길을 물었습니다. 유동3거리에 와 놓고도 사람들에 유동3거리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증12의 2권). 광주시민들은 이들을 ‘외지인들’이라 불렀습니다. 나머지 트럭과 장갑차 4대는 도청 근방에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하였습니다.  

가장 빨리 털린 무기고는 낮 12시에 털린 나주경찰서 무기고였습니다(증6의 55). 가장 늦게 털린 무기고들은 광주에서 멀리 있는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털렸는데 그 시각이 오후 4시였습니다(증5의 63, 증4의 35). 이러한 기록은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책자들에도 있고, 1995년 7월 18일에 발간된 검찰최종보고서와 안기부 자료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당시 정보당국은 정보분석을 세밀하게 하지 않고, 보고서에 원자재 상태로만 남겨놓았습니다. 정보는 가공된 제품입니다. 누가 가공하느냐에 따라 정보의 질이 결정됩니다. 똑같은 원재료를 가지고도 1980년대의 분석관들은 이 막중한 정보를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5.18진실이 나올 것’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때까지는 5.18연구를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선진국들은 왜 최고의 두뇌들을 길러 정보분석 작업에 투입하겠습니까? 그 어느 나라도 적장의 서랍 속에 잇는 정보를 꺼내 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강대국들은 정보를 분석하는 데 최고의 두뇌들을 오래도록 사용하여 분석력을 향상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최고의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어 평균적인 두뇌들만 뽑아, 현대적인 분석에 대한 훈련과정 없이, 정보분석 분야에 활용해 왔습니다. 그나마 장교들은 보직변경이 잦아 정보생산력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의 경우에는 소령-중령 예편자들 중에서 일부를 문관으로 임명하여 전문가라 부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1980년 5월 당시의 상황일지만 잘 분석했어도, 북한특수군 600명이 활약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중벌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진술서만 면밀하게 검토했어도 20대 무산계층의 뜨내기들이 광주사태의 주범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에 광주인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없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괄목할만한 상황은 이들 600명의 학생부대가 8톤 분량의 TNT를 전남도청 지하실에 옮겨놓고 순식간에 포탄으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조립 및 해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당시 전라도 계엄분소 전체에 오직 한 사람 5급 문관인 배승일 뿐이었습니다. 현역 군인들에는 장교든 병사든 이런 능력 없습니다. 5월 26일부터 구성된 ‘항쟁본부’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다고 그들 스스로 증언하였습니다. 광주사람들 중에는 장갑차 4대를 몰 수 있는 인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예비군들과 대학생들은 모두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8톤 분량의 TNT와 뇌관과 40km 길이의 도화선을 탈취할 생각을 감히 누가 하였던 것이며, 그것을 단 시간에 폭탄으로 조립하여 전남도청에 쌓아놓고 여차 하면 광주시를 히로시마처럼 잿더미로 날릴 생각을 누가 감히 하였겠습니까? 이런 생각 이런 능력 광주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광주사태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5월 21일,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이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구전을 반복하여 국민 모두에 상식화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오후 1시 경,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에 집결해 있는 공수부대원 수백 명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여 1명의 병사를 현장에서 깔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렇게 질주하기를 네 차례나 반복 했습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31사단 소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공수대원들이 실탄 없이 고생한다며 넘겨준 수백발의 실탄을 가지고, 질주해오는 장갑차를 향해 발사였습니다. 정지된 상태에서 조준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달려오는 장갑차를 결사적으로 피하면서 조건반사적으로 발사한 것입니다.  

오후 1시의 도청 발포로 수백 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했다는 이 허무맹랑한 ‘국민 상식’에 대해 제가 조사를 했습니다. 5월 21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모두 61명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면 계엄군이 집결해 있던 도청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사망한 28명은 누가 죽였겠습니까? 도청 앞 사망자 33명에 대해 더 살펴보았습니다.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십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습니다. 맞아 죽고 찔려죽은 사람은 공수대원과 상관없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또 누가 죽인 것입니까? 한발 더 나아가 살펴보았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13명 모두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한마디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광주사태 10일 동안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입니다. 차량사고로 죽은 사람, 찔려 죽은 사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진 사람, 목이 잘린 사람, 불에 그을린 사람, 총에 맞은 사람 등입니다. 5월 21일에 사망한 사람들에서 보았듯이 이들 주검들의 대부분은 공수부대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6명의 사망자 중 총상 사망자가 11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모두 여러 차례 세어보니 그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36명만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1982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쪽 상단에는 총상사망자 수가 117명, 이중 75%인 88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참고할 것은 M16소총의 탄흔이 다른 총알들의 탄흔과 유별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M16탄환은 삽입부가 볼펜 자국 정도로 아주 작은 반면 통과해 나간 자리는 종이컵처럼 크게 벌어집니다. M16탄흔이 이렇게 독특하기 때문에 다른 총의 탄흔과 혼동되지 않습니다. 이런 탄흔 분석은 5.18당시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총 집합하여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저는 검찰이 1995년에 내놓은 사망원인에 대한 자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광주사람들은 ‘M16에 맞아 사망했다’고 해야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여 신고하였습니다. 이미 뼈만 남은 15년 전의 시체를 놓고 아무런 조사 없이 다시 신고를 받아, 이를 통계 처리한 것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처사일 것입니다.  

앞서 저는 5월 21일 통계를 제시해 드렸습니다. 도청과는 거리가 먼 곳들에서 사망한 28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칼과 몽둥이에 의해 사망한 20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무기고 총에 의해 사살된 13명은 누가 죽인 것이겠습니까? 과연 광주시민이 80명이라는 광주시민을 쏘았겠습니까? 과연 광주시민이 또 다른 광주시민을 찔러 죽이고 때려 죽였겠습니까? 이 모두가 광주시민들의 소행이었다면 5.18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며 광주는 시민이 시민을 마구 살해한 패륜의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칼에 찔리고 으깨지고 머리를 잘라놓은 시체는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잔인함의 모두가 광주시민들의 소행이라는 말입니까?  

도청 앞에서 벌인 600여명의 특수작전이 얼마나 지독하게 강한 것이었으면, 그 막강하다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를 포기하고 오후 4시부터 도망을 쳤겠습니까? 도망가는 길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3공수 여단 4개 대대는 20일 밤부터 전멸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고, 숙영지인 전남대로 돌아와서도 약 16시간 동안 또 밀리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21일 오후 4시부터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수십 대 1의 중과부적 상태에서 큰 피해 없이 도망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전개된 위와 같은 고도의 게릴라전을 광주의 대학생이, 광주의 껌팔이 구두닦이 계급들이 나서서 주도했다고 믿을 국민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작전이 광주인들에 의해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21일 계엄군이 철수하고, 동시에 북한군 600명이 잠수해 있었던, 5월 22일에 더욱 확연하게 재확인 됩니다. 먼저 아래 사진들을 보십시오. 북한특수군의 위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생략)

 

2017.4.12.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목록

Total 13,849건 1 페이지
최근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공지 북한에 배신당한 아웅산 테러범 제 630, 631광수 지만원 2019-02-14 32530 873
공지 5.18관련사건 수사결과(1995.7.18)를 공개합니다. 첨부파일 지만원 2013-04-02 367226 1607
공지 [안기부자료] 5.18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첨부파일 지만원 2013-04-02 322576 1493
공지 도서구입 - 종합안내 지만원 2010-08-15 472148 2038
13845 일본의 의미(에필로그) 관리자 2024-03-27 1693 45
13844 일본의 의미(9)역사 왜곡 관리자 2024-03-27 1704 35
13843 일본의 의미 (프롤로그) 관리자 2024-03-19 8740 103
13842 일본의 의미(8) 일본은 가장 밀접한 미래 동반자 관리자 2024-03-19 8538 77
13841 일본의 의미(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관리자 2024-03-19 8638 61
13840 일본의 의미(6)강제징용 문제 관리자 2024-03-15 11478 68
13839 일본의 의미(5)일본군 위안부 관리자 2024-03-12 13601 88
13838 일본의 의미(4)반일 감정 조장의 원흉들 관리자 2024-03-06 17950 131
13837 일본의 의미(3)근대화의 뿌리 관리자 2024-03-06 15391 99
13836 일본의 의미(1~2) 관리자 2024-03-06 16463 106
13835 [다큐소설]전두환(10). 운명(수정 완료) 관리자 2024-02-23 13893 145
13834 책 소개(다큐소설 전두환) 관리자 2024-02-22 13390 147
13833 [다큐소설]전두환(9)역사바로세우기 재판(2)(수정 완료) 관리자 2024-02-22 12734 60
13832 [다큐소설] 전두환(9)역사바로세우기 재판~1(수정 완료) 관리자 2024-02-20 11196 61
13831 [다큐소설] 전두환(8) 5.18 - II (수정 완료) 관리자 2024-02-16 11735 82
13830 [다큐소설] 전두환 (8) 5.18 - I(수정완료) 관리자 2024-02-14 10062 81
13829 [지만원 메시지(221)] 박근혜와 한동훈 관리자 2024-02-07 16146 262
13828 [다큐소설] 전두환 (7) - 5.17과 그 전야(수정완료) 관리자 2024-02-06 15310 87
13827 [지만원 메시지(220)] 한동훈 불가사의 관리자 2024-01-31 17665 285
13826 [다큐소설] 전두환 (4) - 전두환 업적 (수정완료) 관리자 2024-01-20 26679 127
13825 [다큐소설] 전두환 (6) - 12.12 (수정완료) 관리자 2024-01-19 27444 114
13824 [지만원 메시지(219)] 나에 씌워진 면류관 관리자 2024-01-14 30459 287
13823 [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Ⅱ)(수정완료) 관리자 2024-01-04 32601 117
13822 [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Ⅰ)(수정완료) 관리자 2024-01-04 31050 111
13821 [지만원 시(24)] 무엇이 아픈가 관리자 2024-01-04 36919 256
13820 [다큐소설] 전두환 (3) - 박정희 업적(수정완료) 관리자 2024-01-03 30464 167
게시물 검색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대표자 : 지만원 | Tel : 02-595-2563 | Fax : 02-595-2594
E-mail : j-m-y8282@hanmail.net / jmw327@gmail.com
Copyright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All rights reserved.  [ 관리자 ]